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알파의 태도는 이제까지와 달랐다. 이전까지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하고 싶은 대로 감정을 드러냈다면 지금은 그런 감정들을 억누르는 듯 내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돌칼을 뽑아 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는 이전까지와 극도로 달라, 언뜻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파비안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저의 대답만 기다리는 별하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가끔 체온을 나누거나 힘을 겨룰 때 상대의 이념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어.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감각이랄까.”
“……?”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비안은 가만히 말을 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알파는 널 두고 내기를 하려는 것 같아.”
“미친? 난 내기 빵이 아니야.”
“이곳에서 하이 알파는 저자뿐이다. 그 위상과 자존심은 너와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야. 하지만 그는 나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어.”
“…….”
“자신의 위상이 더는 무너지지 않고, 널 내게서 떼어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어쩌면 가장 안전한 방법.”
“…….”
“어떤 내기를 하든, 이곳에서 나고 자란 쪽이 훨씬 유리할 테니까.”
별하는 그의 생각에 토를 달지 못했다. 확실히 딱 맞아떨어지는 추측이었다. 정말 이러한 추측이 들어맞는다면, 돌칼을 뽑아 드는 순간 파비안은 알파의 내기에 응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게 무엇을 얻게 되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해도.
별하는 제 뜻을 더욱 확고히 했다.
“그럼 더 뽑으면 안 되겠네. 절대 뽑지 마. 손도 대지 마. 파비안, 널 이용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하이 알파인 네가 있는 한 저들도 쉽게 덤비지 않을 거야.”
“……언제까지?”
“응?”
파비안은 차분히 되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대치해야 하는 거지?”
“…….”
“저자들은 이곳이 삶의 터전이지만 우리는 아니야. 이곳에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야. 이렇게 계속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그의 말이 맞았다. 이러는 사이에 구조대가 왔을지도 모른다. 천운으로 이곳을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조난자들의 살아생전 유품만 남은 것으로 오해하고는 금방 철수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별하도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당장의 불안감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음식이 없다 해도 당장에 죽지는 않지만 사고를 당하면 즉사였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위험한 내기라면, 어떻게 할 거야?”
파비안은 얕은 한숨을 뱉었다. 바닥에 꽂힌 돌칼에 집중된 이목이 점차 소란의 주체인 파비안에게로 향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담담히 답했다.
“몇 주 동안 이곳이 무인도인 줄로만 알았어. 지금 역시 이 섬에 대해 거의 몰라. 누가, 무슨 생물이 서식하는지, 저 산이 활화산인지, 사화산인지조차 알지 못해.”
“…….”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어차피 저들의 손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어려워.”
“…….”
“어떤 내기라도, 난 이걸 뽑아야 한다는 뜻이다.”
파비안의 저음은 더없이 담담했다. 자신의 앞날을 짐작한 것처럼. 분노한 별하는 알파와 베타들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안 돼, 파비안. 쉽게 결정하지 마. 저놈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지 알아낸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저쪽도 당장 덤벼들지 못하니까.”
그 때 파비안이 돌칼의 손잡이를 움켜잡아 단숨에 뽑아 들었다.
숨죽인 채 주시하던 이들의 소리 없는 탄식이 구덩이 가득 들어찼다. 돌칼을 뽑아 들기만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알파는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파비안에게 박혀 있던 눈길을 떼고 별하를 스쳐보더니 이내 뒤돌아 구덩이를 휙 나가버렸다.
여명을 등진 채 지켜보던 족장이 지팡이를 굴리며 베타들에게 고함을 쳤다.
별하는 돌칼을 쥔 이를 아연히 쳐다보았다.
“진심이야?”
파비안은 대답 없이 돌칼의 단면을 들여다보았다.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있는 그것은 역시 가볍고도 날카로웠다. 차가운 성질과 따뜻한 성질이 공존하는 신기한 재질을 손끝으로 찬찬히 더듬으며, 파비안은 일부러 별하의 눈을 못 본 체했다.
“서바이벌 게임 같은 게 아니야. 정말 널 죽일 수도 있다고.”
“…….”
“개죽음당할 수도 있어. 파비안.”
별하는 겨우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지만 원망이 담긴 속내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파비안은 돌칼을 다리 옆으로 내리며 별하와 눈을 맞췄다.
“그렇게 비열한 놈들이라면 벌써 질식사시켰겠지. 통구이를 만들었거나.”
별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겁에 질려 있었다.
“질식사시키진 않아도 분명히 먹을 생각이었을 거야. 이 일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식인을 한다고?”
파비안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물었다. 어쩌면 제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구덩이 밖의 시끄러운 소음을 힐긋 돌아본 별하는 좀처럼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사람 손가락을 고깃덩이처럼 잘라 넣은 돼지죽을 봤어. 알파들이 먹다 남긴 걸 갖다준 거였어.”
“…….”
“여기 와서 오메가를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어. 말단 일을 하는 건 베타지만 나머지 주민들은 전부 알파야. 그런데 이렇게 많은 알파들이 존재한다는 건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별하는 그때의 충격적이고 역겨운 기억이 떠올라 혀를 쯧, 쯧, 몇 번이고 찼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라는 듯 치를 떨었다. 파비안이 물었다.
“먹었나?”
별하가 실소했다.
“너라면 먹을 수 있어?”
“……아사로 죽을 정도라면.”
파비안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장난이나 재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담이었다.
“하아…….”
별하는 이마를 짚었다. 이것도 심각한 일이었지만 당장은 더 큰 불이 발등에 떨어진 상태였다.
돌칼을 뽑아 든 후부터 원주민들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마저 180도로 달라졌는데, 다시 무를 수 있을까 싶었다. 무르려는 기세라도 보일라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별하는 초조감과 불안감,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싸우느라 얼굴이 백지장이었다. 파비안은 그런 그를 위로했다.
“괜찮아. 별하.”
“안 괜찮아. 저놈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상상하는 것도 무서워…….”
“…….”
“끔찍하다고.”
파비안은 달콤한 한숨을 흘리며 별하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흔적으로 뒤덮은 옅은 상처들을 내려다보며 동글동글한 윤곽을 스치듯 더듬었다.
“별하, 네가 생각하는 그런 불상사는 없어.”
별하는 침울하게 대꾸했다.
“점쟁이도 모르는 앞일을 자신하지 마.”
“확신하는 거야.”
“…….”
“확신하건대, 다 괜찮아질 거다. 그자가 뭘 원하든, 무슨 작당을 꾸미든 결국에는 내가 승리할 테니까.”
알파를 아우르는 하이 알파다운 자신감이었다. 별하는 눈을 들어 파비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알파들의 장점이란, 무릇 육체에 한정된 그것뿐이라고 치부해 왔었다. 줄곧 외면해 왔던 그들의 많은 특징 중 유독 도드라지는 하나를 뒤늦게 자각한 별하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스쳤다.
위기의 상활일수록 강하게 발현되는 승부욕보다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힘, 그 자신감은 지금 이곳에서 어쩌면 가장 큰 힘이었다.
“빌어먹을.”
별하는 알파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아 와락 껴안았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이곳에서, 언제 다시 파비안과 체온을 나눌 수 있게 될지 기약이 없었다. 파비안은 강한 힘으로 별하의 등을 안았다.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이의 이마와 정수리에 상냥한 키스를 퍼부으며 속삭였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줄게.”
“…….”
“널 꼭 집으로 보내줄게.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
별하는 파비안의 가슴에 뺨을 부비며 눈을 맞췄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간신히 억눌러 참고 있었다. 파비안은 그를 눈 안 가득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밀착한 눈길만큼 벌어진 점막이 달라붙으려는 찰나, 밖의 소음이 뚝 멎어 들었다. 머리를 불쑥 들이민 베타 하나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팔을 바깥을 향해 흔들었다. 나오라는 뜻이었다.
둥― 둥― 둥― 둥―
광장에서는 북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만찬 시간에 울리는 난타질과는 사뭇 다른 무게가 느껴졌다. 넝쿨에 묶여 끌려다녔던 이전과는 다르게 그들은 베타들에게 인도되어 광장으로 향했다. 별하와 파비안이 인기척이 다분한 곳으로 들어가려는데, 막 안쪽에서 나온 한 무리의 알파들이 옆으로 지나갔다.
별하는 무리에 섞여 지나가는 작은 인영을 힐긋 돌아보았다. 가슴팍에 흰 문양들을 어지러이 그려 넣은 인영은 나이가 조금 든 여자였다. 그녀도 고개를 돌려 별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 무엇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으로.
“오메가……?”
앞쪽에서 어서 따라오라는 의미를 담은 고함이 들렸다. 별하는 다른 생각할 여유 없이 멀어지는 파비안과 거리를 좁혀 광장으로 들어섰다.
높다랗게 피운 장작불을 크게 몇 겹으로 둘러앉은 알파들이 일시에 이쪽을 향했다. 하나같이 늑대 형상의 가면을 쓴 그들은 창과 활을 손에 들고 있었다.
037.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알파 사이를 지나 장작불 앞에 다다르자 불길 너머에 서 있던 족장과 이곳의 하이 알파가 그늘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 뒤로 이곳의 실권을 나눠 가진 듯한 또 다른 알파들도 여럿 보였다.
다른 이들보다 짙은 색의 가면을 쓴 하이 알파가 굵직하게 외쳤다.
“우! 두아! 두!”
그러자 광장의 알파들이 저들의 무기를 들고 연호했다. 두! 두! 두! 두!
돌칼을 높이 들어 기세를 북돋는 하이 알파의 탄탄한 상반신에서부터 종아리와 두툼한 허벅지까지, 어떤 미지의 존재를 형상화한 그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용맹함을 과시하는 행동과 화려한 그림들은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원초적인 기술이었다.
족장이 지팡이로 파비안을 가리키자 광장은 일순 찬물을 쏟아부은 듯 적막감이 감돌았다. 별하는 저를 향한 거무튀튀한 눈초리들을 경계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뭘 원하는 거지…….”
“…….”
파비안은 제 돌칼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족장은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 냈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백분의 일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특유의 어투와 행동, 광장에 모인 알파들의 반응 등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파비안이 예상한 상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파비안이 말한 대로였다. 이들은 게임, 혹은 승부로 힘을 겨루려는 생각이었다. 별하는 자신의 존재가 승리 시에 획득하는 메달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물었다.
“제기랄.”
누가 이기든, 파비안이 승리하더라도 자신은 그 누구의 것이 되지 않을 터였지만 별하는 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설득하고 싶은 의욕조차 느끼지 못했다.
족장이 하이 알파와 파비안의 사이에 우뚝 섰다. 족장도 지금은 허리가 굽었지만 젊었을 적에는 그들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을 정도로 여전히 체격이 늠름했다.
“밀댐라리머이! 디리다서이!”
저주를 퍼붓듯 주문 같은 외침을 토해 낸 그는 망토 밖으로 뭔가를 꺼냈다. 지팡이를 던지고 두 손으로 그것을 받쳐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 광장의 알파들이 입으로 북소리를 내며 창으로 땅을 두드렸다. 쿵! 쿵! 쿵! 쿵!
그것은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크기의 갈고리였다. 발톱과 유사한 모양의 갈고리 안쪽에 다섯 손가락을 끼워, 포악하고 사나운 음성과 몸짓으로 흉내 내는 어떤 형상은 틀림없는 맹수였다. 혹은 괴물.
아이들에게 구연동화를 읽어주는 듯 계속되는 괴물 흉내에 별하와 파비안의 눈길이 스치듯 교차했다. 별하는 입술 안쪽을 잘근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설마 저런 거 잡아오, 라는 말은 아니겠지? 애초에 저런 게 어디 있다는 거야……?”
파비안은 족장의 실감 나는 구연동화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아.”
“여기에 저리 큰 발톱을 가진 맹수가 있다고?”
“…….”
“우연히 주운 발톱이거나 그 비슷한 거겠지. 그거 가지고 공룡의 존재라도 믿는다는 게 대체 무슨…….”
별하는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다는 듯 습관처럼 혀를 찼다. 파비안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공룡이 아니야.”
“성체 표범일 수도 있어. 끽해야 열대 악어.”
게임을 넘어서 생사를 건 모험에 대해 설명하는 이들을 주시하던 오드아이와 가면 너머로 이쪽을 노려보는 하이 알파의 눈길이 마주쳤다.
파비안은 턱을 치켜들었다. 눈에 불꽃을 틔우며 전의를 불태우는 하이 알파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직시하며 독백하듯 읊조렸다.
“혹은 그보다 더 미지의 존재.”
구연동화는 금방 끝이 났다. 다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별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질색한 얼굴로 파비안을 설득했다.
“도망치자.”
“가능성이 희박해.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어.”
“이상한 거 잡으러 갔다가 물려 죽으면? 독에 감염되거나 바이러스, 패혈증 같은 건 생각 안 해? 도망치는 게 훨씬 가능성이 높아.”
“고집부리고 싶지 않아, 별하.”
파비안의 부드러운 어투에 별하는 양눈썹끝을 내리며 달래듯이 속삭였다.
“안 부리면 되잖아.”
파비안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별하의 입가에 묻은 먼지를 살살 닦아주었다.
“쫓긴다는 건 한시도 편해질 수 없다는 뜻이야. 잡힐 때까지, 구조대가 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이어지겠지. 반대로 이건 승리하면 끝이야. 다시 해변으로 돌아갈 수 있어.”
“바보야, 너? 네가 승리한다고 해서 저놈들이 순순히 포기할 거라는 보증서는 어디 있지? 지금 대체 뭘 믿고 있는 거야?”
그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단언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 하이 알파는.”
별하는 신음했다.
“하아……. 파비안. 파비안…….”
알파가 되어보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전반적인 습성이 그랬다.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손바닥을 뒤집듯 그때그때 달리하는 비열한 습성은, 그것이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패시브 스킬 같은 것이었다.
별하는 의사가 확고한 파비안을 더 설득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쳐다만 보았다.
그 때 파비안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원주민 우두머리들과 광장의 알파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별하가 파비안과 같은 것을 느끼고 손등으로 코를 막았다.
“이제 곧 즐거운 식사 시간이겠군.”
“즐거운 식사?”
“뭘 주든지 먹지 마. 과일 아니고선.”
“……네가 말한 그건가?”
푹 삶긴 사람 손가락을 급하게 먹어치우던 돼지를 떠올린 별하는 제 목을 감싸며 구역감을 삼켰다.
“더 소름 끼치는 게, 냄새야.”
파비안도 동감하는 바였다. 그 냄새는 어떤 음식의 향보다도 향기로웠다. 달짝지근한 듯 구수하게 들어오는 순간 혀 밑으로 침이 고여 들며 식욕이 샘솟았다. 재료의 정체를 몰랐다면 허겁지겁 퍼먹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감칠맛이 있었다.
별하는 더욱 속이 거북해져서 땀방울이 맺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두웅― 둥― 두둥― 둥― 어디선가 난타질이 시작되자 베타들이 부지런히 음식들을 날랐다. 저번처럼 각각의 그릇들에 담겨진 모습이 아니라, 커다란 고깃덩이를 긴 꼬챙이에 꿰어 앞뒤로 짊어지고서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초벌구이를 갓 마친 바비큐였다.
앞다리 뒷다리를 단단히 묶은 모양새가 인육을 즐기던 돼지를 잡은 것 같았다. 질긴 껍질을 벗겨내고 근육과 지방이 골고루 분포한 고깃덩이를 장작불 위에 올리자 금세 숯불냄새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별하는 제 예상과 달리 평범한 돼지 바비큐를 아연히 쳐다보았다.
“한 마리 남은 돼지를 잡을 만큼 큰 축제인가……?”
“…….”
“인육 먹던 돼지라 어차피 먹진 못하지만.”
파비안은 대답이 없었다.
베타들은 꼬챙이를 돌려가며 통돼지를 이쪽저쪽 골고루 익혔다. 돼지고기가 익어갈수록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군침이 돌아 별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성은 혐오스러움과 역겨움에 치를 떠는데 그 안쪽의 무의식은 먹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강한 불길에 금방 바짝 익은 고기는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광장의 알파들은 달려들어 먹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우두머리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두!”
귀한 통돼지는 우두머리들 앞으로 옮겨졌다. 하이 알파가 돌칼을 꺼내 통돼지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칼날을 눕혀 대가리까지 단번에 가르자 검게 끓어오른 핏물이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하이 알파는 강한 악력으로 돼지의 갈빗대를 바깥으로 열어젖혔다. 우드득― 우드득― 굵은 뼈들이 부러져 안쪽이 벌어지자마자 아직 완전히 익지 않은 내장들이 철퍼덕 쏟아졌다. 길게 빠진 내장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별하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악몽 안에서나 느끼는 이상한 기분을 입 밖으로 꺼내면 정말 현실이 될 것만 같아서 이를 물고 참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한 채로 지켜보던 파비안이 입을 열었다.
“돼지가 아니야.”
“…….”
별하는 팔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이 알파는 팔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줘 통돼지를 알뜰하게 소분했다. 칼질은 능숙했다. 큰 살덩이를 뼈에서 추리고, 뜯어낸 갈빗대는 손에 들고 먹기 수월한 크기로 하나하나 잘랐다.
등뼈는 돌칼을 내리쳐 토막 내 안쪽에 든 보드라운 연골까지 삭삭 긁어냈다. 덜 익은 내장도 버리는 것 하나 없이 나뭇잎에 싸 다시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긴 꼬챙이에 남은 부위는 넝쿨에 묶여 덜렁거리는 손목과 발목뿐이었다. 작업을 마친 하이 알파는 열김이 피어오르는 제 손을 핥으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원주민 부족의 가장 우두머리인 족장이 축제의 주축인 이들을 중심으로 고기를 배분했다. 어린 베타가 그것을 파비안과 별하에게로 가져왔다.
새파란 나뭇잎 위에 놓인 구운 고깃덩이들에서는 보기만 해도 침이 흐를 정도로 감미로운 숯불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흡사 등갈비 같은 부위와 살을 추리지 않은 정강이,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귀 한쪽과 모양이 틀어지지 않게 예리하게 잘라낸 동그란 눈알, 어디서 잘라낸 건지 모를 두툼한 살덩이에서 육즙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
별하의 충혈된 눈동자가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고깃덩이로 옮겨갔다. 완전히 익지 않은 고깃덩이 표면이 얼룩덜룩했는데 그을음 안쪽에 흰색 염료가 묻어 있었다. 묻어 있다고 하기에는 어떤 형상을 하고 있었다.
순간 광장으로 들어서기 전 마주쳤던 오메가가 떠오른 별하는 그대로 헛구역질을 했다.
“우웩! 웩―!”
먹은 게 없어 묽은 침만 뚝뚝 떨어졌다. 고기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파비안 역시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별하와 파비안을 제외한 광장의 모든 이들은 부족한 고기를 조금이라도 더 먹고자 장작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난타질 소리에 맞춰 즐거운 식사는 한참을 이어졌다. 부족한 식사는 과일과 풀로 대체됐고 그럼에도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며 성토하는 이가 없었다.
038.
별하는 멀찍이 물러났다. 숲으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저들이 뒤쫓아 와 저것들을 억지로 목구멍에 쑤셔 넣을 것만 같아서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곁으로 다가온 파비안이 그에게 새파란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과와 비슷한 모양의 과일이었다.
“괜찮아……?”
별하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지금은 먹는다는 개념조차도 거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식인종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싫어질 정도였다.
구역질은 멈췄지만 명치가 욱신거릴 정도로 속이 좋지 못했다. 진땀이 나고 입술은 바짝 말라서 찢어진 주위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파비안은 조용히 과일을 베어 물었다. 그 역시도 식욕을 느끼지 못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생각해 의식적으로 배를 채웠다.
별하는 누런 피부의 짐승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내 건 남기지 말고 네가 다 먹어. 난 어제 많이 먹었어.”
“…….”
말이 없는 파비안을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뭘 먹긴 했어?”
가만히 눈길을 내린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별하는 작게 탄식하며 그가 든 과일을 잡아 입술께로 밀었다.
“먹어, 빨리.”
당연하게도 발정기 때는 많은 열량을 필요로 했다. 히트는 물론이거니와 러트는 더 했다. 정액과 고열이 체내에서 끝없이 생산되고 배출되는 과정에서, 무리한 체력 소모로 실신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발정기 때 섹스 외의 행위에 대해 일시적으로 관심이 줄어드는 현상도,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유전자들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창조해 낸 자가 질환의 일종이었다.
그러한 러트 중에 에너지 섭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 짝도 아닌 평범한 로우 오메가를 찾아 숲을 내달렸을 파비안에게 별하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무언가 그에게 억지로 짐을 씌운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못했다.
별하는 몇 번의 채근 끝에야 남은 과일을 먹는 파비안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씹었다.
“…….”
“…….”
파비안은 일부러 그를 보지 않고 툭 내뱉듯 말했다.
“이 정도로는 아무 일 없어.”
평소와 다르게 무심한 저음이었지만 상대가 걱정하지 않도록 꾸민 목소리임을 별하가 모를 리 없었다.
“…….”
별하는 고개를 돌려 멀거니 광장을 응시했다. 우두머리, 졸개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떤 이는 꼬챙이에 매달린 것들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앞니로 뜯거나 긁어내 어금니로 씹은 뒤 목으로 넘기는 일련의 소음들에 분주한 난타질 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새 별하와 파비안의 몫까지 누군가가 가져가고 없었다.
조용히 눈을 굴려 그들을 하나하나 응시하던 별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자.”
딱딱한 과일의 씨까지 깨끗하게 씹어 먹은 파비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말했지?”
별하는 크게 뜬 눈으로 파비안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도망치자! 도망쳐! 파비안의 팔을 낚아채듯 붙잡아 즉시 숲으로 내달렸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더 뛰었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별하는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앞서 달리던 파비안이 팔에 힘을 실어 뒤처진 별하를 바짝 끌어당겼다.
“읏.”
저에게 대번 끌려온 이에게 급히 물었다.
“하아……. 어느 쪽?”
별하는 대답도 못 하고 햇빛이 비추는 수풀을 눈짓했다. 그들은 다시 한참을 달렸다.
밀림의 지형이 고르지 않고 장애물도 워낙에 많아서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넘어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앞선 이가 돌칼을 떨어뜨렸지만 누구도 줍지 않았다.
처음 광장을 벗어나 숲으로 도망쳤을 때, 별하는 그들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냄새도, 뽕잎 먹는 누에고치 같은 소음도, 저들에게로 날아드는 갖은 눈초리도 더는 느껴지지 않아 자유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깐이었다.
별하의 뜻을 순순히 따르던 파비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을 뒤쫓아 오는 알파들의 체취를 느꼈다.
광장에서 느꼈던 알파들의 것과는 조금 달랐고,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이쪽을 향해 왔다. 그리고 광장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아…… 하아…….”
“하, 하아…….”
앞서 별하가 가리킨 장소에 도착했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와 풀뿐이었다. 별하는 저도 이곳에 처음 와본 참이라 어디로 더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주변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