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19)화 (19/49)

어쩔 수 없이 옆 존재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푹 젖었던 앵무새도 별하의 체온이 싫지 않은지 휙 날아가 버리거나 부리로 쪼아대지 않았다.

바람이 비껴 불자 나무 아래로 빗방울이 튀어 들었다. 별하는 다리를 모아 앵무새를 가까이 끌어안은 채로 점점 짙어지는 어둠을 견뎠다.

자신은 처지가 비슷한 녀석과 이런 나무라도 찾아 쉬고 있지만 파비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위험에 빠진 건 아닌지 심려를 내려놓지 못했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곳이라 이성적인 사고나 판단이 생각보다도 어려웠다.

“…….”

비껴드는 비를 맞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얌전히 품에 들어와 있던 앵무새가 불편한 듯 몸을 꿈지럭거렸다. 별하는 등을 세워 움직일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앵무새는 깁스를 한 다리로 용케 나무뿌리를 폴짝폴짝 넘어갔다.

“……?”

설마 죽으러 가는 건가 하고 그는 얼른 앵무새를 뒤따랐다. 그 때 앞을 폴짝거리던 생물체가 돌연 모습을 감췄다. 좀 전까지 죽을 것처럼 비실거리기에 과연 밤을 견딜 수 있을지 내심 걱정하고 있던 터라 별하의 만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새 어딜 간 거지? 집으로 돌아가 버린 건가? 짝은 아직 그 자리에 있는데.

그는 차가운 땅바닥에 누운 사체를 돌아보며 신기루처럼 사라진 작은 온기를 곱씹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데 귓전으로 새소리가 파고들었다. 삐삐삐삑― 삐삐삐삑― 유아들이 걸음마를 배울 때 신는 신발 소리 같았다.

별하는 번득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나무 기둥을 돌자 바람에 흔들리는 넝쿨 사이로 새파란 꽁지깃이 보였다. 앵무새는 저를 찾아온 이를 확인한 후 바로 위쪽의 널따란 나무줄기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안쪽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뭐 하는 거지?”

별하가 어리둥절하게 서 있자 어딘가로 들어갔던 앵무새가 다시 소리를 냈다. 삐삐삐삑― 삐삐삐삑― 별하의 의문이 더 가중되어 갔다.

“설마, 따라오라는 뜻은 아니지?”

그에 답을 하듯 앵무새가 울었다. 삐삐삐삑― 별하는 믿기지 않는 듯 소리가 나는 곳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번뜩 나무줄기를 밟고 올라섰다.

그보다 윗가지로 올랐을 때 별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발을 딛고 선 줄기와 이어진 나무 기둥 앞에 앵무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제법 큰 구멍이 나 있었는데 안쪽이 싱크홀처럼 시커멨다.

언뜻 음침했지만 앵무새는 전혀 겁을 내고 있지 않았다. 별하는 고개를 숙여 그곳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시커먼 안쪽은 나무기둥 두께만큼 넓고 또 깊었다. 비바람이 조금도 들지 않았고, 젖어 있지도 않았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나무 구덩이는 작은 동물이 쉬어가는 장소였던 듯 널브러진 나뭇잎만이 전부였다.

앵무새가 숨겨진 장소를 찾아낸 것도 놀라웠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알린 데에 더할 나위 없이 감격했다. 별하는 앵무새의 재촉과 성화에 바닥의 사체를 가져와 함께 나무 구멍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쪽이 닫힌 공간은 어느 곳보다 아늑했다. 사위에서 불어 들던 차가운 비바람도, 부산한 비바람소리도, 어디서 급습할지 모를 검은 인영을 경계하느라 뒤가 당기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적당한 습기와 적당한 건조함이 느껴지는 나무냄새만이 가득 차 있었다.

안쪽에 자리를 잡은 별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 안벽에 등을 기대고 점점 엷어지는 어둠을 멍하니 응시했다. 제 짝의 상태를 살피던 앵무새가 별안간 별하의 다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따뜻한 체온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의 위에 자리를 잡자마자 금방 꾸벅꾸벅 졸았다.

“…….”

별하는 순순히 자리를 내어주었다. 앵무새와 체온을 나누며 고요한 어둠을 한참 들여다보다 곧 눈을 내리감았다. 많은 상념과 생각들이 스쳤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내일은 더 먼 곳까지 나갈 계획이었다. 정 안 되면 거목에 불을 질러서라도 파비안과의 거리를 좁힐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회가 생겼을 때 조금이라도 더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파비안 외의 존재와 마주칠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하기에.

“후우…….”

별하는 뒷머리를 나무에 기댔다. 곧장 의식이 가라앉으며 곤한 잠기가 밀려들었다. 온종일 계속되던 체력 고갈과 갈증, 허기, 긴장감들이 이제야 걷잡을 수 없는 위력으로 전신을 내리눌렀다. 별하는 나른한 한숨을 불어내며 몸을 뒤척였다. 앵무새는 일어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별하 역시 더는 손도 까딱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이전의 태풍처럼 세차게 휘몰아치는 빗소리에도 눈을 뜨기 힘들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심신을 더 붙잡고 있기가 버거워 움켜잡은 손을 살짝 푸는 순간, 나무 구덩이보다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의식이 빨려 들어갔다.

046.

태풍이 아닐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하늘이 맑았다. 들이켠 숨을 다시 내뱉기 아까울 정도로 공기는 달고 상쾌했다. 땅은 아직 젖어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별하는 나무 아래 둥그렇게 솟아오른 땅을 매끄럽게 골랐다. 아침까지도 짝의 사체 곁에서 떠나지 못하던 앵무새는 그것을 땅에 묻고 나자 더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멀찍한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흐트러진 날개털을 정리하는 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주변 정리를 마친 그는 창을 손에 쥐었다. 간밤에 의외의 장소에서 잠을 푹 잔 덕분에 몸 상태가 꽤 좋았다. 웬만한 근육통은 이제 익숙해서, 어쩌면 근래 들어 컨디션이 가장 좋은 날 같기도 했다.

그가 길을 나서자 앵무새는 깃털 정리를 그만두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더 멀어지기 전에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그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별하도, 그의 어깨에 당연한 듯 걸터앉은 앵무새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길고 길었던 밤을 함께 보낸 탓인지 대수롭지 않게 서로를 받아들였다.

갓 솟아오른 태양이 보이는 곳에서 위치를 가늠한 후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낮은 수풀을 지나다 어떤 동물이 먹다 남긴 과일 찌꺼기로 허기를 채우고 잎사귀에 맺힌 빗물로 갈증을 없앴다. 역시나 금방 허기가 져 땅에 묻은 새가 생각났지만, 어깨에 앉은 친구의 무게 덕분에 상상은 구체화되지 못했다.

별하는 남방을 벗어 땀으로 진득해진 목덜미를 닦은 후 허리에 둘러맸다. 밤새 내린 비로 다른 날보다 습도가 꽤 높았다. 고온다습의 불쾌한 날씨에 바람도 불지 않아 온 피부가 끈적끈적했다. 밀림은 갈수록 태산이라 구슬땀을 뚝뚝 흘리며 걷던 중이었다.

울긋불긋한 관목들이 우거진 야트막한 경사로에서 작은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샘물이었다. 미미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별하는 얼른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가에 창을 꽂아두고 무릎을 꿇어앉아 투명한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자그마한 수중생물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목을 축였다. 땀에 젖은 얼굴과 목덜미를 씻어내고 열이 오르는 팔 위쪽까지 물로 식혔다. 그 와중에도 앵무새는 별하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좀 무거운데.”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짐승은 내버려 두고 발을 씻으러 물에 들어가는데 맞은편의 수풀이 와스스 흔들렸다.

“―?”

울창한 수풀을 헤치며 훅 튀어나온 뭔가가 물을 마시려다 이쪽을 발견하고 움직임을 뚝 멈췄다. 별하 역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수 초간의 침묵과 아이 컨택이 이어졌다.

시커먼 형체는 상대가 뒷걸음쳐 도망가기 전에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크허엉―! 검은 표범이 샘물을 가로질러 별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윽!”

별하는 어서 뒤쪽의 창을 잡으려 했지만 그보다 표범이 훨씬 더 빨랐다. 2미터를 훌쩍 넘을 듯한 몸체를 날려 목표물의 목덜미를 향해 정확히 송곳니를 빼 들었다. 화들짝 놀란 앵무새가 황급히 날개짓을 하며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별하는 목덜미를 감싸듯 팔을 들어 막았다. 표범의 송곳니가 팔뚝에 박히기 바로 직전, 옆에서 날아온 물체에 표범이 물 위를 철퍼덕 나뒹굴었다. 포환 같은 물체에 복부를 정통으로 맞아 분명 강한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금방 몸을 추슬러 일어나더니 수풀 너머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하아…… 하아…….”

꼼짝없이 팔을 물어뜯길 뻔했던 별하는 숨을 가쁘게 게워내며 코코넛 열매가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분명 파비안일 것이다. 급히 수풀을 헤치는 그 때, 코로 느껴지는 익숙한 체취에 손을 우뚝 멈췄다. 그 순간 수풀 너머에서 커다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

별하는 주춤 물러났다. 커다란 인영은 파비안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길을 떠났던 원주민 하이 알파였다. 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 있는 건지 그는 하이 알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라도 눈을 돌렸다가는 좀 전의 표범에게서처럼 목덜미든, 어디든 물어뜯길지도 몰랐다.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의 하이 알파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오메가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별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느릿하게 훑어내리더니 이내 옆을 휙 스쳐 지나갔다. 표범에게 던졌던 코코넛 열매를 주워 들고는 혹 깨지지 않았는지 들여다보았다.

별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알파가 갑자기 덮치려는 건 아닌지 옆으로 멀찍이 비켜서며 물가에 꽂아둔 창을 힐긋 돌아보았다. 동시에 알파 역시 물가에 꽂힌 창을 발견했다. 둘의 시선이 충돌했다.

“…….”

“…….”

별하는 잽싸게 수풀로 뛰어올랐다. 그러다 한쪽 발이 쭉 미끄러져 물속에 엉덩이를 쿵 찧었다.

“읏.”

신음하면서도 첨벙거리며 어서 몸을 일으켰다. 재차 수풀로 들어가 도망치려던 그는 저 혼자 난리법석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하이 알파는 무표정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느냐는 듯.

하이 알파는 공격할 의사가 전연 없어 보였다. 저들의 창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는 코코넛 열매를 가뿐히 쪼개 안쪽의 단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곤 돌칼로 과육을 일일이 긁어내 선뜻 건네어 왔다.

“…….”

별하는 솔직한 심정으로 절을 하고서라도 받아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저 돌칼로 무엇을 했는지 속속들이 아는 이상 배를 곪는 편이 정신적으로 훨씬 이로웠다.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하자 알파는 그것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보란 듯 맛있게 먹어치우고는 다시 멀뚱히 눈길을 맞댔다.

꼬르륵―

“…….”

“…….”

꼬르르륵― 별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느긋하게 발길을 돌렸다. 저는 이만 가볼 테니 멀리 갈 때까지 제발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뜻을 담은 눈길을 건네며 뒤돌아서는데 알파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두. 두.”

별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느직하게 수풀로 들어섰다. 그러자 알파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실렸다.

“두! 두!”

당장 뒷덜미를 잡아채러 달려들 것만 같은 기세에 별하는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알파는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뭔가를 가리키거나 가르쳐주려는 게 아닌, 함께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

“…….”

별하는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고개를 저어 거부했다가는 느닷없이 또 맞을지도 몰랐다. 통증이 겨우 가신 뺨에서 욱신욱신한 환각통이 느껴졌다.

“두. 두.”

알파는 계속해 같은 말을 되뇌었다. 꼬르륵― 짐승과 다름없는 알파는 집요하게 채근하질 않나, 뱃속은 눈치 없이 꼴꼴 소리를 울려대질 않나, 별하는 난처함에 진땀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파비안의 말을 떠올렸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하이 알파는.’

신념이 강한 하이 알파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파비안의 말대로라면, 저를 내기 빵으로 걸고 다른 하이 알파와 겨루는 중에는 어떤 트릭이나 몹쓸 짓을 하지 않으리란 뜻이기도 했다.

문명사회의 하이 알파와 문맹사회의 하이 알파의 행동 양태가 과연 일치할지는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파비안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반인반수에게 다시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별하는 패배감을 느꼈다. 알파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뼈저리게 절감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알파와는 전혀 다른 알파를 떠올렸다.

알파의 위력을 과시하지 않고, 오메가를 성욕 도구만으로 보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짓은 결단코 이행하지 않는 알파. 다정한 알파. 나의 것이 되었으면 하는 알파…….

“두. 두.”

“…….”

별하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이에게 눈길을 던졌다. 뭘 원하느냐고. 알파는 그의 뜻을 똑바로 알아먹은 듯 앞장섰다. 먼저 물가를 나가서는 지면에 꽂힌 창을 휙 뽑아 들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하는 별하에게 선뜻 그것을 던졌다.

별하는 얼떨결에 창을 받아 들었다. 까딱하면 본인이 찔릴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무기를 주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알파는 그런 별하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 익숙하게 수풀을 헤쳐나갔다.

그는 제집 앞마당을 돌아다니는 듯 밀림을 나아갔다. 뾰족한 돌밭이나, 알록달록한 독벌레, 미끄러운 이끼, 제법 깊은 진흙탕을 맞닥뜨려도 돌아가거나 주춤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알파를 멀찍이서 뒤따르던 별하는 도망갈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좀 더 멀어지면 반대편이든 좌우로든 전력으로 내달릴 생각이었다.

“…….”

문득 전과 다르게 가벼워진 어깨를 깨달은 그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녹음의 어디에서도 앵무새는 보이지 않았다. 새파란 깃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인사도 없이 날아가 버린 신기루를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앞쪽에서 알파의 기척이 날아들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 선 알파는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냄새의 정체를 알아챈 별하는 알파가 가리키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가지가 길쭉하게 뻗은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뾰족뾰족한 외피에 둘러싸인 녹색 과실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익히 아는 별하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두리안이다.”

별하는 서둘러 다가가 가까이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대충 봐도 십수 개였다. 강렬한 냄새와는 전혀 다른 맛과 질감을 지닌 두리안은 해변에서도 잘 먹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역시나 맛을 아는 짐승들이 익기 전에 서둘러 따먹는 것인지 파비안도 잘 찾지 못한 그런 과일이었다.

느끼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기억하는 입 안에서 침이 가득 고여 들었다.

별하가 나무를 타려고 하자 알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긴 다리를 몇 번 내젓지 않고도 가볍게 목적지에 도착해 열매를 손에 넣었다. 돌려 딴 그것을 수풀 위에 하나씩 던지며 흙바닥에 굴러떨어질 정도로 수북하게 쌓았다.

별하는 조개껍데기를 꺼내 딱딱한 껍질을 바삐 갈랐다. 질기고 단단해 잘 열리지 않아 창을 세워 틈을 벌렸다. 외피를 겨우 뜯어내자 안쪽에 고이 누운 속살이 드러났다. 그는 얼른 그것을 한가득 크게 베어 물었다. 크림처럼 녹아 없어지는 과육을 두세 입만에 끝내자 알파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별하는 그를 못 본 척 먹는 일에만 집중했다. 과일 더미로 다가온 알파는 익숙하게 껍질을 벗겨 과육을 별하의 앞에 층층이 쌓아 올렸다.

“…….”

별하는 매우 불편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두. 두.”

알파는 그것을 먹으라며 계속해 채근했다. 두. 두. 별하는 손을 대지 않았다.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가 전과 같은 상황이 될 수 있었다. 이쪽은 호의로 받아먹은 것을 상대는 어떤 행위의 승낙으로 이해하는 거라면 절대 받아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큰 실수를 해버렸지만.

“두. 두.”

별하는 알파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제 스스로 두리안의 외피를 열심히 깠다. 쏟아지는 눈길에 나직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필요 없다고. 망할 두두 새끼.”

“두두.”

언뜻 알파의 목소리에서 화색이 느껴졌다. 별하는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알파는 전에 없이 두 눈을 빛내며 되뇌었다.

“두두.”

괴물처럼 보이던 알파가 일순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저를 때리고, 괴성을 지르고, 괴력을 과시하고, 사람의 몸통을 단칼에 갈라버리던 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별하는 외피에서 끄집어낸 과육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네 이름이야?”

알파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누르며 대답했다.

“두두.”

047.

“……어. 그래. 멋진 이름이네, 두두.”

두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생겨났다.

“두. 두.”

“…….”

별하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폭신폭신한 과일만 계속해 입으로 가져갔다. 언제 어느 때에 위험이 발생하든 최상의 컨디션으로 달아나기 위해.

* * *

밤새 비를 맞은 흙은 아직 굳지 않은 상태였다. 파비안은 몸을 낮춰 앉아 움푹 파인 진흙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 손바닥의 반절도 되지 않는 발자국은 자신이 찾는 대상이 아니었다. 크기도 그랬고, 발 모양도 제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뭉툭하게 짓눌려 있을 뿐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듯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게다가 단일 개체의 흔적이 아닌, 무리를 이룬 생물체들이었다.

미지의 ‘그것’이 무조건 한 마리라고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발톱의 크기로 보건대 무리 지어 살 수 없는 특수 개체였다. 그게 아니라면 벌써 눈에 띄었으리라.

파비안은 생각에 잠긴 채 손에 든 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질긴 그것을 쭉 뜯어내 질겅질겅 씹었다. 오래된 껌을 씹듯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여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었다.

진흙에 붙박인 눈을 떼고 느직하게 몸을 세워 일어나던 그 때였다. 파비안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휙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나뭇가지에 뭔가가 앉아 있었다. 짙푸른 녹음의 배경과 언뜻 동색으로 보였지만, 그보다 높은 채도의 새파란 물체가 시야에 또렷이 잡혔다.

“……앵무새?”

이쪽을 전혀 알지 못하고 제 날개를 급히 정돈하는 데에 여념이 없던 앵무새는 별안간 파비안이 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발견하고 작은 머리통을 갸웃거렸다.

서로에게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감지한 듯 침묵을 잇대던 찰나, 파비안은 손에 든 돌칼을 눈앞의 목표물을 향해 힘껏 날렸다. 순식간이었다.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번들거리는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정확히 앵무새에게로 날아갔다.

휘익― 목표물을 미세하게 빗겨나간 돌칼은 나무기둥을 쪼개듯 쩍 박혀 들었다. 그에 앵무새는 날개를 제대로 펼 새도 없이 곧장 지면으로 추락했다. 바로 옆에서 터진 충격파로 기절한 듯 땅바닥에 떨어져 꼼짝하지 않았다.

파비안은 질겅거리던 것을 멀리 훅 뱉어내고 그곳으로 향했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가간 그는 날개를 펴다 만 채로 등을 보이고 쓰러져 있는 앵무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밤새 비를 맞은 건지 새파란 깃털은 꼬질꼬질했고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작은 눈은 뒤집혀 있었고, 미처 다물지도 못한 부리 사이로 분홍색의 혀가 삐죽 나와 있었다.

파비안은 미동하지 않는 앵무새를 발로 툭 건드려 반대로 돌려 눕혔다. 배 쪽이 훤히 드러나는 순간 엷은 눈동자가 깃털에 가려진 발 쪽으로 옮겨갔다.

“…….”

그는 앵무새의 꼬리를 잡아 거꾸로 들어 올렸다. 고개와 두 날개를 축 늘어뜨린 앵무새를 눈높이까지 들어 오그린 두 발을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한쪽 다리에 감긴 붕대를. 앵무새가 스스로 이것을 해냈다기에는, 혹 원주민이 도와줬다기에는 지극히 괴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부목의 위치, 형태로 짐작하는 낯익은 처치법과 방금 막 상처를 감은 듯한 붕대의 재질은 이곳의 것이 아니었다. 면 재질의 새하얀 그것은 언젠가 직접 만져본 적이 있는, 그 안에 박힌 단내까지 핥듯이 맡았던 것이었다.

파비안은 그제야 비로소 의문을 풀어냈다. 어찌하여 이 작은 짐승에게서 별하의 체향을 느낀 건지를.

“탈출한 건가.”

어떻게?

별하가 이곳 어딘가에 와 있음을 깨달은 그는 턱을 굳게 물었다.

고개를 들어 사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오감을 세워 숨을 단전 깊은 곳까지 들이켰지만 별하의 페로몬은 전연 느껴지지 않았다. 원시림의 한가운데 위치한 장소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지형적인 특성 때문인지, 밀림 본연의 냄새밖에 없었다. 이곳 동물들의 냄새도 무척 희미해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

제 손에 잡힌 생물부터 어떻게 처리할지 빤히 직시하는데, 마침 앵무새의 뒤집혔던 눈동자가 스르르 돌아왔다. 파비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늘어뜨린 날개를 퍼덕이며 발버둥을 쳤다. 삐삐삑― 삐삐삐삑―! 앵무새는 저를 거꾸로 세운 위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으로 버둥거렸지만, 몸이 단단히 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부리로 쪼아보려 해도 간발의 차이로 닿지 않았다. 삐삐삐삑―!

파비안은 거칠게 푸덕거리는 앵무새의 양쪽 날개를 가뿐히 움켜잡아 똑바로 돌려세웠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생물체가 주둥이를 벌리며 다급하게 울어댔다. 삐삐삑― 삐삐삐삑― 빠, 삐삐―! 빠, 삐이, 비안! 빠, 비안―!

돌연 사람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파비안의 건조한 오드아이가 일순 크게 뜨였다. 앵무새는 파비안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결코 혼동할 수 없는 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빽빽거렸다. 빠비! 비안―! 빠비―안―!

“…….”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제 이름을 남발하는 앵무새와 눈을 똑바로 맞췄다. 악력에 단단히 붙잡힌 소동물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었다.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파비안은 별하와 제 손 안의 앵무새가 어떻게 만났을지 대강 짐작하는 정도였지만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냈으리라 확신했다. 간밤의 악천후 속에서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고, 제 이름을 학습할 정도라면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 말인즉슨 별하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빠! 비안―! 빠비안―!

파비안은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이 작은 짐승이 어디로 날아갈지는 순전히 도박이었다. 그곳이 저만의 안락한 둥지일지, 제 다리를 고쳐준 은인의 곁일지 그저 운에 맡기는 것이었다. 어쩌면 천운일지도 모르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푸덕거리는 앵무새를 제 반대편 팔 위에 앉혔다. 본능적으로 팔을 움켜쥐는 것을 확인하고 날개를 붙들고 있던 악력을 풀었다. 우악한 구속감이 갑작스럽게 사라지자 앵무새는 당황한 듯 어리둥절한 눈으로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그가 가만히 읊조렸다.

“……어서 가. 널 살려준 은인에게로.”

앵무새는 형형한 오드아이와 마주하자마자 황급히 날갯짓을 하며 훌쩍 날아올랐다.

빠, 비안―! 빠비아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대한 교목들의 가지 사이를 관통해 우거진 녹음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파비안은 눈앞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제자리에서 번뜩 뛰어올라 나무기둥에 틀어박힌 돌칼을 단번에 뽑아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지면에 쿵 내려서서는 앵무새가 사라진 방향으로 곧장 큰 걸음을 내디뎠다.

* * *

부드러운 버터 같은 식감에 엄청난 단맛의 과일도 정신없이 먹고 또 먹은 후에는 슬슬 물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중을 대비해 위장에 빈 공간이 생기지 않을 때까지 입에 든 것을 꾸역꾸역 목으로 넘겼다. 두리안의 역한 냄새를 더는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자 단발의 꿀 같은 식사는 끝이 났다.

별하는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허기가 질 게 눈에 훤해서 제법 많이 남은 과일을 어떻게 할지 고심했다. 껍질째로 들고 다니기에는 뾰족한 외피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고 껍질을 벗겨서 가지고 다니자니 상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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