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33)화 (33/49)
  • 파비안의 느른한 숨결이 번득 목덜미에서 느껴진 별하는 옆을 돌아보았다. 보이진 않았지만 파비안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기분이 대번 좋아질 만큼 달콤한 숨결에 절로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파, 비안…….”

    파비안은 어둠 속에서도 기운이 전해질 만큼 강렬한 눈빛으로 별하를 직시한 채 답했다.

    “조상 대대로 이곳을 다녀갈 정도였다면 ‘그것’도 꽤나 오래 서식해 왔을 거야. 번식하고 있다는 건 암수가 존재한다는 뜻이고 개체 수가 다양하다는 뜻이기도 해. 제아무리 하이알파라 해도 쉽게 움직이지 못해. 뇌 기능이 똑바로 작동하는 놈이라면.”

    열감이 실린 숨결이 목덜미의 솜털을 건드려 간지러웠다. 별하는 금세 흐트러진 호흡을 애써 다잡으며 의문을 달았다.

    “수명이 긴 녀석일 수 있잖아. 200년 이상을 산다는 바다거북처럼. 그보다 수명이 더 길다면 어떻게 할 거야?”

    파비안은 짧게 웃었다.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네.”

    “그렇지?”

    “그럼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별하는 제 입술을 자근거리며 코끝에 살짝살짝 닿는 상대의 우뚝한 콧날의 감촉을 느꼈다. 대화가 끊어졌을 때 파비안이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들이밀었다.

    “읏, 음.”

    별하는 턱을 들어 그와 입술을 맞댔다. 마른 점막이 닿는 것만으로도 등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뒤가 움찔거렸다. 밤새 느꼈던 쾌감이 번득 떠올라 단번에 체온이 상승했다. 그것을 전해 느낀 파비안은 밀착한 입술을 잠시 떼고 떨어졌다.

    별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파비안의 주위를 떠도는 후광을 목격했다. 어둠에 잠긴 금발에서 와르르 떨어진 빛가루가 발밑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이제는 흘러나오지 않아, 별하?”

    파비안은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으며 별하의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별하는 그의 뒤에서 반짝이는 빛가루를 내려다보며 아연히 되물었다.

    “뭐가 흘러, 나와……?”

    “별하 안에 싼 내 정액.”

    “아…….”

    파비안은 별하가 대답하기 전에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크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녹녹한 살덩이들이 엉겨 붙었다. 별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발정할 수 있다는 데에 실로 경악하면서도, 그와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파비안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혀를 섞으며 빛가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신없이 타액을 나누는 중에도 빛가루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파비안에게서 떨어진 빛가루가 맞는 건가, 의문을 품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파, 으읍, 비안. 파비, 흠, 읏.”

    당장 옷을 벗길 듯 들이미는 이의 어깨를 억지로 누르며 공간을 벌렸다. 간신히 떨어진 파비안은 아쉬운 듯 별하의 입술을 핥으며 얕은 숨을 뱉어냈다. 별하는 제 눈을 문질렀다. 빛가루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환영이나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저기, 저거 뭐야??”

    별하가 검지로 그곳을 똑똑히 가리켰으나 암흑 속에서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파비안이 어디를 보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같은 곳을 가리켰다.

    “파비안 네 등 뒤에 저거 말이야.”

    078.

    파비안이 뒤를 돌아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별하가 가리키는 곳을 금방 찾지 못한 듯 잠잠하다가 이내 번득 몸을 움직였다. 파비안 역시 별하와 같은 것을 발견한 듯했다. 창끝으로 주변 바닥을 더듬어 그의 옆으로 다가간 별하는 바위 사이에 떨어진 빛가루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먼지보다 작은 빛가루는 동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굴로 살금살금 숨어들어 온 것도 아니었다. 바닥의 미세한 틈으로 비춰드는 한 톨보다 작은 햇빛이었다. 바위에 가려져 보이지 않다가 두 사람이 눈높이를 바꾼 덕분에 드러난 것이었다.

    파비안은 대번 돌칼의 끝으로 그 주변을 툭툭 건드렸다. 별하는 당황하며 얼른 그를 말렸다.

    “뭐 하려는 거야?”

    파비안은 자신이 더 의아한 듯 답했다.

    “지름길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지름길이 아니라 절벽이면?”

    별하는 자신이 말하고도 소름이 돋아 어깨를 굳혔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기에도 바쁜데 바닥을 부수려는 이에게 크나큰 당혹감을 느꼈다. 파비안은 무책임하게 느껴질 정도로 담담히 말했다.

    “지형으로 봤을 때 절벽은 아니야. 절벽이라면 햇빛이 비쳐들지는 않겠지. 더군다나 서쪽인데.”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아, 파비안.”

    별하는 언제나 파비안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 왔었다. 신뢰감이 바닥을 칠 때에도 저 깊은 본능은 그를 믿고 있었다. 분명 그랬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또 달랐다.

    발밑이 꼭 절벽이 아니더라도 대뜸 무너뜨리는 건 자살행위였다. 길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있을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미지로 뛰어드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절벽에서도 그렇게나 위험천만했는데.

    별하는 이번만큼은 그의 의견에 반대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대꾸할 말이 생각하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파비안은 대뜸 별하의 손을 잡아 제 뒤로 멀찍이 물렸다.

    “잠시만 뒤로 물러나 있어줘.”

    그는 이미 바닥을 헤집기로 작정한 듯했다. 별하는 파비안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내키지 않으면서도 창을 곧게 세워 들고, 파비안의 옆으로 가 섰다. 이왕에 하는 거라면 같이 하는 편이 나았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더라도 같이 죽어야 덜 괴로웠다.

    “떨어져도 난 모른다, 파비안.”

    “이곳의 암석 특성상 광범위하게 무너지진 않을 거야.”

    “그건 어떻게 아는 거야?”

    “목수 이전에 조각도 조금 배웠거든.”

    별하는 쓴 입맛을 다셨다.

    “정말 만능 엔터테이너네.”

    어둠 속에서 또렷하고도 단호한 저음이 날아왔다.

    “그래도 만에 하나 모르니 금이 가면 바로 물러나, 별하.”

    “알았어.”

    내리칠 위치를 정한 그들은 손에 든 것을 움켜쥐었다. 셋, 둘, 하나― 파비안의 짤막한 초읽기에 맞춰 바닥에 쾅 충격을 가하는 순간 동굴이 진동했다. 파비안은 재차 돌칼을 쾅! 쾅! 내리쳤다.

    지진인가 생각될 정도의 울림 뒤로 충격을 받은 바닥에 쩍 균열이 일었다. 돌칼을 양손으로 맞잡아 다시금 내려치자마자 지나온 벼랑길처럼 지반이 우르르 무너졌다. 쿠쿵―

    별하와 파비안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쿵― 바닥에 새로운 길이 트인 동시에 아래쪽에서 강한 빛살이 비집어 들어, 별하는 팔을 들어 막았다.

    “으윽.”

    “…….”

    눈이 멀 듯한 광채였다. 파비안은 지그시 고개를 돌려 빛이 솟구쳐 드는 구멍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별하가 곁으로 다가가는 중에 느닷없이 구멍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장비 하나 없이 스쿠버다이빙을 하듯.

    “―?!”

    화들짝 놀란 별하는 파비안을 향해 황급히 팔을 내뻗었다. 간발의 차로 그를 놓치며 허공을 움켜잡자마자 무릎을 꿇어 구멍 아래로 고꾸라질 듯 내려다보았다.

    “파비, 안……?”

    바로 아래 새하얀 빛 한가운데에 그가 서 있었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 바닥도, 벽도, 다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파비안은 눈 부신 빛 속에서 좌우, 상하를 크게 빙 둘러보며 읊조렸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려와도 돼.”

    갑작스러운 광원에 움츠러들었던 시력이 이내 원상태로 돌아왔다. 별하는 시큰시큰한 눈동자를 빠르게 깜빡이며 파비안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는 커다란 암석 위에 서 있었다. 암석은 파비안의 머리칼과 비슷한 색이었고 사위에서 비쳐드는 빛줄기를 반사하느라 몹시 반짝거렸다.

    별하는 서둘러 구멍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순간 동굴 바위에 부딪힌 다리에 무게가 실려 시큰거렸다.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는 그를 파비안이 손을 뻗어 붙잡아 주었다.

    “괜찮아?”

    “어, 괜찮아. 너만이라도 놀라게 하지 않…….”

    별하는 고개를 드는 순간 말을 더 맺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을 마주하고는 입을 벌린 채로 눈동자만 굴렸다.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외부에서 마주했던 철옹성 같은 절벽은 이곳의 안벽이었고 그 끝이 아득하게 멀었다. 하늘을 뚫고 나갈 듯한 천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으며 태양이 그곳에 갇혀 있었다.

    새하얀 빛이 쏟아지는 구멍을 향해 높이 솟구친 바위들 사이사이로 지나온 곳과는 전혀 다른 녹음이 펼쳐져 있었는데, 사계절을 대표하는 수목들이 어떤 방해도 없이 번창해 있었다.

    낮은 지면에는 연둣빛의 풀들과 샛노랗고 동그란 점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그것들은 전부 꽃이었다. 구멍에서 내려왔을 때부터 강하게 느껴지던 냄새의 정체인 듯했다. 동굴에서 파비안이 맡았던 향내 역시.

    별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파비안 같은 만능 엔터네이너도, 지리학 관련 전공자도 아니었지만 천장만이 열린 돔 형태의 폐쇄된 공간에 이런 숲이 형성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자신들이 밟고 선 암석을 포함해 지면 위로 솟구친 바위들 때문이었다.

    삐죽빼죽한 바위들 사이로 일반 광물질이 아닌 것들이 적지 않은 수로 섞여 있었다.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 없는 그것은 거대한 황금 덩어리였다.

    단순한 황금이 아닌 듯 강한 광택이 났는데 황금색 유리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거대한 구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황금들과 만나 돔 안을 마치 또 다른 세계처럼 밝히고 있었다.

    “뭐야, 이건…….”

    별하는 살아오면서 숲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많고 큰 황금을 본 적이 없었다. 발아래의 황금바위를 내려다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맨발에 닿는 촉감은 약간 서늘하면서도 매끈했다. 이끼에 뒤덮이지 않은 바위는 질감으로만 봤을 때는 평범한 바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빛을 옮기는 능력을 제외한다면 분명 그랬다.

    “……어쨌든 사화산이었던 거네.”

    파비안 역시 이색적인 풍경을 아연히 돌아보다 별하와 눈길을 나눴다.

    “그것도 꽤 오래전에 죽은.”

    죽었다고 표현하기에 돔 안의 세상은 너무도 싱그러웠다. 방금 막 생명을 틔운 것처럼 생기와 활력이 넘쳐 흐르는 듯했다. 별하는 믿기지 않는 풍경을 멀거니 응시하며 독백하듯 물었다.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건가? 그거.”

    “아마도.”

    “펜트하우스에 사는, 괴물이라…….”

    파비안은 황금바위의 아래를 내려다보며 별하의 옆을 지나갔다.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라. 우선은 자리부터 옮기도록 해, 별하.”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에 넋이 나가 있던 별하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평화로운 돔 안은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그에 반해 무척 고요했다. 간혹 녹음이 일렁이는 소리나 작은 새들의 기척은 느껴져도 그 외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곳이 정말 미지의 ‘그것’이 사는 곳이라면 이질적인 소음을 내는 불청객의 방문을 분명 알아차렸으리라. 별하는 파비안의 옆에 서서 함께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

    바위는 안벽과 맞닿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돔의 정중앙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었으나, 높이로 봤을 때는 전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4, 5미터를 족히 넘는 높이였다. 별하는 흔한 넝쿨도, 그 무엇도 없는 주변을 돌아보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내려갈 생각이야?”

    파비안은 돌칼을 허리에 차며 되물어왔다.

    “클라이밍 해본 적 있어?”

    “…….”

    순간적으로 침묵한 별하의 대답을 금방 알아들은 그는 어려운 것 없다는 듯 말했다.

    “별하는 야자수 잘 타잖아. 같은 원리야. 천천히 한 발 한 발 짚으며 내려가면 돼.”

    일정한 자세로 야자수를 오르내리는 것과 전신의 근육을 이용해 암벽을 타는 것이 과연 비슷한 수준인 건지 별하는 자그마한 의문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할 수 있든, 하지 못하든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시에 들이닥친 ‘그것’에 목숨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휘휘한 숲속에 내버려진 시체들처럼 잔인하게.

    별하는 손에 쥔 창을 바위 아래로 떨어뜨렸다. 지면에 푹 꽂힌 것을 확인한 후 당장 뛰어내릴 태세인 파비안을 돌아보며 눈짓했다.

    “일단 해보자.”

    순식간에 바위를 타고 내려가 지면에 닿은 파비안은 가장 먼저 주변을 살폈다. 경계할 만한 사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직 반도 내려오지 못한 별하를 올려다보았다. 어디를 붙잡고 어디에 발을 둬야 하는지 위치를 봐주며 차분하게 코치했다.

    별하는 어금니를 물고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부지런히 발을 내렸다. 잡을 곳이 마땅치 않은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용을 쓰느라 전신이 욱신거렸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뛰어내려, 별하.”

    2미터 높이의 바위에 매달린 별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뭐?”

    “뛰어내려. 받아줄 테니까.”

    “안 돼, 그건. 중력을 받으면 훨씬 무거워져서 너까지 다쳐.”

    “괜찮아.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고 장담해.”

    별하는 어깨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절대 뛰어내리지 못할 만큼 높은 위치는 아니었으나 괜히 자만을 부려 뼈가 부러지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부상을 입는다는 건 경기에서 패하는 정도가 아닌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파비안은 두 팔을 내밀어 뛰어내리기를 완고하게 청해 왔다. 자신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듯이.

    “제기랄.”

    별하는 파비안이 서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는 이내 몸에서 힘을 풀었다.

    079.

    뒤돌아 떨어지는 별하를 아래서 대기하고 있던 파비안이 가뿐하게 받아냈다. 그리고는 유리병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었다. 걱정이 무색할 만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

    별하는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파비안에게 겸연쩍은 눈길을 보내고는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발에 닿는 흙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흙인지 모래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입자가 고와, 움직이는 대로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혔다.

    그는 바닥에 꽂아둔 창을 뽑아 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황금바위로 인해 바깥보다 더 밝은 듯한 공간은 음지라는 생각이 전연 들지 않았다. 녹음 아래 그늘마저 희미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별하의 물음에 파비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돔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바위들을 가만히 응시하며 답했다.

    “이곳에서 잠시 상황을 지켜본 후에 저곳으로 가봐야겠어.”

    “무슨 냄새가 나?”

    “익숙하지 않은 냄새들이 사방에서 느껴져.”

    높은 고도에 폐쇄된 공간이니만큼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별하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사위를 연신 살피며 창을 꽉 움켜쥐었다.

    “올까? 여기로?”

    “들었다면 헐레벌떡 달려올 테지. 경고를 보낼 정도로, 자신의 영역에 대해 집착하는 녀석이니까.”

    “…….”

    “영리한 만큼 호기심도 클 테고.”

    눈이 마주치자 파비안은 숲을 향해 턱짓했다. 어서 움직이자는 뜻이었다.

    그들은 수목이 우거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구멍이 뚫린 안벽 아래와 그 주변을 유심히 지켜보며 대기했다. 무엇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창을 쥔 손 안이 흥건할 정도로 긴장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분명 긴장했었으나, 한참이 지나도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자 지루함을 느꼈다. 밝은 햇살과 시원한 공기, 간만의 부드러운 지면, 향긋한 꽃냄새, 약간의 허기와 갈증이 느껴졌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운 평화로움이었다. 무시무시한 미생물체의 서식지만 아니었다면 바로 취침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터줏대감의 소홀한 관리 감독에 시간이 갈수록 집중력이 흐트러진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낮은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별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실이라도 나간 건가……?”

    나무 그늘에 서서 한 곳만 응시하던 파비안이 말을 이었다.

    “자느라 못 들은 건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네. 여기서 기다리는 건 이제 시간 낭비 같아.”

    파비안은 제 뜻도 그러하다는 듯 눈길을 내렸다.

    “중앙을 살펴봐야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별하와 파비안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평평하고 부드러운 지면은 걷기에 수월했다. 빛이 내리쬐는 데도 열기는 높지 않았고 공기는 쾌적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숲을 가로지르느라 들꽃을 밟으며 걷는 그 때, 작은 수풀더미가 푸르르 흔들렸다. 우뚝 멈춰 선 별하는 그곳으로 창을 겨눴다.

    “저기. 뭐가 있어.”

    파비안은 그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조심해, 파비안.”

    돌칼을 수풀 더미로 던지자 안쪽에 숨어 있던 물체가 화들짝 놀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흰 털이 북슬북슬 난 작은 짐승이었다. 얼핏 토끼 같기도 하고 기니피그 같기도 한 녀석이었는데 잔뜩 겁을 먹고서 근처 무성한 수목 그늘로 잽싸게 달려갔다.

    별하는 한숨과 함께 창을 내렸다. 그가 수풀에서 돌칼을 들어 파비안에게 내밀었다.

    “어쩐지 반갑네. 이런 때에 귀여운 동물을 보니까.”

    그는 불현듯 새파란 짐승을 떠올렸다. 저들을 기다리다 못해 집으로 가버린 듯한 블루칩이 생각나 마음이 좋지 못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제 가족인 것처럼 무척 잘 따르던 녀석이었는데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과일이라도 더 먹여줄 걸. 어깨 무겁다고 괜히 들썩이지 말 걸.

    별하가 생각에 잠긴 중에도 돌칼은 제 자리를 찾아가지 않았다.

    “…….”

    파비안은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작은 짐승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안광을 빛내며.

    “파비안?”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찰나였다. 작은 짐승이 도망간 수풀 뒤에서 짧은 비명이 울렸다. 목숨이 끊어지는 단말마였다.

    “―!”

    별하는 엷은 나무 그늘을 번득 돌아보았다. 주변의 수풀 안에서 우걱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쩝쩝쩝 큰 주둥이를 벌리고 다급하게 뭔가를 먹어치우는 기척이었다.

    수 초도 지나지 않은 순간에 벌어진 일은 생각과 말을 앗아갔다. 별하는 파비안이 제 손에서 돌칼을 가져가는 것도 모르고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세하게 하느작거리던 수풀이 이윽고 폭풍 속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더니 안쪽에서 뭔가가 걸어 나왔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건 맹수였다. 늑대.

    누르스름한 털로 뒤덮인 늑대는 거대했다. 별하의 가슴께까지 닿을 듯한 크기였는데 길쭉한 주둥이에는 급하게 해치운 먹이의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것을 닦으려 주둥이를 벌리자 안쪽에 맺힌 먹이의 체액이 주르륵 떨어졌다.

    별하는 이쪽에 박힌 늑대의 황갈색 눈동자를 애써 못 본 체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에, 무슨 늑대가 있어? 근데 저거 늑대가 맞아……?”

    눈앞의 늑대는 대륙의 일반적인 늑대보다 덩치가 무척 크고 주둥이도 더 길쭉했다. 날카로운 이빨은 바다악어의 그것을 연상케 했고 다리가 긴 만큼 발도 두툼했다. 별하의 눈길이 대번 늑대의 네 발로 향했다.

    “지금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찾은 거 같아, 파비안.”

    늑대는 입맛을 다시며 별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먹잇감을 노리듯 느릿하게 원형을 그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돌칼을 움켜쥔 파비안은 늑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굳게 닫힌 입술을 열었다.

    “녀석에게서 냄새가 느껴져. 아주 특이하고도 낯설지 않은.”

    별하 역시 창을 바짝 세워 들고서 불시에 나타난 생물체를 경계했다.

    “어떤 냄새?”

    파비안은 저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느직이 답했다.

    “인간의 페로몬과 비슷한 냄새.”

    별하는 눈을 깜빡이며 옆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인간의 페로몬 냄새가 난다고? 저 늑대한테서?”

    “정확히는 알파의 페로몬.”

    “…….”

    별하와 파비안이 침묵의 눈길을 나누는 사이, 늑대와의 거리가 눈에 띄게 좁혀졌다. 파비안이 입술을 모아 피리소리를 내며 환기를 시도했으나 늑대는 그를 본 척 만 척하며 별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별하는 저를 먹이로 인식한 듯한 늑대를 마주하며 낮게 혀를 찼다.

    “또 이런 취급인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늑대가 새빨간 주둥이를 크게 찢으며 달려들었다. 별하의 창과 파비안의 돌칼이 동시에 허공을 갈랐다. 늑대는 민첩하게 뛰어올라 피하며 길게 들어온 창을 이빨로 텁석 물었다. 그것을 곧장 제 쪽으로 당겨 별하를 잡아끌었다.

    “으, 윽!”

    황소도 삼킬 듯한 아나콘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엄청난 괴력이었다. 파비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손에서 놔!!”

    무기를 놓지 않으려 끌려가던 별하는 사태를 파악하고 얼른 손에서 창을 놓았다. 당기는 힘이 사라져 움칫한 늑대를 향해 곧바로 돌칼이 달려들었다. 콧등을 스치며 비켜 간 돌칼의 서늘한 기운에 놀란 듯 기세등등하던 맹수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늑대는 피가 흐르는 콧등을 일그러뜨리며 파비안을 향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회색곰만 한 늑대가 주둥이를 피로 물들인 채 역정을 내는 모습은 몹시 위협적이었다.

    별하는 근처에 떨어진 창을 발견했다. 줍기에도 위험하고 줍지 않으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는 잠깐의 고민을 끝내고 빠르게 몸을 날려 창을 주워 들었다. 늑대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까운 별하를 향해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었다.

    파비안은 손에 든 것을 힘껏 내던졌다. 돌칼의 날이 장애물을 헤치고 정확히 목표물에 가닿는 순간 늑대의 날카로운 비명이 주변 숲을 울렸다. 꼬리를 말고 뒤돌아 달아나는 늑대의 대퇴부에는 돌칼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파비안은 별하의 옆을 휙 스쳐 지나며 외쳤다.

    “놓쳐선 안 돼!”

    “어, 어?”

    그를 아연히 쳐다보던 별하는 곧 그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늑대는 다리를 중상을 입고도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쓰러진 나무와 바위를 뛰어오르며 훌쩍 앞서 달렸다. 저를 뒤쫓는 이들을 따돌리려는 듯 일부러 험한 지형으로 들어가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하아…… 하아…….”

    별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내밀면 닿는 거리에서 달리는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파비안은 뒤따르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눈치채고 곧 늑대의 추격을 멈췄다.

    “하아……. 괜찮아, 별하?”

    별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급히 호흡을 골랐다.

    “어떻게 저런, 하아……. 다리로 달릴 수 있는 거지? 정말 늑대가 맞는 거야? 하아…….”

    파비안은 주위를 돌아보며 턱 끝으로 떨어지는 땀을 닦았다.

    “우리가 익히 알던 늑대보다 훨씬 영리한 건 확실해.”

    “빌어먹을. 늑대였던 거였어?”

    별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거대 발톱의 주인이 회색곰 크기의 늑대였다니. 문득 원주민들이 쓰고 있던 가면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쫑긋 선 양쪽 귀와 길게 빠진 주둥이, 예리한 송곳니까지 달려 있던 그것은 분명 늑대의 형상이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된 별하는 제 상태가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파비안에게 눈짓했다.

    “아무리 거대 늑대라도 그 상태론 얼마 못 갔을 거야. 혹시 나중에 식인종들이 토 달기 전에 그거 수거하러 가자. 돌칼.”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녀석의 피가 이쪽으로 떨어져 있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일반 바위와 황금바위가 격자로 얼기설기 섞여 험난하게 솟은 지대였다. 천장 아래서 봤을 때는 그림 같기만 하던 풍경이 직접 그 영역으로 들어서자 현실처럼 냉혹했다.

    지면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혈흔을 쫓아 높다란 바위 사이로 들어가는데 별안간 흔적이 뚝 끊어졌다. 파비안은 숨을 깊게 들이켜며 사위를 돌아보았다. 어디에선가 바람소리 같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근방에서 냄새가 진하게 나.”

    별하는 삐죽삐죽 솟은 바위들 뒤편을 예의 주시하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느 쪽에서?”

    파비안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고요한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며 머리 위 구멍을 가리는 바위 위쪽까지 그의 눈길이 닿았을 때 낮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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