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25)화 (25/49)

“별하, 별일 없었어?”

그는 격한 운동이라도 하다 온 듯 숨을 얕게 몰아쉬고 있었다. 손길이 스치는 대로 근사한 형태가 만들어지던 금발은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고 가슴께까지 셔츠 단추가 풀려 있었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속전속결로 임무를 해치운 것 같았다.

별하는 반색하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내려온 거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 넌? 괜찮아?”

파비안의 눈길이 앵무새에게로 향했다가 금방 돌아와 별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확실한 상태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에야 제 뒤에 있는 것들을 끌어와 보여주었다. 이전보다 굵직한 덩굴이었다.

“일단 근방에서 보이는 건 거의 다 뜯어 왔는데 아마 더 필요할 거야. 나중에 한 번 더 다녀올게.”

“응.”

“그럼.”

파비안은 말을 더 걸지 않았다. 아래쪽에서도 얼굴이 보이는 절벽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덩굴들을 한 덩이로 꼬는 작업에 착수했다. 별하는 그에게 물었다.

“내가 도울 건 없어?”

파비안은 이쪽으로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답했다.

“밧줄이 완성되는 대로 끌어 올릴 테니 그때까지 좀 쉬어.”

별하는 제 어깨에 걸터앉은 앵무새를 돌아보았다. 그 너머에 도사리는 어둠과 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냉기가 몹시 선득해 오한이 일었다. 장작불은 쉼 없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암흑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서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야.”

작업에 열중해 있던 파비안이 별하에게 슬쩍 눈길을 던졌다.

“무너질까 봐?”

“그것도 그렇긴 한데, 여기 정말 싱크홀인 건가?”

별하는 제 발밑의 암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좋지 않은 상상에라도 빠진 듯 낯빛이 어두웠다. 파비안은 그의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대답했다.

“화산 활동 중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카르스트 지형처럼 침식 작용으로 생겨났을 테지.”

“…….”

“설마 익룡이라도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별하?”

별하는 실소하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런 게 있을 리가.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분명 휘어진 입술과 가벼운 목소리에는 웃음이 담겨 있었지만 검은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파비안은 손보던 것을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잠시 모습을 감췄다. 별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나타난 파비안의 손에는 불이 붙은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다. 중력에 의해 수직으로 하강하는 횃불이 별하의 눈앞을 휙 지나갔다.

“―!”

파비안도, 별하도, 앵무새도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떨어지는 횃불을 좇아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횃불은 끝없이 추락했다. 파비안의 손보다 큰 불덩이가 순식간에 좁쌀만큼 작아졌다가 이내 소실점이 되어 가뭇없이 사라졌다.

“…….”

“…….”

“…….”

파비안이 싸늘한 정적을 깨트렸다.

“다행히 익룡은 없는 것 같군.”

별하는 마른침을 꼴깍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전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로 더없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 내가 어, 없다고 했잖아.”

그 때 아래쪽에서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기척이 일었다.

“……?”

“뭐, 지?”

찰나로 마주친 눈동자들이 곧장 발밑으로 향했다. 횃불이 빨려 들어간 새카만 암흑의 공간이 눈으로 분간하기 힘들 만큼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둠을 뒤흔드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불안한 기운을 눈치챈 별하가 뒤로 주춤 물러나는 순간, 바로 아래쪽의 옅은 음영을 뚫고 엄청난 수의 검은 새들이 솟아올랐다.

찍―! 찍찍―! 찍―! 찍찍―! 찍찍찍―!

수백 마리가 넘는 박쥐 떼였다. 별하는 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으윽.”

어이―! 어이이―! 놀란 앵무새가 제게로 달려드는 박쥐를 부리로 쪼아댔다. 달아나던 후미의 박쥐들이 앵무새를 적으로 인식하고 합심해서 공격했다. 찍―! 찍찍―! 별하는 얼른 불이 붙은 장작을 들어 휘둘렀다.

“빌어먹을!”

어이이―! 빠비아안―!

파비안이 근처에서 돌을 집어 소란이 이는 곳으로 던졌다. 찌익―! 박쥐 한 마리가 돌멩이에 정통으로 맞아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기세 좋게 싸움을 걸던 박쥐들은 멀어진 선두 무리를 따라 서둘러 밖으로 달아났다.

마지막 한 마리가 절벽을 빠져나가는 순간 요란한 태풍이 지나간 듯 주변이 고요해졌다.

“하아…… 하아…….”

별하는 박쥐 떼에 휩쓸려 헝클어진 상태 그대로 절벽 위를 아연히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군데군데 털이 뜯겨 엉망이 된 앵무새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별하에게 달라붙어 오들오들 떨었다. 파비안은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고 다시 작업을 재계했다.

“조금만 더 견뎌줘. 금방 올려줄게.”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별하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060.

“그걸 복용하면 정말 짝에 대한 열망도, 충동도 누를 수 있는 거야?”

별하는 제 다리 사이에 들어가 앉아 꾸벅꾸벅 조는 생물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파비안은 지금까지 작업한 덩굴 밧줄의 길이를 눈으로 확인하며 담담히 답했다.

“개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다고 해.”

고가의 특수 억제제는 일반인들이 쉬이 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다국적기업이 기술을 독점한 상태였기에 제조 방식부터 유통 과정까지 무척 까다로웠다. 관련 단체에 가입이 되어야 했고 체계적인 관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금력이 필요했다. 서민들을 위한 대체 억제제들도 시중에 판매되고 있긴 하나, 일반 억제제와 가격만 다를 뿐 효능은 똑같았다.

별하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짝에 대한 열망과 충동을 억누를 수 있다면 거의 베타와 다름없었다. 알파의 페로몬, 오메가의 페로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격은 얼마 정도 할까? 달러로.”

별하는 관심 없는 듯 물었다. 각인이나 짝은커녕 절벽에 갇힌 처지였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기에.

파비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해가 저물어 밀림이 어두워질수록 그의 얼굴에 드리운 음영도 한층 깊어졌다. 특수 억제제에 대해 선망하는 별하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흘렸다.

“패키지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야.”

“건강 검진 패스하고 일회용은 5,000달러, 정도 하려나?”

“…….”

“10,000……?”

“…….”

“……그 이상?”

“그 몇 배.”

별하는 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직업을 가져야 그 막대한 금액을 충당할 수 있을지 골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파비안은 혹여 그가 특수 억제제에 대해 맹목적인 기대를 갖지 않도록 덧붙였다.

“분명 효능은 있지만 후유증이 반드시 따라와.”

허공을 맴돌던 별하의 눈길이 위로 향했다.

“후유증?”

절벽 위 모닥불의 불그스름한 불빛이 파비안의 깊은 눈매와 가라앉은 눈동자를 비췄다.

“만성적 우울감과 신경 과민증, 자가 면역 질환, 급성 백혈병, 급성 심장 질환, 3년 이상 복용자들 중에 신장 이식을 받지 않은 자가 없어.”

담담한 저음은 어슴푸레한 어둠을 따라 벼랑 아래로 흘러내렸다. 별하의 목울대가 크게 상하로 움직였다. 그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밧줄을 잇는 파비안을 응시하며 고요히 물었다.

“그럼 파비안 네 어머니도…… 그러, 신 거야?”

파비안의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저와는 어떤 접점도 없는 타인을 떠올리듯 별다른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뒤늦게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그럴 테지.”

별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 같은 특수 억제제에 대한 실망감보다도, 상당한 리스크를 감내하고서라도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속 깊은 사정에 대해 생각했다.

줄곧 이어지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파비안은 딱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심기가 저조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별하와 마찬가지로 어떤 생각에 빠져든 듯 말이 없었다.

“음…….”

별하는 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쩌다 보니 딴 길로 샌 대화를 다시 이곳으로 끌어오기 위해 최대한 가벼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 뭐야?”

파비안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일 뿐 대답이 없었다. 그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 별하는 바람결에 어렴풋이 날리는 금발을 응시하며 구체적인 물음을 던졌다.

“음식이나 영화 취향 같은 거 말이야. 게임은 해? 해본 적 있어?”

파비안은 은연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특별히 즐기는 건 없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별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세우며 턱을 괴었다.

“그래도 그중에서 취향인 게 하나쯤은 있지 않나?”

“글쎄.”

“하다못해 패션 취향은 있겠지. 그래도 명색이 연예인인데.”

“…….”

“정말 나무만 패고 논 거야?”

파비안의 그윽한 눈매가 깊어졌다.

“운동은 좋아해.”

“그럴 거 같더라.”

“어째서?”

“저절로 그런 몸이 되진 않잖아.”

파비안의 몸은 알파 중에서도 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크고 굵은 뼈대와 미끈하게 다져진 근육의 조화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것이 보통의 운동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란 것쯤은 군대를 만기 전역한 별하도 익히 알고 있었다. 파비안 본인만이 자신의 그런 부분에 대해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별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어떤 운동?”

“음.”

“설마 다 좋아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파비안이 가지런한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운동이라면 거의 대부분 좋아하지만 특히 스키, 하키, 스노우보드, 펜싱, 승마, 럭비, 클라이밍을 자주 즐겼어. 취향이라.”

한쪽 눈가로 흘러내린 금발을 무의식적으로 쓸어넘기는 손길이 몹시 우아하면서도 멋이 있었다. 본인에게 그런 의도는 일절 없었을 테지만, 흡사 자신의 훌륭한 외모에 도취된 나르키소스와 닮은 모습이었다. 저주를 받았든 어쨌든, 결국 물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져버린 아름다운 미청년.

크루즈 선상에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와 사람들의 무수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희미한 동요조차 없던, 당연한 듯 행동하던 그의 첫인상을 불쑥 떠올린 별하는 제게만 들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이 알파는 하이 알파로군.”

묵묵히 작업에 임하던 파비안의 눈길이 잠깐 스쳤지만 오가는 말은 없었다.

별하는 저를 둘러싼 안벽의 그림자가 눈에 띄게 짙어진 것을 깨닫고 모닥불을 돌아보았다. 마른 장작을 뜯어먹으며 활활 타오르던 불길의 위세가 어느덧 약해져 있었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장작을 마저 불길 속에 밀어 넣고 주변으로 흩어진 숯을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위쪽으로 물었다.

“갑자기 궁금해서 말이야. 넌 그런 일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목수였다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별하는 손을 멈추고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

방금까지 절벽 끝에 앉아 있던 인영이 보이지 않았다. 곧장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낮에 내려다볼 때보다 더 새카맣게 응어리진 공간은 소리까지 먹혀든 듯 고요했다. 이쪽으로 떨어진 것 같진 않았다. 별하는 서둘러 일어나 기척도 없이 사라진 이를 불렀다.

“파비안?”

한잠이 들었던 앵무새가 놀라 날아올랐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별하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파비안의 대답은 한참이 지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급한 용무가 생겼다면 무슨 말이라도 전하고 갔을 텐데,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의 행방을 별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설마 아나콘다나 정체불명의 맹수가 나타난 게 아닌가 해서 녹음이 드리운 위쪽을 급히 올려다봤지만 그 어떤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뜻 졸릴 만큼 평화로웠다.

“파비안?!”

빠비아안―! 그들의 목소리가 절벽을 지나 어둑한 녹음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가 걱정된 별하는 제 어깨에 앉은 앵무새를 아래로 내렸다. 위로 올려보낼 생각이었다. 상황을 인지하고 날개를 푸닥거리며 거부하는 생물을 위로 날리려는 그 때, 머리 바로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됐어?”

별하는 반대편 절벽에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머리 위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파비안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손에는 덩굴 밧줄을 쥐고.

“별하?”

별하는 눈썹이 찌푸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안 보여서 놀랐잖아.”

파비안은 신경을 쓰게 해 미안하다는 눈길을 전하곤 손에 든 덩굴을 곧장 아래로 내렸다.

“길이가 그리 넉넉하지 않아. 내가 직접 끌어 올릴 테니 잘 잡아.”

“응.”

이내 별하의 눈앞으로 밧줄이 내려왔다.

여러 갈래의 덩굴을 단단히 감은 밧줄은 제법 두꺼웠다. 올라가는 도중에 뜯어질 염려는 일절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단단했다. 덩굴의 외피가 거칠게 정리된 모양으로 봐서 무성한 이파리와 가시들을 제거하느라 더 늦어진 것 같았다.

별하는 급히 주변을 정리하고 밧줄을 손에 잡았다. 묵묵히 내려다보는 파비안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올라가면 돼?”

그가 엄중하게 지시했다.

“밧줄을 허리에 감아.”

별하는 시키는 대로 밧줄을 제 허리에 감아 힘껏 묶었다. 그를 확인한 파비안은 조금도 다정하지 않은, 상냥하지 않은 근엄한 저음으로 뇌까렸다.

“셋을 세면 끌어 올릴 거다. 잠깐이면 되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마.”

별하는 어금니를 굳게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안은 서서히 물러나 벼랑의 경계 너머로 사라졌다. 곧 밧줄이 팽팽해지며 나직한 저음이 숫자를 차근차근 짚었다. 셋, 둘, 하나―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별하의 발이 디딤판에서 떨어졌다.

“읏.”

별하는 급히 밧줄을 움켜잡았다. 허공에 뜬 몸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순간 강한 위력이 밧줄을 통해 전해졌다. 미끄러지듯 단숨에 위로 끌려 올라간 별하는 제 발밑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채 다 꺼지지 않은 모닥불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아…….”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으면 바로 지상이었다. 당겨지던 밧줄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별하는 고지를 눈앞에 두고 고민했다. 뛰어서 올라갈까? 충분히 가능한 거리였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움직일지 고민하는데 다행히 밧줄이 다시금 움직였다. 파비안이 바로 위에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든 어둠 속에서 눈길이 얽혀들었다.

“조금만 더, 견뎌줘.”

“파비안…….”

“잘하고 있어, 별하.”

별하는 얕게 호흡하며 입술을 곱씹었다. 지금 누가 해야 할 말인데.

성인 남자를 쭉쭉 끌어 올리는 위력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했다. 별하는 곧 절벽의 깎아지른 경계선을 훌쩍 넘어섰다. 길게 내미는 파비안의 손을 움켜잡고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곧바로 앞사람을 와락 안았다.

내내 별하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앵무새가 소란을 피해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파비안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뒤늦게 손에서 밧줄을 내려놓고 별하를 마주 안았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온 힘을 다해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제 두 번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거칠게 오르내리던 파비안의 숨결이 차츰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별하는 제 뒷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 창백하게 경직된 얼굴을 올려다보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미안. 놀랐지?”

“…….”

“나도 황천길 가는 줄 알았어. 이번에는 진짜.”

파비안은 말이 없었다. 제 품에 들어온 이를 두 눈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시 체온을 맞댄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 듯 별하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 넘겨주고 흙이 묻은 턱을 살살 문질러 닦아주었다. 이마에 작게 긁힌 생채기를 발견하고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별하는 그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괜찮아. 파비안.”

“…….”

“괜찮아.”

속삭이며 파비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다 여기저기 험하게 긁힌 상처들을 발견했다.

깊고 얕은 상처들이 손등과 손바닥, 팔꿈치까지 뜨문뜨문 이어져 있었는데 덩굴의 가시를 제거해 나가며 밧줄을 만들 때 생긴 것 같았다. 또한 엄지손톱 밑에는 핏물이 맺혀 있었고 손바닥의 상처에서는 진물이 묻어나는 상태였다. 이전과 다른 형태의 상흔은 별하를 급히 끌어 올릴 때 생긴 것이었다.

희고 깨끗한 피부를 뒤덮은 상처들을 뒤늦게 발견한 별하는 탄식했다. 어떤 내색도 하지 않는 파비안을 올려다보며 굳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뭇잎으로라도 감싼 후에 끌어 올렸어야지, 바보야.”

파비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별하에게 잡힌 손을 거둬들였다.

“이런 건 금방 나아.”

061.

깊은 상처가 아니라고 해도 환부의 위치에 따라 고생하는 정도가 다 달랐다. 밖으로 노출된 부위의 환부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더 까다로운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나 손이라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갈 수 있었다. 의식주를 직접 발로 뛰어 해결해야 하는 이곳에서라면 더욱이나 그랬다.

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비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책망이 묻어 있었다.

“나 때문에.”

파비안은 저를 향한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촉촉한 눈동자가 멀리서 날아든 불빛들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과 닮은 그것을 잠잠히 바라보다 말했다.

“여러 악연이 맞닿았을 때 재난은 발생하지. 자책하지 마. 별하, 네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축복이니까.”

“축…….”

그는 모르는 단어를 알려주듯 또박또박하게 발음했다.

“축복.”

“…….”

별하는 제 허리에 감긴 밧줄을 풀어주는 파비안에게서 슬쩍 눈길을 내렸다. 진한 섹스를 나누는 사이거나 어쨌거나, 이런 다정하면서도 낯간지러운 표현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파비안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항체가 없는 한국인 특유의 예민한 감성이 발동해 오싹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파비안은 가까이 닿은 별하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제 끝났어.”

“응…….”

밧줄이 떨어져 나가고 완전하게 자유로워진 별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절벽은 위에서 언뜻 보아서는 존재의 유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폭이 좁고 길이가 길지 않아 갈잎까지 더한다면 그야말로 덫의 모습이었다. 싱크홀 같은 구덩이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것처럼 고요했지만 주둥이를 열어놓은 채로 다음에 걸려들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악운만으로 끝나지 않겠지.”

파비안은 챙겨 온 창을 별하에게 건넸다. 머리 위 가지에 앉아 깃털을 분주히 정리하는 앵무새를 힐긋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저 녀석에게 관심을 끌리지만 않으면 돼. 나만 보고 따라와, 별하.”

앵무새는 단장을 하다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 별하는 건네받은 창을 꽉 움켜쥐었다. 예기치 못한 고난을 안겨다 준 장소에서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자. 한시라도 빨리.”

앵무새가 날아와 별하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파비안은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차오른 밀림을 앞장서 헤쳐나갔다.

점차 짙어진 음영에 가시거리는 극도로 한정적이었다. 1, 2미터 내외의 거리만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력이 좋은 파비안 역시 더 이상의 전진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그는 뒤처지지 않고 바짝 따라붙은 뒷사람을 돌아보며 적당히 쉴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별하는 그제야 가쁜 숨을 나직이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장작불 꺼버리고 온 거 아쉽네. 밤눈 밝은 편인데 하나도 안 보여.”

파비안은 길을 막는 파초를 돌칼로 가뿐히 베어내며 말했다.

“금방 켜줄게.”

“슬슬 라이터 기름 아껴야지. 내가 켤게.”

신뢰가 듬뿍 담긴 시선이 날아왔다.

“부탁할게.”

별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은 좀 걸리지만 마른 가지만 있다면.”

“학교에서 배운 건가? 군대?”

“오메가 연맹. 교육 이수할 때 상도 받았어. 몇 번.”

“우등생이었군.”

“열심히 하긴 했지. 너랑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그들 덕분이야. 학교에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거긴, 편하게 공부하기만은 힘든 곳이니까.”

“……쓸모없는 집단인 줄로만 알았는데 좋은 영향력도 끼치고 있었네.”

별하는 어렴풋이 웃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쭉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음.”

파비안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하는 그를 뒤따르며 나중에 쓸 장작거리와 저녁으로 먹을 과일나무를 찾아 살폈다. 전용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던 앵무새는 자리가 불편했던지 대뜸 푸덕거리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찾았나?”

별하는 실눈을 뜨고 앵무새가 사라진 방향을 내다보았다. 파비안이 별하와 같은 곳을 응시하며 물었다.

“쉴 만한 곳?”

“응.”

“…….”

그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 기색을 비쳤지만 별말 없이 앵무새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시나 엄청난 너비의 나무 위에 안착해 삐삐삑 노래를 부르는 앵무새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저를 쫓아온 별하와 파비안을 보며 새파란 날개를 들썩거리다가 기둥 너머로 사라졌다.

“설마 또 0.1평은 아니겠지.”

별하는 먼저 앵무새의 안내를 따라 나무를 탔다. 무성한 나뭇가지를 잡고 두어 칸 올라가자 어둠 속에서도 새파랗게 빛나는 생물체가 제자리걸음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에 둥그런 구멍이 나 있었는데 크기가 제법 컸다.

별하는 기시감을 느꼈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태풍을 견뎌냈었던 그날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너만 믿는다, 앵무새.”

어이― 앵무새는 별하와 눈을 맞춘 후에 어두컴컴한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별하는 나무 아래쪽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파비안은 올라올 생각이 없는 듯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심해.”

“적당해 보이면 부를게.”

구멍 안쪽에서 앵무새가 재촉하듯 삑삑거렸다. 별하는 손으로 정수리를 감싸며 어둑한 공간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상쾌한 공기로 가득 찬 안쪽에는 장애물이 없었다. 좁지 않았고 뻥 뚫려 있었다. 바닥이 약간 울퉁불퉁했지만 이전의 어떤 곳보다 넓었다. 충분히 셋이서 밤을 보낼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그는 조금 젖은 듯한 나무의 안벽을 더듬으며 목소리를 살짝 높여 불렀다.

“파비안. 여기 괜찮은 거 같아.”

동공이 어둠에 적응하자 바깥에서 비쳐드는 빛이 미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앵무새는 이미 오목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별하는 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어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이를 다시금 불렀다.

“파비안.”

“괜찮나?”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일었다.

“……!”

언제 나무를 타고 올라왔는지 파비안이 몸을 낮춰 다가왔다. 별하는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오드아이를 코앞에서 마주하고 놀란 숨을 삼켰다.

알파의 페로몬과 그 기운에 이제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이었다.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갈수록 더 예민해질 뿐이었다. 이렇듯 때때로 끼쳐 드는 오한은 세포 활동이 멎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별하는 특수 억제제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생각하며 파비안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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