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34)화 (34/49)

“온 사방에서.”

080.

그의 말은 곧바로 형태를 만들었다. 가까운 바위 뒤에서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낮게 으르렁대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늑대는 중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 말끔한 회색 털로 뒤덮여 있었다. 별하는 창을 반대 손으로 바꿔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갈색이었던 거 같은데?”

파비안이 대답하기 전에 그들의 이목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옆쪽 바위 뒤에서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진갈색이었다. 등 높이는 좀 더 낮았고 체구도 작았다. 그럼에도 어릴 적 동물원에서 본 사자보다도 커 보였다.

그 옆에는 시커먼 돌칼이 대퇴부에 박힌 늑대도 함께 있었다. 다음의 늑대는 별하와 파비안이 지나온 바위 뒤에서 나타났다. 별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들을 둘러싼 늑대들을 돌아보았다.

“뭐, 뭐야? 한 마리가 아니었어?”

창을 움켜쥔 별하의 손이 달달 떨렸다. 겁을 먹은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눈높이와 비슷한 늑대들은 상식적으로 알던 늑대보다 훨씬 거대했고 하나같이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을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파비안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로 그중 한 마리의 늑대를 예의주시했다. 돌칼이 박힌 늑대였다. 무기를 회수할 기회를 찾기 위해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협동력이 뛰어날 거야.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을 테니 조심해.”

별하는 이를 악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안쪽은 사정이 달랐다. 이곳에 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수없이 먹이의 신세가 되어보면서 점점 심중에 큰 물결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공포와 두려움을 넘어 악에 받칠 대로 받친 오기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저를 향해 침을 뚝뚝 흘리는 늑대들을 번갈아 노려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 알파야? 이 녀석들?”

파비안은 네 마리 늑대의 위치를 가늠하듯 차분히 돌아보며 답했다.

“맞아. 알파 페로몬을 강하게 풍기고 있어.”

별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특정 동물 중에 우두머리 기질을 가진 개체를 알파로 인식하는 동물이 존재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간과 같은 페로몬을 풍긴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현 인류의 주요 특성 중 하나가 알파와 오메가, 베타라는 특수한 생체 영역이었다.

그는 자신이 익히 알던 것이 사실은 정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적잖은 혼란을 느꼈다. 그러다 이곳이 자신이 살던 문명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다시금 사실을 상기했다.

고정관념을 깨부수자 눈앞의 늑대들이 알파라는 명제에도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었다. 새로운 명제에는 자연적으로 수많은 의문이 뒤따랐다. 별하는 늑대들의 뒤편을 힐끔힐끔 내다보며 지금 가장 또렷한 의문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오메가는? 그 녀석들은 어디 있는 거지?”

파비안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맞은편의 늑대처럼 당장 달려들 듯 반짝이는 오드아이를 매섭게 치뜨고 있었다.

별하는 미세하게 거칠어진 호흡이 느껴지는 파비안과 등을 맞댄 채로 늑대와 대치했다. 자꾸 바짝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여기서 가장 큰 놈을 고르면 되는 건가?”

파비안의 작은 코웃음이 등을 통해 느껴졌다. 겁먹은 소동물처럼 목덜미가 한입에 뜯겨나갈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미친 짓 같았지만, 별하 역시 돌연한 웃음을 터트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든, 이제 곧 끝이라는 생각에 거의 다 증발했던 힘이 다시 차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어때, 파비안? 나 잘 쫓아온 것 같지 않아?”

별하는 원주민들의 감옥에서 도망 나온 후 처음으로 자신의 결단에 대해 확신했다. 온갖 상황을 겪어오며 가중되던 자기 의심과 불안들이 지금 이 순간만은 전연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감옥을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이 흉포한 늑대들을 파비안 혼자서 직면하게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이곳에 있었다. 둘이서 함께.

파비안이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잘 왔어, 별하.”

그들이 희미하게 소리를 내어 웃자 늑대들은 위협하듯 송곳니를 내보이며 커다란 앞발을 굴리면서도 막무가내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별하와 파비안의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돌았다.

별하는 늑대들이 달려들지 못하게 창을 앞으로 세워 들고서 가만히 말했다.

“회색 늑대.”

먼저 모습을 드러낸 늑대였다. 가장 앞에 선 회색 늑대는 호기롭게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하에게 큰 관심을 내보이는 듯했으나 곧 파비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그의 주변을 돌고 있었다.

파비안은 회색 늑대를 힐긋 돌아본 후 다시 돌칼이 박힌 늑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다친 늑대는 인내심을 다해 무리에 섞여 있었지만 이미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머지않아 힘이 빠져 주저앉을 듯했다.

“저 녀석이 쓰러지면 회색부터.”

별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회색 늑대가 가장 크다고 해도 다른 늑대들이 작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른 늑대들도 회색 늑대와 비등비등했다.

“떼로 덤벼들지 않을까?”

“머리를 부수면 꼬리는 자연적으로 흩어져.”

파비안은 제 생각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머리를 부수기 전이 가장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회색 늑대도 뚝딱 때려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고 별하는 그를 힐긋 돌아보았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늑대들과 대치한 이는 충분히 그럴 것 같기도 했다.

“머리를 부수기 전에 이쪽이 당한다면 말이야.”

찰나로 파비안과 눈길이 스친 그 때였다. 피칠갑을 하고서 으르렁대던 황갈색 늑대가 울컥 피를 토했다. 늑대들의 이목이 부상당한 동료에게로 향하는 순간을 파비안은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바닥에서 큼지막한 돌을 주워 들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작은 진갈색 늑대가 성큼 다가온 파비안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며 매섭게 달려들었다.

“파, 파비안!”

별하는 어떤 신호도 없이 맞닥뜨린 상황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창을 세워 진갈색 늑대를 향해 온 힘으로 내던졌다. 퍽! 어깻죽지에 창이 꽂힌 늑대가 짧은 비명을 외치며 파비안을 비켜 선회했다.

파비안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황갈색 늑대를 덮쳤다.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며 무서운 소리를 냈지만 부상이 깊어 움직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세 발로 겨우 서 있는 녀석에게서 여지없이 돌칼을 회수하는 순간 조금씩 새어 나오던 체액이 울걱울걱 쏟아졌다. 버팀목 구실을 하던 돌칼이 뽑혀 나가자 늑대는 맥없이 고꾸라졌다.

늑대들이 성난 듯 울부짖었다. 아우우! 별하는 바로 제 등 뒤에 와 닿은 기척에 번뜩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 늑대가 코앞에서 촘촘한 이빨을 들이밀었다.

“윽!”

팔로 얼굴을 막으며 물러나다 아래쪽 팔의 살점이 일부 뜯겨나갔다. 불에 덴 듯한 아픔을 느낀 순간 별하는 그보다 더 강렬한 본능에 사로잡혔다. 도망가야 한다.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처참하게 죽을 게 분명했다.

뒷걸음질 치다 발이 걸려 넘어진 그는 다친 팔을 움켜잡고서 파비안을 힐긋 돌아보았다. 그는 저에게 달려드는 진갈색 늑대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크게 벌린 주둥이에 돌칼을 박아 넣기 직전이었다. 돌연 이쪽을 돌아보는 파비안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새파랗게 일변했다.

별하는 제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얼굴과 목을 물어뜯으러 달려드는 늑대들이었다.

“―――!!”

돔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포효였다. 폭발하듯 터진 외침과 더불어 파비안의 강한 페로몬이 삽시에 주변을 에워쌌다.

침을 흩뿌리며 광견병에 걸린 듯 달려들던 늑대들이 일순간 귀와 꼬리를 내리고서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그들은 이토록 강한 알파의 페로몬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듯 당황한 기색을 나누면서도 오금을 잘 펴지 못했다. 커다란 덩치로 와들와들 떠는 모습이 얼핏 자그마한 강아지처럼 보였다. 쓰러져 있던 늑대까지 고개를 들고 낑낑거렸다.

별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곁으로 다가온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파비안의 흰 손과 셔츠는 늑대들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피를 한껏 머금은 돌칼은 황금 바위 옆을 지날 때 전혀 다른 모양으로 번들거렸다. 뚝뚝 흘러내리는 핏물과 얼크러져 사신의 낫 같았다.

분노한 오드아이는 별하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오직 적으로 낙인찍힌 늑대들을 쫓았다.

파비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색 늑대에게로 다가갔다. 주변의 늑대는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회색 늑대는 우두머리답게 네 발로 굳건히 서 있었지만 파비안의 페로몬과 기세에 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간혹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정도였다. 파비안은 당장 회색 늑대의 네 발을 모조리 잘라낼 듯 돌칼을 돌려 잡았다.

별하는 얼른 남방을 벗어 다친 팔을 감았다. 좀 전까지 그토록 두렵던 늑대가 지금은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수많은 시체를 만들어낸 포악한 짐승들이었지만 엄밀히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밖에 없었다.

이 모든 사단은 오로지 인간의 욕심으로 빚어진 일이었다. 이기적인 원주민들이 저들의 이념을 채우기 위해서. 별하는 그 속에 본의 아니게 합류하게 된 자신과 파비안의 처지에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늑대들에게 비감을 느끼면서도 파비안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발톱을 구해가지 않으면 자신들이 원주민의 밥이 된다. 또한 운 좋게 도망가더라도 섬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죽을 때까지 쫓기는 신세였기에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파비안은 회색 늑대의 앞에 우뚝 섰다.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파비안을 응시하는 회색 늑대의 꼬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이었다.

“……나를 원망해.”

그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돌칼을 회색 늑대의 정수리 한가운데에 내리꽂았다.

피에 젖은 날이 회색 털에 닿기 직전이었다. 맞은편에서 뭔가가 휘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와 우악하게 부딪쳤다. 쩌엉― 예기치 못한 외력에 파비안의 돌칼이 목표물을 비켜 지나갔다.

“―?”

파비안은 번득 고개를 들었다. 저와 강하게 맞부딪친 그것은 근처 나무기둥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돌칼이었다.

081.

파비안이 든 것과 색깔도 모양도 완전하게 일치하는 돌칼. 나무에 박힌 그것은 날이 꽤 상한 파비안의 것과 달리 원형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건조하게 마른 칼날이 그늘 속에서 번들거렸다. 별하는 황급히 돌칼이 날아온 방향을 내다보았다.

“저, 저건 설마…….”

돌칼의 주인은 곧 우거진 수풀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나뭇가지에 윗머리가 닿는 장신, 근육질의 체형과 상반신의 화려한 그림들, 검은 머리칼 하며 성난 얼굴까지, 역시나 예상한 인물이었다. 나뭇가지에 박힌 돌칼을 가볍게 뽑아낸 두두가 늑대들처럼 콧등에 주름을 만들며 으르렁거렸다.

“두! 두! 두! 두!”

커다란 목청으로 내지르는 괴성이 몹시 감사나웠다. 자신의 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듯한 경고는 정확히 파비안을 향해 있었다.

두두의 행색은 말끔했다. 처음 집을 나섰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다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뭔가에 시달렸다거나 굶은 듯한 기색도 없었다. 마치 지도에서 한 번 선행한 길을 차근차근 따라와 이곳에 다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당연시하다가 예상과 다르게 저보다 먼저 도착해서 트로피를 거머쥐려는 파비안을 발견하고 지금 이처럼 분노하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돌칼을 움켜쥔 두두는 회색 늑대를 사이에 두고 파비안과 대치했다.

“두! 두!”

두 하이 알파의 독한 페로몬에 꼬리를 만 늑대도 늑대들이었지만 별하는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든 현기증을 느꼈다. 편히 숨쉬기가 곤란해 호흡기 질환을 앓는 사람처럼 크게 헐떡였다. 그러자 파비안에게 꽂혀 있던 두두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했다.

두두는 상처를 입고 피범벅이 된 별하를 발견하고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파비안이 그 앞을 막아섰다. 두두보다 큰 신장의 그는 턱을 치켜들고서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신경 쓸 사람이 아니야.”

“두! 두!”

“그보다 더 시급한 게 있을 텐데. 네 목숨.”

“크으…….”

두두는 험악한 얼굴로 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하이 알파를 직시했다. 이전에 한 번 파비안의 무력에 제압당한 적이 있음에도 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문맹의 식인종 출신이기 이전에 하이 알파는 하이 알파였다. 제 목숨이 끊어질지언정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고고한 존재.

두두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지만 섣불리 달려들지도 않았다. 파비안의 힘을 맛본 전력이 있어 그와 팽팽히 대치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별하의 양뺨과 입술이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지독하게 풍기는 페로몬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면서도 파비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파비안은 등을 보인 채 미동 없이 서 있었으나 그의 심기가 페로몬을 통해 오롯이 전해졌다. 곧 머지않아 눈앞의 상대를 단숨에 짓밟아 억누를 게 분명했다. 두두 역시도 우위를 선점하는 이가 자신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호승심이 들끓는 하이 알파들은 생존을 건 싸움을 하는 맹수들처럼 거칠게 얽혀들어 상대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덜미에 박아 넣은 이빨을 뽑지 않으리라.

별하는 혀를 쯧, 찼다. 강한 마취제를 투약한 듯 몽롱하게 뒤엉킨 머릿속을 가다듬으려 머리를 흔들었다.

다친 팔을 꽉 움켜잡고서 정신을 다잡으려는데 바위 지대의 안쪽, 정확히 돔의 정중앙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우렁차고도 길게 이어지는 성음은 늑대의 하울링이었다. 아우우우― 별하는 황망히 그곳을 돌아보았다.

“늑대가 또, 있어……?”

파비안과 두두의 페로몬에 납작 엎드려 있던 늑대들이 그것을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곳으로 즉시 달려갔다. 죽은 게 아닌가 싶던 황갈색 늑대까지 절뚝이며 뒤따랐다.

하이 알파 사이에 갇혀 있던 회색 늑대가,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와 돌연 별하에게로 달려들었다.

“으, 읏!”

비틀거리며 급히 창을 주워 들려는 별하의 등을 한입에 물고는 선두를 쫓아 빛과 같은 속도로 내달렸다.

“별하!”

“두! 두!”

피에 젖은 돌칼과 마른 돌칼이 동시에 날아들었으나 모두 빗나갔다.

별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면에 두 발을 붙이고도 좀처럼 현기증이 가시지 않아 진땀을 흘렸다. 거대한 늑대에게 등을 물린 채 높은 바위들을 지나 깎아지른 절벽을 수차례 뛰어넘었다.

그리 깊지 않은 어떤 절벽 아래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별하는 자신이 늑대에게 물려 죽은 후 사후세계로 가기 위해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샛노란 들꽃 냄새와 건조한 흙과 바위 냄새, 알파 늑대들의 냄새도 현실이 아닌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꼈다. 현실과 꿈의 경계선을 떠돌다 지금 막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예전 화산의 분화구였던 구멍이 머리 꼭대기에 떠 있었다. 요새처럼 사방을 둘러싼 황금바위들은 흡사 거산처럼 태양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지대가 높아 바위들 사이로 주변이 내려다보였는데 군데군데 크고 작은 그늘이 져 있었다. 절벽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맞닥뜨렸던 낭떠러지의 형태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별하는 가까스로 두 다리에 힘을 실어 중심을 잡으며 제 등을 더듬었다. 상처는 전혀 없었다. 다만 늑대의 침에 젖은 남방과 티셔츠에 커다란 구멍들이 나 있었다.

“……?”

이곳으로 그를 물고 온 회색 늑대와 다른 늑대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들은 별하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포로를 보듯 힐긋거릴 뿐이었다.

하이 알파들의 지독한 페로몬과 갑작스럽게 납치되었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별하는 지나온 길부터 돌아보았다. 바위 사이로 헤쳐 온 숲이 내다보였으나 십수 킬로미터는 될 거리였다.

파비안의 후각 능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저를 찾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 쫓아온 두두가 파비안을 해코지할지 알 수 없었다. 파비안이 호락호락 당할 인물은 아니라 해도, 운이 나쁘다면 상상보다 더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빌어, 젠장.”

별하는 그에게로 돌아갈 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헤쳐 온 방향은 놓치지 않았지만 늑대들이 서 있는 곳을 제외한 사위가 바위에 가로막혀 있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늑대들처럼 바위를 뛰어오르지 않는다면 사실상 갇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저를 여기로 데려와서도 전혀 먹을 생각이 없는 늑대들을 아연히 돌아보았다.

“대체, 날 왜 데려왔어……? 여기 너희들 먹이 저장소라도 돼? 처형대인가?”

물어봤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늑대들은 그를 물끄러미 주시할 뿐이었다.

별하는 빈 주먹을 그러쥐었다. 부드러운 풀을 눌러 밟고서 한참 주춤거리다 이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을 지나 파비안에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별하가 가까이 다가가자 늑대들은 말을 맞춘 듯 송곳니를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도망가면 물어 죽이겠다는 의지가 명명백백했다. 그는 늑대들을 향해 거칠게 우짖었다.

“아아악―!”

악에 받친 괴성을 내뱉자마자 늑대들이 대번 꼬리를 내리고 제자리에 앉았다.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순한 개들 같은 모습이었다. 별하는 생각지 못한 상황에 눈을 끔뻑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얌전히 자리에 앉은 늑대들은 별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불현듯 별하는 자신도 모르는 어떤 재능이 제 안에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블루칩도 그렇고, 동물을 수족처럼 부릴 줄 아는 능력 같은.

“아악!”

늑대들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얼핏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 것도 같았다. 별하는 더 큰 기합소리를 내기 위해 이번에는 단전에까지 힘을 넣었다. 숨을 깊게 들이켜는 순간, 뜨뜻무레하게 눅은 바람이 목덜미에 훅 끼쳐 들었다.

“읏.”

그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섰다. 전방이 온통 새하�R다. 그사이 눈이라도 내린 건가 착각할 만큼 티끌 한 점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다시 눅은 바람이 느껴졌다. 별하는 숨을 뱉는 것도 잊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새하얀 풍경은 눈 같은 것이 아니었다. 환각을 보는 것도 아니었고 지극히 현실이었다. 눈앞에는 황금바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늑대가 서 있었다. 새하얀 털로 뒤덮인 늑대였다.

앞의 늑대들보다 서너 배는 훌쩍 뛰어넘는 크기의 늑대는 공상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쫑긋 선 양쪽 귀와 유리알 같은 파르스름한 눈동자, 길쭉하게 뻗은 주둥이, 익숙한 구조의 몸체로 봤을 때 분명 늑대였으나 늑대가 아니었다. 어쩌면 현재의 늑대로 진화하기 이전의 그 조상을 보는 듯했다.

불청객들을 죽이려 들던 늑대들은 경외에 찬 눈으로 새하얀 늑대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회색 늑대도 마찬가지였다. 늑대들의 우두머리는 바로 새하얀 늑대였다.

새하얀 늑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별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다가왔다. 별하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대고는 냄새를 맡는 듯 움직임을 멈췄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뜨뜻무레한 숨을 내쉬며 그의 복부와 아랫배 주변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바짝 얼어붙은 별하는 저와 눈높이가 일직선상인 늑대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눈동자에는 그를 해코지하려거나 잡아먹으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별하에게 강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

별하는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밖으로 내뱉었다. 그 때 문득 들꽃보다 더욱 강렬한 향기를 느꼈다. 분명 페로몬이었다. 로우 오메가답게 평범한 후각 능력을 지닌 그는 이토록 선명한 페로몬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알파가 아닌 오메가의 페로몬을.

새하얀 늑대는 오메가였다.

082.

오메가 늑대는 저를 쳐다보는 별하의 주변을 느릿하게 빙 돌았다. 영롱한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냄새를 맡다가 대뜸 코로 떠받히기도 했다.

거산 같은 늑대에 비해 인형처럼 자그마한 별하는 이리저리 밀려 나갔지만 거친 느낌은 일절 없었다. 터줏대감이 아닌 터주신이었던 늑대는 새하얀 털만큼 태도도 부드러웠다.

별하는 말이 통할 리 없는 짐승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메가였어?”

새하얀 늑대는 별하의 곁을 맴돌다 돌연 그의 앞에서 쿵 드러누웠다. 나무 크기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자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가 보였다.

“……? 뭐, 야?”

새하얀 늑대가 하는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별하는 우두커니 서서 눈송이처럼 뽀얀 늑대의 가랑이와 풍성한 속눈썹 아래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늦게 보드라운 털 속에 숨은 뭔가를 발견하고는 머뭇머뭇 말했다.

“어……. 고추가 있네.”

새하얀 늑대는 다리를 치켜든 채로 별하를 가만히 응시했다. 쓰다듬으란 건가? 별하는 조심히 손을 뻗었다. 솜사탕처럼 몽글몽글한 안쪽 털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들었다. 파비안의 머리칼만큼 매끄럽고 보드라운 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자각하지 못하고 새하얀 늑대가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이던 그 때였다. 작게 젖꼭지가 튀어나온 아랫배 쪽이 꿀렁거렸다. 별하는 그대로 손을 멈추고 움직인 곳을 쳐다보았다. 다시 둥그렇게 튀어나온 아랫배가 멋대로 꿀렁였다.

“―?!”

놀라 주춤 물러나던 순간 그는 깨달았다. 새하얀 늑대의 뱃속에 생명을 가진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임신을 한 것이었다.

잔뜩 긴장한 별하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는 새하얀 늑대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다가가 느른하게 오르내리는 늑대의 배를 다시금 쓸었다. 심장 소리만이 고요하게 느껴지는 피부 위로 단단한 무언가가 슬쩍 불거져 나왔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아…….”

별하는 깊은숨을 불어내며 늑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푸른빛의 눈동자는 세상의 악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맑았다. 경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산 아래 시체들을 만든 원흉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들에게 저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을지도 몰랐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고 보는 안하무인의 인간들이었으니까.

“임신했구나…….”

별하는 늑대의 보드라운 배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그곳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안쪽의 기관들이 움직이는 소리 너머로 작은 생명체, 혹은 생명체들이 활동하는 기척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그 기이하고 신비로운 현상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든 별하는 홀린 듯이 늑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털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뱃속의 간헐적인 태동에 귀 기울였다.

새하얀 늑대는 별하가 만족할 때까지 풀 위에 누워 제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을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런 짐승에게 강한 동질감과 함께 유대감을 느낀 별하는 새하얀 털을 끊임없이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별하는 알파 늑대들이 새끼 강아지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하면서도 향기로운 늑대에게 폭 파묻혀, 그간의 시름을 찰나로 잊어버릴 만큼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그 때 새하얀 늑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위쪽의 바위를 올랐다. 별하가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자 뒤돌아 눈길을 보내왔다.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저를 따라오라는 뜻이 분명했다.

“…….”

그는 아직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상식과 현실을 뛰어넘는 눈앞의 존재에 경외심을 느끼고 있었다.

새하얀 늑대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다가 별하가 다가가자 다시 바위를 밟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