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17)화 (17/49)
  • “지옥인 줄 알았는데…….”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를 듣지 못한 파비안은 다시 말해 보라는 듯 별하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으음?”

    별하는 그의 키스에 응수하며 가만히 속삭였다.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

    “이대로 계속.”

    파비안은 힘에 부쳐 꼼짝하지 못하는 별하를 번뜩 일으켜 세워 안았다. 힘들어하면서도 제 목에 두 팔을 감아 밀착해 오는 이의 허리와 뒤를 단단히 받쳐 안고서 가뿐하게 번쩍 일어났다.

    “읏.”

    희미한 숨소리도 없이 별하를 품에 안은 그는 바로 옆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허리까지 오는 낮은 수심에 몸을 담그고 앉아 이곳저곳에 묻은 흙을 씻겨내 주었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과 번들거리는 목덜미, 체액으로 끈적끈적한 다리 사이, 좀 더 안쪽에 손을 넣어 씻겨주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대고 키스했다.

    입술이 열리자마자 새빨간 살덩이들이 뒤섞였다. 파비안은 별하의 움찔거리는 뒷덜미를 한 손에 잡고 고개를 기울여 점막 안을 깊게 파고들었다.

    “으, 으응…….”

    “흠.”

    부드럽게 감기던 살덩이들이 금방 섹스를 하듯 급하게 맞물렸다. 곧추세운 혀를 성기처럼 빨며 솟아나는 단물을 허겁지겁 핥아먹었다. 서로를 쫓던 눈길이 맞닿는 순간 다시금 불이 붙어 후끈 달아올랐다.

    별하는 다리를 벌려 재촉했다. 파비안은 거칠게 흐트러진 숨을 내뱉으며 그 사이로 돌진해 들었다. 겨우 우므러들었던 안쪽이 다시 빠듯하게 벌어지며 열기둥에 꿰뚫렸다.

    “하읏……!”

    한껏 예민해져 있던 육체는 금방 쾌감에 휩싸여, 급박하게 파고드는 페니스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긴장한 육체가 다시 맞부딪칠 때마다 수면에 거친 파문이 일며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흐읏, 읏, 으응…….”

    “음.”

    파비안은 힘이 빠진 별하가 물속에 처박히지 않도록 팔로 지탱하며 굳건하게 허리 짓을 했다. 따뜻한 물속에서도 오한이 찾아든 피부를 혀로 일일이 핥아 올리며 곤두선 젖꼭지와 그 주변을 정성스레 빨았다.

    불그스름한 피부 위에 수없는 흔적을 만들어나가며 별하의 안쪽을 끊임없이 찔러 들어 자극했다.

    “파, 파비안……!”

    갑작스런 오르가즘에 별하가 허리를 크게 들썩였다. 그에 강하게 맞물렸던 페니스가 쑤욱 빠져나갔다.

    “하, 으으…….”

    “하아…….”

    파비안은 코끝까지 물에 잠긴 별하를 일으켜 벽에 돌려세웠다. 신음하듯 헐떡이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서 벌어진 엉덩이에 제 성난 하반신을 문질렀다. 꽉 닫힌 주름이 느슨해지는 순간 허리를 쳐올려 안을 파고들었다.

    강한 위력이 뒤를 칠 때마다 엉덩이가 쩍쩍 벌어지며 마른 등허리가 움찔거렸다. 뒤에서 쳐올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별하는 미끈한 허리를 뒤틀며 고통에 신음했다.

    “흐으…….”

    파비안은 그의 등을 제 가슴팍으로 눌러 압박하듯 단단히 끌어안았다. 납작한 가슴을 움켜쥐고 곧장 허리를 세차게 놀렸다. 퍽퍽퍽― 수면이 넘칠 듯 출렁였다.

    “하으윽, 파비……안…….”

    교접된 곳에서 진득하게 뒤섞인 체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뱃속에 가득 찬 열기를 견디고 견디던 별하가 소리 죽여 사정하는 순간 파비안이 안쪽에서 쑥 빠져나가 급히 정액을 배출했다.

    “하아…… 하아…….”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섹스를 마친 그들은 갈잎 위에 누워 나른하게 흩어지는 호흡을 다잡았다. 어떤 소음도 악취도 존재하지 않는, 젖은 풀냄새와 서로의 향긋한 체향만이 느껴지는 곳에 몸을 섞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별하는 숨을 고요하게 내뱉으며 파비안의 오드아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불태울 듯한 열기는 더 느껴지지 않았지만 잔 열감이 남아 반짝거렸다.

    “애인 없다는 거 거짓말이지?”

    파비안은 별하의 새파란 흰자위 안에서 도록도록 굴러다니는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넘치는 욕구를 애인도 없이 어떻게 해결했어? 애인이 있다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네 페로몬에 끄덕하지 않을 오메가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마음껏 할 수 있잖아. 딱히 오메가가 아니더라도.”

    “…….”

    “아, 그래서 애인을 만들지 않는 건가?”

    파비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기에 부정하려다가 분위기에 취한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 그저 말을 아꼈다. 별하는 이해한다는 듯 긴 한숨을 불어냈다. 똑바로 돌아누워 구덩이 천장의 나무뿌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엉덩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

    “…….”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미안.”

    파비안은 정말 미안한 듯 눈길을 내렸다. 물기가 살짝 마른 별하의 피부를 쓸며 뺨과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억양 없는 저음이 머뭇거리듯 흘러나왔다.

    “이런 단내는 처음이라.”

    별하는 한숨과 함께 웃었다. 조금도 웃지 않는 파비안의 손등에 키스를 전하며 답했다.

    “이런 단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이 알파가 특별하다고 해주니 황송하네.”

    “…….”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이야. 나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라. ……조금 당황스럽네.”

    “…….”

    “…….”

    파비안은 말없이 별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길이 맞닿자 자연스럽게 입술이 스쳤다.

    서로 반대로 고개를 기울여 다시 입술을 부딪치려는 그 때, 파비안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의 입술을 응시하던 별하가 움직임을 멈춘 오드아이를 올려다보았다. 불쑥 끼쳐 든 불안감을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야?”

    파비안이 몸을 세워 일어나 숨을 깊이 들이켰다.

    “…….”

    숲냄새, 강물냄새, 젖은 흙냄새, 별하의 진한 체향 사이로 느껴지는 이질적인 냄새를 선명하게 감지하고는 제 어깨 너머로 별하를 돌아보았다.

    “근처로 되돌아왔다.”

    “벌, 써 발각된 거야?”

    별하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일변했다. 파비안은 새파랗게 질색해 굳어버린 별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대답했다.

    “아직 이쪽을 발견하진 못했어. 근처를 맴돌고만 있군.”

    “어떻게 알고 되돌아온 거지? 설마 그 거리에서 이쪽 냄새를 맡았다거나 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

    무언은 긍정이었다. 파비안은 섹스를 나눌 때 발현된 페로몬으로 이곳의 위치를 들켰음을 확신했다. 그들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옷가지를 서둘러 꿰어 입었다. 별하는 척척하게 젖은 남방을 위에 걸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무리 체취가 강하다 해도 그 거리에서 맡는다는 게 가능해? 내가 하이 알파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건가?”

    파비안의 고급 셔츠와 바지는 이미 거의 다 마른 상태였다. 그것을 금방 걸쳐 입은 그는 별하의 뒷머리에 붙은 갈잎 부스러기를 떼어내 주며 말했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어.”

    “세 가지나……?”

    “하나는 별하 너도, 나도 체내에 발정억제제가 더는 남아 있지 않아 페로몬이 과도하게 발현되었을 경우, 다른 하나는 저들의 후각 능력이 우리의 예상을 훨씬 웃돌지도 모를 경우, 나머지 하나는.”

    별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파비안은 담담히 이어 말했다.

    “우연.”

    “……아, 우연.”

    파비안은 밖으로 눈짓하며 먼저 앞장을 섰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별하는 그를 느지막이 뒤따르며 독백처럼 물었다.

    “우리가 각인을 한다면, 짝이 된다면 저놈들도 포기할까……?”

    이곳에 들어왔던 대로 물길을 되짚어가던 파비안이 조용히 답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저쪽은 하이 알파의 긍지에 사활을 건 상태라 아닐 가능성이 좀 더.”

    “…….”

    “확실한 건, 각인하면 너와 나 둘 다 잡아먹으려 들 거다.”

    분명 확실했다. 별하는 빌어먹을,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멀어진 파비안과 얼른 거리를 좁혔다.

    밖은 어느새 엷은 음영에 잠겨 있었다. 태양이 기울어 그늘이 진해진 구덩이를 벗어나 반대편 숲으로 넘어갔다. 강물을 따라서 그곳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속력을 내 이동했지만 금방 체력이 떨어진 별하는 앞선 이의 보폭을 도통 쫓아가지 못했다. 뾰족한 돌이나 거친 나무껍데기, 벌레 무리, 미끄러운 이끼를 만날 때면 무거운 걸음이 한층 더 느려졌다. 그러다 파비안의 손에 잡혀 끌려가기도 하고, 등에 잠시 업혔다가, 다시 끌려가기를 반복했다.

    복잡한 밀림은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길잡이 역할을 하던 햇빛마저 약해지자 같은 곳을 뱅뱅 맴도는 듯 풍경의 변화를 전연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 허벅지만 한 넝쿨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주변 수목을 뒤덮은 거목 아래서 잠시 숨을 골랐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별하는 가쁜 숨을 고르며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아직 쫓아오는 거 같아?”

    그늘 아래서 사위를 살피던 파비안이 의아한 듯 읊조렸다.

    “어느 순간 사라졌어.”

    “체취가? 이제 안 나? 겨우 따돌린 건가?”

    그는 별하의 물음에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아무 냄새도 안 나.”

    별하는 발바닥을 콕콕 찌르는 돌멩이를 털어내며 되물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

    주변을 살피던 파비안이 별하를 돌아보았다. 몸을 낮춰 앉아 그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옴폭 들어간 발바닥 안쪽에 제법 큰 가시가 박혀 있었다.

    “가만히. 가시 박혔어.”

    “으, 어쩐지 따갑더라.”

    그것을 손톱으로 천천히 끄집어내는데 별하의 눈길이 반사적으로 파비안의 머리 뒤를 향했다. 검게 그늘이 드리운 가지 아래, 굵다란 넝쿨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넝쿨과 비슷한 두께의, 넝쿨과 같은 누른색을 한 무언가는 서서히 벌어지는 주둥이 사이로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별하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파, 파비안 뒤!”

    파비안이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거대한 아나콘다가 새빨간 목구멍을 쩍 찢어 벌리며 달려들었다.

    “위험해―!!”

    별하는 황급히 파비안의 등을 끌어안고 옆으로 굴렀다.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아나콘다의 이빨이 청바지에 걸려 수풀로 확 끌려들어 갔다.

    042.

    “으윽! 파비…….”

    파비안이 기민하게 별하의 손을 붙잡아 수풀 밖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8, 9미터를 훌쩍 넘을 듯한 거대 생물체는 제 이빨에 걸린 별하를 바로 휘감을 듯 꼬리를 꼿꼿이 세워 흔들어댔다.

    “별하! 꽉 잡아!”

    파비안은 별하를 단단히 움켜쥔 채로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발에 차이는 크고 뭉툭한 돌멩이를 손에 쥐고 휘감기기 직전의 아나콘다의 몸통 한가운데를 내리쳤다.

    카악―! 자극을 받아 더 강하게 휘감기는 몸체 사이를 파고들어 가, 별하가 양손으로 간신히 붙든 대가리를 향해 돌멩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퍼억! 강한 위력으로 내려치자마자 아나콘다의 눈알이 툭 불거져 나오며 벌어진 주둥이가 단번에 닫혔다. 파비안은 거센 돌질을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연타해 아나콘다의 대가리를 수차례 내리찍었다.

    질긴 비늘이 찢기며 무른 살과 체액이 뭉그러지듯 쏟아져 나왔다. 짓뭉개진 아래로 하악골이 드러나는 순간 사나운 파충류가 거대한 몸뚱이를 바닥에 널브러뜨렸다.

    별하는 파비안의 도움을 받아 제 위로 쓰러진 아나콘다의 무거운 사체를 겨우 밀어내고 빠져나왔다. 아나콘다의 대가리를 박살 내버린 파비안의 손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다쳤어? 어디 봐.”

    별하는 서둘러 제 남방으로 파비안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확인했다. 그의 손바닥은 굳은살이 박인 것 말고는 말짱했다. 파비안은 흐트러진 숨을 길게 불어내며 말했다.

    “내 피가 아니야.”

    서로의 넋이 나간 얼굴을 쳐다보다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늘 아래 숨어 있던 다른 한 마리가 느릿하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아나콘다보다 몇 배로 큰 놈이었다.

    “…….”

    “……나도 돌멩이 좀.”

    당장 달려들 듯 혓바닥을 긴박하게 날름거리는 아나콘다의 새카만 눈알에 돌연 뭔가가 휘익 날아와 박혔다. 극락조의 꼬리털로 깃대를 늘인 화살이었다. 연달아 날아온 화살이 아나콘다의 반대편 눈알을 단박에 파고들었다.

    칵―! 카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다시 한번 일었다. 멀리서부터 날아온 화살이 요동치는 대가리를 정확히 꿰뚫는 순간, 거목도 부러뜨릴 듯하던 생물체는 이전의 것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별하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얼른 돌아보았다. 백색 강 너머에 검은 인영들이 늘어서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파비안은 옆 사람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신호하면 좌측 바위로 달려. 바로 뒤에 있을 테니 앞만 보고.”

    “자, 잠깐만…….”

    “Three.”

    별하는 어금니를 물고 제 옆에 선 파비안과 강 너머의 검은 인영들을 돌아보았다.

    “Two.”

    “잠, 하아…….”

    “One.”

    툭 뱉자마자 파비안은 손에 든 돌멩이를 강물 위로 날렸다. 수면이 거칠게 튀어 올라 시야를 가리자마자 별하는 몸을 틀어 바위로 내달렸다. 파비안이 앞선 별하에게로 따라붙기 직전, 화살이 그보다 빠르게 날아왔다.

    “윽……!”

    팔에 강한 통증을 느낀 별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파비안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이전까지와 다른 소리가 일었다. 슈우욱― 화살보다 훨씬 둔탁한 파열음을 일으키며 날아간 물체가 그들의 사이를 갈라 뒤편 나무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파비안은 우뚝 멈춰 선 채로 옆쪽에 박혀 든 것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버린 돌칼이었다.

    “…….”

    강 너머의 하이 알파는 가만히 활시위를 당겼다. 활촉은 다른 어디도 아닌 정확히 별하에게로 향해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그것은, 더 소란을 부리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오메가를 죽이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파비안은 피가 흥건히 배어난 별하의 팔을 내려다보며 사납게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Fuck.”

    다시 끌려간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많던 원주민들은 전부 어디로 간 것인지, 제 움막으로 숨어들어 간 건지, 밤 사냥이라도 나간 건지 작은 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역겨운 불에 탄 고기냄새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광장을 관통하는 아나콘다 사체들의 비릿한 악취가 천지를 메우고 있었다.

    단단히 성이 난 듯한 족장은 장작불 앞에 선 별하를 이리저리 살폈다. 별하의 목덜미를 들여다보고 각인이 되지 않은 것을 재차 확인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나무 아래의 하이 알파에게 동물 울음 같은 소리를 건넸다. 하지만 하이 알파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파비안만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돌칼을 들고 있던 파비안은, 이제는 피가 멎어 검게 굳은 체크무늬 남방의 혈흔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러다 별하와 시선이 마주치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별하는 괜찮다며 눈짓했다. 피가 조금 배어나긴 했지만 실제로 화살은 살을 뚫지 않고 스쳐지나간 정도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상처였다.

    그럼에도 파비안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침묵한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겉은 호수의 수면처럼 더없이 잔잔했지만 그 안쪽은 크루즈에서 만난 폭풍우보다 더한 격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앞의 모든 형상들을 송두리째 뽑아 형체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리고픈 열망과 싸우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을 감지한 족장은 거친 육성을 내질렀다. 목에 걸린 거대 발톱을 치켜들고 캄캄한 심림 어딘가를 계속해서 가리켰다. 거대 발톱을 지닌 미지의 생물체의 서식지를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곳을 조심하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거대 발톱을 다시 품 안에 소중히 돌려 넣는 행위를 목격하고서야, 별하와 파비안은 일련의 알 수 없는 상황들이 가리키는 바를 온전히 알아차렸다. 그것을, 거대 발톱을 가져와야 하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족장은 그 후로 갈고리 같은 손을 펼쳐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날수 같은 숫자와 연관된 무언가를 일러주기도 했다. 유난히 새카만 밤하늘과 별하를 번갈아 가리키며 목청을 커다랗게 돋우는데 언뜻 그들만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것 같았다.

    잠잠히 타들어 가는 장작불 위로 뭔가를 쏟아붓자 새빨간 불길이 교목의 꼭대기에까지 닿을 정도로 솟구쳤다. 족장이 지팡이로 땅을 굴렸다. 그늘에 숨어 있던 검은 형체들도 발을 굴려 천둥 같은 소음을 만들었다.

    쿵― 쿵― 쿵― 쿵―

    보이지 않는 움막 안쪽에서 또한 가세해 지진처럼 지면을 흔들었다.

    쿵― 쿵― 쿵― 쿵―

    출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이 알파는 그것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별하는 얼른 파비안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베타들에게 붙잡혀 저지당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음에 당황한 별하는 당장 사라져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이를 외쳐 불렀다.

    “파, 파비안!”

    파비안은 별하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단번에 눈길을 맞췄다. 별하는 애써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이래야 하는 걸까? 이게 정말, 우리한테 필요한 일일까?”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지만 별하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이 순간이 끝일지도 몰랐다. 모든 시작의 끝.

    파비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분한 저음으로 인사를 건네어 왔다.

    “갔다 올게.”

    별하는 그에게 두 눈을 붙박은 채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얼마나 걸리는 거야?”

    “저 발톱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그때부터 시작이겠지.”

    “말도 안 돼. 기한이 없다는 거잖아.”

    다급히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땅을 굴리는 천둥은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또 다른 하이 알파가 출발선을 넘어설 때까지 계속 이어질 기세였다. 파비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전과 다름없는 억양으로 담담히 말했다.

    “기한은 없지만 목표는 있어.”

    “…….”

    “그거면 충분해.”

    별하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전혀 안 충분해…….”

    아무리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하이 알파라고 해도 파비안은 현대인이었다. 이곳에서 자고 나란 원주민들과는 사고방식부터 달랐다.

    좀 전의 무시무시한 아나콘다를 손쉽게 잡아낸 그들은 나름의 사냥 방식을 대대로 물려받은, 말 그대로 토착 인종이었다. 그 먼 곳에서 자신들의 페로몬을 감지할 정도로 후각 능력이 뛰어나고, 야간에도 밀림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을 갖고 있고, 벌레가 기웃거리지 않는 두꺼운 피부에다, 이곳 지형지물의 특성을 꿰뚫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강점은, 이미 한 번 미지의 ‘그것’과 조우한 적이 있는 듯한 족장의 이야기들을 서로 공유한다는 데 있었다.

    그에 반면 파비안은 손에 든 돌칼이 전부였다. 신체적인 특성은 이곳의 하이 알파도 뛰어넘을 만큼 우수하지만 그 외에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다. 아나콘다를 비롯해 많은 변수들이 도사리는 이곳에서는 피지컬이 빼어나다고 해도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인간의 완력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들이 필요했다. 게다가 지금 가장 중요한 ‘그것’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직 감으로 짐작하는 정도였기에 별하의 상심은 깊어져만 갔다.

    별하는 곧바로 돌아설 듯한 파비안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당장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이 조급하게 달싹거렸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심하란 말도, 잘 갔다 오라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파비안 역시 건네는 말이 없었다. 잠시간 눈을 마주하다 이내 돌아섰다.

    별하는 저를 억압하는 베타들의 악력을 떨쳐내려 팔과 어깨를 비틀었다. 팔꿈치를 세워 휘둘렀지만 양쪽에서 단단히 잡아끄는 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자꾸만 무겁게 잠기는 목에 힘을 실어 목소리를 높였다.

    “파비안……!”

    억눌렸던 목소리는 우! 우! 우! 우! 기합까지 넣은 천둥소리를 넘지 못하고 얼마 못 가 흩어졌다. 별하는 입술을 찢을 듯 짓이기며 목 안에 꽉 들어찬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를 억눌러 삼켰다.

    등을 보인 채 멀어지던 파비안이 어둠에 휩싸인 밀림 앞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좇던 별하는 숨을 훅 들이켰다. 눈이 마주친 순간 복부에 힘을 주고 이전보다 더 크게 외쳤다.

    “진심이었어!”

    파비안은 진한 음영에 몸을 반쯤 묻은 채로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별하는 쉬지 않고 다급하게 외쳤다.

    “억제제 먹고 싶다고 말했던 거 진심이었어! 물어달라고 했던 것도! 같이 있다고 싶다고 했던 것도, 페로몬 때문만이 아니야! 페로몬 때문이 아니야! 왜냐면 지금도 같은 마음이니까!”

    043.

    우두커니 선 파비안이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모습이 마치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별하는 다음의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멀리서 눈을 맞댄 채로 떨리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도, 나도 이럴 줄 몰랐어. 알파를 ……하게 될 줄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미동 없이 서 있던 파비안은 곧 발길을 돌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밀림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갔다. 기다렸다는 듯 휘감기는 어둠에 차츰차츰 묻혀들더니 이윽고 희끄무레한 잔영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별하는 흔적도 남지 않은 그의 자취를 눈으로 좇으며 아연히 중얼거렸다.

    “네가 좋아졌다고…….”

    남은 하이 알파까지 길을 떠난 후에도 천둥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장작불은 하늘까지 닿을 듯 그 기세를 멈추지 않았고, 움막에 숨어 있던 알파들도 하나둘 광장으로 나와 아나콘다 해체 작업에 끼어들었다.

    누군가 생목으로 노래를 불렀다. 금방 난타질이 가세해 들며, 목적을 달성한 하이 알파가 최초로 귀환할 때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을 축제가 시작했다.

    별하는 후미진 움막으로 끌려가 갇혔다. 아무것도 없는 원형의 작은 공간에는 문으로 비쳐 드는 달빛이 전부였다. 그는 안으로 떠밀린 그대로 서 있었다.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는 인영을 멍하니 바라보다 번득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문은 열릴 듯 열리지 않았다. 주먹으로 가격하다가 발로 걷어차기도 하고, 어깨를 세워 문을 들이받기도 했지만 쉬이 열리지 않았다. 가격하는 데 쓴 손과 발만 욱신욱신하게 부어올랐다. 별하는 분노에 찬 욕설을 내뱉으며 덜컥거리는 문에 발길질을 했다.

    “빌어먹을! 씨발―!”

    계속해서 문이 덜컥거리자 밖에서 감시하는 베타들의 고함이 들렸다. 문을 부수고 나간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별하는 숨을 가쁘게 할딱이며 어두컴컴한 안쪽을 서성였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머릿속이 새하�R다. 어둠 속으로 내쫓긴 파비안을 뒤쫓지 못한 자신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제 처지, 저를 가축처럼 대하는 식인종들, 이 모든 상황에 미치도록 화가 났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생식에 관련된 것밖에 없는 망할 오메가인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이런 보잘것없는 오메가를 위해 위험 속으로 선뜻 자진해 들어간 파비안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진한 감정을 느꼈다.

    “하아…….”

    알파뿐만이 아닌,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안하무인 알파에게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되리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크루즈 갑판에서 우연히 만나, 상대를 오해한 줄도 모르고 다짜고짜 욕을 하며 당장 치고받고 싸울 것처럼 굴던 오만방자한 알파를 좋아하게 될 줄은.

    별하는 끊이지 않는 파비안을 향한 생각들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어둠 속을 방황했다. 그가 남긴 육체의 통증이 몹시 달콤해서 지금의 이런 적막을 더 견디기 힘들었다. 온갖 비감이 깃든 한숨이 습관처럼 새어 나왔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