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26)화 (26/49)

“들어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좋아.”

파비안이 고개를 숙여 풍성한 금발을 밀고 들어왔다. 머리가 들어오고 살짝 구부린 어깨를 밀어 넣으려는 그 때 입구에서 툭 걸렸다. 이곳저곳에 자라난 버섯들을 정리하던 별하가 돌아보았다.

“왜 그래?”

“…….”

파비안은 양쪽 어깨를 좀 더 구부려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툭― 그래도 들어가지 않자 어깨를 다각도로 움직여 진입을 시도했다. 툭― 툭― 재차 힘을 가해 시도하자 나무기둥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일었다. 앵무새가 졸다 말고 날개를 펼쳐 푸덕거렸다.

“뭐, 야?”

“…….”

파비안은 구멍 앞에서 멀거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별하 역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깨 때문이야?”

“부숴도 될까?”

파비안은 허락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나무기둥을 파헤칠 듯했다. 별하는 그의 너른 어깨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침울해진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야?”

“…….”

파비안은 몹시 좋지 못한 심기를 내뿜으며 좁은 입구를 양쪽으로 잡았다. 바깥 방향으로 움켜잡아 그대로 부서뜨릴 듯 악력을 가하자 금세 나무기둥에 빠지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빠비아안―! 빠이안! 어이―! 앵무새가 질색하며 울어댔다.

그는 한숨을 불어내며 손에 실은 힘을 풀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숨기려 눈길을 내리며 말했다.

“난 아래서 잘게. 별하는 거기서 잘 거지……? 잘래?”

조심스러운 물음에 별하는 곧장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

파비안은 이만 내려가 보겠다는 눈길을 보내곤 나무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별하는 공기 중에 실린 그의 달콤한 체향을 들이켜며 혀를 쯧, 찼다.

“귀여워.”

얼른 뒤따라 나가려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앵무새와 눈이 마주쳤다.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찾아줘서 고맙다. 수고스럽겠지만 다음에는 더 넓은 곳으로 부탁해.”

그는 동그란 눈을 끔뻑거리는 생물을 뒤로 하고 간만의 아늑한 둥지를 나섰다. 올라온 대로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가다 아래서 모닥불을 피우는 이와 눈길이 맞닿았다. 파비안은 손을 내밀어 별하가 안전히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왔다.

“어두워서 발목 접질릴 수 있어.”

“응.”

힘들이지 않고 땅을 밟은 별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다 문득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내가 불 피우려고 했는데 한 발 늦었네.”

금방 피어난 불길이 어둠을 밝혔다. 파비안 역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표정한 얼굴에 환한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 던져둔 것을 별하에게 내밀었다. 바나나 송이였다.

별하는 반색하며 받아들었다.

“어디서 난 거야?”

파비안은 나무 뒤편으로 턱짓했다.

“뒤편에 바나나 나무 군락이 있어.”

“그래? 명당이었구나, 여기. 저 녀석 칭찬해 줘야겠는걸.”

“올 때 바나나.”

“어?”

“늦었지만.”

별하는 뒤늦게 떠오른 듯 웃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파비안은 당연하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확신과 신뢰감으로 가득 찬 눈빛에 별하는 머쓱하게 입술을 씹으며 모닥불 곁으로 다가갔다.

따뜻한 불빛이 그득하게 비추는 자리에 앉아 파비안과 고즈넉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무른 과육 사이의 씨들을 하나하나 씹어먹으며 절벽에서 챙겨온 패션후르츠로 목을 축였다. 앵무새는 한잠이 든 듯 나오지 않았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캄캄한 숲을 날아다녔다.

적당히 배를 채운 별하는 나무기둥에 등을 기대고 새삼 꿈만 같았던 하루를 되짚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죽을 뻔했던 아찔한 순간도 그랬지만 저런 위험한 지형지물이 언제 또 예기치 않게 나타날는지 걱정스러움이 더 컸다.

“여긴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곳일까?”

062.

파비안은 돌칼의 날을 들여다보던 눈을 들어 올려 불길을 응시했다. 물음에 대한 답을 마땅히 찾지 못한 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야 상념에서 느직이 빠져나와 굳게 닫힌 입술을 열었다.

“예상보다 면적이 훨씬 더 크다는 것밖에는.”

이동이 제한된 현재 위치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별하는 밤하늘도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밀림을 빙 돌아보았다.

“이런 큰 섬이 어떻게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적도 부근에다 화산까지 있는데.”

“음.”

“애초에 섬이 맞긴 한 걸까?”

“섬은 확실해. 식인 문화는 특수한 공간에 격리된 집단에서 이따금 나타나는 현상이야. 육지에서는 이제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옛 품종의 과일도 그렇고.”

파비안은 씨가 가득 박힌 바나나를 내려다보았다. 별하는 그와 관련해 일절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해맑은 원주민들의 행태가 더 소름 끼쳐 등골이 오싹거렸다. 파비안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별하, 네가 전투기를 목격한 그 이후로는 상공을 지나는 무엇도 없었어. 해상 역시 보나 마나.”

“…….”

“저들이 어떻게 이곳에 터를 잡게 됐는지 겨우 유추하는 정도지만, 터를 잡은 날 이래로 지금까지 분명 단 한 번도 외부인을 만나 보지 못했을 거다. 아마 우리가 처음일 테지. 안타깝지만 완벽하게 고립된 곳이라는 뜻이기도 해.”

별하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외면해 왔던 사실과 돌연히 맞닥뜨리면서 경미한 공황증상을 겪는 듯했다.

“…….”

파비안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벗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문명이 닿지 않는 섬에 온전히 갇혀버린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갇힌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지의 존재에게서 발톱을 구하지 못한다면 이곳 원주민들의 피와 살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도 다른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선취해야만 했다.

별하는 체증처럼 가슴 안쪽이 답답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고 오직 한 가지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숨이 막혔다.

크루즈에 탑승한 그날부터 시작된 고난이 갈수록 점점 더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에 부딪힐지, 그것을 멀쩡하게 견뎌낼 수 있을지 그는 자신하지 못했다.

신체의 아픔은 어떻게든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동료를, 파비안을 놓치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할 것만 같았다. 만약 더 좋지 않은 악운으로 그를 잃게 된다면…….

별하는 말수를 잃고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침울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파비안은 그의 기운을 북돋우려는 듯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회의적이지만은 않아.”

“……?”

“이제 거의 화산에 근접했어. 족장이 말한 ‘그것’의 서식지로 추정하는데 머지않아 만날 수 있겠지.”

“머지않아…….”

“곧 끝날 거야.”

파비안의 손에 들린 돌칼이 새빨간 불빛에 번들거렸다. 별하는 고개를 들어 옆 사람을 돌아보았다.

“괜찮을까? 난 ‘그것’의 정체를 아직 짐작도 못 하겠어.”

파비안 역시도 ‘그것’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안을 느끼는 기색이나 두려워하는 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알파의 전투적인 호승심에 불이 붙은 듯 두 눈을 번득였다.

“누군가 잡은 전례가 있다면 이쪽도 못 할 게 없어.”

부드러운 저음에서 알 수 없는 전의가 느껴졌다. 별하는 두 무릎을 세워 앉으며 제 검은 발톱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거, 발톱 가지고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우리 풀어줄까? ……해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파비안의 엷은 눈동자가 별하의 옆으로 향했다. 벌레 울음소리가 나직이 울리는 밤 숲을 잠시 물끄러미 내다보다 곧 눈길을 돌렸다. 모닥불에 차츰차츰 먹혀드는 장작 위로 새것을 올려 불길을 더 크게 키우며 답했다.

“그렇게 될 거야.”

모닥불을 가만히 응시하던 별하는 슬쩍 눈을 굴려 파비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좌한 자세로 묵묵히 돌칼을 들여다보는 그는 어렴풋한 음영에 잠겨 있었다. 보드라운 깃털 같은 속눈썹의 그림자가 우뚝한 콧등에 드리워져 있었다. 굳게 닫힌 입술은 유독 불그스름했고 유려한 턱과 목덜미, 너른 어깨는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크고 곧은 손가락이 돌칼을 쓸어 만질 때마다 흰 피부에 난 상처들이 그림처럼 따라 움직였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금발이 몹시 반짝거렸다.

이런 와중에도 미감을 느끼게 하는 잘생긴 외모도 외모였지만 주변의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언제 어느 때나 냉철함을 유지하는 파비안의 태도에 별하는 새삼 존경심을 느꼈다. 그는 제 발톱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알파는 따로 수업이라도 받는 건가?”

파비안이 이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자신감 수업. 별하는 대답하려다가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서.”

“…….”

파비안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근처의 풀을 뜯으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딴청을 부리는 별하를 응시하다 이내 손을 멈추고 물어왔다.

“그런데 별하, 옆에 있는 건 뭐지?”

“옆?”

별하는 반사적으로 그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시커먼 무언가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뭐, 뭐야?!”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별하가 먹다 남긴 바나나를 손에 꼭 쥐고 먹던 원숭이가 덩달아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회갈색 털로 뒤덮인 원숭이는 크지 않았다. 소형 애완견 크기로 까만 눈망울은 소처럼 커다랬고 기다란 꼬리에는 흑백의 줄무늬가 나 있었다.

원숭이는 작고 검은 두 손으로 바나나를 꼭 쥐고서 별하와 파비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끼이이―

별하는 그 자리에 버석 굳은 채로 원숭이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거? 언제부터 와 있던 거야??”

파비안은 별하의 그런 반응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정말 모르고 있었냐는 듯이.

“좀 됐어.”

“빌어먹을.”

원숭이는 별하의 좋지 않은 반응에 이만 돌아가려는 듯 남은 바나나까지 낚아채 품에 끌어안았다. 별하는 작은 원숭이가 공격적인 종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그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때였다. 나무 위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일었다.

빠비―

그늘진 나뭇가지 위에서 또 다른 원숭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새파란 뭔가를 품에 꼭 안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앵무새였다. 한 녀석은 발버둥 치는 앵무새의 부리를 손으로 꽉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녀석은 도망치지 못하게 날개를 꽉 틀어잡고 있었다.

아늑한 둥지에서 자다 말고 봉변을 당한 앵무새는 잔뜩 질겁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별하가 기함하며 소리쳤다.

“미친! 당장 내려놔―!”

바닥에 꽂아둔 창을 손에 쥐고 날리려는데 그보다 먼저 뒤에서 둥그런 뭔가가 휙 날아갔다. 퍽― 주먹만 한 돌멩이에 머리통을 맞은 원숭이가 끼이끼이 죽는 소리를 냈다. 덩달아 놀란 원숭이들이 앵무새를 내던지고 잽싸게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빠비아안! 빠비안! 어이이! 미친―!

놀란 앵무새는 날개를 푸닥거리며 황급히 별하에게로 날아왔다. 얼른 내민 어깨에 내려앉아 작은 몸을 달달 떨었다.

별하는 앵무새의 헝클어진 깃털을 어서 정리해 주며 사위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혹 다시 덮쳐드는 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멀리 가버린 듯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파비안을 돌아보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저런 원숭이가 새도 잡아먹어?”

손에 든 돌멩이를 내려놓은 파비안은 원숭이들이 사라진 방향에서 느릿하게 눈길을 뗐다.

“작은 짐승을 먹기는 하는데. 제 덩치와 비슷한 녀석을 노리는 건 나도 처음 보는군.”

별하는 얕은 숨을 길게 불어내며 제 목덜미에 달라붙은 앵무새를 쓰다듬었다.

“오늘 밤엔 위로 올라가지 마. 여기서 같이 자자.”

앵무새는 말귀를 알아먹은 것처럼 작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별하는 앵무새의 작은 몸을 보듬으며 꽁지깃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주었다.

“다시 못 오게 지켜줄게.”

그를 지켜보던 파비안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로.”

별하는 저항 없이 그가 이끄는 곳으로 가 앉았다. 파비안의 따뜻한 체온과 체향을 등으로 느끼며 앵무새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다시금 손봤다. 삐뚤어진 부목을 똑바로 세우고 붕대를 새로 묶는데 발끝에서 미약한 통증을 느꼈다.

별하의 멍든 발톱을 발견한 파비안이 그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건 언제 이렇게 됐지?”

“아,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어디 부딪쳤나 봐. 괜찮아, 안 아파.”

“…….”

“안 빠진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랬으면 걷기 힘들었을 텐데.”

파비안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길이 닿지 않는 근처 수풀로 들어가더니 별하가 의문을 가지기 전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대로라면 빠질 수도 있어.”

그는 별하의 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려 검게 피가 맺힌 엄지발톱을 들여다보았다.

063.

파비안은 수풀에서 뜯어 온 너른 나뭇잎으로 별하의 엄지발가락을 차곡차곡 감쌌다. 길쭉하고 질긴 나뭇잎을 붕대 대용으로 사용해, 그것을 여러 번 감아 고정했다.

쉽게 풀리지 않도록 꼼꼼하게 드레싱하는 이를 별하는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겸연쩍은 듯 깜빡이던 눈길이 문득 한 지점으로 향했다. 비스듬히 기울인 파비안의 턱 아래쪽에서 작게 긁힌 생채기를 발견했다. 딱지가 앉은 생채기 주변이 아직 발그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별하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그것을 혀로 핥았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에게 애정을 쏟듯 정성을 다해 혀를 움직였다.

“…….”

파비안은 느릿하게 눈을 들어 전방의 숲을 내다보았다. 별하의 자체 소독이 끝날 때까지 그 상태로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뒤에 간지러운 감촉이 떨어져 나갈 때서야 눈길을 내리고 다른 상처가 또 없는지 그의 발을 살폈다.

같은 남자지만 저보다 눈에 띄게 작은 발을 손에 쥐고 도드라진 복사뼈의 위쪽까지 빈틈없이 확인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연하게 살이 빠진 별하의 청바지가 헐렁했다.

“……다른 곳은?”

다른 곳은 괜찮으냐고 묻고 있었다. 별하는 대답 없이 파비안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 딱지가 앉지 않은 손등과 손가락, 손바닥의 상처들을 내려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우리나라엔 약초로 만든 약재가 꽤 발달해 있어. 질환이나 상처에 효능이 있는 약용식물 같은 거. 종류도 참 많더라.”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파비안의 상처 입은 손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렸을 때 몸이 좀 약했었는데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약용차 마시고 감기랑 아토피 이겨냈었거든. 그때 간단한 종류라도 미리 알아놨더라면 좋았을 텐데.”

“…….”

“그랬다면 지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을 텐데.”

파비안은 앵무새를 꼭 안고서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별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지런한 검은 속눈썹과 꾹 다문 입술을 스쳐지나 목이 늘어진 티셔츠 아래 옴폭하게 파인 쇄골을 눈으로 쓸었다. 별하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자연스럽게 눈길이 맞닿았다. 그는 검은 머리칼 아래 숨은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다.

“나도 치즈는 만들 줄 몰라.”

“치, 즈……?”

파비안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고향 특산품이거든.”

“……아.”

뒤늦게 이해한 별하의 입가에도 어렴풋한 미소가 스쳤다. 그의 품 안에서 금세 잠이 든 앵무새는 희미하게 코를 골았다. 작은 생물에게도 오늘 하루는 꽤나 길었던 것 같았다. 별하는 파비안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눈을 떼고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느릿하지만 강하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얕은 숨을 불어냈다.

“내일은 좀 더 기운을 올릴 만한 걸 먹자.”

파비안은 별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제 손 안에 쉬이 들어오는 팔을 쓸어내리며 다감하게 되물었다.

“어떤 게 있지? 기운을 올릴 만한 건?”

별하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고기.”

“음. 좀 더 자세하게.”

“작은 동물이 잡기에 수월하겠지? 새는 좀 그러니까 패스. 원숭이들도 뭔가 사람 같아서 꺼림칙해.”

파비안은 나직이 코웃음 소리를 냈다.

“그럼 너구리. 두더지. 사슴. 나무늘보. 코알라.”

“…….”

“족제비. 여우. 퓨마. 재규어. 아르마딜로. 도마뱀. 거북이.”

차근차근 하나하나 나열하는 목소리가 몹시도 나긋했다. 별하는 하품을 하며 무거워진 눈두덩을 문질렀다.

“어떻게 하나도 안 땡길 수가 있을까?”

파비안은 별하의 땀이 밴 정수리와 옆머리에 키스했다. 발그스름하게 열이 오른 귓불에 스치듯 입술을 붙였다.

“구우면 괜찮을 거야.”

문득 어떤 좋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 별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생선은? 어때?”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잡아줄게. 오메가 연맹에서 배운 낚시법이 있는데 약간 부족한 부분을 손봤거든. 바위 밑에서 잠자던 녀석까지 끌려 올라올 때도 있는 거 알아?”

물고기를 잡을 강물을 발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염원하는 것이 결코 실재하지 않을 꿈이라도 해도 이 찰나의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생각과 기분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큰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

별하는 주변에서 기다란 나뭇잎을 뜯어 그것을 이리저리 묶어가며 저만의 낚시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파비안은 별하의 강의를 경청하며 그의 뺨과 이마에 애정 어린 키스를 수없이 남겼다.

“정말 기대되는군.”

눈길이 마주치자 강한 자성에 이끌리듯 입술 점막들이 맞닿았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 여러 번 달라붙었다가 아쉬운 듯 느릿하게 떨어졌다. 별하는 고개를 크게 기울여 제게 키스하는 파비안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낚시법 설명 지겨웠구나?”

불빛을 담은 오드아이는 맞닿은 열기로 금방 촉촉해진 별하의 입술에 붙박여 있었다. 그는 느직이 눈을 들어 모닥불 불빛에 발그스름해진 별하와 얼굴을 맞댔다.

“신기하지. 별하 네가 하는 말은 조금도 지겹지 않아.”

“그래……?”

“그래. 지금까지 들어왔던 어떤 이야기보다 즐거워. 이런 세계가 정말 존재했었나, 의아할 만큼.”

별하는 작게 실소했다.

“낚시 이야기가 엄청 재미있을 정도로 심심한 곳이긴 하지. 또 다른 의미에서는.”

파비안은 웃지 않고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의 크고 작은 움직임과 희미한 호흡, 말을 할 때마다 만들어지는 표정, 그 안에 숨은 기색들까지 가만히 눈에 담았다. 열렬한 눈길에 어쩐지 쑥스러워진 별하는 괜히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그럼 너의 기대에 부응해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게.”

“뭐든.”

“파비안 블랙그레이, 라는 한 알파 남자와 엮이게 된 이야기야.”

“…….”

별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운을 뗐다.

“악운도 그런 악운이 없었지. 제기랄.”

파비안은 결국 눈가를 휘며 웃었다. 매끈한 뺨에 보조개 같은 긴 주름이 파이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맑은 얼굴을 내보였다. 별하는 저도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었다.

“벌써부터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데. 진짜 웃긴 이야기는 이 뒤에 잔뜩 있다고.”

파비안은 새하얀 이를 숨기지 못했다.

“파비안, 쉿. 그만.”

웃음보가 터져버린 듯 이마를 짚고서 큭큭거리는 이를 보며 별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곧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저 역시 이를 활짝 드러냈다.

“망할, 파비안.”

“미안. 미안해, 별하.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줘.”

별하는 멋대로 끌려 올라가는 입술을 씹으며 간신히 이야기를 덧붙여 나갔다.

“그런데 그 알파 녀석이 뜬금없이 우리 어머니를 찾는 게 아니겠어?”

파비안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한잠이 들었다 깬 앵무새가 시끄럽다며 삑삑거렸다. 별하는 어미 새처럼 그를 보듬었다.

“깨워서 미안. 일어난 김에 너도 같이 들어볼래? 하이라이트는 아직이거든.”

뒤섞인 웃음소리 너머로 장작 타는 소리가 나직이 스며들었다. 타닥타닥― 자그마한 모닥불은 달빛도 비집어 들지 못한 캄캄한 어둠 속에서 꿋꿋하게 타올랐다. 언젠가는 이 기나긴 어둠을 뚫고 높은 곳에서 번쩍 떠오를 것처럼.

* * *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는 뙤약볕이 뜨거웠다. 짙푸른 녹음 아래에서도 그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별하는 눈썹 옆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눌러 닦으며 눈앞의 교목을 올려다보았다. 7, 8미터 그 이상인 나무의 윗동으로 도망친 생물체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아깝다. 다 잡은 건데.”

지면에 깊게 꽂힌 창을 뽑느라 눈앞에서 놓친 다람쥐를 찾아 나뭇가지 이곳저곳을 살폈다. 별하의 어깨에 앉아 목을 쭉 빼고 같은 방향을 내다보던 앵무새가 돌연 날개를 펼쳤다. 좌측의 나뭇잎이 무성한 가지로 날아올라서는 한 지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미친―! 미치인―! 별하는 반색하며 작은 돌멩이들을 주워 들었다.

그 주변으로 하나씩 던지자 그늘 속에 숨어 있던 붉은 다람쥐가 후다닥 나무기둥으로 올랐다. 앵무새는 그것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전에 다리를 치켜들어 위협했다. 그에 놀란 다람쥐가 앞발을 놓쳐 지면으로 굴러떨어졌다. 찌익― 별하는 서둘러 나무를 돌아 다람쥐가 떨어진 지점으로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다람쥐는 금방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는 창끝으로 다람쥐의 등을 눌러 가뿐하게 포획했다. 찍찍― 찍찍찍― 붉은 털이 풍성한 다람쥐는 별하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다해 바동거렸다. 나무 위를 유유히 날며 전용 소파로 돌아온 앵무새가 포획한 사냥감을 만족스러운 듯 내려다보았다.

찌익― 찍찍― 별하는 제 손을 물려고 자그마한 이를 드러낸 생물체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

손 안에서 다람쥐의 거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분명 먹으려고 잡은 것이었지만 막상 먹이의 체온을 느끼자 거부감이 들었다. 사실 과일만으로도 허기는 잠재울 수 있었다. 살이 부쩍 빠지기는 했지만 에너지를 소비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어젯밤 물고기를 잡아주기로 파비안에게 약속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당연하게도 강물과 물고기는 찾지 못해서 대신 다람쥐 고기라도 먹여주고 싶었다.

찍찍― 헌데 다람쥐의 겁에 질린 눈망울과 보드라운 뱃살, 따뜻한 체온을 마주하자 그런 다짐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어쩌면 어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갓 태어난 새끼들을 떠올리는 순간 별하는 양심의 가책을 더 견디지 못했다.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어냈다. 다람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손에서 빠져나가 수풀로 달려갔다. 어이이―! 미친―! 앵무새가 부리를 치켜들고 두 발을 굴렀다. 별하는 불만이 가득한 앵무새의 날개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파비안에겐 비밀이야.”

그 때 뒤쪽에서 기척이 일었다.

“별하, 잡았어?”

다정한 저음의 정체는 파비안이었다. 별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아, 놓쳤어. 넌?”

반짝이는 금가루를 흩뿌리듯 환한 분위기를 드리우며 다가오는 그의 손에 축 늘어진 뭔가가 들려 있었다. 붉은빛의 풍성한 털로 뒤덮인 그것은 좀 전에 별하가 놓아준 생물과 같은 종의 다람쥐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대여섯 마리였다.

064.

별하와 앵무새의 눈길이 슬쩍 마주쳤다. 그는 턱을 문지르며 애써 덤덤한 척 물었다.

“여기 이 녀석들 영역인가? 언제 그렇게나 잡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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