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겨우 비쳐 드는 차가운 안벽에 등을 기대고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어떻게 해야 여기를 벗어나서 그와, 파비안과 함께 할 수 있을지.
혹여 죽더라도 상관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전적이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채로 어떤 위험에 처했을지 모르고,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로 시간을 죽이는 지금이 훨씬 더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광장의 축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벽에 기댄 그대로 주저앉은 별하는 그와 함께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화려한 금발과 신화 속의 미남자와 빼닮은 외형을 거리낌 없이 으스대던 첫 만남부터 사체인 줄로만 알았던 이곳에서의 재회,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고 억울하기 그지없는 첫 섹스―
“미친…….”
별하는 허탈하게 자조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파비안의 여러 모습들, 배려심이 넘치는 신중한 어투와 조금 쑥스러운 듯 보석처럼 빛나는 오드아이를 내리깔며 엷은 미소를 짓는 얼굴을 가만히 오래도록 떠올렸다.
“…….”
이런 무인도에 함께 버려진 동료로 그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픈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파비안 블랙그레이라는 남자는.
별하는 두 눈을 단단히 떴다. 새하얗게 헝클어졌던 머릿속이 별안간 또렷하게 맑아져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인지했다.
지금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우선 갇힌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리고 파비안과 함께 돌아가야 했다. 원래 있던 그곳으로.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새우잠을 자고 몇 개 들여보낸 과일로 배를 채운 후에도 해가 뜨지 않았다. 다시 꾸벅꾸벅 졸다가 문틈으로 밝은 햇빛이 비쳐 들 때쯤 밖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문가에 앉아 있던 별하는 대번 눈을 뜨고 베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동물의 울음소리로 들렸지만 특유의 어감과 행동거지로 그 뜻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여러 명이 지키던 이곳에는 이제 베타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별하는 다른 베타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남방을 벗었다. 그것을 양손에 감아 팽팽히 당긴 후 문을 발로 찼다. 쾅쾅쾅―!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별하가 문을 차거나 말거나 일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럴 거라 예상한 별하는 쉬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저릿한 발바닥에 감각이 무뎌져 갈 때쯤 문 너머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소음을 일으켰다. 쾅쾅쾅쾅쾅―!
결국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별하는 문 바로 옆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끼이익― 문을 연 베타는 목을 쭉 빼고 컴컴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던지 그늘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는 찰나, 별하는 손에 감은 남방으로 베타의 목을 감았다. 곧장 온 힘을 다해 움막 안으로 끌어당겼다.
“으윽!”
목을 붙잡힌 베타는 바닥에 쓰러져서도 거칠게 반항했다. 별하는 베타의 손질 발질에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팽팽하게 당긴 손을 놓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려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은 악력을 이를 물고 버티고 버텼다. 한참을 컥컥대며 발버둥 치던 베타는 이내 까무룩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하아…… 하아…….”
별하는 숨을 몰아쉬며 얼른 밖을 내다보았다. 역시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광장의 기척을 중심으로 사위를 살피던 별하는 마음먹은 순간 곧바로 움직였다. 바닥을 나뒹구는 베타의 창을 주워 들고 움막의 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파초 군락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몸을 숨겼다.
별하는 태양의 위치와 광장의 각도를 눈으로 어림짐작한 후 그대로 숲을 내달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비 오듯 흘러내린 땀에 옷이 흠뻑 젖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알파만큼 후각 능력이 좋지 못해 누가 쫓아오는지,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지 알 수 없었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다리를 움직였다.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르면서 빈혈 같은 현기증이 옅게 일었다.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과호흡이 이어질 때쯤에서야 뜀박질을 멈추고 이끼로 뒤덮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후우…….”
땀방울이 흘러들어 가 따끔거리는 눈을 문질러 닦으며 서둘러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녹음으로 빼곡한 열대우림은 그곳이 그곳 같았다. 제 아무리 눈에 익은 풍경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전에 마주친 아나콘다처럼 또 무엇과 맞닥뜨릴지 몰랐다.
물론 강가만 잘 피해 다닌다면 아나콘다 같은 파충류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대신 습지를 피해 사는 생물체를 만날 가능성이 좀 더 올라가기에 무조건 사주경계하며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하는 창을 세워 들고, 퍼진 몸을 일으켰다.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태양이 보이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좁은 초지를 발견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태양의 위치를 확인할 때였다. 뒤쪽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소리가 일었다. 들릴 듯 말 듯 미세한 소리를 돌연 자각한 별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무 그늘에 숨은 검은 형체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
별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훅 들이켰다. 그것을 다시 내뱉기 전에 뒤돌아 달렸다. 태양이 기울어지는 방향을 가늠해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치며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볼 시간도 아까워 이를 악다물었다. 넝쿨이 뺨을 스쳐 생채기가 나도, 발바닥에 가시가 박히고 돌멩이에 찢겨 피가 배어나도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아…….”
밀림이 깊어질수록 점점 햇빛이 위력이 약해졌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그늘로 들어서다 별하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무릎을 찧고 넘어졌다.
“윽…….”
진이 다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숨을 뱉는 것도 힘들어 어깨만 들썩거렸다. 등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에 별하는 겨우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검은 인영 하나가 나직한 고무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검은 인영은 어째선지 이전처럼 우악하게 덮쳐들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뭐지?
먹을 뒤집어쓴 데다 그늘에 숨어 있어 검은 인영의 표정을 분간할 수 없었다. 움직임도 없는 터라 전과 다른 태도를 취하는 연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별하는 의아함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느지막이 나타난 또 다른 검은 인영도 마찬가지였다. 저들끼리 알 수 없는 눈길을 주고받을 뿐 별하를 잡으러 오지 않았다. 멀리서 쳐다볼 뿐이었다.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었든 별하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맥이 풀린 다리를 간신히 곧추세워 그늘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검은 인영은 역시나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았다. 여기까지 쫓아와 놓고서도, 멀어지는 목표물을 두 손을 놓고 쳐다만 보았다.
뒷걸음질하던 별하는 얼른 뒤돌아 움직였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이끼냄새가 짙게 배인 그늘 속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곳은 커다란 장작불을 등 뒤에 둔 족장이 누누이 가리키던 바로 그 장소였다.
거대 발톱을 지닌 미지의 ‘그것’이 사는 곳.
파비안이 향한 그곳.
044.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마른침을 넘기며 물과 비슷한 것이라도 찾았지만, 운 좋게 발견한다고 해서 덥석 달려들어 마실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곳에 아나콘다가 서식하는 사실을 안 이상은 물 근처에 가는 것도 사실 두려웠다. 그때도 파비안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분명 거대하고 육중한 몸체에 휘감겨 뼈가 다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질식사했을 터였다.
“…….”
별하는 창을 손에 꽉 움켜쥔 채로 녹음뿐인 숲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원주민들의 거처 주변 숲보다 훨씬 깊고 험한 심림인 것은 확실했다. 해변에서 봤을 때 섬의 가장 내측으로 추정되었던, 화산을 에워싸고 있던 그 원시림이었다.
섬이 이 정도로 넓었던 건가, 새삼 막막한 기분에 휩싸인 별하는 걸음을 멈췄다. 꼬르륵―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찾아들자 더 견디기가 버거웠다. 몸 상태도 몹시 좋지 않아서 당장 쓰러져 자고 싶은 욕구만이 강렬했다.
별하는 잠시라도 눈을 붙일 만한 곳이 있을까 싶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흙바닥은 부드러운 이끼로 덮여 있었지만 밤낮없이 돌아다니는 온갖 곤충들과 숲의 퇴적물들 때문에 잠을 청하기는 적당하지 못했다. 무성한 관목들 아래는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새카만 그늘로 음침했고, 걸터앉기 좋은 튼튼한 나무줄기들은 하나같이 아나콘다처럼 보여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울창한 녹음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는 건지 도통 헷갈렸다. 이쪽 방면이 정말 맞는지, 그림자가 드리우는 반대편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의 연속이었다.
“하아…….”
갈증을 없애야 했고, 배를 채워야 했고, 제대로 된 길을 찾아야 했고, 휴식을 취해야 했으며, 그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파비안과 만나야 했다.
무엇 하나 절실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지금 당장 해내야만 하는 일은 걷기도 힘들 정도로 기력을 쇠진한 몸뚱이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육신을 원하는 만큼은 움직일 수 있어야 길을 찾든, 길을 만들어 내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별하는 달콤한 육즙이 흐르는 과일부터 떠올렸다. 작은 동물의 기척이 빈번하게 느껴지는 만큼 그들의 먹이가 되는 것들도 꽤 발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날카로운 촉이 달린 창으로 수풀을 이리저리 헤쳐 나가며 코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파비안이나 원주민들만큼 후각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이 섬의 과일 냄새에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특유의 향을 풍기는 과일 몇 개는 100미터 밖에서도 그 냄새를 맡을 자신이 있었다.
구린 냄새와 다르게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과육을 떠올리자 혀 밑으로 침이 한가득 고여 들었다.
손에 힘을 넣어 창을 휘두르자 나뭇잎들이 뭉툭하게 잘려나갔다. 시작도 끝도 없는 녹음의 미로를 한참 들어가는 중이었다. 문득 시야로 흰색의 무언가가 휙휙 스쳐지나갔다.
“……?”
주위에 움직임을 가진 물체는 저밖에 없었기에 별하는 잔뜩 경계하며 그곳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젖혀도 눈에 다 담지 못하는 활엽수 아래쪽에 1, 2미터 높이의 떨기나무들이 줄지어 자라나 있었다. 새하얗게 봉긋봉긋 피어난 그것은 분명 꽃송이였다. 새빨간 수술의 꽃송이를 보자마자 별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낯익은 외형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그것을 급하게 따 입으로 욱여넣었다. 수술에 붙은 자그마한 개미들을 발견했지만 하등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이전에 먹었을 때는 쌉쌀한 맛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달콤한 맛밖에 나지 않았다. 진한 설탕물을 빨아먹고 자란 듯 꽃잎의 테두리까지 짜릿하도록 맛있었다. 별하는 손이 닿는 대로 꽃송이들을 뜯어 입 안이 가득 차도록 넣고 또 넣었다.
나무 꼭대기에 붙은 것들만 남기고 꽃송이를 깨끗하게 해치운 그는 손등으로 입을 눌러 닦았다.
“…….”
뭔가 잔뜩 먹은 것 같긴 한데 포만감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허기나마 가시게 해준 꽃들에게 감사의 눈길을 전하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이마에 톡, 물방울이 떨어졌다.
미간을 그러모은 별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녹음 너머로 미미하게 느껴지던 태양빛이 한층 더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은 아니었기에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
이런 지경에 설상가상 비까지 내릴 낌새라니. 그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목적지가 없는 길을 다시 재촉했다.
물웅덩이가 고이지 않을 높은 지대, 줄기가 여러 갈래인 거목이면 가장 좋았지만 아나콘다가 숨어들 만한 음기가 있어선 절대 안 됐다. 주변 수풀이 시야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자라나 있고, 근처에 바나나 나무가 있으면 더 좋았다. 뱀이 바나나 나무를 싫어한다고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별하는 기계적으로 수풀을 헤쳐 나가며 곰곰이 생각했다. 밤을 안전히 보내기 위해 필요한 요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고심해야 할 부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야간에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정처 없이 걷는 와중, 본격적으로 비가 추적추적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별하는 널따란 나뭇잎 하나를 뜯어 한쪽 끝부분을 오므렸다. 그곳에 입을 가져다 대고 나뭇잎 안쪽으로 고여 드는 빗물을 마셨다.
꽃송이를 뜯어 먹은 후에 갈증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마른 점막을 채우며 목으로 넘어가는 물맛이 무척 반가웠다.
배가 불룩하게 올라올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시는 그의 귓가에 어떤 부산한 기척이 스쳤다.
“―?!”
검은 인영들인가 하고 움찔 놀랐다가 계속해서 푸다닥 푸다닥 이어지는 기척에 발소리를 죽이고 주변을 살폈다.
엄청난 둘레의 나무 뒤를 조용히 도는데 푸다닥거리는 기척이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수풀과 나무덩굴이 우거진 부근에서 흙탕물과 빗물이 난잡하게 튀고 있었다. 수풀이 요란하게 흔들리면서 이파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뿌연 빗줄기 사이로 새파란 무언가가 언뜻언뜻 보였다.
“……?”
채도 높은 청색의 무언가는 제 몸을 돌돌 휘감은 녀석에게서 벗어나려 한쪽 날개를 급박하게 펄럭였지만 무지막지하게 조이는 위력을 더 견디지 못하고 금방 고꾸라졌다. 2, 3미터 길이의 굵직한 뱀은 기다렸다는 듯 주둥이를 꾸역꾸역 늘여 죽은 새를 집어삼키려 했다.
별하는 창을 세워 들자마자 꼿꼿하게 선 뱀의 대가리를 향해 날렸다. 갑작스런 공격에 화들짝 놀란 뱀이 주둥이를 확 오그렸다. 죄고 있던 먹이까지 내버리고 황급히 수풀로 스스스― 꼬리를 흔들며 도망쳤다.
“제기랄.”
쯧, 혀를 찬 별하는 빗줄기 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꽂힌 창을 뽑아 들었다. 뱀이 사라진 자리에는 죽은 새만 덩그러니 비를 맞고 있었다. 긴 꼬리와 배, 가슴, 날개, 머리까지 알록달록한 앵무새였다.
“…….”
별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저와 같은 처지의 생물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먹어도 될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미칠 듯한 허기가 없었지만 밤을 지내고 내일이 되면 분명 후회할 터였다. 다시 돌아온 뱀에게 앵무새를 빼앗기기 전에 얼른 먹어버리지 않은 것을.
빗속에 우두커니 서서 죽은 새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그 때 근처 수풀 바닥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굵은 빗방울이 수풀 위로 떨어지는 정도의 자그마한 기척이었다. 별하는 그곳을 향해 창을 겨눴다. 뱀이 어디로 튀어나올지, 어깨를 세우고 수풀을 주시했다.
“…….”
머리칼이 흠뻑 젖고, 발바닥이 흥건해지고, 창을 치켜 세운 팔에 쥐가 내릴 때까지 뱀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죽은 새도 그대로였다.
착각이었나? 생각하는 순간 다시 수풀이 흔들렸다. 빗물에 젖어 든 바닥으로 새파란 뭔가가 휙 지나갔다.
별하는 곧장 창을 내리고, 몸을 숙여 수풀 아래쪽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가 그늘 속에 숨어 있었다.
도망갔던 뱀이 아니었다. 빗물에 새파란 깃털이 흠뻑 젖은 그것은 죽은 새와 똑같은 앵무새였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늘에 몸을 숨긴 채로 죽은 제 친구를 쳐다보던 앵무새는 별하와 눈을 마주치자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앵무새는 깊은 그늘로 숨어들어 갔다.
별하는 수풀에서 멀찍이 물러나, 근처 나무 아래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나무 윗부분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묵직해진 남방을 벗어 물기를 짜냈다. 젖은 머리칼과 얼굴을 그것으로 닦아내다 문득 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무슨 재주로 이 넓고 깊은 밀림에서 파비안을 찾으려고 한 건지 자신에게 의문을 느꼈다.
별하는 의아했다가 곧 걱정스러워졌다가 이내 두려움을 느꼈다. 미로 같은 밀림에 갇혀 이대로 끝도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도는 상상을 하자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덮쳐 들었다.
족장이 가리킨 곳으로 가면 파비안을 만날 수 있으리라 자신했었다. 파비안의 뛰어난 후각으로 충분히 저를 찾을 수 있다고 막연히 믿었었다.
그러나 만약 길을 잘못 들어 반대편으로 온 것이라면? 서로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이렇게 나아간다면? 혹 파비안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벌써 일어났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들이 뇌리에서 몸집을 불려나갔다. 별하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자근거렸다. 이러다 그와 만나기도 전에 정신병에 걸려 죽을 것만 같아서 의식적으로 되뇌었다.
그와 만날 수 있다. 그와 만난다. 파비안과 반드시 만난다.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되뇌고 또 되뇌었다.
시간이 지나자 가쁜 호흡도, 들이치던 불안감도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한 별하는 멀거니 서서 뿌연 장막에 뒤덮인 밀림을 바라다보았다.
“…….”
빗소리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세상은 고요했다. 낙오되어 버려진 듯 홀로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그 때였다. 멀찍한 수풀 아래 숨어 있던 앵무새가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슬그머니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045.
빗소리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세상은 고요했다.
낙오되어 버려진 듯 홀로 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그 때였다. 멀찍한 수풀 아래 숨어 있던 앵무새가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슬그머니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한쪽 발이 불편한 듯 뒤뚱뒤뚱 나와서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앵무새는 곧장 빗속으로 들어가 덩그러니 누운 친구의 늘어진 날개를 부리로 물고 수풀 아래로 잡아당겼다. 죽은 데다 비에 젖어 묵직한 사체는 쉬이 끌려오지 않았다.
새파란 깃털에 진흙이 묻어 더러워지고 뒤틀린 발의 발톱이 부러져도 앵무새는 포기하지 않았다. 흠뻑 젖은 날개를 힘겹게 펄럭여 함께 수풀로 들어가려 안간힘을 썼다.
“…….”
별하는 그를 묵묵히 응시했다. 금방 지나가는 비가 아니었던지 빗방울은 점점 더 세차게 밀림 속을 파고들었다. 힘에 부친 앵무새는 차갑게 식은 친구 옆에 오도카니 서서 비를 맞고만 있었다. 저도 함께 죽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별하는 불현듯 빗속으로 들어갔다.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옆으로 다가가도 앵무새는 꼼짝하지 않았다. 겁을 먹은 듯한 눈만 끔뻑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그런 앵무새의 밑을 받쳐 들었다.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거부하는 앵무새에 이어 물웅덩이에 잠긴 죽은 새를 함께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앵무새의 거친 날갯짓이 점차 누그러졌다.
비가 한동안 그칠 것 같지 않아서 별하는 좀 더 안전한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몇 사람이 손을 이어야 겨우 잡힐 만큼 두꺼운 나무의 밑동은 높다랗게 솟아난 뿌리에 둘러싸여 천연 요새 같았다. 무성한 이파리들 덕에 아직 젖지 않은 기둥 아래로 들어온 그는 앵무새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가까운 곳에 작은 사체를 내려놓자 앵무새는 서둘러 친구의 옆으로 뒤뚱뒤뚱 다가왔다. 발이 바깥으로 꺾여서 몸을 똑바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딪쳤다.
형제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일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짝이었었는지 이전 상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제 목숨이나 통증은 하등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별하는 넋이 나가 있었다. 앵무새에게 제 모습을 투영해 보고 있었다. 반쪽을 잃은 작은 생물에게서 자신의 가장 좋지 않은 미래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상상조차 끔찍했지만 어쩌면, 어쩌면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뱀과 싸우다 죽은 짝과 그리고 홀로 남겨진…….
“…….”
별하는 머리를 흔들어 털었다. 눌어붙으려는 사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 제 젖은 체크무늬 남방을 들췄다. 남방 안쪽의 티셔츠 밑단을 대번 이로 쭉 찢어냈다. 사체 옆에 인형처럼 서 있는 앵무새의 아래를 놀라지 않게 천천히 받쳐 들어 제 다리 위로 데려왔다.
앵무새는 저항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애착과 의욕을 전부 잃어버린 듯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럼에도 손끝으로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조금만 참아.”
별하는 작게 속삭이며 새끼손가락 두께의 뒤틀린 다리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확인했다. 뭔가에 강하게 부딪친 건지, 묵직한 물체에 눌렸던 건지,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뱀의 미끄덩하면서도 우악하게 죄어드는 몸체를 떠올리던 그는 제 머리 위를 힐긋 올려다보았다.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손을 움직였다.
오메가 연맹이나 군대에서 배운 응급처치술은 대상이 사람이었다. 별하는 조류는커녕 개와 고양이도 치료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다친 사람에게도 다친 부위를 소독하고 드레싱을 해준 게 전부였다.
붕대만으로 골절 부위를 처치하기에는 부족해 주변을 살폈다. 부러진 다리를 지탱해 줄 지대대가 필요했다. 별하는 발밑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발견하고 주워 들어 가운데를 부러뜨렸다. 힘없이 톡, 부러지는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지지대가 될 만한 것을 다시 찾았다.
그 때 뭔가가 머리칼을 스치는 느낌에 번득 고개를 들었다. 나무줄기에서 수십 갈래로 뻗어나간 가지를 타고 길게 늘어진 넝쿨이 바람에 흔들리며 스친 것이었다.
별하는 얕은 숨을 뱉어냈다. 그러다 곧게 뻗어 내린 넝쿨을 발견하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굵기도, 경도도 부목 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을 적당히 끊어내려는데 껍질이 질겨 쉽게 뜯기지가 않았다. 손톱으로 잘라내려다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조개껍데기가 고이 들어 있었다. 이전에 사용한 적이 있어 이가 나가 있었지만 이것을 자르기에는 썩 괜찮았다.
‘면도보다 훨씬 유익한 목적이군,’
‘어떻게 사용하든 도구는 편리하면 되는 거야. 치아나 손톱이 필요한 작업을 할 때는 특히나.’
파비안과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라 별하의 입가로 희미하게 온기가 맺혀 들었다.
“…….”
어렴풋하게 맴돌던 온기는 금방 날아가고 입매는 한층 단단하게 굳어졌다.
별하는 조개껍데기의 날을 세워 쇠사슬처럼 질긴 넝쿨을 여러 번 그어 내렸다. 그러자 금방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을 앵무새의 다리 길이에 맞게 잘라낸 뒤 새파란 깃털로 뒤덮인 등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앵무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뒤틀린 다리를 재빠르게 제자리에 돌려 넣었다. 뚜둑―
앵무새는 날개를 한 번 퍼덕일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별하는 원래 자리로 돌아온 다리에 부목을 대고 찢어낸 티셔츠 붕대로 다리를 감았다. 좀처럼 단단히 감기지 않아 부목과 붕대를 몇 번이나 이리저리 맞춘 후에 가까스로 원하던 형태 비슷한 모양으로 처치를 끝마쳤다.
볼일을 완전히 끝낸 후에도 앵무새는 요지부동이었다. 별하의 허벅지 위에 올라선 채로 제 짝이 누운 방향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별하 역시 앵무새를 내치지 않았다.
이 무시무시한 밀림에는 먹고자 하는 본능만이 전부인 포식자들밖에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이곳에서의 피식자는 오롯이 자신이었는데, 저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마주하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유대감, 동지애와 비슷한 그런 감정들에 줄곧 날이 서 있던 신경이 느슨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따뜻했다. 작은 몸집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이 순간 어떤 각오와 다짐보다 지친 마음을 위로했다.
빗물이 이곳저곳에서 폭포처럼 쏟아졌다. 강처럼 흐르는 빗물에 잠긴 바닥 이끼가 해초처럼 너울거렸다. 길게 늘어진 나뭇잎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익숙한 모양새로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기울자 금방 한기가 밀려들었다. 별하는 젖지 않은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불온한 생물체들에게 발각당할 위험은 가급적이면, 지금 이런 때만은 피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