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비안…….”
성감대를 어루만지는데도 별하는 금방 사정하지 못했다. 괴로운 듯 헐떡이며 더 강한 쾌감을 원하고 있었다. 금방 흥분해 버린 별하의 엉덩이 사이로 파비안이 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삽입하지는 않고 움찔거리는 구멍을 두툼한 기둥으로 문지르며 얕게 허리질을 했다.
하반신이 부딪칠 때마다 뒤에 자극이 일자 별하는 어렵지 않게 사정감을 느꼈다. 당장 구멍으로 쳐들어올 듯 주변을 도사리는 위력과 페니스에 가해지는 강한 압력에 신음하다 번득이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파비안의 손 안에 정액을 쏟았다.
“흐으읏……!”
파비안은 곧장 상체를 숙여 신음하느라 벌어진 별하의 입술을 제 입술로 눌러 막았다.
055.
파비안은 곧장 상체를 숙여, 신음하느라 벌어진 별하의 입술을 제 입술로 눌러 막았다.
집어삼킬 듯이 혀를 깊게 섞었다가 금방 떨어져 나갔다. 별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속에서 차츰 가라앉아 가는 제 페니스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하아…… 하아…….”
“…….”
파비안은 손에 감싸 쥔 것을 자유롭게 놓아주며 나뭇잎을 다시 들었다. 별하의 다리 사이와 그 안쪽을 기계적으로 반복해 쓸며 엊저녁 정사의 흔적이 남은 곳까지 꼼꼼히 씻겨주었다. 몸을 편안히 눕게 해 머리를 감겨주고 유독 뻐근해 하는 어깨와 등허리를 마사지하듯 만져주었다.
별하는 파비안이 이끄는 대로 나른한 몸을 움직였다. 그가 건네는 깨끗한 새 나뭇잎으로 이를 닦아낸 뒤에는 팬티를 가져와 빨았다.
증여받았을 당시보다 조금은 낡은 것 같은 그것을 물속에 넣어 흔들어 씻는데 옆에서 한창 목욕 중인 인영이 시야로 들어왔다. 파비안은 아침 목욕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조각상 같은 전신이 싱그러운 햇살이 비쳐드는 강물과 함께 반짝반짝했다. 굵직한 페니스는 아직 우뚝 서 있지만 난잡하다거나 천박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매끈하게 뒤로 넘긴 금발과 젖은 속눈썹 끝자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티끌만 한 잡티나 상처조차 생기지 않은 피부는 더없이 희고 깨끗했다. 반드러운 피부를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마치 갓 깎아 만든 큐빅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어떤 조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대로 사진을 찍어도 후대에까지 회자될 화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별하는 괜히 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팬티의 물기를 쭈르륵 짜냈다. 그는 도와달라는 말이 없는 파비안의 곁으로 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등 밀어줄게.”
파비안은 대뜸 허리를 숙여 별하의 젖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잘 부탁한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손바닥 위에 나뭇잎을 올려놓고 뒤돌아섰다.
“…….”
별하는 동요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눈앞의 너른 어깨에 나뭇잎을 문질렀다.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그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한 번에 양극단을 오가기가 힘들었다. 물을 흠뻑 적셔 상하로 문지르자 파비안이 자세를 낮춰 물속에 앉았다.
“미안, 별하.”
“……앉지 않아도 돼. 충분히 닿아.”
그가 고개를 돌려 옆얼굴을 내보이며 말했다.
“이게 더 쉽잖아.”
늠름한 천사 같은 외형만큼이나 상냥한 저음이었다. 눅진하게 젖은 금발이 눈가로 흘러내려 금빛 속눈썹을 가렸다. 별하는 너른 등을 반복적으로 쓸어내리며 용기 내 물었다.
“나도 감겨줄까?”
“음?”
“네 머리. 앉은 김에.”
파비안이 제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별하는 검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어색하게 눈길을 마주했다. 파비안은 선뜻 물속에 드러누웠다. 홀딱 벗고 페니스를 세운 채 반듯한 얼굴만 수면 밖으로 내민 모습에도 위화감은 전혀 없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이상과 미감을 극대화한 예술 작품 같았다.
별하는 투명한 물속에서 너울거리는 금발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그것은 몹시 부드러웠다. 물에 푹 젖은 고급 실크 같기도 하고 물결 그 자체 같기도 했다. 금빛 물결. 빛을 받지 않아도 반짝거리는 머리칼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손가락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따뜻한 두피를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자 파비안이 느른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시원한 듯했다.
별하는 최선을 다해 손을 움직였다. 남성적인 윤곽이 살아 있는 이마에서부터 정수리, 귀 옆, 곧게 뻗은 뒷덜미까지 차근차근 문질러 씻었다.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눈길은 파비안의 얼굴로 내려앉았다.
대체로 평평한 이목구비를 가진 동양인들과는 다르게 입체감이 살아 있는 얼굴은 화려했다. 베일 듯한 콧날과 예쁘게 파인 인중, 선명하게 붉은 입술은 시원하면서도 잘생긴 모양을 하고 있었다.
“…….”
별하는 그 안쪽에 숨은 새빨간 살덩이를 문득 떠올렸다. 촉촉하고도 말랑말랑한 혀는 과일처럼 달았다. 그것과 간극 없이 밀착해 얽혀드는 감각을 느낀 순간 저를 향해 있는 오드아이와 부딪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저를 향한 검은 눈동자에 박혀 들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별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느직이 눈길을 내리며 자연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아까 고릴라들 말이야. 여기서 사는 거겠지?”
굳게 닫혀 있던 파비안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아마도.”
별하는 불현듯 떠오른 의문에 손을 멈췄다.
“그 징그러운 놈들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던데. 왜 그런 걸까? 딱히 위험한 맹수나 그런 게 사는 것 같진 않잖아, 여기. 우리가 찾고 있는 ‘그것’ 말고는.”
“징그러운 놈들? 원주민?”
“원주민들 중에 새카맣게 위장한 녀석들 봤지? 계속 내 뒤를 쫓아왔거든. 처음 잡혀 왔던 날부터 쭉.”
“…….”
“근데 어느 순간 안 따라오더라. 이 원시림을 보호해야 한다든가 하는 위대한 사명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파비안은 제 머리칼에 닿는 손길이 없자 천천히 몸을 세워 일어났다. 젖은 머리칼을 목 뒤까지 쓸어넘겨 물기를 제거한 그는 야트막한 생각에 잠겨 들었다. 별하 역시 당시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상황들에 새삼 의문을 느꼈다. 그것도 진한 위화감이 따라붙은.
“왜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던 걸까?”
파비안은 이윽고 물가로 걸어 나가며 제 생각을 내비쳤다.
“위험한 장소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혹은 신성한 장소라거나.”
“신성한 장소…….”
“아니라면 우리가 찾는 ‘그것’의 영역이라는 뜻일 수 있어.”
“일리가 있네.”
거대한 아나콘다도 어렵지 않게 사냥하는 식인종들의 생활 양식으로 미루어봤을 때 신성한 장소와 ‘그것’의 영역, 이 두 가지가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별하는 손에 꼭 쥐고 있던 팬티의 물기를 다시 한번 쥐어짠 후 그를 따라 물 밖으로 나갔다. 파비안은 제 옷가지를 손에 들고 모닥불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족장이 품에 안고 다닐 정도의 발톱이라면, 특별한 가치를 지닌 짐승이겠지. 여러 의미로 만만치 않을 거야.”
“…….”
별하는 열대 악어와 성체 표범, 그리고 거대한 아나콘다보다 더한 괴물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이런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악몽인 양 외면하고만 싶었다.
그는 제 의지와 다르게 자꾸 주춤거리는 다리를 채근해 얼른 옷을 입었다. 젖은 몸 위에 그대로 바지와 티셔츠를 걸쳤다. 세탁한 팬티와 남방, 창을 들고 모닥불로 다가가자 파비안은 계속해 제 사견을 담담히 풀어냈다.
“발톱 크기로 봐서는 상당한 덩치를 가진 놈이야. 단독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고 필연적으로 육식을 해. 어쩌면 고릴라 같은 건 한 입 거리 먹이일지도 모르지.”
모닥불 옆에 우두커니 서서 그의 말을 경청하던 별하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아무리 가설이라도 너무 무섭잖아. 너만 한 고릴라가 잡아먹히는 상상은 꿈에서도 하고 싶지 않아.”
파비안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모닥불을 손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와 돌연 경계심을 최대치로 가동 중인 이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이 주제의 대화를 이만 끝내려는 듯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주변 짐승들 움직임으로 봐서 여긴 아직 안전지대 같아.”
“…….”
“아마 당분간은 그렇겠지.”
그럼에도 별하의 경계 수위는 낮아지지 않았다. 사위를 에워싼 밀림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문득 섬이 이렇게 컸나, 싶었다. 해변에서도 크기를 짐작하지는 못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섬이 아니라 거의 대륙이었다.
대륙과 다름이 없는 이곳에 어째서 원주민밖에 살지 않는 건지, 이 큰 섬을 구조대는 어째서 아직도 찾지 못하는 건지 피가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파비안은 모닥불에 몸을 말린 후에 바지와 셔츠를 걸쳐 입었다. 막 불이 붙은 나무막대 하나만 꺼내 들고 돌칼을 지면에 박아 넣었다. 흙을 묵직하게 떠 올려 그대로 모닥불을 덮었다. 불씨를 완전히 꺼트리고 움직일 채비를 끝낸 파비안은 조용한 옆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만 움직일까?”
한동안 말없이 창을 들여다보던 별하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각 난 햇살이 찾아든 가지 위는 어떤 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어쩌지? 아직 안 돌아온 것 같은데.”
파비안은 물가를 향해 발길을 틀며 말했다.
“금방 쫓아올 거야. 영리한 녀석이라.”
경험을 토대로 확신하고 있었다. 별하 역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범상치 않은 앵무새는 상황 판단력이 우수했다. 우스갯소리로, 서울의 웬만한 알파들과도 견줄 수 있을 만한 실력이었다. 어쩌면 더 좋을지도.
파비안은 이제 그만 가도 되겠냐는 듯 눈길을 보내왔다. 별하는 아직 마르지 않은 팬티를 바지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대답했다.
“어서 움직이자.”
* * *
더할 수 없이 화창한 날씨였다. 다른 날에는 머리 위쪽의 짙푸른 녹음으로 지면에까지 햇빛이 잘 닿지 않다가 오늘은 곳곳에서 새하얀 빛줄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목덜미에 땀이 맺히는 정도의 더위임에도 비 오는 날씨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하암…….”
별하는 불쑥 튀어나온 하품에 손등으로 입을 꾹 눌러 막았다. 느릿하게 떨어지는 입과 손바닥 사이로 다시 하품이 새어 나왔다.
“하아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갈 길을 정하던 파비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별하, 많이 피곤한가?”
별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괜찮아.”
“…….”
“문제없어.”
혹시라도 움직이는 데에 방해가 될까 싶어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별하는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간밤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는데도 원래 체력이 영 돌아오질 않았다. 역시 과한 섹스가 문제인 듯했다. 거기에다 생각지도 못한 과거사의 고백으로 정신적인 피로도 적잖은 한몫을 한 것 같았다.
별하는 제 안색을 살피는 이에게 괜찮다는 눈길을 보내곤 제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쫓아왔었어야 할 녀석이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소리라도 내서 불러들여야 하나, 고민하는 그 때 뒤쪽에서 힘찬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집 나갔던 앵무새였다.
056.
어딘가에서 실컷 놀다 온 듯한 앵무새는 곧바로 별하의 어깨에 착지했다. 제 전용 소파마냥 걸터앉아서는 왜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갔느냐는 듯 양날개를 푸드덕거렸다. 날갯짓을 피해 고개를 돌린 별하의 뺨 가까이 다가와 부리를 들이댔다.
“그러니까 너무 멀리 가진 마.”
앵무새는 흡사 고양이처럼 그르릉그르릉 성대 소리를 내며 계속해 대가리를 비벼 왔다. 자꾸 뭔가를 들이미는 통에 별하는 옆을 돌아보았다. 앵무새의 부리에 둥그렇고 검은 무언가가 물려 있었다. 부리로 물고 있다는 편이 옳았다.
“……?”
별하는 고개를 기울여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둥글게 말린 물체의 안쪽에서 십수 개의 발이 튀어나와 꿈틀거렸다. 벌레의 유충이었다. 별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옆으로 쭉 뺐다.
“어어, 그러지 마.”
앵무새는 그것을 별하에게 계속해서 권유했다. 그만하라는 뜻으로 날개를 툭 건드리자 자그마한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 맛있는 걸 왜 받지 않느냐는 듯한 눈길로 빤히 쳐다보았다.
별하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곳을 쳐다보며 관심을 더 보내지 않고서야 앵무새는 부리에 물고 있던 것을 제 목으로 꿀꺽 삼켰다. 혀를 움직여 완전히 삼킨 뒤에는 기분이 좋아진 듯 삑삑거렸다
그를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파비안은 불이 붙은 막대기를 적당한 주변 바닥에 꽂으며 물어 왔다.
“잠시만 기다려줄래?”
근방의 수풀 형태를 눈에 담고 있던 별하가 그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갑자기 왜?”
파비안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늘에서 쉬고 있으라며 손짓하고는 대뜸 우거진 수풀로 들어갔다. 느닷없이 자리를 비운 이가 딱히 맹수와 싸우러 가는 것 같진 않았다. 지극히 사적인 상황을 짐작한 별하는 불 근처의 그늘로 들어갔다.
별하는 두툼한 뿌리에 걸터앉으며 목덜미의 땀을 셔츠 깃으로 닦았다. 어깨에 앉아 있던 앵무새는 자연스럽게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꼬르륵―
“…….”
문득 허기가 찾아왔지만 지금 별하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만약 이쪽보다 두두가 먼저 ‘그것’을 찾아낸다면 어떻게 되는 건지 다시금 불안감을 느꼈다.
이곳 원시림에 들어온 후부터 검은 인영들은 전혀 따라붙지 않았지만 여기서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해변으로 나가야 했다.
당장 오늘 저녁 구조대가 섬을 찾을지도 몰랐다. 해변과 근방을 수색한다 해도 언제 이곳까지 도착할지, 자신들의 흔적을 찾지 못해 단순한 실종자들로 처리해 버리는 건 아닌지, 별하는 별안간 밀려드는 불안과 초조감에 입술을 곱씹었다.
물론 그는 파비안의 직감과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목표물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건지, 애초에 정말 실존하는 생물체가 맞는지도 의문이었다.
혹 암모나이트와 다름없는 그것을 신격화해 이런 미친 게임을 축제처럼 즐기려는 건 아닐까. 식인 원주민들의 일상과도 같은 축제나 그것을 대하는 족장의 태도, 두두의 강대한 의지로 보아 그럴 가능성도 다분해 보였다.
긴 한숨을 불어낸 별하는 남방을 벗어 허리에 둘렀다. 몸단장에 한창인 앵무새를 잠깐 올려다보곤 자리를 옮겨 나무기둥에 등을 기댔다. 노곤하게 가라앉는 몸을 추슬러 잠시 눈을 붙였다. 캄캄한 어둠을 멍하니 응시하는데 불현듯 단내가 코끝을 스쳤다.
“으음…….”
별하는 무거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등을 세웠다.
“어, 언제 온 거야?”
전방을 내다보던 파비안과 그 옆에서 뭔가를 먹던 앵무새가 역시나 놀란 눈으로 별하를 돌아보았다. 파비안은 걱정하는 낯으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좀 됐어.”
별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방금 눈 감았는데?”
파비안은 별하의 입가에 살짝 묻어난 침을 엄지로 닦아주며 말했다.
“말하지 그랬어. 쉬어가도 되는데.”
“…….”
“그보다 중요한 건 없어.”
심려하는 목소리가 못내 감미로웠다. 별하는 손등으로 제 입가를 문지르며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얼마나 잤던 거야?”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 잠깐.”
잠깐이라고 했지만 5분, 10분만 잔 게 아님을 별하는 알 수 있었다. 침이 새어 나올 만큼, 오므린 두 다리에 강력한 쥐가 내릴 만큼 잔 것 같았다.
별하는 마른 눈가를 비볐다. 몹시 찌뿌드드한 몸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으켜 바닥을 밟았다. 순간 허리와 엉덩이에 이는 둔통을 이를 물고 참으며 말했다.
“시간 끌어서 미안. 이제 움직이자.”
파비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더 쉬어가도 돼. 눈 좀 붙여, 별하.”
별하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잘 만큼 잤어. 이제 개운해졌어.”
“…….”
“어제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뒤처졌을 거 아냐. 오늘은 뭐라도 찾아야지. 하다못해 분변이라도.”
파비안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지금 바로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별하가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턱짓을 했다.
“우선 배부터 채워. 어제부터 먹은 게 없잖아.”
정말 셀 수도 없이 몸을 섞으며 에너지란 에너지는 전부 쏟아붓고도 물밖에 먹은 게 없었다. 당연히 배가 고팠지만 어쩐지 식욕이 생기지 않은 별하는 제 손에 들어와 있는 것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파비안은 자책하듯 나직이 읊조렸다.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무심했어.”
“…….”
그것은 자줏빛을 띤 야구공 크기의 과일이었다. 해변에서도 몇 번 먹었었던 패션후르츠였다. 새콤달콤한 맛을 기억해 내자마자 혀 밑으로 침이 가득 고였다. 별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짐짓 단호히 말했다.
“고맙지만 두두 녀석보다 빨리 찾아야 하잖아.”
파비안은 제 발밑으로 손을 내려 다른 큼직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칼의 예리한 날로 패션후르츠의 상단 부분을 가뿐하게 잘라냈다. 새끼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를 꺾어 누르스름한 과즙이 흘러내리는 패션후르츠 안쪽에 빨대처럼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별하에게 내밀었다.
“괜찮아.”
별하는 그것을 선뜻 받아 들지 않았다. 꼴깍꼴깍 침만 삼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두두 새끼가 먼저 그걸 가져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다고.”
“…….”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원주민 전체가 우릴 잡아먹으려고 좀비처럼 쫓아다닐 텐데, 그 많은 수를 우리 둘이서 어떻게 상대해?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안 돼. 너무 위험해. 두두 놈이 가지지 못하도록 우리가 먼저 찾아내는 수밖에 없어.”
앵무새는 주변 분위기가 좋거나 말거나 열심히 부리를 놀려 과일을 파먹고 있었다. 파비안은 그럴 경우를 이미 가늠해 봤다는 듯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과일을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물론 그렇겠지.”
“별하,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흔히 발견되고 간단히 사냥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경외시하지도 않았을 테지.”
“…….”
별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두두 녀석이 몹시 서둘렀던 이유가 강대한 의지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임을 돌연히 깨달았다.
불쑥 덮쳐든 정적 속에서 별하는 얼떨결에 파비안이 내미는 것을 받아 들고 옆자리에 앉았다. 안쪽에 가득 담긴 과즙과 새하얀 과육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파비안은 담담히 답했다.
“괜찮아. 안심해. 아무 일 없어.”
“…….”
“만에 하나 생기더라도 충분히 바로 잡을 수 있어.”
부드러운 억양을 구사하는 저음에서는 언뜻 여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태연한 척, 강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그의 본연에서 우러나오는 기백과 기품이었다.
별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예쁜 오드아이의 동공이 들여다보이는 거리에서 향긋한 체향을 느끼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대뜸 파비안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소리가 나게 점막을 붙였다가 떼며 패션후르츠 안에 꽂힌 나뭇가지를 쥐고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진짜 맛있다.”
“…….”
“고마워. 파비안.”
금방 식사를 끝낸 앵무새가 폴짝폴짝 뛰어 별하의 어깨에 앉았다. 과즙이 묻은 제 부리와 가슴털을 여유롭고도 능숙하게 정리했다. 별하는 상큼한 과육과 톡톡 터지는 씨를 씹으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너도 좀 먹었어?”
대답이 없는 이를 흘깃 돌아보다 다가오던 파비안과 입술이 부딪쳤다. 파비안은 뒤로 물러나는 별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으응.”
놀란 앵무새가 급히 날갯짓하며 날아올라 나무 위에 걸터앉았다. 빠비아안! 파비안은 달콤한 맛이 가중된 혀를 단숨에 뒤쫓아 깊게 얽었다.
그는 호흡이 흐트러질 때까지 점막을 찌르고 빨며 격한 키스를 퍼붓다가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타액이 묻어 반들반들해진 별하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백한 얼굴을 했다. 먹다가 만 과일을 어정쩡하게 쥐고 있는 별하의 손에 또 다른 과일을 쥐여주었다.
마치 번개가 내리꽂히는 듯한 키스에 넋이 나가 있던 별하는 그것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
패션후르츠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과일은 언뜻 껍질을 벗기지 않은 옥수수처럼 보였다. 실한 오이, 애호박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정체불명의 물건을 보고만 있자 파비안이 초록 껍질을 벗겨주었다. 흡사 생선 비늘처럼 알알이 부스러지는 외피의 안쪽에는 전혀 다른 색의 과육이 숨어 있었다.
“먹어도 되는 거야?”
파비안이 웃었다.
“설마 별하 너에게 먹지 못하는 걸 주겠어?”
별하는 그의 환한 웃음에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껍질을 완전히 벗겨내자 샛노란 알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건네받자마자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이로 씹을 새도 없이 입 안에서 사라지는 과일과 파비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뭐지? 완전 부드럽고 달콤해. 맛있어.”
“몬스테라.”
“몬, 스테라? 과일 이름이야?”
파비안이 으흠, 하고 담백한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몬스테라에서 나는 열매.”
“아, 그렇군. 처음 보는 과일인데 진짜 최고야. 두리안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아.”
별하는 옥수수를 먹듯 몬스테라의 열매를 급히 베어 물었다. 작은 씨들을 일일이 뱉어 내가며 생소한 질감과 단맛을 만끽했다. 뼈대만 남기고 깨끗하게 먹어치운 후에야 생각이 난 듯 옆 사람에게 물었다.
“넌? 먹었어?”
파비안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새로운 나무막대기에 옮겨붙은 불길 옆 수풀에 무언가가 쌓여 있었다. 먼저 먹은 패션후르츠와 방금 먹은 몬스테라 열매, 파인애플들까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좀 전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게 과일을 찾으러 갔던 모양이었다.
별하는 그의 지극한 정성과 배려에 혀를 내둘렀다. 하루 온종일 먹어도 다 해치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실소를 터트렸다.
“저거 다 먹으면 자유의 몸이 되는 건가?”
파비안이 보드라운 한숨을 불어냈다. 어렴풋이 휘는 눈가와 입가에 예쁜 미소가 스쳤다.
“왕자님으로 변신할지도.”
“…….”
별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정색할 뻔한 것을 턱을 물고 참아냈다. 멋대로 일그러지는 만면을 가까스로 이완시켜 발밑에까지 굴러와 있는 과일을 주워 들었다. 옆 사람이 하던 대로 과일의 껍질을 까서 입으로 가져가자 잠잠히 바라보던 파비안이 덧붙여 말했다.
“부족하면 말해 줘. 얼마든지 따 올 테니까. 더 많이.”
농담이 아닌 진담이었다. 별하는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제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과일 무덤과 추가된 것들에 파묻혀 언제까지고 이곳에 묶여 있기 전에.
“괜찮으니까 참아줘.”
057.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반 이상을 남긴 과일은 수분이 많은 것만 따로 분류해 크고 질긴 나무 이파리에 담았다. 만두를 빚듯 이파리를 한데 모아 가느다란 넝쿨로 입구를 조이고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동에 무리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준비해 창 양측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별하는 부른 배를 습관적으로 문지르며 바로 옆에서 걷는 이를 슬쩍 돌아보았다. 넝쿨에 감긴 돌칼이 파비안의 허리춤에 달려 있었다. 자유로운 양손으로 창을 눕혀 어깨에 걸친 그의 모습에서 우물물을 길어 나르던 대한민국 옛 선조들의 모습이 얼핏 덧입혀졌다. 전혀 다른 외형이 주는 위화감은 신기하고 기묘하면서도 우스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별하는 소리 없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전방을 내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