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 혼자 가버린 게 아닐까 했던 불안이 한낮의 눈송이처럼 녹아 없어졌다.
파비안에게 다가가려던 별하는 제 옆에 쌓여 있는 것들을 툭 건드렸다. 바위인가 했으나, 그것들은 별하의 손길이 닿는 즉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동그란 형체들을 굳이 들여다보며 확인하지 않아도 고유의 향으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일이었다. 새콤달콤한 맛과 단맛이 강한 두 가지 과일로 이루어진 더미.
“…….”
이 근처에서도 이러한 과일이 자란다고 여기기에는, 과종이 의심할 수 없는 열대종이었다. 설마 돌아갔다 온 건가? 과일을 가져오려고? 별하는 나직이 혀를 찼다. 지나온 길은 끝이 없었고 그 길을 홀로 돌아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자신이 잠든 사이에.
과일의 출처를 짐작하며 생각에 잠긴 사이 눈을 뜬 파비안이 별하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읏.”
그는 흠칫 놀라 어깨를 바짝 웅크린 별하를 품에 안고서 뺨을 문질렀다.
“언제 일어났어, 별하? 몸은 괜찮아?”
바닥에 뒷머리를 붙이고 누운 별하는 제 위를 덮쳐든 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섹스하고도 얼굴을 마주하자 다시금 뱃속이 묵직하게 뜨거워졌다.
저에게 연신 뺨을 비비는 파비안의 헝클어진 금발과 끝이 살짝 휘어진 입매를 지나 새하얀 목덜미에 찍힌 수많은 자국을 발견하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장작불 옆에서 나뒹구는 것들을 눈짓하며 물었다.
“저건 어디서 난 거야?”
“저거?”
“과일 말이야. 근처에 있었어?”
“…….”
“설마 되돌아 갔다 온 건 아니지?”
지나온 숲에 과일을 가지러? 파비안은 대답 없이 별하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잠시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아직 발정기를 보내는 중인 별하는 거리낌 없이 다리를 벌렸다. 파비안과 입술을 붙이고 혀끝을 맞댔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느릿하게 혀를 더듬다가 순식간에 조급해져 깊게 얽혀들었다.
“으음…….”
파비안은 별하의 뒤로 손을 밀어 넣어 어느새 젖어 든 주위를 더듬으며 나직이 물어왔다.
“더 할 수 있지? 별하?”
파비안의 페니스도 줄곧 발기한 상태였다. 낮에 별하에게서 떨어진 뒤 금방 노팅이 풀렸지만 발기는 수시간이 지나도 굳건했다.
“응…….”
별하는 잠시 떨어진 찰나의 틈도 참을 수 없다는 듯 파비안의 입술을 삼키며 그의 바지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들은 처음 섹스를 나누는 것처럼 성급하게 달라붙어 서로의 감촉을 좇았다. 별하는 제게 끊임없이 부딪혀 오는 이를 두 팔로 끌어안으며 환희에 몸부림쳤다.
“파, 파비안……. 으읏, 파비안, 파비안……. 파비안…….”
파비안은 별하의 숨소리에 맞춰 몸을 열었다. 녹아내릴 듯 젖은 안쪽에 크고 뜨거운 불을 지피고 또 지피며 열에 들뜬 저음으로 속삭였다.
“계속 불러줘.”
“파비, 파비안…….”
“사랑스러운 나의 별하, My fianc.”
“흣, 으읏……. 파비안…….”
소나기구름이 지나간 밤하늘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보름달이 떠올랐다.
무인도와 다름없는 이곳에 적응한 몸은 발정기를 굵고도 짧게 보냈다. 별하는 파비안과 물고 빠느라 여명이 뜰 때쯤 잠들고서도 정오가 되기 전에 먼저 일어났다. 그럼에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다. 공기가 좋아서인지, 생애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히트를 보낸 직후여서 인지 몹시도 상쾌했다. 가히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굴 근처에 만들어진 물웅덩이에서 몸을 씻은 별하는 뒤늦게 일어난 파비안과 과일로 배를 채웠다. 이제 어디로 갈지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가 어제 본 절벽을 다시 확인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히트에 눈이 멀어 절벽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별하는 그에 동의했다.
과일을 서로 나누다 손끝이 부딪혔을 때 다시금 피어오르려는 불씨를 그들은 딴청을 부리며 간신히 꺼트렸다. 아쉬움이 묻어난 짧은 키스를 나눈 후에 곧바로 움직일 채비를 했다.
별하는 길을 나서기 전, 햇빛이 비쳐드는 아늑한 동굴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여기, 블루칩 비슷한 게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헛것을 봤나?”
“글쎄.”
“……?”
파비안은 별하의 이마를 입술로 누르고는 먼저 동굴을 나섰다.
멀지 않은 절벽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주변을 살폈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이 비추는 절벽에는 어제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길이 나 있었다.
발을 살짝만 잘못 내디뎌도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좁은 벼랑이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기에는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으나, 절벽의 한가운데에 난 모퉁이는 분명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별하와 파비안의 시선이 교차했다.
별하는 파비안의 투명한 눈동자와 햇살에 반짝이는 흰 뺨, 새빨간 입술을 아연히 쳐다보며 물었다.
“설마 저기로 가자는 뜻은 아니겠지?”
파비안은 돌칼을 허리에 차며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내가 먼저 앞장서지.”
76.
“…….”
앞장서지 않아도 된다는 특혜가 주어졌지만 별하는 머뭇거렸다. 저곳에 길이 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막다른 벽에 가로막혀 저 좁은 벼랑을 다시 돌아 나오다 발을 헛디뎌 불상사를 당하는 경우보다는 나을 테니까.
좋지 않은 상상들을 떠올리던 별하는 뒤숭숭한 마음을 가다듬으려 깊게 심호흡을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까지는 힘들어도 적어도 상황에 충실하자. 그러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으리라. 언제나 늘 그래왔었던 것처럼.
별하는 곧 창을 움켜쥐고서 옆 사람에게 눈짓했다. 조심해. 파비안은 별하와 눈길을 짧게 주고받은 뒤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수풀에 가려진 벼랑으로 들어섰다.
정방향으로 똑바로 걷기에는 확실히 폭이 좁아 몸을 약간 돌려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벼랑길은 협소할 뿐만 아니라 바위 틈새에 자라난 이끼와 잡초들로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이끼에 덮인 바위는 밟지 마. 별하.”
스치듯 눈길이 마주쳤을 때 파비안은 뒷사람에게 단단히 주의시켰다.
“응.”
별하는 파비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벼랑을 조심히 걸었다. 일순 발아래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눈가를 찡그렸다. 내내 외면하고 있던 절벽 아래가 언뜻 시야로 들어왔다.
아득한 절벽 아래는 온통 시푸른 녹음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파스텔 빛깔의 영롱한 바다와 투명할 정도로 맑은 하늘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천혜의 경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새하얀 태양마저 풍경 속에 녹아들어 마치 특수한 필터를 입힌 듯 온 세상이 반짝거렸다. 여행의 참 묘미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별하는 문득 충동을 느꼈다. 근처 기념물 판매점에서 멋들어진 풍경이 그려진 엽서를 구매해, 집으로 안부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겨우 발견한 공중전화기로 전화를 걸어 엽서를 잘 받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곳은 별일이 없는지, 끼니는 잘 챙기고 계신지, 혹 불효한 아들 걱정에 몸져누운 건 아닌지.
현재 서 있는 곳이 발을 잘못 까딱했다가는 비명횡사하는, 이름 없는 섬의 절벽 한가운데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달려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별하는 턱을 살짝 당겨 서늘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새로 깔끔하게 드레싱한 나뭇잎붕대 아래 낭떠러지는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았다.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천국과 지옥처럼 힐긋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광경이었다. 금세 싸늘하게 식은 땀이 등줄기로 흘러내렸다.
“근육 덩어리 두두 놈이 정말 여길 지나갔을까?”
벼랑길은 파비안에게도 조금 버거워 보였다. 그보다 가로 폭이 더 큰 두두가 이 좁은 길을 지나가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거구를 절벽에 바짝 붙여 한 발 한 발 내디뎌가며 절벽의 안쪽으로 들어갔을까? 정말?
앞서 걷던 파비안은 걸음 속도를 살짝 늦췄다. 전방으로 향해 있던 이목을 돌려 탁 트인 전경을 지나 뒷사람을 스치듯 돌아보았다.
“확실히 최근에 통로로 사용된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아. 식인종들의 조상이나 고산 지대에 서식하는 동물 정도라면 모를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 꼭대기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에 닿을 듯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같은 자리를 계속해 뱅뱅 도는 새가 보였다. 아마도 사냥을 준비하는 커다란 수리과 같았다.
이곳에 들어와 처음 보는 동물의 출현에 별하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수에게까지 버림받을 정도로 악독한 존재가 숨어든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친 탓이었다. 그는 눈으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먼 벼랑길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체도 더 안 보이고, 안 보여서 다행이긴 하지만 뭔가 땅에 표시해 둔 빵부스러기를 잃어버린 느낌이야.”
“그들만의 통로를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우리 눈으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으음. 이대로 계속 가야 할까? 잘못 든 길일지도 모르는데?”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절벽 아래서는 계속해 바람이 들이쳤다. 파비안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이 하나밖에 없다면 별하는 어디로 가겠어?”
“…….”
“지나온 길은 시간만 잡아먹지.”
별하는 굳은 입가를 설핏 끌어올렸다. 웃음이 아닌 각오를 다지는 표정이었다. 파비안은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향해가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 막다른 길이라면 다시 돌아 나오면 되니까.”
“아, 차라리 익룡이 나으니까 그것만은 제발.”
작은 웃음과 함께 저음이 어렴풋하게 날아들었다.
“역시 시간은 걸리겠지만 미련이나 후회를 남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그리 말하는 파비안의 금발이 유독 반짝거렸다.
“…….”
밤새 손안에 들어와 있던 금발이 지금은 한 올 한 올 살아 숨 쉬는 듯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기만 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가슴 안쪽이 뭉클할 정도로 경이로워 보였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 햇빛, 흙먼지까지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에 별하는 경미한 혼란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열릴 계획도 없었던 심혼에 파고든 낯선 감정은 그 파급력이 더욱 강렬했다. 강대하게 밀려드는 그 위력에 무력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별하는 얕은 한숨을 불어냈다. 절벽에 기댄 몸이 몹시 욱신거렸으나 달콤하기만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 낯설고도 애틋한 감정을 깊게 관철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시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하아…….”
그는 고난이 끝날 순간만을 기약하며 목하의 시급한 문제에 집중했다. 더 아래로는 눈을 두지 않고 앞사람만 보며 다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멀리 보이던 모퉁이에 닿았을 때쯤 파비안이 눈짓을 건넨 후 먼저 돌아갔다. 별하는 좀 더 걸음을 빨리해 그를 뒤따랐다.
완만한 모퉁이를 완전히 돌자마자 절벽 안쪽의 형태가 똑바로 내다보였다. 예전에는 폭포수라도 흘렀던 건지 산 위쪽에서부터 아래쪽까지 깊게 파여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균열이 보였다.
균열이 난 틈새는 1, 2미터 내외의 타원형 구멍들로 사람이 충분히 지나다닐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별하는 반색하며 저를 기다리는 파비안에게로 눈을 돌렸다.
“길이다. 길 맞지?”
파비안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답했다.
“어쩌면.”
혹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별하는 만족했다. 긴 벼랑길을 지나 잠시라도 쉴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곳으로 통하는 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절벽의 틈새로 빠르게 가는 중이었다. 별하는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었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 있는 날벌레를 발견했다. 태양 아래서 직선으로 날아가는 날벌레가 혹 사람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돌아오는 건 아닌지 미간을 좁혀 경계했다.
그러다 그것이 벌레가 아님을 깨달았다. 꼬리가 달린 헬리콥터였다.
파비안 역시 그것을 발견했으나 절벽 한가운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길. 그는 나직이 혀를 차며 바로 앞의 이끼 바위를 성큼 넘어섰다. 그 찰나 발아래 지반에 균열이 일었다. 콰직― 순간 발을 디딘 지점이 마른 모래처럼 우르르 허물어졌다.
“―!”
“파, 파비안?!”
파비안은 민첩하게 뛰어넘어 무너진 지점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안착했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난 별하는 훅 들이켠 숨을 불어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파비안은 괜찮다는 눈길을 보낸 후 무너진 곳부터 살폈다. 1미터 정도 지반이 유실된 지점은 절벽 아래가 곧장 내려다보였다.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어 들었고 주변 바위는 이끼로 뒤덮여 뛰어넘기 까다로웠다. 운이 나쁘면 별하가 선 곳도 곧 무너질지 몰랐다.
“어서 이쪽으로, 별하.”
별하는 길이 사라진 앞을 내다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쉬이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였으나 발밑의 경치가 상당히 아찔했다. 싱크홀이나 석회동굴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면, 눈앞의 고난이 명명백백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절벽에 등을 붙이고 발밑을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건 분명 저주야. 저주.”
파비안이 손을 길게 내밀었다.
“별하. 어서.”
“후우―”
짧게 숨을 뱉은 별하는 거리를 재듯 뒤로 조금 물러났다.
“빌어먹을.”
중얼거리며 몸을 살짝 낮추자마자 곧바로 허공을 뛰어넘었다. 이끼 바위를 훌쩍 넘어서서 파비안의 손을 맞잡는 순간 뒤쪽의 지반마저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별하는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끊긴 다리처럼 벼랑길은 더 이상의 통행이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여태까지 잘도 버티고 있었네.”
그들이 피신한 곳은 일단 단단한 암석 위였으나 주변 지반의 상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파비안은 곧장 절벽 안쪽의 동굴로 향하며 말했다.
“폐쇄된 이유가 있었던 거군.”
역시 두두는 이곳을 지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별하는 여전히 오금이 저린 다리를 조금 절뚝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돌아 나가긴 글렀네. 갇힌 건가?”
폭이 조금 넓어진 벼랑길을 지나 절벽 안쪽에 도착한 파비안은 반대편 절벽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지나온 벼랑길이 이어져 있었다,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별하는 이런 상황을 더는 겪고 싶지 않아 혀를 쯧 찼다. 차라리 땅굴을 파거나 암벽등반을 하는 쪽이 조금 더 오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듯했다.
“절벽 따위 이제 정말 사양이야.”
그는 동감하는 듯 한숨을 불어내는 파비안을 지나 먼저 절벽의 틈새로 향했다. 섬을 앞에 두고도 보이지 않는 듯 떠나가 버린 헬리콥터는 그들에게 절망, 실패와 같은 의미였기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절벽의 틈새는 싱크홀이나 석회동굴만큼 어두웠다. 그곳만큼 서늘하지는 않았고 공기도 제법 쾌적했는데, 별하의 컨디션이 평소보다 좋은 탓인지도 몰랐다.
장작은커녕 지푸라기도 보이지 않아 파비안은 마지막 수단인 지포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이제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분명한 라이터는 부싯돌이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다. 챠르륵―
안벽에서 떨어져나온 기암괴석들과 종유석들이 엉기성기하게 잇댄 공간은 한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협소하고 천장도 낮았다. 커다란 파이프 관 같은 어둠 속 통로는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작은 불길이 일렁이는 음영 속에서 둘의 눈길이 마주쳤다.
별하는 자문하듯 입을 달싹였다.
“길이 나 있다는 건,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거지? 정체불명의 ‘그것’이.”
파비안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수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가만히 말했다.
“어떤 냄새가 느껴지긴 하는데 모르겠어. 처음 맡아보는 특이한 냄새라 확실치가 않아.”
“특이한 냄새?”
“음. 눅눅하면서도, 알 수 없는 향내가 느껴져.”
077.
별하는 그가 표현하는 눅눅한 향내라는 것이 상상이 잘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하는 능력 외에는 베타 범주에 드는 평범한 후각을 지니고 있어 더 그랬다. 파비안은 고요한 동굴을 빙 돌아보며 덧붙였다.
“동굴의 습기 때문일 수도 있어.”
“눅눅한 건 그렇다 쳐도, 향내라는 건 동굴에서 나는 냄새가 아닌 것 같은데.”
파비안도 별하의 의견과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얕은 생각에 잠긴 별하를 내려다보며 잠잠히 물어왔다.
“몸은 좀 어때?”
“응?”
“움직이기 괜찮나?”
“아…….”
별하는 불현듯 간밤의 꿈 같았던 시간이 떠올라 얼굴을 희미하게 붉혔다. 괜히 고개를 돌려 딴 곳을 쳐다보며 담담히 대답했다.
“아까 벼랑길 무너질 때 심장 한 번 내려앉은 것 말고는 괜찮아. 끄떡없어. 근래 들어서 최고 호조야.”
파비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별하는 설핏 웃으며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안쪽으로 눈짓했다.
“기세를 몰아서 그놈 어서 해치워버리고 돌아가자. 우리 해변으로.”
그리 말하는 별하의 안색도, 목소리에서도 확실히 강한 생기가 느껴졌다. 파비안은 그제야 묵혀놓았던 고민을 일단락한 듯 어둠길을 내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장 원하는 바야.”
그들은 이전의 누군가가 찾아내 제법 잘 다듬어놓은 길을 다시금 나아갔다.
지금까지는 장애물이라고 할 만큼의 문제점이 없는 듯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큰 문제가 생겨났다. 불이 없었다. 라이터 불길을 앞세워 걷는 것도 잠시였다. 차츰차츰 기름이 닳아 이내 티끌만 한 불티조차 남기지 않고 사그라진 것이었다.
동공이 어둠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제 몸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이들은 숨소리와 체온으로 서로의 위치를 가늠했다. 발을 잘못 내디딘 별하는 바위에 발끝이 살짝 부딪쳐 낮게 신음했다.
“제길.”
파비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 갈 거야. 창끝으로 주변을 잘 더듬어가며 걷도록 해, 별하.”
그의 말대로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라면 분명 끝은 있을 터였다. 그 끝이 얼마나 먼 곳에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별하는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조금 전까지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솟아났었는데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익숙하지 않은 불안감이 엄습해 들었다.
앞의 기척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게 정말 파비안이 맞는지 생뚱맞은 의심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기척이 사실은 파비안이 아니라 동굴에 기생하는 괴생물체, 혹은 악마라면……? 그것이 파비안을 잡아먹고 그의 체온과 강한 페로몬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라면……?
별하는 목덜미에서부터 등허리까지 쭈뼛해지는 오한을 느꼈다.
“그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
돌연히 물음을 던졌다. 묵묵히 어둠을 헤쳐나가던 앞선 기척이 잠시 뚝 멎어 들었다. 옷감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하게 일더니 곧 익숙한 저음이 날아들었다.
“성인식과 같은 의미일 테지. 알파의 힘과 명예를 제의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을 테고.”
부드러우면서도 담담한 어투는 분명 파비안이었다. 별하는 되물었다.
“제의적?”
“음. 의식, 숭배 같은 의미라고 해야 할까.”
파비안의 설명을 금방 이해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폐쇄된 사회일수록 집단주의를 강요하는 현상이 심해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정설이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관은 천양지차이나 천성적으로 탐욕이 없는 별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에 터전을 잡은 식인종들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 반대편 원주민들의 성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원초적인 힘을 숭배하는 이들의 의식을 따라 이런저런 생각들에 잠겨 든 채로 걷던 별하는 또 한 번 단단한 바위를 저항 없이 걷어찼다.
“윽.”
“별하?”
파비안이 불쑥 다가와 별하를 더듬었다. 제 무릎을 끌어안고서 웅크린 이의 상태를 살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다친 발이야?”
한 차례 통증이 물러간 뒤에야 별하는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을 올려다보았다.
“으, 아니. 반대쪽 발. 무릎이랑.”
“걸렸어?”
“걷어찼어.”
“음.”
따뜻한 손이 별하의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허벅지를 지나 무릎과 정강이를 천천히 더듬었다. 뼈의 형태를 확인하는 손길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으…….”
별하가 작게 신음하자 다정한 저음이 바로 뒤따랐다.
“미안.”
파비안은 별하의 새끼발톱 끝자락까지 더듬어 확인하고는 살짝 떨어졌다.
“뼈, 근육은 무사해. 멍은 들겠지만.”
“뼈 부러지는 줄 알았어.”
“창끝을 좀 더 멀리 짚어. 피해갈 수 있는 여유는 생길 만큼.”
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목소리를 냈다.
“알았어.”
파비안이 손을 뻗어 별하의 뒷머리를 쓸었다. 진땀에 살짝 젖은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며 엷은 한숨을 불어냈다.
“잠시 쉴까?”
별하는 희미한 음영조차 보이지 않는 사위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여기서?”
“조용하고 괜찮은 거 같은데.”
“조용하긴 하지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 때 앞쪽에서 번득 불이 켜졌다. 챠륵― 부싯돌 소리와 함께 살아난 라이터 불길이 동굴 내부를 비췄다. 별하는 주변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 앞에 우뚝 선 파비안과 두 눈을 마주했다. 눈을 멀뚱히 깜빡이는 찰나 라이터 불이 훅 꺼졌다. 챠륵― 다시 불이 켜졌으나 전보다 더 빨리 불빛이 증발했다. 챠륵― 다시 한번 불이 켜졌을 때 파비안은 바로 코앞에 와 있었다.
음영이 짙게 드리운 무표정한 얼굴은 희다 못해 몹시 창백해 보였다. 흡사 어릴 적 소설책에서 본 인간의 피를 갈구하는 백작의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순간 오싹한 한기를 느낀 별하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뭐, 뭐 하는 거야?”
라이터는 더 켜지지 않았다. 파비안은 별안간 나직이 뇌까렸다.
“미안.”
“……? 방금 뭐 한 거야??”
“…….”
“설마, 장난친 건 아니지……?”
“…….”
“하아, 망할 파비안.”
별하는 그가 저를 웃게 하려고 장난을 걸어온 것을 뒤늦게 깨닫고서 한숨을 지었다. 어색해진 공기가 잠시 흘렀다. 한참 후에야 어쩐지 우스운 기분이 든 별하가 실소했다.
조용히 옆자리를 지키는 파비안의 숨결이 어둠 속에서 느껴졌다. 느른하면서도 향긋한 페로몬냄새는 성적 긴장감을 부추기는 동시에 알 수 없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별하는 절벽에서부터 이어진 긴장감이 한 발 물러간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서로 아무 말 하지 않은 채로 잠시간 어둠을 응시했다. 어떤 형상도, 소리,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동굴에 점차 적응해 가고 있었다. 별하는 발끝이 닿는 근처 암석에 등을 기대고서 물었다.
“우리 얼마나 걸었을까?”
“글쎄. 한두 시간쯤?”
“하루 반나절은 걸은 것 같은 기분이야. 넌 안 그래?”
“마찬가지.”
별하는 저만 불안을 느꼈던 게 아니라는 데서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팔꿈치에 닿는 파비안의 체온을 느끼며 그의 목소리를 더 듣기 위해 말을 걸었다.
“어떤 녀석일 거 같아?”
적당한 답을 고르는 듯 한참 후에야 저음이 흘러나왔다.
“큰 녀석이겠지. 사족보행을 하는 포유류에 날카로운 송곳니, 치악력이 엄청날 거야. 생각보다 더 포악할지도.”
“……날개는 없겠지?”
“거대한 덩치를 지탱하는 날개가 있다면 우리도 그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겠지.”
별하는 뻐근한 제 목덜미를 주무르며 작게 읊조렸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러다 파비안의 어깨에 팔꿈치가 닿아 상체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만약에 두두가 벌써 구해서 가버렸다면 어떻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