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매달린 생물체들은 이미 세상을 하직한 듯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파비안은 풍성한 꼬리를 한데 움켜잡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별하가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운 좋게 둥지를 발견했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입구만 잘 막는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어. 무엇보다 병원소인 녀석들이니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이곳에 항생제 같은 건 없으니까.”
별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렇군.”
“그리고 오는 길에 한 놈 더.”
“……대단하네.”
별하의 칭찬을 받은 파비안은 기분이 좋아진 듯 눈을 내리깔았다.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은 어째선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도 희고 깨끗했다. 그는 사냥한 다람쥐들을 다리 옆으로 내리며 물어 왔다.
“배고프지, 별하? 이만 돌아갈까?”
별하는 빈손에 창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앞장 서 왔던 길로 향하던 파비안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어깨 너머로 말했다.
“아, 오는 길에 샘물이 있었어.”
“그래? 이전에 비 올 때 생긴 건가?”
“깊은 밀림 속이니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지.”
별하는 나뭇잎들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라고 완전히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구나.”
“어디든, 무엇에든 양면성이 있을 테니까.”
별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기는 한데 점점 이곳에 익숙해지는 것 같은 느낌은 그다지 반갑지가 않아.”
파비안은 웃었다.
“조금 멀지만 수심이 꽤 있으니 그곳에서 식사 준비를 하도록 해. 그 전에 먼저 씻어도 되고.”
별하는 그제야 한결 밝아진 안색으로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거 좋다.”
이른 아침에 새로 피운 불씨는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금 타올랐다.
샘물은 이전에 표범을 맞닥뜨렸던 곳보다 조금 작았지만 허벅지가 잠길 만큼 꽤 깊었다.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씻은 파비안은 건장한 상반신을 드러내고서 먹을거리를 손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내버려 둔 채로 사냥해 온 것들의 껍질을 벗기고 모양을 정리해 다듬었다. 처음에는 그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작업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다가 핏물을 제거한 이후에는 감을 잡은 듯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별하는 일찌감치 상한 비위를 숨기고 손을 도우려 했지만 파비안에게 단호히 거절당했다. 내색하지 않아도 진즉 그의 상태를 알아챈 것이었다.
“여긴 괜찮으니 천천히 씻어. 준비되면 부를게.”
별하는 미안한 듯 말했다.
“오늘은 내가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파비안은 새빨갛게 피가 묻은 손끝을 나뭇잎에 닦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군. 다음번에 부탁해도 될까, 별하?”
조각조각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만월 밤의 해수면처럼 반짝거렸다. 순간 말문이 막힌 별하는 그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화사한 금발과 같은 색의 곧은 눈썹, 반듯하고도 그윽한 이목구비, 어렴풋한 티끌 한 점 찾을 수 없는 흰 얼굴에 점점이 틘 핏방울까지 눈길을 잡아끌었다.
섬뜩하게 위화감이 드는 모습인데도 별하는 그것과는 또 다른 기분을 느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오면서 분명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바로 알파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알파의 강인한 위력이나 권위에 대한 선망이 아니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해 나가는 힘, 원초적인 에너지와 좀 더 닮아 있었다.
별하는 금방 생각을 바꿨다. 그것은 어쩌면 알파에 대한 경외심이 아니라 파비안 블랙그레이라는 유일무이한 남자에 대한 감회,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깨달은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남자라는 단순한 프레임을 벗어나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호의의 감정, 존경 같은 것들이었다.
별하는 제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꼭 하게 해줘.”
파비안은 제 뺨에 튄 새빨간 핏방울을 손등으로 느직이 닦아내며 반드시 그리하겠노라 눈짓했다.
투명한 샘물은 생각보다 온도가 낮았다. 별하는 마른 목부터 충분히 적신 후에 땀이 밴 몸을 씻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가운 물에 머리끝까지 푹 담그고 싶었으나 혼자 신선놀음을 할 만큼의 철면피는 되지 못해 서둘러 대충 볼일을 끝마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변으로 고기를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크게 키운 모닥불 위로 고깃덩이를 꿴 나무꼬챙이가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고깃덩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양으로 잘게 조각이 나 있었고 냄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들숨과 함께 맡는 순간 목울대가 저절로 꿀꺽 움직였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깃덩이에서 맑은 기름방울이 끝없이 떨어졌다.
파비안은 알맞게 익은 고깃덩이를 가져와 미리 깔아놓은 나뭇잎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옆 사람에게 먼저 건넸다.
“먹어, 별하.”
별하는 모닥불 위를 가로지르는 꼬챙이에 꽂힌 눈을 내려 제 앞의 고기 조각들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멋대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데도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떤 기억이 지금의 이 장면과 오버랩되어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숯불고기의 지독하게 강렬한 냄새에 더욱 허기진 별하는 복부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침만 삼켰다. 앵무새는 연기가 싫었던지 별하에게서 떨어져 나무 위로 올라갔다. 파비안은 나머지 고기를 구우며 가만히 말했다.
“그것과 달라. 이건 다람쥐야.”
“……알아.”
“알고 있다 해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전까지의 수고 또한 헛된 노동이 될 뿐이지.”
그는 조금 강한 억양으로 뇌까렸다.
“…….”
별하는 주저했다. 누구보다 자신이 더 먹고 싶었지만, 미치도록 먹고 싶었지만, 그때의 충격이 트라우마처럼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인육을 떠올리는 것들에 쉬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흡사 고기를 먹는 행위 자체가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별하가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는 그 때, 파비안이 선뜻 손을 뻗어 고기 조각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한입에 넣어 그것을 우물우물 씹었다. 금방 목으로 넘긴 후 재차 고기를 집어 먹었다.
“……맛있어?”
그의 물음에 파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육즙이 흐르는 고기를 다시 먹어 보였다. 얼마 씹지 않은 단백질 덩어리가 금방 목으로 넘어갔다. 별하는 혀 밑에 가득 고인 침을 소리 죽여 삼켰다. 이내 그는 마음을 다진 듯 미리 만들어놓은 나무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기 한 점을 집어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으음…….”
별하의 낯빛이 창백했다. 햇빛이 내리는 허공을 응시하며 입안에 들어온 것을 의무적으로 씹던 그는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금방 녹아 없어진 고기는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육질이 부드러웠다. 폭신폭신한 살코기를 씹을 때마다 고소한 육즙이 흘렀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감칠맛이 느껴졌다. 별하는 신음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말도 안 돼.”
“입맛에 맞지 않나?”
“생선이나 조개랑은 비교가 안 되네. 너무 맛있어.”
파비안은 금방 부드러워진 눈길로 별하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또 얼마나 걸어야 할지 모르니 기회가 있을 때 에너지를 비축해 놔야 해. 많이 먹어.”
별하는 그와 눈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기를 두 점씩 집어 급히 입으로 가져갔다. 이전까지 그랬던 반응을 스스로도 믿기 힘들 만큼 고기에 대한 열망이 폭발하듯 넘쳐흘렀다.
그는 저에게서 원주민들의 모습을 문득 느꼈지만 이제 돌아갈 길이 없었다. 되새김질할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생각들은 애써 뒤로 하고 오직 식사에 집중했다.
“너도 어서 먹어, 파비안. 내가 다 먹어버릴지도 몰라.”
“포동포동하게 살이 잘 오른 녀석들이라 고기가 많아. 부족하면 근처에서 더 잡아 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 마음껏.”
파비안은 그리 말하며 생고기가 가득 꽂힌 꼬챙이를 새로이 불 위에 척 올렸다.
지면의 경사를 느낀 때는 오랜만의 포만감이 넘치는 완벽한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선 지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을 무렵부터였다.
신경을 크게 기울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완만한 경사였으나 밀림의 형태가 조금 달랐다. 밀도는 낮아진 반면에 수목의 높이가 훨씬 높았다. 이끼로 뒤덮인 지면의 곳곳에는 커다란 암석이 융기해 있었고 얼핏 절벽처럼 보이기도 했다.
햇빛이 직접적으로 비춰들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지나쳐 온 빽빽한 밀림보다는 미미하게 밝아진 분위기였다. 별하는 푹신푹신한 이끼 바닥을 창끝으로 꾹꾹 눌러가며 걷다가 불현듯 옆 사람에게 물었다.
“그 녀석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가시거리가 길어진 전방을 내다보던 파비안은 물음의 주인공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되물었다.
“누구?”
“두두 놈.”
65065.
파비안의 눈길이 가까운 곳으로 돌아왔다.
“아마 화산, 이 주변에 있을 테지.”
별하는 번득 옆을 돌아보았다.
“그 녀석 냄새가 나?”
“이전에는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안 나. 거의.”
“밀림에서는 느껴졌었다고?”
“수일 전 꺼뜨린 모닥불 연기처럼.”
“……설마 우릴 따라다녔다는 뜻은 아니지?”
파비안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우측의 이끼로 뒤덮인 높다란 암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아니야. 미세한 잔향만 느껴졌었으니까.”
별하 역시 근처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풀이 높게 자라난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가 뜨끈뜨끈한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앵무새는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연스럽게 나무 위로 올라가 주변을 정찰했다.
“그 녀석 족장한테서 ‘그것’에 관한 정보를 대충이라도 전해 들었을 거 아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왕 발톱을 가진 것밖에는.”
“그렇기는 하지.”
“그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얼마나 큰지, 뭘 먹는지, 무엇에 취약한지, 어디에 서식하는지. 아무것도 몰라.”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피던 파비안은 초조한 기색의 별하를 돌아보았다.
“그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이쪽보다 한 발 앞서서 움직인다는 게 유일한 장점일 테지.”
그의 담담한 어조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힘겨루기에서 가뿐하게 패한 제 아래 서열을 내려다보듯 그 이상의 감흥은 없어 보였다. 별하는 창을 만지작거리며 시원한 그늘로 들어오는 이를 쳐다보았다.
“정체를 아는 것만 해도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어떤 포획법이 가장 유리할지 확률을 따져볼 수 있잖아.”
“음.”
“그리고 우린 잡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어. 다쳐가면서, 치명상을 입어가면서 잡아봤자 아무 소용없으니까.”
파비안은 오는 길에 딴 과일을 손에서 굴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
별하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나무 위의 앵무새를 올려다보며 옆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두두 놈보다는…….”
파비안이 과일을 반으로 쪼개 한쪽을 내밀었다.
“그놈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을 거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기에 그저 신화 속의 영물일 뿐이지. 혈혈단신으로 그것과 오롯이 마주하기 전까지는.”
“…….”
별하는 받아 든 과일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빈틈이 생기기를 기회만 엿보고 있던 사념들이 성급하게 들러붙었다. 대개가 좋지 않은 결말에 관한 것들이었다. 별하는 눈을 들어 앞을 내다보았다. 수풀들 사이로 솟아오른 산 중턱을 응시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단전에까지 끌어모은 호흡을 차분히 길게 내뱉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해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 나뭇가지에 앉은 앵무새에게 턱짓했다.
“블루칩.”
파비안과 앵무새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블루칩?”
별하는 겸연쩍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웃어 보였다.
“으응, 블루칩. 여기서 가장 안전한 녀석이잖아. 새파랗기도 하고.”
“음.”
“계속 앵무새라고 부르기 뭐해서 말이야. 당분간은 이렇게 함께 다닐 거 같은데, 이름이 있는 편이 좋을 거 같아서. 많이 이상한가?”
앵무새가 곧장 날아와 별하의 어깨에 앉았다. 그가 과일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부리를 들이밀어 할짝거렸다. 이따금 별하와 눈을 맞추거나 작은 머리통을 요리조리 까딱거리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정녕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 앵무새가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 만큼 사랑받는 애완조의 요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블루칩은 이름을 부여받아 기분이 더 좋아진 듯 화려한 날개를 번갈아 펼쳐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파비안은 제 손에 든 과일을 다시 쪼개 하나를 별하에게 건넸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만큼 이상한 게 있을까?”
별하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건 그렇지. 그게 가장 이상하지.”
“녀석에게 딱 맞는 이름이야.”
“그래? 다행이다. 암컷인지 수컷인지 몰라서 나름 꽤 고민한 거거든.”
새콤달콤한 과즙이 듬뿍 담긴 과육을 한입에 먹어 없앤 파비안이 단언했다.
“암컷이야, 별하.”
별하는 베어 문 과일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컷에 좀 더 가깝지 않나?”
“으음. 암컷일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은데.”
“너 새 키워본 적 없지?”
“……어깨 너머로 감상하는 정도로만. 별하는?”
“……실은 나도 키워본 적은 없지만, 느낌이 딱 수컷이잖아?”
“글쎄.”
그다지 믿지 못하는 파비안만큼 별하 역시 수긍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돌연 화제의 중심이 된 블루칩은 금세 끝내버린 과일 껍질을 갉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블루칩의 삐죽한 꽁무니로 향했지만 서로의 작은 꿈을 위해 그 이상의 호기심은 갖지 않았다. 파비안은 먼저 그늘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진실은 차차 밝혀지겠지. 해가 지기 전에 이 주변을 좀 더 확인해야 하니 이만 움직이도록 해.”
“그래.”
별하는 과일 껍질을 뒤쪽으로 버리며 그를 따라나섰다. 과즙에 부리가 흥건히 젖은 블루칩은 과일 반쪽을 혼자 해치우고도 부족했는지 별하가 버린 것까지 쫓아 수풀로 들어갔다.
“블루칩. 좀 있다가 또 따줄 테니 어서 와.”
나무 밑동 주변으로 어지럽게 자라난 수풀이 블루칩의 등쌀에 훤히 파헤쳐졌다. 별하는 먼저 가려다가 혹여 수풀에서 뱀과 비슷한 무엇이라도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돼 선뜻 돌아서지 못했다.
“어이.”
수풀이 거칠게 흔들렸다. 안쪽으로 굴러간 과일 껍질을 찾는 듯 푸닥거리던 녀석이 대뜸 옆쪽의 이끼에 뒤덮인 바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빈 과일 껍질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우승 트로피처럼 그것을 흔들어대는 짐승을 보며 별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갈게.”
어이이―! 미치인―! 블루칩이 서둘러 발돋움을 해 날아왔다. 그 때 바위를 뒤덮은 이끼와 주변의 갈잎들이 함께 무너져내렸다.
“……?”
별하는 평소처럼 어깨가 묵직해졌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의 이목은 이제 더 블루칩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블루칩이 밟고 있던 검회색의 동그란 바위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창끝을 세워 바위를 덮은 퇴적물을 슬쩍 밀어냈다. 창끝이 바위의 표면에 부딪혀 서걱거렸다.
“…….”
퇴적물이 떨어져 나가며 동그란 바위의 형체가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별하는 주춤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설마, 하던 불온감이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이었다.
손에 쥔 창의 끝부분이 향한 곳에 바위는 없었다. 검회색의 동그란 것은 사실 바위 같은 게 아니었다. 바로 송장이었다. 흡사 미라의 형태를 한 그것은 생명 활동을 멈춘 지 수십 년은 지난 듯한 인간의 시체였다.
“빌어먹을.”
멀찍이서 별하를 기다리던 파비안이 좋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체야.”
“시체?”
“사람 시체.”
파비안은 별하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수십 년간 흙 속에 파묻혀 있던 검은 비닐처럼 시체의 안면 피부가 기형적으로 구겨져 있었다. 늘어진 눈꺼풀은 광대에 붙어 있었고 코끝은 뭉그러져 이전의 형태를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구멍이 뚫린 듯 크게 벌어진 구강은 입술이란 부위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밋밋했다.
그 시커먼 안쪽 깊은 곳까지 가득 들어찬 이끼 속에 누르스름한 조각 하나가 우뚝 서 있었는데 치아였다. 턱관절이 빠져 있었지만 양쪽 귀는 온전한 형태로 붙어 있었고 귓불의 주름까지 선명했다.
사방이 탁 트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진공 상태에서 세월을 견딘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은 모양새가 몹시 기묘했다.
파비안은 별하에게서 창을 빌려와 시체의 턱 아래쪽을 뒤덮은 이끼와 지저분한 퇴적물들을 훑어내렸다. 별하는 굳은 얼굴로 고요하기 그지없는 사위를 경계했다.
“조심해, 파비안.”
“역시 원주민이로군.”
파비안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체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무너진 안면보다 좀 더 나은 상태의 가슴팍에는 여러 가지 염료를 사용한 그림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부락에서 본 원주민들과 같은 모양의 하의만 입고 있었는데 작지 않은 골격과 차림새로 봐서는 시체 역시도 알파였던 것 같았다. 시체는 괴로움과 고통에 잠식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손도 발도 똑바로 붙어 있었다. 생명을 앗아갈 만큼의 외상은 찾을 수 없었다.
“어째서 죽은 거지? 병이라도 걸렸던 건가?”
별하 역시 의아함을 느끼듯 물었다. 파비안은 정좌한 시체의 뒤편으로 이동하며 답했다.
“목숨이 끊어지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야.”
창의 날로 높다란 수풀을 베어낸 뒤 시체의 뒷면에 붙은 이끼를 완전히 긁어냈다. 서걱서걱― 소름 끼치는 마찰음 뒤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시체의 뒷면이 곧 세상 밖으로 훤히 드러났다.
066.
구부정한 척추가 도드라진 시체의 등은 안면 피부 조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시커멓게 썩은 그대로 바위처럼 굳어 있었는데 역시나 등허리 부근에 외상이 나 있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날 같은 것에 찢긴 열상과 절상이었다. 작은 크기가 아니었고 앉은 자세를 어떻게 유지했는지 의아할 만큼의 치명상이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큰 상처들은 규칙적인 배열로 길게 나 있었는데 안쪽의 열상이 가장 깊었다. 마치 거대한 회색곰이나 성체의 수컷 호랑이에게라도 공격을 당한 듯한 모양이었다.
“…….”
“…….”
별하와 파비안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듯 말이 없었다. 전용 소파에 앉은 블루칩만이 과일 껍질을 흔들어대며 부산하게 놀고 있었다.
별하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독백하듯 물었다.
“‘그것’에 당한 걸까?”
파비안은 시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치명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짐승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겠지.”
“…….”
별하는 고개를 들어 사위를 돌아보았다. 햇빛이 비쳐드는 원시림은 무척 고요했다. 간헐적으로 바람결이 희미하게 느껴질 뿐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알람시계처럼 멀리서 울리던 새소리도 언제부턴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음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순간 오한을 느끼고 뒤를 번득 돌아보았다. 활엽과 침엽이 묘하게 뒤섞인 밀림 속에서 움직임을 지닌 물체는 이쪽의 셋뿐이었다. 별하는 불현듯 끼쳐 든 불안감에 전신의 오감을 곤두세웠다.
파비안은 시체의 또 다른 특이점을 찾아 그를 뒤적이며 차분히 덧붙여 말했다.
“치명상을 입게 된 현장이 이곳은 아닐 거야.”
“뭐? 그렇게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일 테지만…….”
파비안은 말끝을 흐렸다. 별하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말은, 저 원주민이 상처를 입은 상태로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뜻이야?”
“이 녀석은 하체에 비해 상체가 발달되어 있어. 특별히 전완근과 회전근, 견갑골 둘레, 대퇴부의 두드러진 모양새로 봐서는 창술에 능한 인재였을 거다. 혹은 투포환 쪽의. 그것들은 적지 않은 흔적들을 남기기도 하지.”
“…….”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해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는 힘들어.”
파비안은 주변을 돌아보며 건조하게 읊조렸다.
“주위 지물이 너무 깨끗해.”
“저 정도 상처라면 꼬리뼈든, 골반뼈든 부러졌을지도 몰라. 나도 의학적 지식은 별로 없지만 저런 상처를 입고 보행은 거의 불가능해. 상반신, 하반신이 분리된 로봇이 아닌 이상.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쓰러졌을걸?”
파비안은 확신에 찬 별하의 말에 고개를 까딱이며 긍정의 뜻을 표했다.
“잘 짚었어, 별하. 이 녀석은 상처를 입은 즉시 과다출혈로 빈사 상태였을 거야. 바로 코앞에서 사신을 마주했겠지.”
“……?”
그는 앉은 몸을 세워 일어났다. 굳은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별하에게 창을 건네며 자문하듯 입을 열었다.
“만약 스스로 걸은 게 아니라면?”
별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파비안이 건네는 창을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어금니를 꾹 물었다.
“그건 무슨, 경우를 말하는 거야?”
“말 그대로. 다른 존재에 의해 옮겨진 것이라면?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든, 사후에든.”
“…….”
“물론 가정일 뿐이지만.”
별하와 파비안의 눈길이 스쳤다. 별하는 뒤늦게 창을 건네받으며 짧게 실소했다.
“아무리 이런 곳이라고는 해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런 무시무시한 발톱을 가진 녀석에게 사고하는 머리가 있다고? 애초에 왜? 어째서 여기에다 옮긴 건데? 잡아먹지 않고?”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나오는 의문들에 파비안은 단 한 마디로 답했다.
“길목.”
별하의 어두운 얼굴에 형체를 갖지 못한 의문들이 점점 더 쌓여갔다.
“길목?”
“뒤돌아봐.”
그는 파비안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질러 온 숲은 별다른 것 없이 호젓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보드라운 땅, 짙푸른 녹음뿐이었다. 파비안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길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미 여러 차례 지나다닌 흔적이 남은 곳을 무의식적으로 찾아낸 것 같아. 별하 너도, 나도.”
교목과 관목을 교묘히 비켜 간 경로에는 확실히 수풀의 높이가 낮았고 덩굴도 자라나 있지 않았다.
“원주민들의 이동 경로겠지.”
별하는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의문들이 남아 있었다. 아직 추정하는 정도였으나, ‘그것’의 실체와 관련된 진실에 차츰 다가서고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다. 파비안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꾸밈없이 드러냈다.
“일부러 이곳에 놔둔 건 아닐까. 이 녀석을 시체로 만든 ‘그것’이.”
“……어째서?”
“이곳에 오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별하는 입을 꾹 다물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파비안의 생각과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기색이었다.
빈 과일 껍질을 실컷 가지고 논 블루칩은 그것을 버리고 이제 제 깃털을 단장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날개를 푸닥거리는 작은 기척이 주위의 정적을 깨트렸다.
파비안은 말을 잃은 별하의 머리칼을 스치듯 흩뜨리며 가벼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