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14)화 (14/49)

“…….”

“…….”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그가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담담한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곤혹감, 후회감, 미안함, 분노, 죄책감에 이어 자괴감까지. 별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흰 뺨에 기다란 속눈썹을 드리운 채 전방만 응시하는 파비안의 안색이 몹시 파리했다. 이 모든 일들이 마치 제 잘못으로 빚어진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별하는 통증이 이는 목울대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까칠한 목 안쪽을 가까스로 다듬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와줘서 고마워.”

지금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인사였다. 파비안이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서로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던 그 때, 별하는 제 주머니에 든 것을 불쑥 떠올렸다.

부스스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애를 썼다. 그럴 때마다 팽팽하게 연결된 넝쿨 가시가 목을 찔렀다.

“윽…….”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별하는 흐트러진 숨을 억지로 다잡으며 대답했다.

“나한테 그, 거 있어.”

“그거?”

“네가 준 조개껍데기…….”

파비안이 마찬가지로 반색했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선뜻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별하는 다시 혼자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려 이리저리 시도했다.

“읏.”

계속해 찔린 상처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파비안이 단호하게 저지했다.

“그만해, 별하. 차라리 내가…….”

똑바로 말을 맺지 못하는 파비안도, 스스로 제 주머니를 사용하지 못하는 별하도 당혹감에 침묵했다. 바람결에 떠밀린 문이 미세하게 삐걱거렸다. 그러자 꼿꼿하게 타오르던 장작불이 는적는적 일렁였다.

파비안은 한참 후에야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잠시 숨을 참으면 돼.”

자신에게 거는 주문 같았다. 별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이 거리에서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여서 상대의 숨소리만 들어도 솜털까지 곤두섰다.

“그, 래.”

어쩔 수 없이 대답한 후에도 움직임은 없었다.

“…….”

“…….”

요란하게 일렁이던 불길이 다시 잠잠해졌을 때 파비안이 정중하게 물어왔다.

“그쪽으로 가도 될까?”

별하는 고개를 까딱였다.

“중간에서 만나…….”

숨을 들이켠 후 무릎을 몇 번 옮기지 않아 마주쳤다. 별하는 조개껍데기가 든 바지 주머니를 옆 사람 쪽으로 내보였다. 새하얗게 가라앉은 얼굴로 다가온 파비안은 곧장 별하의 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주머니가 작고 깊어 손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으음.”

상체를 숙여 손을 힘껏 밀어 넣자 끝자락에 조개껍데기가 살짝 닿았다. 별하는 나무뿌리가 내려온 구덩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잘근거렸다.

“…….”

“이쪽으로 조금만 더, 별하.”

조개껍데기를 한 번 잡았다가 놓친 파비안이 주머니에 손가락을 걸어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허리를 비틀린 별하가 눈썹을 구기며 제 턱밑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저를 빤히 올려다보던 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별하는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한가득 차오른 숨을 바삐 내뱉었다. 곧바로 다시 들이켜다가 파비안의 페로몬을 자각하고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주머니를 뒤적이던 파비안이 함께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으읏…….”

“음, 별하.”

별하는 흙바닥에 등을 부딪친 아픔보다도 제 위로 포개진 파비안에게 온 정신이 향해 있었다.

불빛에 비친 두 뺨은 빨갛게 상기해 있었고 부은 입술 또한 그랬다. 눈동자는 약에 취한 듯 초점이 흐릿했다. 이미 전신은 진땀에 흠뻑 젖어 스치는 것만으로도 데일 듯 뜨거웠다.

별하는 묶인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며 가쁘게 헐떡였다.

“파, 파비안……. 두 번 다시 부탁 안 할 테니까……. 나랑 제발, 섹스하자…….”

파비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머리를 들어 입술을 맞췄다. 급하게 점막을 비비다가 혀를 세워 파비안의 입술 사이를 갈랐다.

“흐음.”

한숨이 빠져나오는 안쪽을 비집어 들어 서슴없이 살덩이를 휘감았다. 파비안은 거부하지 않고 키스에 응했다. 입술을 열어 잠시 혀를 얽다가 상체를 숙여 재빠르게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조개껍데기가 닿자마자 힘을 실어 단번에 밖으로 끄집어냈다.

“파비안…….”

별하는 조개껍데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제 팔에 감긴 넝쿨을 자르는 파비안에게 온 관심이 집중돼 있었다. 그의 입술과 뺨에 키스를 퍼부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서 킁킁거렸다.

“파비안, 어서…….”

“…….”

파비안은 꽤나 질긴 넝쿨을 차분히 끊어냈다. 별하의 목에 생채기를 만든 것까지 끊어내고 등을 세워 앉았다. 제 목에 감긴 것을 더듬어 자르는데 별하가 일어나 그의 바지 버클을 급히 열었다.

“하아…….”

바지 지퍼를 찌익 내리자마자 불그스름하게 성난 페니스가 솟구쳐 올랐다. 진한 페로몬을 풍기는 그것을 별하는 한입에 물었다.

034.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알파의 페니스를 애무해 본 적이 없고, 그 방법도 몰랐지만 별하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야 파비안이 흥분하는지. 그의 흥분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별하는 입술을 벌려 투명한 체액이 흐르는 귀두를 혀 안쪽까지 집어삼켰다. 움찔거리는 기둥의 뒤쪽을 혀로 핥아 올리며 다시 점막 안으로 빨아들이자 파비안의 억누른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으, 음.”

별하가 그의 다리 사이에 파묻힌 동안 파비안은 제 목을 감은 넝쿨까지 완전히 제거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인내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턱을 물고 참고 있던 그는 자유로워진 목을 쓸어내리며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하아…….”

“파비안, 파비안…….”

별하는 거의 히트 상태였다. 달아오른 페로몬을 마음껏 흩뿌리며 섹스를 간청하고 있었다. 파비안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무엇보다 강렬히 별하를 원하고 있었지만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날의 약속을 지키려는 것 같았다.

별하는 당장 숨이 끊어져 죽을 것처럼 애원했다.

“제발, 파비안……. 여길 나갈 때까지 만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나의 ……가 되어줘…….”

“…….”

움직이지 않는 파비안의 목을 끌어안아 그의 귓불을 눅진하게 빨았다. 귓속으로 혀를 밀어 넣어 안쪽을 적신 후 헐떡임을 억누르며 작게 속삭였다.

“나의 알파가 되어줘…….”

파비안은 밀려드는 격정을 더는 거부하지 못하고 별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개를 기울여 별하의 입 안으로 단숨에 파고들었다. 밀착한 점막 사이로 새빨간 혀들이 깊게 얽혀들었다.

“으응…….”

“음.”

별하는 찢어진 입술에서 아픔을 느꼈지만 파비안에 대한 열망 앞에서는 한낱 미미한 감각일 뿐이었다. 저를 휘감은 점막이 떨어지지 않도록 더 깊게 달라붙었다.

파비안은 곧바로 별하의 청바지를 끌어 내려 벗겼다. 팬티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도 전에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가 하반신을 틈 없이 밀착시켰다.

한참 전부터 질퍽하게 젖어 있던 구멍은 당장 삽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무르게 우므러드는 주름을 귀두로 눌러 들며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미안, 별하. 하아……. 넣어도 될까?”

몹시 조급한 저음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좀 전 알파와의 육탄전에서 무시무시한 괴력을 행사하던 이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별하는 이러는 시간도 견딜 수 없다는 듯 파비안을 재촉했다.

“빠, 빨리…….”

달아오른 육체들이 하나로 포개지는 순간 파비안은 별하의 뒤를 단박에 찔러 들었다.

“흐, 으읏……!”

성난 열기둥이 내벽 깊숙한 곳까지 빠듯하게 들어찼다. 파비안은 어금니를 물고 허리를 물렸다. 귀두가 빠져나기기 전에 다시금 허리에 힘을 실어 별하의 뒤를 쳐올리자 서로의 입술에서 열뜬 신음이 터졌다.

떨어졌던 입술이 재차 맞물리면서 금방 허리 짓이 거칠어졌다. 퍽퍽퍽― 지금은 감미로운 감각들보다 묵은 갈급증을 해소하는 일이 시급했다.

별하는 파비안의 어깨에 매달려 최대한 몸을 열었다. 그럼에도 가랑이를 찢어발길 듯 파고드는 위력에 신음을 삼키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으응, 흣, 읏……!”

“하아…….”

파비안은 별하의 허벅지 뒤로 팔을 밀어 넣어 음영에 잠겨 보이지 않는 접합 부위를 활짝 열어젖혔다. 울툭불툭하게 솟은 페니스에 꿰뚫려 찢어질 듯 벌어진 구멍에서 애액이 흘러내렸다.

그는 제 아랫배에 별하의 고환이 찌부러질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 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별하는 뱃속이 열리는 듯한 고통에 바들바들 떨며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새빨갛게 열 오른 점막들이 흡입하듯 달라붙었다. 빠듯하게 맞물리던 성기가 곧 매끄럽게 삽입되기 시작했다. 성기를 맞대기 전부터 최고조로 흥분해 있던 육체는 금방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파비안은 잔뜩 흥분해 있으면서도 먼저 사정하지 않았다. 별하의 절정을 유도하려는 듯 매끄럽게 파고들던 기둥을 돌연 쑥 꺼냈다. 구멍이 반사적으로 우므러드는 순간 주름을 헤집어 내벽을 찔러 들었다.

“파, 읏, 파비안…….”

“으음.”

“파비, 제발……. 으응, 읏. 흣.”

우직하게 그를 몇 번 반복하자 별하는 흙바닥을 움켜쥐며 흐느꼈다. 다시 한번 안쪽까지 단박에 찔러 드는 찰나 별하는 열기둥을 문 채로 정액을 쏘아 올렸다.

“하으, 읏……!”

파비안의 가슴팍까지 튀어 오른 정액이 다시 그에게로 흘러내렸다. 파비안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움찔움찔 경련하는 별하를 끌어안은 채 뜨겁게 무르녹은 안쪽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사정하고서도 곧장 발기한 별하는 별안간 뱃속에서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전에도 버거웠지만 지금은 뱃속이 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감각을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제게 들러붙은 파비안의 허리를 붙잡아 저지했다.

“흐읏, 파비안……. 지금 혹시 노팅, 으읏, 인 거야……?”

별하의 입술과 뺨, 귓불, 목덜미를 핥고 또 빨아대던 파비안이 내벽 깊이 파묻은 페니스를 슬쩍 뒤로 뺐다. 미끄덩하게 빠지다가 두툼하게 부푼 귀두가 입구에 걸려 겨우 빠져나왔다.

“읏, 노팅이잖아……?”

억지로 벌어지는 아픔에 별하는 상기된 얼굴을 찡그렸다. 파비안은 곧장 페니스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발정 중에도 허리를 비틀며 거부하는 별하를 제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하아, 밖에다 쌀 테니까…….”

“으으, 안 빠져……. 안 빠, 읏, 진다고…….”

“제대로 된 노팅이 아니라 괜찮아. 다치지 않게 뺄게, 하아…….”

“흐읏…….”

파비안은 곧 파정할 기세였다. 뒤섞인 체액이 질퍽하게 흐르는 별하의 엉덩이를 잡아 벌려 허리 짓에 속도를 더했다.

제대로 된 노팅이 아니라고 해도 평소보다 훨씬 커진 페니스는 흉기 수준이었다. 전적으로 고통이 아닌 쾌감이 느껴졌지만 별하는 간신히 그를 받아내고 있었다.

파비안은 전신의 근육을 돋워 별하와 한 몸을 이뤘다. 페니스가 녹아내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워진 별하의 안쪽을 한참 파고들다가 번득 덮쳐 드는 사정감에 급히 허리를 뒤로 뺐다. 귀두가 다시 구멍 입구에 걸려 빠지지 않았다.

“별, 읏, 별하……. 힘을 빼…….”

“흐으으…….”

별하는 입술을 깨물며 엉덩이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순간 귀두가 빠져나오자마자 빠끔거리는 주름 위에 희뿌연 정액을 쏟아냈다.

“으음.”

“하으으.”

별하는 불시에 텅 비어버린 몸을 움찔거리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파비안은 사정을 끝낸 뒤에도 발기가 풀리지 않은 제 페니스를 훑어 내리며 별하의 상위를 뒤덮었다. 다급하게 숨을 뱉는 입술을 눌러 혀를 휘감으며 제 정액으로 흥건한 주름을 다시 파고들어 갔다.

“으응…….”

별하가 허리를 들썩이며 거부했다. 파비안이 둔부와 허벅지의 근육을 세워 젖은 내벽을 우직하게 밀고 들어갔다. 미끄러지듯 뱃속을 점령하는 순간 별하는 신음을 토하며 파비안의 등을 긁었다.

“읏, 파비안……. 파비, 그만…….”

“조금만, 더.”

철퍽― 철퍽― 별하가 바로 반응하는 지점을 아프지 않게, 부드럽게 자극하자 이내 다리가 느슨하게 벌어졌다. 다시 달뜬 숨결이 점막 사이를 오갔다.

금방 흥분한 별하는 제 다리 사이에서 부드럽게 율동하는 파비안의 등허리에 팔을 둘러 제게로 끌어당겼다. 흥분에 도취된 눈동자들이 밀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술 점막이 달라붙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수없이 사정한 후에도 섹스는 끝이 나지 않았다. 장작불이 점점 짧아져 곧 연소가 된 후에도 어둠 속에서는 젖은 육체가 맞부딪치고 있었다. 별하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로 파비안에게 안겨 흔들렸다. 젖은 바닥은 뒤섞인 체액들로 질펀했다.

파비안은 못다 한 한을 풀려는 듯 끝이 없었다. 막 사정감을 느낀 그는 별하의 안에서 페니스를 쑥 빼냈다.

“으응…….”

부풀었던 귀두는 이제 거의 가라앉아 찢어질 듯한 통증 없이 페니스가 빠져나왔다. 곧바로 정액이 쏟아졌다.

“음.”

파비안이 일말의 스스럼도 없이 다시 삽입하려 들자 별하는 그의 어깨를 밀며 거부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완강했다.

“그만해, 미친놈아……. 대체 이게, 몇 번째라고 생각해? 이러다 죽어.”

“으음……. 안 좋았어?”

“좋고 안 좋고 상관없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야.”

“…….”

“쯧, 이래서 알파 놈들이 싫다니까.”

파비안은 아쉬운 듯 말이 없었다. 나직이 내뱉는 그의 숨결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얼른 떨어지려 몸을 일으키던 별하는 암흑 속에서 뻗어온 손길에 허리를 붙잡혀 다시 안겼다.

“읏, 파비안. 그만해. 러트도 끝났잖아. 이제 정신 차려야 해.”

그의 러트는 끝이 났고, 페로몬에 지배당했던 이전의 시간들도 모두 과거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파비안은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별하를 놔주지 않았다.

끝났다 싶으면 다시 덮쳐 오고, 이제 정말 끝났구나 싶어도 또 이렇게 들러붙어 왔다. 이전의 재수 없을 만큼 고고하고, 젠틀하고, 소년처럼 수줍어하던 파비안 블랙그레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런 상황에 미쳤지. 너나 나나.”

이성이 돌아온 별하는 파비안에게 허리를 안긴 채로 지금의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았다.

035.

배낭여행을 시작했다가 중동 국가의 내전에 휘말려 계획에도 없던 크루즈를 타게 되고, 거기서 또 폭풍우와 해일을 만나 조난을 당한 것까지는 또렷하게 인지했다.

무인도에서 조우한 하이 알파와 단둘밖에 없는 생활을 이어나가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식인종 원주민들은 정말 복병이었다. 몇 주간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거기다 강제적으로 식인종 원주민 하이 알파의 짝이라니. 알파와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떠오른 별하는 들릴 듯 말 듯 욕설을 뱉었다.

파비안이 함께 있어 전과 같은 절망감은 없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원주민들의 숫자는 몇십 배나 많았고, 거의가 알파였으며, 무기 또한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곳의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게 난타질과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식사시간을 보내던 원주민 알파들을 떠올리자, 자신과 파비안을 돼지우리가 아닌 이런 곳에 가둬둔 족장의 속내가 못내 꺼림칙했다.

별하는 피딱지가 앉은 입가를 문지르며 위태로운 앞날에 대해 고심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자신들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 그들의 앞마당인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지를 궁리하다 문득 생각했다.

“이러는 사이에 구조대가 왔으면 어쩌지? 우리 여기 있는 거 아무도 모를 텐데…….”

파비안은 별하의 목덜미에 코를 붙여 느릿하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흔적을 남겨놓고 왔어.”

“흔적?”

“별하, 너와 내가 있다는 이곳에 있다는.”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뜻을 되물으려는 찰나 파비안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희미한 기척이 들렸다.

“―?!”

“그놈이다.”

별하는 얼른 바닥을 더듬어 옷을 주워 입었다. 파비안은 그제야 별하에게서 느지막이 떨어졌다.

덜컥덜컥―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구덩이를 울렸다. 어둠을 가둔 문이 열리기 직전, 파비안은 별하의 팔을 잡아 제 뒤로 이끌었다.

“뒤로 와.”

별하는 얼떨결에 그의 뒤로 가 섰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지만 저를 향한 오드아이를 선명하게 느꼈다.

“…….”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에 서로의 살을 맞대고 체온과 체액을 나누며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알파에게 능욕을 당할 뻔한 그때, 운 좋게 나타나 저를 구해준 후부터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발을 다쳤을 때 간호를 해준 그때부터인지도…….

자신이 눈치 빠른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하 역시도 이제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이곳에서 의지하고 마지막까지 함께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앞에 선 알파, 파비안임을.

별하는 자신의 몸 안쪽 깊은 곳에 새겨진 흔적을 문득 느끼곤 몸을 떨었다.

임신 가능성 때문에 안에서 사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무쇠처럼 발기한 열기둥으로 끊임없이 파고들던 감각은 앞으로 어떤 알파를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 잊을 수 없으리라.

그만큼 극렬한 감각과 감정에 시달렸었다.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본능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린 채로.

“하아…….”

별하는 자꾸만 멋대로 움찔거리는 팔을 끌어안으며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덜컥덜컥― 부산한 마찰음을 내며 곧 문이 열리고, 밖에서 불붙은 장작이 날아들었다. 깜깜하던 구덩이 내부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곧 얼굴을 빼꼼히 드러낸 베타 하나가 안쪽을 확인한 후 뒤쪽을 향해 빠르게 무언가를 보고했다.

장작불이 꺼지기 전까지 다리 사이의 흉기를 숨김없이 드러내던 파비안이 지금은 셔츠와 바지를 멀쩡히 입고 있었다. 별하 역시도 어둠 속에서 용케 착의를 마친 상태였다.

베타가 지나간 후 커다란 인영이 그늘을 드리우며 문밖을 막아섰다. 아까의 그 알파였다. 그는 안쪽에서 풍기는 체취를 맡은 듯 험상궂은 얼굴을 했다. 알파가 별하를 향해 손짓하며 불렀다.

“우! 두! 두!”

나오라는 뜻 같았지만, 별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난폭한 성향을 숨기지 못하는 알파에게 맞은 기억이 뚜렷했다. 별하는 그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파비안의 그늘 뒤로 숨어들었다.

그게 불만이었던지 얼룩덜룩한 알파의 만면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별하를 밖으로 불렀다.

“두! 두!”

별하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 때 알파의 뒤에서 낯익은 언성이 들렸다. 족장이었다.

족장이 상기된 목소리로 무언가 외치자 알파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서 맞섰다. 계속해 이어지는 내부 분란에 별하도, 파비안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싸우는 거야?”

“…….”

파비안은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드세게 고함을 쳐 족장의 입을 막은 알파가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알파는 이전보다 누그러진 음성으로 별하를 불렀다.

별하가 파비안과 질펀하게 섹스한 것을 알면서도 딱히 문제로 삼지 않는 모양새가 오메가의 정조보다 짝, 반려, 각인이라는 개념이 더 큰 듯했다.

알파는 여지없이 분노를 표출하며 별하를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파비안이 그 손길을 막자 둘은 다시금 대치했다. 어제에 이은 데자뷔였다.

“…….”

“…….”

파비안의 완력과 성미를 한 번 경험한 알파는 어제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전면전을 피해 살짝 물러서더니 바깥의 베타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알파의 지시에 따라 베타들이 안쪽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파비안과 별하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파비안이 난폭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같았다.

별하는 경악했고 파비안은 조용히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두! 두! 우!”

알파는 계속해 별하를 채근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누구든 쏴 죽이겠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했다.

“두! 두!”

별하는 베타들이 혹 정말로 파비안을 쏴버릴까 봐 커다란 그림자에서 떨어져 나와 그의 옆에 섰다. 족장과 알파, 알파와 파비안, 알파와 별하, 별하와 파비안의 구도에서, 여기 있는 누구도 구도의 유사성이나 관계의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별하는 단 하나, 모든 사건의 발단은 오메가인 저 때문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저를 쫓아 이곳까지 들어온 파비안, 이방인 오메가를 자신의 짝으로 맞이하려 한 이곳의 알파, 평범한 오메가를 두고 힘 싸움을 하는 하이 알파들…….

족장과 알파의 관계가 부자관계인 듯 아닌 듯 모호했지만, 이방인 오메가를 두고 의견이 갈린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처음 결정했던 대로 오메가를 주민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이방인 알파와 이방인 오메가 둘 다 만찬 재료로 쓸 것이냐.

“아.”

별하는 그제야 일련의 상황을 이해했다. 이방인 둘을 만찬 재료료 삼으려는 족장의 뜻을 알파가 어기고 자신을 살리려 한다는 것을. 예상이 적확하게 맞아떨어진 건지, 알파는 베타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예상외로 활시위는 파비안이 아닌 별하에게로 향했다. 힘만 센 거한으로만 생각했던 알파는 별하와 파비안, 두 사람을 동시에 침묵시키는 법을 영리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우! 두! 두!”

알파는 별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파비안은 혹여 별하가 활에 맞지 않을까 우려해 움직이지 않았다. 알파가 우악하게 잡아끌어도 파리한 얼굴로 고요히 지켜볼 뿐이었다.

“윽.”

별하는 알파의 악력을 단박에 뿌리쳐내고 파비안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옆이 아닌 앞을 막아서서는, 자신은 이 하이 알파를 선택했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그에 알파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분노나 역정 같은 선명한 감정이기보다, 자신이 갖지 못한 물건을 다른 이에게 빼앗겼을 때 미묘하게 끼쳐 드는 감정의 변화 같은 것이었다.

“…….”

한풀 누그러진 모습으로 그들을 응시하던 알파는 돌연 제 허리춤에 꽂힌 돌칼 하나를 빼 들었다. 또 싸움을 거는 건가 했으나 그것을 휘둘러 파비안의 근처 바닥에 퍽 꽂아 넣었다.

“이니댜미러댜이.”

뽑아 들라는 듯.

“…….”

파비안은 그것을 뽑아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느낀 별하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뽑지 마, 파비안. 예감이 안 좋아.”

“……뽑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긴데.”

실제로 베타들을 비롯해 족장까지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비안의 옆에 박힌 돌칼과 알파가 다시 꺼내 드는 반대편 돌칼을, 마치 신의 강림이라도 목격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알파는 바닥에 꽂힌 돌칼을 가리키며 반복해 말했다.

“이니댜미러댜이!”

별하는 알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결투라도 하자는 건가? 어제 그렇게 당하고 왜 또? 설마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

“…….”

“그 정도로 무식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파비안은 제 옆에 꽂힌 돌칼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결투 아니면 그거겠지.”

별하는 제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불안한 듯 되물었다.

“그거, 라니?”

파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저를 죽일 듯 쏘아보는 알파와 눈을 마주하며 불빛 위로 떠오른 오드아이를 번득였다.

“게임.”

036.

여명은 금방 밝아왔다. 문이 활짝 열린 구덩이 안으로 비쳐 든 햇살에 이곳에 모인 이들의 얼굴이 서서히 진한 윤곽을 드러냈다. 별하는 파비안의 생각과 추측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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