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28)화 (28/49)

“현재로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지만 다른 가설들도 있어. 하나가 아닌 여럿이 왔다거나 하는.”

“…….”

“아직 가정일 뿐이니 크게 개의치는 마.”

그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리 말하며 옆을 비켜 지나가, 앞장서 길을 나섰다. 한참이 지나도록 반응이 없는 뒤를 돌아보며 어서 오라는 눈길을 보내왔다.

“별하.”

“응. 갈게…….”

별하는 여전히 어떤 소리도, 기척도 들리지 않는 휘휘한 숲을 돌아보며 느직이 그를 뒤따랐다.

06. Almost There

가설과 현실은 얼마간의 시간 차를 두고 극명히 나뉘었다. 이전보다 높아진 경계심을 두르고 숲을 가로지르다 두 번째 시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처음 나무 아래서 만난 시체와 비슷한 형태의 두 번째 시체는 이끼에 덮여 있지 않았고 얇게 깔린 갈잎을 치우자 치명상을 입은 복부가 훤히 드러났다. 뭔가에 관통당한 복부는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텅 비어 있었는데 등 뒤편의 수풀이 언뜻언뜻 비쳐 보였다.

나무기둥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시체는 미라의 형태가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별하의 불안과 긴장이 눈에 띄게 고조되었을 때는 세 번째 시체를 발견한 직후부터였다. 세 번째로 발견한 시체는 좀 더 누른색과 청색을 띠고 있었다. 큰 상처를 입은 흉곽을 보호하듯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웅크린 모습이 못내 안쓰러울 정도였다.

생식 활동이 원활하지 못한 오메가를 잡아먹는 식인 원주민들이었지만, 별하는 어쩔 수 없이 같은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느꼈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본능적인 전해지는 감정들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째서 시체가 이렇게 널려 있는 거지? 정말 파비안 네 말대로…….”

“…….”

파비안은 더 이상 시체를 살펴보지 않았다.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주변 숲을 가만히 둘러볼 뿐이었다. 별하는 좀 전부터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움켜쥔 창을 비스듬히 눕혀 들었다.

“정말 네 말대로 경고하는 건가?”

별하는 스스로 말하고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설들은 선뜻 내세울 수 없을 만큼 파비안의 예상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돌칼을 움켜쥔 파비안의 손등에도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나 있었다. 그는 울창한 침엽 군락에 가려진 저편을 내다보며 나직이 뱉었다.

“‘그것’에 가까워졌다는 뜻일 테지.”

별하는 그와 같은 곳을 바라다보았다. 지나온 밀림과는 좀처럼 조화되지 않은 침엽 군락은 그늘이 져 컴컴했다. 아직 태양이 하늘 위에 떠 있었으나 달도 사라진 밤처럼 어두웠다. 언제부터인지 목덜미에 돋아난 소름이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파비안은 그곳에서 고개를 돌려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나에게 부여된 시험이다. 별하, 넌 가지 않아도 돼. 근처에서 은신해 있도록 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나긋하게 전하는 목소리가 몹시 다정했다. 그와 눈길을 맞댄 별하의 검은 눈동자에는 생각지 못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불안과 긴장, 불온감을 단번에 넘어서는 전의였다. 앞을 가로막는 무엇이든 전력으로 헤쳐 나아가겠다는 강렬한 전의.

“그곳에서 도망쳐 나올 때부터 각오한 일이야. 너랑 두 번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

별하는 똑똑히 혀를 굴려 또렷하게 발음했다. 거짓 없는 진심을 전하기 위해.

“후회하지 않아. 운이 나빠 잘못되더라도 함께하겠어, 너와.”

파비안은 흐린 미소를 지었다. 땀이 밴 별하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고는 엄지로 조심스럽게 뺨을 쓸었다.

“난 후회할지도 모르겠어. 별하.”

067.

“……어째서?”

조심스럽게 묻는 별하를 향한 파비안의 눈빛은 더없이 다정했다.

“혹시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린다면, 그래서 만약 너에게 어떤 작은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끝없이 방황하겠지. 분명.”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안전한 곳을 함께 찾아봐 줄 테니, 부디 이곳에 있겠다고 말해 줘.”

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저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먼 곳에서 불어온 바람에 주변의 수풀이 나직이 흔들렸다. 꾸벅꾸벅 졸던 블루칩은 바람결에 깃털이 들썩이자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파비안은 별하의 땀에 젖은 이마에 입술을 쪽 붙이며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전했다.

“별하, 너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널 잃고 싶지 않다는 미명하에 안전히 소유하겠다는 속내가 숨겨진, 나의 욕심이라면 욕심이겠지. 이기적이고 못난, 비틀린 탐욕.”

“…….”

파비안은 날렵한 금빛 눈썹의 끝을 내리며 무겁게 속삭였다.

“지금만은 욕심 부리고 싶어. 날 용서해 줘. 별하.”

“파비안.”

별하는 두 눈을 치켜떴다. 한 사람만이 담겨 몹시 반짝거리는 오드아이를 똑바로 응수하며 한 자 한 자 곱씹듯 내뱉었다.

“잊었어? 우린 동료야.”

“…….”

“다른 감정을 내세우기 이전에 둘이 함께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 온 동료라고. 알파나 오메가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서로 목숨을 걸고 말이야. 아니야?”

파비안은 별하의 뜻을 금방 이해하고서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이지.”

별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와서, 여기까지 와서 손 놓고 지켜보고 싶지 않아. 달아나고 싶지 않아. 너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가까이서 움켜쥐고 싶어. 그게 가능성이든, 기회든. 불운이든.”

“…….”

“함께 극복하고 함께 돌아가는 거야, 파비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파비안은 조용히 눈길을 내렸다. 흘러내린 금발이 스친 뺨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깃들었다. 그는 별하의 이마에 다시금 입을 맞췄다. 땀방울이 송송 맺힌 콧등과 눈가, 뺨에 애정 어린 입술을 연신 눌렀다.

그가 입술에도 흔적을 남기려다 자중하려는 듯 살짝 물러나자 별하가 턱을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쉬이 깜빡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올곧이 그를 향해 있었다. 파비안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별하의 볼통한 입술에도 따뜻한 흔적을 남겼다. 곧 떨어져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는 듯 몇 번이나.

새들이 부리를 부딪치듯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에 파비안은 내외하듯 눈길을 들어 전방을 바라다보았다. 멀지 않은 침엽수림만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별하는 참 멋진 남자로군.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나의 안목이 실망스러워.”

별하는 파비안의 등을 가벼이 토닥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흐릿한 오염조차 없이 여전히 상태가 좋은 셔츠 너머의 등은 그 어떠한 고난도 뛰어넘을 것처럼 단단하고 강직했다. 그는 파비안의 곧은 등을 쓸며 흐리게 웃었다.

“썩 나쁜 안목은 아니야. 영원히 모를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까.”

파비안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제 턱끝에 동그란 정수리가 닿는 이에게 두 눈을 꽂은 채로 나직이 말했다.

“별하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칭찬은 맞지?”

보드라운 저음이 화답하듯 곧바로 잇달았다.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

“뭔가 쑥스럽네.”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사람.”

“으음.”

“유일무이한 사람.”

눈길이 맞닿았다. 별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듣고 싶은 말이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 파비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을 내다보는 별하의 귓가와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파비안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옆 사람에게 밀착한 눈을 느직이 떼어냈다.

“그렇지.”

“아직 해가 있지만 금방 질 거야.”

“두세 시간 뒤에는 차차.”

별하는 창을 움켜쥐었다.

“응. 그 전에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저곳에 숨은 게 뭔지, 어떤 상태인지 조금이라도 밝을 때 확인하고 싶으니까.”

그는 제 어깨에 다소곳이 앉은 블루칩을 지나 마음을 다지듯 가만히 호흡하는 파비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갈까?”

파비안은 대답 대신에 너른 보폭으로 앞장섰다.

주변 지대는 경사도가 그리 가파르지 않았지만 간간이 경로를 가로막는 높다란 암석들에 몸의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길지 않은 초야를 가로질러 얼기설기 자라난 교목을 지나자 곧 침엽수 군락지가 눈앞에서 위용을 드러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수목들은 도시의 마천루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별하는 고개를 젖혀 사위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는 안쪽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으나 가까이서 본 침엽수림은 지나온 곳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일조량이 높지 않아 좀 더 어둡고, 공기의 온도가 썩 낮았다. 또한 습한 기운보다도 메마른 나무껍질과 토양, 낙엽이 썩는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그늘진 아무 아래서 시커멓게 웅크린 인영을 간혹 발견했지만 별하는 일부러 못 본 척 지나쳤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바를 이제는 충분히 이해한 것이다.

단단한 침엽수들 사이에서 뜨문뜨문 자라난 열대 식물들은 자리를 착각하고도 무척이나 우람했다. 파비안은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삐죽삐죽한 수목들만큼 솟구친 암석들이 포진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때까지도 얌전히 전용 소파에 앉아 있던 블루칩이 별안간 안절부절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조금만 심사가 틀려도 삐익삐익 소리를 질러대던 녀석이 어쩐 일로 소리도 내지 않고 그르렁거리기만 했다. 별하는 제 어깨 위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생물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블루칩은 부리를 열지 않고 날개만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파비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별하?”

별하는 파비안의 뒤편에 펼쳐진 풍경을 내다보며 얕은 숨을 불어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자기 영역이 아니라서 긴장했나 봐.”

파비안은 블루칩에게로 향한 눈을 거둬들이고 앞을 내다보았다. 눈길은 앞을 향해 있었지만 걸음은 더 나아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다. 수목 너머 병풍처럼 늘어선 암석들에 앞이 완전히 가로막힌 상황이었다.

별하는 블루칩을 토닥이며 길을 막은 암석의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수직으로 뻗어 올라간 모양이 거의 절벽과 다름이 없었다. 수십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절벽을 맨손으로 올라 지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절벽 따라서 좀 더 돌아볼까?”

“…….”

파비안은 숨을 가만히 들이마셨다. 머리 위쪽과 발아래, 사위를 차분히 돌아보다가 절벽을 따라서 좀 더 움직였다. 바위들이 튀어나온 낮은 경사로를 내려가는 중에 문득 어느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특이한 형태의 파초들이 밀집한 주변으로 눈길을 던지며 읊조렸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던 모양이군.”

파비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착실히 뒤따르던 별하는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숨을 다잡으며 그늘이 진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뭐가? 두두 녀석?”

“근방에 체취가 꽤 남아 있어. 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수 시간 전에 지나갔을 테지.”

“지금까지 절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건가?”

“그랬을지도.”

별하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제법 영리하잖아. 두두 놈.”

그도 그럴 게 자신들처럼 숲을 가로질러 왔다면 길을 헤맬 가능성과 함께 맹수나 독충, 또 다른 불청객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이곳에 ‘그것’을 제외한 맹수가 서식하는지, 애초에 수목 외의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싱크홀과 같은 여러 가지 변수를 예방할 수 있었으리라.

별하의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파비안은 건조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이곳 지리에 대해 선행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아, 그렇겠구나. 녀석에게 든든한 빽이 있었다는 걸 깜빡했네.”

파비안은 먼저 지나간 이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를 말없이 살폈다. 별하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블루칩의 등을 연신 쓸었다. 현재 가장 궁금한 한 가지를 입 밖으로 꺼낼지 말지를 고민하며 끝없이 이어진 절벽을 내다보는데 금방 주변 수색을 끝낸 파비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체취를 맡지 못하도록 향이 진한 뭔가를 피웠어. 휘발성분이 든 풀? 나무? 어떤 생물의 부위? 어찌 됐든 휘발되기 전에 먼저 발견한 것 같아.”

“그래? 운이 좋았네.”

“멍청한 녀석이 상대의 능력을 간과한 덕분이지.”

고개를 들어 무심히 툭 내뱉는 파비안은 전에 없이 싸늘했다. 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벌써 잡았을까?”

파비안은 생각도 전에 대답했다.

“아니. 전혀.”

“으음? 어떻게 확신해?”

그는 다시 평지로 이어지는 절벽 길을 나서며 그보다 쉬운 물음이 없다는 듯 답했다.

“멍청한 녀석이니까.”

그를 뒤따르는 별하의 긴장한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의 의문이 스쳤다.

“그렇게 멍청해 보이진 않던데? 무식하긴 해도.”

별하는 저에게 과일을 내밀던 두두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 무식하고 흉포하고 혐오스럽던 그가 그 순간만큼은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몹시 순진해 보였다. 다른 원주민들과는 다르게 어쩐지 눈이 반짝거렸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오메가에게는 그런 얼굴을 보여주는 건가, 생각했다. 어쩌면 불같은 첫날 밤을 보낼 생각에 잔뜩 들떴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두두가 통구이가 된 오메가의 배를 단박에 가르는 모습을 불현듯 연상하고는 그와 관련된 상념은 일체 거둬들였다. 별하는 애써 다른 즐거운 기억과 지나간 추억들로 찝찝해진 머릿속을 씻어냈다.

별하와 파비안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절벽 길을 걸었다. 블루칩은 여전히 좌불안석이었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기색으로 전용 소파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어깨를 짚은 두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별하는 무의식으로 그곳을 돌아보았다.

이전보다 해가 더 기울어 발밑의 그늘이 조금 진해졌을 때쯤이었다. 별하는 옆 사람에게 가만히 물었다.

“그때도 이렇게 날 찾았던 거야?”

068.

파비안은 제 어깨너머를 슬쩍 돌아보았다. 옴폭하게 들어간 절벽 앞에서 곧 걸음을 멈추고 뒷사람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이전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음을 건네어 왔다.

“발은 좀 어때?”

“어? 아, 괜찮아. 문제없어.”

별하는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어제저녁 파비안이 드레싱해 준 나뭇잎붕대는 이미 한참 전에 날아간 상태였다. 언제부터인지 두 번째 발톱까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으나 큰 통증은 없었다. 생각 없이 걷다가 바위에 부딪히거나 돌멩이를 발로 걷어차는 게 아니라면 걷는 데 지장이 없었다. 발톱이 빠져 이보다 더 불편해질까 봐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파비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밤을 보내는 게 좋겠어.”

별하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벌써?”

“금방 어두워질 거야.”

“이렇게 시간 끌다가 두두 놈이 먼저 찾아내면 어떡해? 뭔가 단서를 찾을 때까지는 좀 더 가보자. 아직 해도 있는데 지금 멈추기에는 일러.”

“길이 좋지 않아서 위험해, 별하.”

“……아직 아무것도 못 봤잖아. 여기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정말 위험한 건 따로 있잖아?”

파비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집을 부린다기보다는 파트너의 피로도 상태를 고려해 내린 결정 같았다. 그것을 눈치챈 별하는 눈썹을 찌푸렸다.

“난 아직 가뿐해, 파비안. 100미터도 13초 만에 뛴다고. 지금 당장 그렇게 뛸도 수 있어.”

“…….”

파비안은 못 들은 척 슬며시 몸을 틀었다. 옴폭하게 들어간 절벽을 살피며 하룻밤 쉬어갈 자리를 찾는 그에게로 별하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이.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별하가 하는 말은 전부.”

순순히 나오는 대답에 별하는 제 주장을 더 강하게 펼치지 못했다. 그가 어째서 저런 마음을 먹었는지 잘 알기에 더 그랬다. 결국 별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파비안이 고른 장소를 돌아보았다.

절벽 안쪽으로 우묵하게 들어간 공간은 폭과 높이가 꽤 크고 널찍했다. 좁아진 안쪽으로 혹시 입구가 나 있는 게 아닐까 했지만 작은 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단단한 암석과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지면의 내측에는 마른 이끼가 두툼하게 덮여 있어 하룻밤 보내기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별하는 시체를 발견한 직후부터 줄곧 세워서 들고 있던 창끝으로 바닥을 짚었다. 깊게 머금은 숨을 천천히 불어내며 긴장한 몸을 이완시켰다. 힘이 바짝 들어갔던 어깨가 내려가고 움켜잡은 손이 저절로 느슨해졌다. 그에 창이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아.”

파비안은 제 발에 닿은 그것을 주워 들어 주인에게로 건넸다.

“몸을 꽤 썼는데, 배고프지 않나?”

별하는 고맙다는 눈짓을 보내곤 창을 가까운 곳에 기대어 세웠다. 여전히 볼록하게 튀어나온 복부를 더듬어 문지르며 말했다.

“아직도 소화 다 안 됐어. 한 며칠간은 배 안 고플 거 같아. 넌? 배고파?”

“그다지. 갈증은?”

“괜찮아. 소화될 때쯤엔 엄청나게 목마를 테니 미리 뭐라도 찾아볼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파비안은 그리 답하며 별하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새카맣게 멍든 발가락을 들여다보는 그의 안색이 못내 어두웠다. 마치 곧 죽을 병을 앓는 환자라도 마주한 것처럼 심각해 보였다.

“그전에 이것부터 치료해야겠어. 감싸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상처를 완전히 고쳐주지 못하는 데 대한 무력감이 얼핏 느껴졌다. 별하는 반짝반짝한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안 아프면 됐어. 혹시 발톱 빠지게 되면 그때 도와줘. 파비안.”

“그때는 늦어. 움직이기 훨씬 불편해질 거야.”

“정말 괜찮은데…….”

파비안은 몸을 세워 일어났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래?”

“응?”

“다시 드레싱해 줄게. 전보다 더 튼튼하게.”

별하는 더 거부하기가 미안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충해도 돼.”

파비안은 굳게 다문 입가를 어렴풋이 끌어올리며 웃었다. 저를 멀거니 쳐다보는 별하의 남방을 똑바로 여며주고는 곧 반대편 숲으로 돌아섰다.

“…….”

별하는 가까운 수풀로 향하는 파비안에게서 눈을 떼고 제 발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신발도 없이 험한 밀림을 누비고 다닌 발은 때가 묻어 얼룩덜룩했다. 이곳저곳에 긁히고 밀리고 까여 자잘한 상처도 꽤 나 있었다.

그는 멀어지는 파비안의 하얀 발을 힐긋 곁눈질했다. 연한 분홍빛의 발바닥에 시커먼 흙이 묻어 있었지만 어제 막 신발을 벗은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분명 같은 땅을 밟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이 쉬었는데, 어째서 이쪽이 더 더러운 건지 새삼 의문을 느꼈다.

별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멋대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누그러뜨렸다.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블루칩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굽은 등을 절벽에 기댔다. 의외로 미적지근한 암석에 기댄 채로 파비안을 기다리는데 문득 어디에선가 나직한 기척이 들려왔다.

“……?”

바람 소리인가 했지만 바로 앞의 자그마한 파초 이파리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녹음 너머의 하늘을 번뜩 올려다보는데 다시금 희미한 기척이 들릴 듯 말 듯 일었다. 작은 물체들이 연속해 도도독 굴러떨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

별하는 기댄 몸을 똑바로 세워 절벽의 좌우를 돌아보았다. 바위라도 굴러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위쪽까지 살폈지만 요새 같은 절벽은 백만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꼿꼿했다. 의아하게 주변을 살피는 그의 곁으로 파비안이 다가왔다.

“왜 그러지, 별하?”

“으음…….”

별하는 저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잘못 들었나 봐.”

볼일을 마치고 온 파비안은 별하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잠잠히 되물었다.

“뭔가를 들었어? 어떤?”

“위에서 돌멩이들 굴러떨어지는 소리 같은 거.”

별하와 파비안이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절벽은 굳건했다.

“바람이라도 불었나 보군. 고도가 좀 더 높아졌을 테니 체감도 다를 거야.”

“그런, 가……?”

“처치만 끝내고 수분을 보충할 만할 것들을 찾아보자.”

“그래.”

파비안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러 크기의 나뭇잎을 손에 들고 있었다. 환부를 한 번에 감쌀 너른 나뭇잎은 없는 대신에 무른 나무껍질 같은 게 있었다. 별하는 파비안이 제 앞에 무릎을 굽혀 앉자 자연스럽게 멍든 발을 살짝 들었다. 중심을 잡기가 어려워 절벽을 짚으며 물었다.

“이러면 돼?”

“앉아도 되고, 별하 편한 대로.”

“그럼 이대로.”

별하는 그대로 발을 들고 있었다. 내내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던 블루칩이 별안간 훌쩍 날았다. 근처의 높다란 나무 위에 헐레벌떡 착지해서는 이쪽을 내려다보며 날갯짓을 해댔다. 빠비안! 어이―! 별하는 눈썹을 그러모았다.

“저 녀석 갑자기 저러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기던데…….”

“…….”

천적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블루칩을 힐긋 올려다본 파비안은 지상으로 눈을 내렸다. 어스름한 숲은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했다. 먼 곳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시간을 들여 살폈지만 뭔가가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낌새는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하던 일에 다시 집중했다.

“배라도 고픈가 보지.”

“…….”

별하는 신경을 곤두세워 주변을 경계했다. 혹 밀림에서 마주쳤던 표범이 이곳까지 쫓아온 건 아닌지, 설마 ‘그것’이 나타난 건 아닌지 창을 다시 손에 들었다. 파비안은 별하의 엄지발가락 길이에 맞춘 나무껍질을 환부에 돌돌 감았다. 그 안쪽에 보드라운 이끼를 채워 넣으며 나긋하게 설명했다.

“이러면 충격이 덜 갈 거야. 빈 공간이 없어서 고정력도 높고.”

“응…….”

별하는 아래쪽에 집중하지 못하고 숲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파비안은 빠르게 나무껍질을 고정했다. 질긴 잎으로 윗부분을 이리저리 엮은 후 고정력을 확인하고서야 별하의 발을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나중에 간단한 신발을 만들어봐야겠어. 조리나 샌들 같은. 착화감은 장담 못 하지만 맨발인 것보단 낫겠지.”

별하는 전보다 더 튼튼하게 드레싱이 된 것을 내려다보았다.

“워낙 솜씨가 출중해서 좋은 물건이 나올 거야.”

파비안은 겸연쩍은 듯 엷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블루칩의 호들갑이 있었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별하는 느직하게 경계심을 풀었다. 기울어진 햇빛이 어렴풋하게 비쳐드는 절벽 안쪽에 등을 기대고 약간의 이질감이 드는 발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파비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러운 발바닥을 발견하고 얼른 털어냈다. 파비안은 적당히 불을 피울 자리를 만들며 물어왔다.

“별하, 불 피워볼래?”

별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맡겨둬.”

“그럼 난 잠시 주변을 돌아보고 올게.”

“같이 안 가고?”

“어두워지기 전에 자리를 잡으려면 그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멀리는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별하가 대답을 미루는 사이 블루칩의 고성이 주변을 울렸다. 미치인―! 미친―! 별하는 귀찮은 듯 미간을 구겼다.

“저 녀석은 대체 뭐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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