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24)화 (24/49)
  • “설마 날 보고 웃은 건가?”

    파비안이 그것을 보았던지 넌지시 물어왔다. 별하는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손에 든 불 막대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우물을 길거나 밭에 퇴비 뿌릴 때 그런 거 썼거든. 느낌은 아주 많이 다른데, 묘하게 잘 어울려서 말이야.”

    파비안은 이해했다는 듯 엷게 미소지었다.

    “그런 거라면 유럽에도 존재해. 용도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

    “대부분 돼지 여물이나 오물통으로 사용됐었지.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애용되고 있을 거야. 아마 30세기가 되어서도.”

    “하긴 사람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은 거의 정해져 있을 테니까. 도구의 느낌은 좀 달라도.”

    “좀 달라도.”

    파비안이 별하의 말끝을 따라서 되뇌자 웃음과 미소가 담긴 눈길들이 여러 차례 교차했다. 별하는 입술을 자근거리며 옆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파비안은 저에게 깊숙이 꽂힌 시선에 엷은 미소를 띤 채로 눈길을 내렸다. 그러다 재빠르게 손을 뻗어 별하의 얼굴을 가리듯이 덮었다.

    “윽.”

    전용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던 앵무새가 날개를 들썩이며 삑삑거렸다. 전방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옆만 보고 걷던 별하는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에 얼굴을 긁힐 뻔한 것을 간신히 피해 갔다. 당사자보다 더 놀란 듯한 파비안이 별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별하, 괜찮아?”

    눈앞의 가지들을 급히 걷어낸 별하는 대답 대신 파비안의 손을 붙잡았다. 핏줄이 튀어나온 커다란 손등에 희미한 생채기가 나 있었는데 핏방울이 맺혀 나왔다. 저 대신 넝쿨 가시에 긁힌 상처였다.

    “난 아무렇지 않아, 파비안.”

    별하는 얼른 제 남방의 안쪽 면으로 피가 맺힌 상처를 꾹 눌렀다. 미안해하는 눈길을 보내자 파비안은 이런 건 하등 문제될 게 없다는 듯 붙잡힌 손을 거둬들였다. 그가 별하의 머리칼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주며 말했다.

    “먼저 길을 만들 테니 뒤에서 올래?”

    별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앞장서는 게 낫지 않을까? 너 과일 들었잖아. 아, 그거 무겁지? 이리 줘. 이제 바꿔 들자.”

    자신이 무거운 창을 짊어지려 손을 뻗었다. 파비안은 호의를 전하는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정도로만 거절했다.

    “전혀 무겁지 않으니까 이쪽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횃불만 조심해. 그리고 앞.”

    앞을 잘 보고 걸으라는 뜻이었다. 확실히 그는 어깨에 짊어진 그것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무거워한다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은 일절 찾을 수 없었다. 단단한 창대가 어렴풋이 휠 정도로 무게가 나가는데도 가뿐하게 들고서 밀림을 헤쳐나갔다.

    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수긍했다. 고집을 부려 과일 주머니들을 건네받는다고 해서 이 상황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기동성만 떨어질 뿐이었다. 서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는 별하도, 파비안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

    “…….”

    그들을 짧은 눈길을 나눈 후 원초의 목적을 위해 다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몹시 우거진 수풀을 가로지르던 그 때였다. 별하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앵무새가 갑자기 발돋움해 날아오르더니 머리 위쪽의 높다란 가지로 올라갔다. 빠비안! 빠비이안―!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며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앵무새는 전에 없이 긴박한 목소리를 내며 삑삑 울어댔다.

    “……?”

    별하는 고개를 뒤로 젖혀 날개를 가만두지 못하는 생물체를 올려다보았다. 멀찍이 앞서나간 파비안이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글쎄, 모르겠어. 갑자기 저러는데?”

    “…….”

    “뭐야? 천적이라도 봤나?”

    뱀이나 맹수를 발견했다기에는 앵무새의 이목이 제 아래쪽의 별하에게로 향해 있었다. 파비안은 혹시 모를 불청객의 난입을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별하는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앵무새를 찾아 옆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어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만 내려와. 놔두고 간―”

    별하는 채 말을 맺지도 못하고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갈잎과 넝쿨들에 파묻힌 지면을 밟는 순간 주변의 지반이 순식간에 우지직 내려앉았다. 허공을 밟고 선 별하는 그만 중심을 잃고 깎아지른 경사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아악―!”

    빠비아안―! 파비안은 손에 든 것을 집어던지고 달려왔다. 덮쳐들듯 달려들어 팔을 힘껏 뻗어 내밀었으나 간발의 차로 별하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찰나로 시선이 얽혀들었다. 별하는 질겁한 눈을 부릅뜨고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파…….”

    허공을 움켜쥔 파비안이 곧바로 반대 손을 뻗었지만 별하는 암흑 속으로 끌려 들어가듯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절벽으로 추락하는 비명이 메아리쳤다.

    “별하―!”

    파비안은 바닥을 기어 길쭉한 구덩이 형태의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스름한 빛도 들지 않는, 더 어떤 비명도 들려오지 않는 새카만 절벽을 망연자실 내려다보았다. 거칠게 쏟아내는 호흡 속에서 공기 중에 남아 있는 단내를 느꼈다.

    “…….”

    그는 머뭇거림 없이 절벽 끝에 발을 붙였다.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비명이 아득하게 메아리치던 절벽은 최소 수십 미터였다. 떨어지면 즉사였다. 성한 뼈는 찾을 수도 없으리라.

    제 손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던 이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하던 검은 눈동자를 떠올린 파비안의 안색이 창백했다. 흐릿한 핏기조차 보이지 않아 이미 죽어버린 사람 같았다.

    절벽 끝자락에 붙인 발을 떼고 허공을 밟으려는 그 때 캄캄한 아래쪽에서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으, 으…….”

    “―?!”

    파비안은 황급히 몸을 낮춰 앉아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벼, 별하……?”

    “……안. 파, 비안…….”

    겨우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는 분명히 별하였다. 그가 죽었다고 확신했던 파비안은 신음하듯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별하―

    수풀 뒤에 숨어 있던 앵무새가 급히 날아와 절벽 아래를 빼꼼 내려다보았다.

    “파비……. 도와, 줘…….”

    긴박한 목소리는 간신히 절벽을 기어올라 왔다. 파비안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서 나뒹구는 불 막대기를 집어 와 넝쿨과 길게 연결한 후 목소리가 나는 지점을 피해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둠을 꿰뚫는 불길에 절벽 아래의 상황이 훤히 드러났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수직의 절벽을 내려다보던 파비안은 탄식했다. 별하는 절벽 단면에 튀어나와 있는 나무뿌리를 붙잡고 겨우 버티고 있었다. 동아줄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검은 눈동자와 겨우 재회한 파비안은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 생애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바로 두려움이었다.

    “파비안…….”

    파비안은 턱을 굳게 물고 감정을 죽였다.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 내려가 그를 밀어 올려주고 싶었지만 위치가 예상보다 아래쪽이었다. 줄이 없으면 닿지 못하는 거리였다.

    “별하, 조금만 더.”

    버텨줘.

    별하는 대답 대신 눈만 깜빡거렸다. 온 체중이 실린 나무뿌리가 돌연 끊어지지 않게 최대한 힘을 뺐다. 파비안은 잘하고 있다는 눈길을 보낸 후 별하의 무게를 견딜 만한 덩굴을 찾아 주변의 수풀을 뒤졌다. 가느다란 덩굴들은 잎만 무성할 뿐 하나같이 가늘었다. 그를 두고 멀리 갈 수도 없었고 시간은 제한적이었다.

    “제길, 제기랄!”

    주먹으로 나무기둥을 내리치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은 파비안은 주변의 덩굴을 손에 잡히는 대로 뜯어내 절벽으로 돌아갔다. 나무뿌리는 아직 크게 상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별하는 부쩍 힘이 빠진 듯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파비안은 급히 덩굴을 엮어 아래로 내렸다. 예상대로 별하에게 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리해 덩굴을 늘렸다가는 오르는 도중에 끊어질 수도 있었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떠올리는 파비안의 시야에 문득 한곳이 걸려들었다. 별하의 반대편 절벽이었다.

    파비안은 불 막대기를 좀 더 아래로 내려 2, 3미터 거리쯤 되는 반대편 절벽의 형태를 확인했다. 별하의 위치보다 조금 아래쪽에 단면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만한 면적이었다. 중량이 실린다고 해서 무너질 형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별하, 저기 보여?”

    별하는 파비안이 가리키는 곳을 겨우 돌아보았다. 위치를 확인하고는 더욱 질색한 얼굴로 새하얗게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모, 못 해. 불가능해…….”

    파비안은 목에 강한 힘을 실어 단언했다.

    “할 수 있어.”

    별하는 자신 없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멀어.”

    그러다 순간 손에서 힘이 빠져 쭉 미끄러졌다.

    “으윽!”

    절벽을 딛고 있던 발끝에 힘을 주고 옆의 뿌리까지 붙잡아서야 가까스로 멈췄다. 무릎을 꿇어앉은 파비안은 냉정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은 낯으로 말했다.

    “할 수 있어, 별하. 해야만 해.”

    058.

    “하아…….”

    별하는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떨어지면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끝이었다. 별안간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목격했다.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제 인생의 희노애락이었다.

    배낭여행 외에 구체화 된 꿈은 없었지만 아직 해보지 않은 것투성이였다. 고난의 연속인 이 현실이 버거워 어쩔 땐 죽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전혀 아니었다. 살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지금의 이 마음을, 메마른 땅에 내리기 시작한 단비를 더 오래오래 맞고 싶었다.

    “두려워하지 마.”

    파비안은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인생의 큰 갈림길에 선 이를 응원했다.

    “네가 어디로 향하든, 나도 따라갈 테니까.”

    “…….”

    별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당장 뛰어내릴 듯 저를 똑똑히 내려다보는 파비안과 눈을 마주했다. 뛰어도 될까? 발을 헛디디면 어쩌지? 발이 닿지 않는다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과 불안에 갈대처럼 흔들리던 마음이 곧 나무기둥처럼 강직하게 곧추섰다.

    별하는 절벽을 디딘 발에 힘을 넣었다. 뚜둑― 움켜잡은 뿌리들에서 질긴 심지들이 하나둘 뜯겨나가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뚜두둑―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주시하는 파비안에게 짧은 눈길을 보냈다.

    뛸게.

    각오를 다지자마자 더 생각할 것 없이 도약하듯 절벽을 힘껏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 반동력으로 어둑한 허공을 가로질러 맞은편 절벽에까지 가뿐하게 다다랐다. 두 발로 절벽 끝을 딛는 순간 중심이 기울어져 뒤로 기우뚱했다.

    “윽!”

    별하는 재빨리 상체를 숙여 무게 중심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균형을 잡는 즉시 안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섰다.

    “하아…… 하아…….”

    뒤늦게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작은 돌멩이와 흙 부스러기가 후드드 떨어졌다. 좀 전까지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던 나무뿌리는 늘어진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파비안은 제 이마를 짚으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별하.”

    그와의 거리가 조금 더 멀어진 상황이었다. 별하는 떨리는 숨을 가만히 불어내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파비안…….”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속삭이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파비안은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듯 대답했다.

    “그래, 거의 다 끝났어. 조금만 더 견디면 돼.”

    그는 절벽 안쪽에서 타오르는 불 막대기를 별하의 발치께로 던졌다. 그것을 얼른 받아 든 별하는 어둑한 주변을 이리저리 비췄다.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안색이 새파랬다. 제법 여유가 있는 디딤판의 면적을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제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올라갈 수 있는 거야?”

    파비안은 별하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상체를 낮췄다.

    “안전하게 끌어 올리려면 많은 덩굴이 필요해. 덩굴은 두껍게 포개 꼬아서 만들 거야. 되도록 해지기 전에 끝낼 생각이지만 작업이 늦어지면 더 걸릴 수도 있어. 그때까지 조금만 더 힘내서, 견뎌줘.”

    “응…….”

    고개를 끄덕이는 별하의 낯빛이 이제야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파비안 역시 거칠게 들이치던 흥분을 가라앉히며 느른한 한숨을 흘렸다. 말을 잃은 눈길들이 자연스럽게 밀착해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충격적인 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지만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이에게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

    별하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손등과 팔 여기저기에 자잘한 찰과상이 나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 부딪친 것 같았다. 발끝이 불편해 눈길을 내리자 푸르스름하게 멍이 든 엄지발톱이 보였다. 발톱이 빠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두 번째 발가락 안쪽까지 멍이 들어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됐든,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별하는 일부러 더 가벼운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괜찮아. 팔다리 똑바로 붙어 있어.”

    파비안은 전혀 웃지 않았다. 한참 눈을 맞대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세워 일어났다.

    “장작 더 던져줄 테니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

    그리 말하곤 절벽의 경계선 너머로 사라졌다.

    별하는 세운 무릎을 찬찬히 내려 양반다리를 했다. 종아리와 허벅지 뒤쪽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근육통이 느껴졌다. 급격하게 팽창한 근육이 찢어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에 만족한 그는 안벽에 뒷머리를 붙였다. 새카만 공기만이 흐르는 거대한 구덩이의 기저로는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았다.

    식은땀에 젖은 옷가지 덕분에 언뜻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길에 먹혀 한 뼘 정도밖에 남지 않은 나무막대기를 내려다보는데 절벽 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모습을 드러낸 파비안은 손에 든 것을 내보였다.

    “별하, 잠시 옆으로 비켜줄래?”

    넝쿨로 한데 묶은 장작들이었다. 별하는 디딤판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공간이 생기자마자 파비안은 각도나 거리를 재지도 않고 그것을 휙 던졌다.

    묵직한 장작더미가 정확히 빈 공간에 안착했다. 쿵― 안벽에 부딪혔다가 도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별하는 반사적으로 낚아챘다.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는 이에게 눈짓했다. 고마워.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제 발밑에서 뭔가를 집어 들어 내보이며 말했다.

    “과일 던져줄게. 목 좀 축여.”

    “응, 몇 개만.”

    껍질이 쭈글쭈글하게 잘 익은 패션후르츠까지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터지지 않도록 하나씩 던져주는 패션후르츠를 전부 받아 낸 별하는 바로 하나를 갈라 상큼한 과즙을 단번에 들이켰다. 파비안은 허벅지에 한쪽 팔을 기대어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덩굴을 가져올 거야.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는 그런 경우 따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말끝을 뭉그러뜨렸다. 이내 얕은 한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크게 고함을 쳐. 최대한 근처에 있을 테니까.”

    “조심해, 파비안. 이런 빌어먹을 씽크홀이 또 어디에 있을지 몰라.”

    파비안은 어둡게 굳은 얼굴로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를 전했다.

    “조심하지.”

    별하는 자조적인 미소를 설핏 지어 보였다. 고립된 저를 놔두고 가기가 마음에 걸리는 듯 우두커니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난 별장에서 쉬고 있을게. 천천히 갔다 와.”

    “…….”

    “올 때 바나나.”

    파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나나? 따 오면 되는 건가?”

    별하는 한숨처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식 조크야.”

    “바나나를 챙기는 관습이?”

    “아니, 아니. 인사 같은 거라고나 할까. 조심히 잘 갔다 오라는.”

    “음.”

    당연하게 생각했던 개그가 통하지 않는 상대는 확실히 외국인이었다. 새삼 현실을 깨달은 별하는 머쓱하게 몸을 뒤적였다.

    “말장난 같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군.”

    파비안은 웃는 척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조심히 잘 갔다 오겠다는 눈길을 건네며 돌아서더니 금방 모습을 감췄다. 어둑한 절벽 사이에 정적이 덮쳐들었다.

    별하는 거의 다 타들어 간 불 막대기 위에 새 장작들을 둥글게 돌려세웠다.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다. 서늘한 공기가 대번 물러나며 주변에 훈기가 돌았다.

    그는 차가운 벽에 등을 묻고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

    밀림의 수풀이 원래 저런 색이었던가? 형광의 연둣빛이 새하얀 빛살과 뒤섞여 몹시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국, 파라다이스를 우러러보듯 싱그럽기 그지없는 풍경을 멀거니 응시했다.

    몇 분 전까지 자신도 저 풍경 속을 걷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절벽에 갇혀버린 현실을 몸으로 부딪치고도 믿을 수 없었다. 세상의 악운이란 악운은 다 겪었는데도 아직 맛보지 않은 악운이 남아 있다는 데에 놀라움마저 들었다.

    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 후텁지근하지만 폭신한 녹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밑 빠진 독으로 들어가는 물처럼, 좀체 오르지 않는 기력을 채우기 위해 잠시 눈을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 덮쳐드는 잠기운에 휩싸이는 그 때, 발을 헛디뎌 구렁텅이로 고꾸라지던 찰나의 잔상이 불쑥 떠올랐다.

    “―!”

    별하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읏.”

    눈을 감기 전과 똑같은 자리에서 1밀리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인데도 절벽 아래로 번지점프를 하고 온 느낌이었다. 몸을 의탁한 디딤판도 곧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어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타닥타닥― 강건하게 타들어 가는 장작불을 응시하며 심신의 안정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바짝 마른 목을 축일 생각으로 불 옆에 쌓아둔 과일을 집어 드는데 불현듯 절벽 위에서 작은 돌멩이들이 오르르 떨어졌다. 벌써 돌아왔나? 별하는 목을 길게 빼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덩굴이 많았나 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질적인 기척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파비안?”

    곧 희미한 기척도 사라져 절벽 위는 고요했다.

    “…….”

    낯설지 않은 기시감을 감지한 별하는 가장 두꺼운 장작 하나를 손에 쥐었다. 뭐라도 뛰어내리면 사정없이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천천히 몸을 세워 일어나 안벽에 등을 붙였다. 절벽의 경계선에 눈을 두고 손등의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장작을 움켜쥐었다. 경직된 목울대가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순간, 절벽의 경계선 너머로 시커먼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리부리한 두 눈과 위협적으로 번들거리는 털 갑옷, 절벽을 움켜쥔 뾰족한 발톱, 날카로운 주둥이, 바로 그것이었다.

    앵무새.

    빠비안―?

    059.

    빠비안―?

    “하아…….”

    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것을 내려놓았다. 절벽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는 앵무새에게 이리 오라며 턱짓했다.

    “어이.”

    앵무새는 움직이지 않고 멀뚱히 별하를 쳐다볼 뿐이었다. 디딤판 끝에 서서 어깨를 슬쩍 내밀어 보았지만 전처럼 날아오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는 몰라도 딱히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별하는 세운 어깨를 내리며 앵무새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숨겨진 절벽 있는 거 알려줘서 고맙긴 한데, 다음번에는 다른 방식을 이용해 줘. 떨어지기 전에 심장마비로 세상 하직할 뻔했다고.”

    앵무새는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동그란 눈을 함께 깜빡였다. 별하는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검은 콩 같은 앵무새의 눈을 쳐다보며 짤막하게 덧붙였다.

    “고맙다.”

    그는 이만 장작불 곁으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렸다. 문득 머리 위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긴 날개를 펼쳐 이쪽으로 날아오던 앵무새는 절벽의 반도 넘지 못하고 다급히 회항했다.

    앵무새는 마치 진흙에 빠진 것처럼 양날개를 퍼덕이며 도망가 절벽 끝에 간신히 착지했다. 영 좋지 못한 심기로 삑삑 울어대며 제자리에서 뒤뚱거렸다. 저를 쳐다보는 이에게로 날아가고 싶은 듯 헛 날갯짓을 했지만 다시 비행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별하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너도 겁먹었구나.”

    앵무새는 당장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쳤다가도 자신이 없는 듯 바짝 접어 웅크렸다. 별하는 대뜸 제 팔을 길게 내밀었다. 어서 와 여기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빠비안! 빠비아안! 앵무새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갈까, 말까 수없이 고민하며 불안한 듯 날개를 들썩거렸다.

    별하는 팔을 편 채로 패션후르츠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반으로 갈라 안쪽을 내보이며 방황하는 앵무새를 유혹했다.

    “어이, 그래도 넌 날개가 있잖아.”

    삑삑―!

    “괜찮아. 어서.”

    앵무새는 주둥이를 벌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어이이―! 별하는 움켜쥔 손바닥을 환히 펼쳐 보이며 주저하는 상대를 나긋하게 얼렀다.

    “착하지.”

    앵무새는 주둥이를 뚝 다물었다. 한껏 구부린 날개를 천천히 펼쳐 몇 번 퍼덕이더니 곧장 힘을 실어 허공을 날아올랐다. 절벽 아래서 피어오르는 음영에 닿았을 때 잠시 주춤했으나 단단히 작정한 듯 목적지로 직진했다. 길게 뻗어 내민 팔에 착지하자마자 어깨 위로 총총 뛰어올랐다.

    별하는 용기를 다해 저에게로 날아온 작은 생물체를 보듬으며 웃었다.

    “그렇지, 앵무새. 잘했어. 나보다 더 용감하네.”

    앵무새는 기세등등하게 부리를 치켜세우며 으쓱거렸다. 별하는 장작불 곁에 앉아 앵무새를 제 다리 위로 내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에게 과일을 건네자 좀 전에 그리 먹고도 지겹지 않은지 호로록 소리를 내며 열심히 파먹었다. 별하는 부러진 다리에 감긴 붕대를 조심히 들여다보았다.

    “여긴 좀 어때?”

    매듭이 풀린 붕대는 때가 타 지저분했다. 다행히 부목은 고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금방 위험한 상황이 도래했을지도 몰랐다. 그것을 똑바로 세우고 늘어진 붕대를 처음처럼 압박하자 앵무새는 통증을 느낀 듯 날개를 푸덕거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저항이 없었다.

    “금방 나을 거야. 조금만 더 힘내.”

    별하는 순한 앵무새의 다리를 깔끔하게 손본 뒤에 본격적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혹 디딤판이 무너지지 않을는지 여전히 불안했지만 혼자일 때보다는 적막감이 덜해 견디기가 수월했다.

    그는 제 다리 위에 앉아 애교를 부리듯 요리조리 눈을 맞춰 오거나 새파란 날개를 자랑하듯이 펼쳤다가 접기를 반복하는 생물의 깃털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사이에 살이 붙은 것 같은 앵무새에게서는 처음 만났을 때의 꾀죄죄하던 모습을 이제 더 찾을 수 없었다. 깨끗하게 정돈한 털이 상당히 부드러웠다.

    별하는 그를 만지작거리며 밧줄 대용의 덩굴을 가지러 간 이를 멍하니 떠올렸다.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도 파비안이 몹시 보고 싶었다.

    온전히 저를 향한 엷은 눈동자와 다정한 저음, 향긋하면서도 묵직한 페로몬, 황금빛의 풍성한 속눈썹, 희면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육체, 그가 남긴 발자국까지도 그리웠다. 실소조차 나지 않는 썰렁한 유머가 어느 때보다 필요했다.

    앵무새의 날개를 잠시 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 그에게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

    별하는 상상 속에 빠진 채로 눈앞의 화려한 깃털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과 그의 사소한 잡담들을 떠올리고 다시 떠올리며 되새김질하는데, 문득 절벽 위쪽에서 작은 기척이 일었다. 수풀이 어수선하게 흔들리는 소리였다.

    별하는 번뜩 일어났다. 느닷없이 옆으로 내팽개쳐진 앵무새가 날개를 거칠게 푸덕거렸다. 어이―! 어이이―!

    “미안.”

    별하는 짧게 사죄하곤 서둘러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파비안?!”

    절벽 위에서 익숙한 형태의 커다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파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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