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는 발로 그릇을 툭툭 건드렸다. 어서 먹으라는 뜻이었다. 별하가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험상궂은 행색과는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맑은 눈이 별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
“…….”
별하는 자신이 과일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에너지를 비축해 어떻게든 도망칠 길을 궁리하거나 시도하는 쪽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릇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익숙하게 껍질을 까 입에 물자 알파의 눈길이 별하의 입술께로 박혀 들었다.
031.
부드러운 과육에 이를 박아 넣자마자 베어 내, 어금니로 뭉그러뜨린 후 급히 꿀꺽 넘겼다. 입술에 묻은 과즙을 혀로 핥으며 다시 과육을 크게 베어 물었다.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워버린 별하는 여전히 저를 내려다보는 알파의 눈치를 살폈다.
알파가 그릇을 발로 밀었다. 계속 먹으라는 뜻이었다. 꼬르륵― 황홀할 정도의 단맛에 금방 입맛이 돌았고 배는 전혀 차지 않았다. 더 먹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별하의 눈길이 그릇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알파는 계속해 그릇을 밀었다. 집요한 채근에 별하는 어쩔 수 없이 과일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익숙한 모양의 바나나부터 시작해 처음 보는 과일들이 더 많았는데 하나같이 달고 맛있었다. 작은 씨가 새콤달콤하게 씹히는 과일을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다음에 먹을 과일을 손에 쥐었다.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던 알파가 몸을 낮춰 앉으며 서둘러 배를 채우는 별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얼굴이 마주 보이는 자리가 상당히 불편했지만 별하는 그가 보이지 않는 척 고개를 돌려 먹기만 했다.
어느 정도 배가 찼을 때쯤 별하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과일 그릇이 비어갈수록 저를 향한 알파의 진득한 눈길은 농도를 더해갔다.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어느새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식사 중인 별하의 이곳저곳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무릎을 접어 바짝 오므린 다리와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새하얀 발,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불그스름한 발톱, 알파는 별하의 발끝을 툭툭 건드리다 얼굴을 쳐다보았다.
“…….”
“…….”
별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관심이 없는 척 과일만 씹었다. 알파의 눈길이 다시 별하의 몸 구석구석을 떠돌았다. 귀가 드러나는 짧은 머리칼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갑자기 다리 사이를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았다. 별하가 거부감을 크게 드러내며 허벅지 사이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두 무릎에 힘을 줘 오므리자 다음은 가슴팍이었다.
납작한 가슴 위에 봉긋하게 붙은 작은 살덩이에 눈길이 가 붙박였다. 저들의 크고 검은 것과는 색깔도, 모양도 전혀 다른 젖꼭지가 알파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별하는 마지막 남은 과일이 혹 저에게 마지막 잎새가 되지는 않을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것을 먹을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뜨뜻한 손길이 별하의 젖꼭지를 톡 건드렸다.
“읏.”
내내 긴장해 있다가 잠깐 방심한 찰나 뻗어온 손길에 별하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몸을 뒤로 물리며 거부했다. 이상한 소리를 낸 저를 오해하지 않도록 더 정색하며 쏘아보았다. 알파는 개의치 않고 손톱을 검게 칠한 검지를 재차 뻗어 왔다.
“으,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
당황한 별하가 팔을 내저으며 거부했다. 그런 접촉은 죽어도 싫다는 듯 뜻이 완강했다.
“…….”
제 손길을 두 번째 저지당한 알파는 이전보다 굳은 기색으로 그를 예의 주시했다. 그는 먹이를 낚아채기 전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먹이의 목덜미 깊숙한 곳에 박아 넣어 골막까지 뜯어내 버릴 듯한 등등한 기운이었다.
별하는 문명의 인간에게는 없는 야생의 기백에 눌려 몸을 바짝 움츠렸다.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눈길을 떨구는 그 때였다. 알파가 별하의 팔을 움켜잡아 확 끌어당겼다.
“무슨, 윽!”
갑작스런 위력에 별하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저를 억압하는 알파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자세를 곧장 깨닫고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제 아래 이미 우뚝하게 솟은 알파의 성기가 하의를 뚫고 튀어나올 듯한 기세였다.
“그만, 둬.”
별하는 질겁했다. 묵묵히 제 하의를 벗기려는 알파를 온 힘을 다해 밀치고 때리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거친 몸부림에 근처에 놓인 과일 그릇이 뒤집히고 나무가벽이 무너질 듯 덜커덕거렸다. 너른 침상이 구석으로 끼익 밀려나며 바닥의 흙먼지가 삽시에 피어올랐다.
“으윽! 그만, 저리 치워!”
별하는 알파에게서 벗어나려 이를 악다물고 발버둥을 쳤다. 우악스럽게 붙잡힌 팔을 간신히 빼내자마자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퍽퍽퍽― 손등뼈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껏 가격하다가 발길질까지 더했다. 지옥 같았던 유격 훈련 당시보다 더한 위력을 사용하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을 썼다.
그럼에도 알파는 요지부동이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며 제게서 떨어지려는 별하를 가뿐하게 제압했다. 별하는 전력을 실은 주먹과 발길질이 전혀 먹혀들지 않자 손톱까지 세웠다. 알파의 팔과 어깨에 금방 붉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
등등한 눈을 한 채 별하의 저항을 인내하던 알파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큼지막하게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손을 펼쳐 별하의 뺨을 후려쳤다.
짜아악―
“―!!”
별하는 그대로 날아가 벽에 쿵 부딪쳤다. 강한 충격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멀어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흡사 쇠몽둥이로 가격당한 듯 얼굴 전체에 감각이 없었다.
금세 부어오른 입가로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별하는 뒤늦게 통증이 올라온 뺨을 움켜쥐고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란 눈동자 안쪽이 그렁그렁했다.
그의 앞에 우뚝 선 알파는 잔뜩 분노해 있었다. 자신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이전의 선심이나 호의는 일절 없이 우성 인자의 지배욕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알파는 대뜸 별하의 팔을 움켜잡아 일으키더니 침상 위로 엎어뜨렸다.
“으읏!”
알파가 무엇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별하는 바르작거리며 거부했다. 좀 전의 충격으로 힘이 실리지 않는 팔을 억지로 내저어 침상에서 일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알파는 다시금 손을 치켜들었다. 당장 후려칠 기세였다. 별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몸을 잔뜩 움츠려 방어했다.
알파는 겁에 질린 오메가를 손쉽게 엎어뜨렸다. 더 거부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별하의 뒷덜미를 압박하듯 짓누르며 그의 하의를 거칠게 끌어내려 벗겼다. 눈앞에 드러난 말간 엉덩이를 잡아 벌려 안쪽을 확인했다. 구멍은 조금도 젖어 있지 않았다.
알파는 흐트러진 숨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마른 구멍을 후볐다.
“그, 그만…….”
별하는 교감이라고는 없는 야만적인 행위 앞에서 흥분은커녕 차디차게 얼어붙어 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가 찢어질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서 극렬하게 내달리는 분노를 견뎠다.
“으으…….”
알파는 구멍을 멋대로 들락거리며 흥분을 유도했지만 긴장한 점막은 쉬이 젖어들지 않았다. 이내 그는 별하를 흥분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제 하의를 허벅지 아래로 끌어내렸다. 기세등등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장작불에 비쳐 안벽에 드리웠다.
그를 발견한 별하는 남은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뒷목을 짓누르는 위력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면서도 거부 의사를 멈추지 않았다.
“그만해, 제발…… 제발……. 난 네, 으윽……. 짝이 아니야…….”
“하아…… 하아…….”
알파는 흥분한 상태였다. 별하의 뒤로 바짝 붙어 열기에 잠식된 숨을 게워냈다. 동물이 저들만의 의사소통을 나누듯 알 수 없는 말로 속삭이자 진득한 숨결이 어깨를 타고 등줄기로 흘러내렸다. 별하의 엉덩이를 한껏 잡아 벌린 알파는 습기 없는 구멍에 제 귀두를 문질렀다.
별하는 눈을 크게 떴다. 목을 눌린 채로 곧 덮쳐들 악몽에 와들와들 떨었다.
“파, 파비안…….”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온 이름이었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떠오른 그 이름만을 신음처럼 되뇌었다.
파비안.
파비안…….
파비안―
알파는 잔뜩 흥분해 눅은 입김을 별하의 목덜미에 쏟아냈다. 경직된 엉덩이를 헤집듯 잡아 벌려 우므러드는 주름을 꾹꾹 눌렀다. 주변을 배회하던 것이 서서히 한 지점을 벌려 들었다. 별하는 턱을 굳게 물었다.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알파의 호흡이 돌연 뚝 멎어 들었다.
당장 허리를 쳐올려 페니스를 삽입하려던 알파가 고개를 홱 들었다. 사위를 돌아보며 코를 벌름거리더니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알파는 별하를 억제하던 위력을 거둬들이고 느릿하게 몸을 세워 일어났다. 지금 오메가를 겁탈하는 일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중대한 무언가가 알파를 자극한 것 같았다.
“…….”
작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표정의 변화도, 큰 움직임도 없었지만 현재 알파는 몹시 사나워져 있었다. 페로몬이 공격적으로 솟구쳐 움막 안이 열기로 뜨거울 정도였다.
불그림자가 노니는 안벽을 빙 둘러 걷던 알파가 한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침상 옆, 아무것도 없는 안벽을 뚫어지게 정시하는 눈에서 불티가 날렸다. 그는 화난 맹수처럼 한참을 으르렁거리다 불시에 주먹으로 벽을 가격했다.
콰앙―!
뼈대 위에 살을 바른 견고한 벽이 폭발하듯 박살 났다. 순식간에 주변으로 뿌연 흙먼지가 일었다. 갑자기 힘자랑을 하듯 벽을 때려 부순 알파는 그 기세와 달리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알파의 두툼한 목덜미에 흰 물체가 감겨 있었다. 단단하면서도 미끈하게 빠진 형태의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팔이었다.
알파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도 외측에서 밀고 들어오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계속해 밀려났다.
“우! 아! 이후! 우!”
그는 무척 당황한 듯 굵직한 육성으로 짐승 소리를 냈다. 이윽고 희끄무레한 인영이 탁한 흙먼지를 밀고 움막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목을 붙잡힌 알파보다 좀 더 장신인 인영의 윤곽이 장작불 불빛에 환히 드러났다.
032.
흙먼지가 묻어 흰빛이 한층 강해진 금발과 핏기 한 줌 보이지 않는 새하얀 얼굴, 어둡게 가라앉은 이색의 눈동자, 군데군데 얼룩이 지고 단추가 떨어져 나간 셔츠, 여전히 매끈한 슈트 바지를 입은 남자는 파비안이었다.
그는 알파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억압한 채로 움막 안을 돌아보았다. 알파의 폭압에서 겨우 해방되어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비척비척 일으키는 이를 발견하고 숨을 깊이 훅 들이켰다.
동그란 뒤통수와 마른 등의 형태, 그 시점부터 단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체향은 자신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별, 하……?”
별하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벗겨진 하의를 끌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끌어 올리다 말고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
별하의 눈가가 흠뻑 젖어 있었다. 하얗게 치장한 피부는 땀에 씻겨 내려가 얼룩덜룩했고 퉁퉁 부은 입가는 립스틱을 칠한 듯 새빨갰다. 찢어진 입술에서 흐른 핏방울이 가슴께까지 타고 내려가 그 주위가 온통 울긋불긋한 자국에 뒤덮여 있었다. 목덜미와 팔은 뭔가에 옭아 묶였던 듯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을 끔뻑이던 별하는 힘없이 킁킁거렸다.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더 들이켜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파……비안……?”
별하와 마주한 파비안의 안색이 새파랬다. 그는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알파를 패대기치듯 던져버리고 서둘러 별하에게로 다가갔다.
파비안은 몸을 똑바로 가누지 못하는 별하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처참해진 얼굴을 아연히 들여다보았다. 차마 만지지도 못했다.
“별하…….”
별하는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찡그렸다.
“파비안? ……진짜 너야?”
파비안은 성실하게 답했다.
“Yes, I am. Fabian Blackgray.”
익숙한 단내가 진동을 하고, 묵직한 저음은 상냥했다. 무엇보다 말이 통했다. 그럼에도 별하는 제 앞에 앉은 이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얼른 눈두덩을 문질러 속눈썹에 매달린 누기까지 말끔히 없애고 다시 여러 번 눈을 맞췄다. 저를 담은 선명한 오드아이를 온전히 마주한 후에야 부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미안.”
“음?”
“미안…….”
이유 없이 대뜸 사과하던 별하와 그의 상처 입은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파비안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에게 공격을 받은 알파가 거친 호흡을 뱉으며 서 있었다.
잔뜩 성이 난 상태의 그는 다른 알파와 들러붙은 별하를 향해 매섭게 고함을 쳤다.
“우! 아우우!”
전신의 근육이 흥분으로 움칠대자 그 위에 그려진 형상들이 마치 현화한 듯 요동했다. 질겁한 별하는 알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찍이 물러났다. 느직하게 몸을 세워 일어난 파비안이 별하의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알파와 정면에서 눈을 마주했다.
“…….”
“…….”
대치한 하이 알파들은 나누는 말이 일절 없었다. 대신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강렬한 각각의 페로몬들이 좁은 공간에서 공격적으로 뒤섞였다. 어디로도 흡수되지 않고, 밀려나지도 않으며, 상대의 것을 집어삼키려 난폭하게 휘감겼다.
우승열패를 겨루는 하이 알파들의 페로몬 속에서 별하는 덜덜 떨었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더 온전할 때 도망치기 위해 비틀비틀 밖으로 향하는데 그를 발견한 알파가 탁한 육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파비안이 민첩하게 알파의 손을 붙잡아 저지했다.
“그만둬. 그는 네 짝이 아니다.”
알파의 만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갈 곳 잃은 손아귀가 저를 붙든 파비안의 목을 향해 독사처럼 달려들었다. 파비안은 그를 가뿐히 피해 다시 한번 지엄하게 경고했다.
“네 짝이 아니야. 그는 내―”
“아! 우우우―!”
알파는 포효했다. 움막이 진동하며 부서진 벽 전체가 허물어질 정도의 큰 사자후였다.
별하가 기다시피 해 통로로 빠져나간 순간 알파들이 큰 맹수들처럼 뒤섞였다. 알파들은 제 급소를 숨기고 상대의 급소를 물어뜯기 위해 난투를 벌였다.
알파는 저보다 훨씬 큰 파비안의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밀려나거나 움켜잡히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것을 길게 빼 들었다. 검은 돌칼이었다. 찌르거나 쳐 내리는 뭉툭한 형태가 아닌, 뭔가를 베어낼 수 있을 정도로 날렵하게 잘 벼른 형태였다. 장작불이 비칠 때마다 시커먼 단면이 번들거렸다.
파비안은 숨을 얕게 들이켰다. 통로 뒤로 몸을 숨긴 별하를 힐긋 돌아보곤 그제야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부터 뱃속을 휘돌던 열덩어리가 한겨울의 입김처럼 사위로 번졌다.
그는 저에게 서슴없이 직진해 오는 알파를 더 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을 벌려 맞아들이며 음산하게 뇌까렸다.
“그리 원한다면 보여주지. 알파 위의 알파를.”
페로몬에 질식당하기 직전 도망친 별하는 옷부터 갈아입었다. 강한 현기증과 미열에 시달리며 급하게 옷을 꿰어 입는 중에도 자꾸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으…….”
파비안의 페로몬을 맡은 후부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곳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려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똑바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에도 움찔거리는 피부 위로 진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별하는 움막을 나서자마자 파초 군락으로 숨어들었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파비안의 페로몬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둔탁한 소음과 먼지로 뒤덮인 움막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이를 물고 미로 같은 파초를 헤쳐 들어갔다. 마음은 급했지만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힌 열띤 몸으로 길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판단력은 전무했고, 시야는 최악이었다.
별하는 고열로 치닫는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가지 못해 엎어졌다. 모로 웅크려 흐트러진 숨을 불어내는 그의 주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아…… 하아……”
그림자는 하나둘 늘어나 주위를 둘러쌌다. 낮의 베타들이었다.
움막은 초토화 상태였다. 외벽도, 가벽도 허물어져 본래의 형상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외력들에 휩쓸린 장작불이 움막 지붕으로 옮겨붙어 타오르고 있었다.
파비안의 목덜미에 긴 생채기가 나 있었다. 이제 피는 멎었지만 셔츠 깃이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알파의 돌칼을 손에 넣은 그는 턱을 치켜들고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하아…… 하아…… 하아…….”
파비안의 발아래 드러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알파의 행색은 그보다 좋지 않았다. 코뼈는 틀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피부를 덮은 그림들은 군데군데 찢겨나가 검붉은 핏물에 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두 눈은 미지의 세계를 목격한 듯 생생하게 번득였다.
자신의 적수가 되는, 저보다 강한 알파는 난생처음이었다. 전혀 다른 외형에다, 전혀 다른 형태의 위력을 사용하는 하이 알파에게 무한한 호기심을 느꼈다. 더불어 강한 상대에게 더 강해지는 하이 알파의 본능을 자극당해 그 어느 때보다 전의에 불타올랐다.
격한 움직임이 생겨날 때마다 흩날리듯 나풀거리던 파비안의 금발이 이내 보드랍게 가라앉았다. 오늘따라 흰빛이 강한 금발 사이의 오드아이는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파비안의 얼굴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희미한 감정도 깃들지 않은 무표정으로 씨근덕거리는 알파를 내려다보았다.
“…….”
“아우민미야미! 아햐여알이!”
알파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파비안은 제 손에 들어온 돌칼을 가만히 반대로 거머쥐었다. 내리꽂기에 수월하도록 칼끝을 아래로 향해 돌려 잡자 알파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리굼우랴니나이!”
생명의 위협을 느낀 듯 바닥에 들러붙은 몸을 일으키려 몸부림을 쳤다. 격렬하게 들썩여댔지만 이전의 충돌로 기력이 쇠진한 육신은 파비안의 위력에 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우! 우! 일댜린짐지이!”
“쉿.”
“라아미즈아……!”
일순간 파비안의 전완근이 크게 도드라지며 손등의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그는 주저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이 상황을 어서 끝내려는 듯 번들거리는 칼끝을 알파의 가슴 한가운데에 내리꽂았다.
정확히, 내리꽂으려던 찰나였다.
뒤쪽에서 큰 외침이 번졌다.
“두! 두!”
파비안은 거칠게 벌어지는 흉곽 앞에서 돌연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진 외벽을 원주민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늑대 형상의 새카만 가면을 쓰고 창을 든 이들은 전부 베타였다. 그 한가운데에 선 족장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파비안을 직시하고 있었다.
파비안의 눈길이 베타들과 족장을 지나 그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의 발치께에 별하가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거친 넝쿨이 그의 목과 양손을 팽팽하게 압박하고 있었는데 마치 말을 듣지 않는 개를 묶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린 별하와 눈길이 스쳤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방울이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파비안의 오드아이에 불이 붙은 듯 일렁였다. 큰 보폭으로 곧장 그들을 향해 가던 그는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
작은 가시들이 돋은 넝쿨이 별하의 목을 옥죄어 들고 있었다. 별하는 희미한 신음도 내지 못하고 제 목을 옥죄는 넝쿨을 끊어내려 발버둥을 쳤다. 작은 핏방울들이 모여 한줄기로 흘러내렸다.
033.
파비안이 움직임을 멈추자 곧 넝쿨 목줄도 느슨해졌다. 쿨럭쿨럭― 별하는 묽은 침과 함께 기침을 토해 냈다. 파비안이 우뚝한 콧등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를 놔줘!”
족장이 지팡이로 땅을 굴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 두! 두! 두!”
격분한 파비안의 페로몬이 최대치로 치솟았다. 당장 그들을 덮쳐 갈기갈기 찢어 죽일 기세였다.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베타들이 겁을 먹은 듯 술렁였다. 족장은 눈을 희번덕이며 더 큰 육성을 질렀다.
파비안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제3의 언어로 포효했다. 페로몬과 뒤섞인 아드레날린에 분노와 투쟁심, 가학심이 한계점까지 다다랐다.
눈앞에 선 이들 전부를 말살하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흐르듯이 출렁였지만 파비안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덫에 걸린 듯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푹 숙인 별하만 직시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 날아온 넝쿨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넝쿨을 움켜쥔 알파는 그것을 우악하게 잡아당겨 파비안을 결박했다.
“윽…….”
파비안은 저항하지 않았다. 분노를 잠재우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드는 이와 눈을 마주했다.
괜찮아, 별하.
금방 구해줄게.
별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젖은 눈만 끔뻑거렸다.
베타들에게 끌려간 곳은 깊숙한 구덩이였다. 광장을 등진 음지에 위치한 그곳은 주민들의 거처로는 보이지 않았다. 악취가 나는 가축이나 식량창고, 내지는 마을에 둘 수 없는 뭔가를 격리시키기 위한 용도의 장소 같았다.
묵직한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문을 들어 올리자 안쪽의 시커먼 공기가 새어 나왔다. 장작불을 든 베타가 그것을 안쪽에 던졌다. 불빛이 드리운 구덩이는 텅 비어 있었다.
진흙냄새와 마른낙엽냄새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취가 미세하게 풍겼지만 돼지도, 음식물 쓰레기도 없었다.
질긴 넝쿨에 목과 양손이 묶인 별하와 파비안은 구덩이로 떠밀려 들어갔다. 베타들은 곧장 문을 내리덮어 봉쇄했다.
밖으로 통하는 단 하나의 길이 닫히는 순간 구덩이에 들어차 있던 어둠이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베타가 버리고 간 장작불에 바로 먹혀 들지는 않았지만 시간문제였다.
파비안은 엎어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별하를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걱정하는 저음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별하는 대답 없이 끊어질 듯 미약한 한숨만 내쉬었다. 도움을 받아 겨우 일으킨 몸을 끌고 장작불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숨어들어 갔다.
“…….”
파비안은 가만히 그를 내버려 두었다.
서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별하는 지금 파비안의 페로몬에 반응해 발정기 증상을 겪고 있었다.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져 앉은 파비안 역시도 상황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좀 전 알파와의 난투로 흥분감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보다 더 난감한 점은 아직 러트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작은 자극에도 페니스가 발기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넝쿨을 뜯어내려 시도해 봤지만 엄청난 인성에 이도 박히지 않았다. 어깨를 세워 굳게 닫힌 문을 쿵쿵 밀었다. 구덩이 안벽이 미미하게 흔들릴 뿐 어딘가에 단단히 걸려 꿈쩍하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해 본다면 문을 잠근 방식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당장 숨이 거칠어져 포기했다.
둘은 서로의 페로몬을 맡지 못하는 척, 맡지 않는 척 일절 쳐다보지 않았다. 짧은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숨을 들이마셨다가 조심히 뱉어내며 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진한 음영 속에 묻힌 별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덜덜 떨리는 몸을 손등이 새하얘지도록 움츠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알, 고 온 거야……?”
파비안은 턱을 물었다. 순식간에 구덩이 가득 들어찬 상대의 체취에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나직이 대답했다.
“……네 페로몬.”
별하는 흐리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이 저주받은 페로몬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도 웃음이 났다. 왜 그런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파비안은 잠잠히 앞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