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10)화 (10/49)

“…….”

“…….”

미처 바지를 입지 못한 별하는 완전한 알몸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급히 옷을 입기에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였다. 원인을 알 수 없던 의문들이 문제의 장본인과 눈을 마주하는 순간 풀려버려 넋이 나간 듯했다.

파비안은 러트가 오기 전 단계의 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잠들기 전까지도 나긋하게 굿나잇 인사를 건네던 사람이 일변한 이유였다.

젖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그늘 아래 서 있던 파비안은 느지막이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에 걸어둔 셔츠를 걸치고는 밀림으로 들어가 이내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고도 움직이지 못하는 별하의 안색이 못내 창백했다. 죽을힘을 다해 다시 물로 향하는 불가사리들을 보고도 막아서지 않았다.

“…….”

모래 위에 널브러진 청바지와 전날 미리 빨아둔 티셔츠, 남방을 느릿하게 차곡차곡 걸쳐 입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은 내버려 둔 채 그늘로 들어갔다. 그날부터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는 모닥불가에 앉아 그것을 멀거니 응시했다.

별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정신을 쏟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장작을 집어삼키는 불길만 눈에 담았다. 그러나 평정심을 가장한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파비안이 사라진 밀림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제기랄…….”

별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믿었던 이에 대한 배신감인지도 몰랐다. 파비안이 알파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특별함을 기대한 자신이 누구보다 원망스러웠다.

마음이 복잡해진 별하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림으로 들어가기 전 스치듯 보이던 파비안의 얼굴이 떠올라 심경이 더 착잡해졌다.

분명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숨을 쉬기 힘들었지만 파비안은 그런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알파의 본능을.

별하는 그를 뒤쫓아 밀림으로 들어가려다 강제로 발정을 당한 첫날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자신이 쫓아가 봤자 알파와 오메가의 입장 차이에는 변함이 없었다. 맹수가 연약한 먹잇감을 사냥하는 이유 역시 단지 배가 고프기 때문인데, 그런 불변의 섭리를 잘 알면서도 잠시나마 관계를 개선시키려는 욕심을 품었던 자신에게 새삼 당혹감과 놀라움을 느꼈다.

분노는 금방 가라앉았다. 어떻게 보면 그런 알파와 여기까지 관계를 이어온 것만으로도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조금만 스쳐도 발정하는 게 알파라는 족속인데, 이 정도면 역사책에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이대로 친구가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기대를 품었을 정도였으니까.

“…….”

나무에 등을 기댄 별하는 젖은 머리칼을 흔들어 털었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를 옷깃으로 닦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파비안은 러트가 끝날 때까지 이 상태로 잠적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몰라서 거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다고 해서 알파의 능력을 피해갈 수는 없겠지만.

그의 제안을 이참에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 된다면 어떤 내기를 하게 되고 또 어떤 고난을 겪게 될지, 앞이 막막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들을 상상하며 불안하게 시간을 죽이는 그 때였다. 밀림 쪽에서 익숙한 형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품에 뭔가를 가득 안고 해변으로 나온 파비안은 그것들을 나무 아래 임시 식량 창고에 내려놓았다. 항상 밥처럼 섭취하는 과일과 가지째 꺾어온 식용 꽃이었다. 그는 별하가 선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며칠 걸릴지도 몰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차분한 음성이었다. 별하는 수북하게 쌓인 과일 더미와 모래에 꽂힌 꽃가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꺼지지 않는 모닥불처럼 과일이나 먹을 것들이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이런 와중에도 그랬다.

“…….”

별하는 두 눈만 끔뻑거렸다. 파비안 블랙그레이라는 남자가 사실은 이러한 알파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미안하고 겸연쩍어서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맞은 말을 찾지 못했다. 안부 인사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마른침만 삼켰다.

할 일을 마치고 다시 밀림으로 향하던 파비안은 별안간 걸음을 우뚝 멈췄다. 대답이 없는 이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괜찮나, 별하?”

별하는 그와 눈길을 마주했다.

“꼭 가야, 해?”

파비안은 곧바로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곧 러트다.”

“러트가 확실한 거야? 마지막 발정기부터 얼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뭘 잘못 먹었거나, 감기라도 걸린 거라면―”

“지금은 나도, 별하 너도 생체 리듬이 규칙적이지 못해. 그런 증상이 조금이라도 감지된다면 떨어져 지내는 게 가장 안전해.”

그는 단호했다.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했다.

024.

“…….”

별하는 목까지 차오른 말이 있었지만 목울대를 움직여 몇 번이나 억눌러 삼켰다. 찰나의 감정에 휘둘려 뱉어냈다가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끔찍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인생이 끝날지도 몰랐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라고 해도, 아직은 그날이 오지 않았기에 참아야 했다. 연민과 고독감에 빠져 마음이 술렁인다고 해도.

“너무 멀리 가진 마. 길 잃을 수도 있잖아…….”

“…….”

파비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밀림으로 홱 들어가 버리지도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별하가 밟고 서 있는 모래를 묵묵히 응시하다 독백처럼 읊조렸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난 러트가 길지 않아서.”

별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연기를 피워.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게.”

“응.”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수영하면 안 돼. 가끔 상어나 독해파리가 올라오기도 해서.”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러트 무사히 보내. 억제제 없이 꽤나 힘들 거야.”

“……그래.”

“…….”

뜨문뜨문 주고받던 대화가 끊어졌을 때 눈길이 스쳤다. 줄곧 시선을 피하던 파비안이 어렴풋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꽉 다문 입술은 핏물이 밴 듯 새빨갰지만 낯빛은 몹시도 창백했다.

이제 그만 돌아서려는 이를 별하가 얼른 불러 세웠다.

“파비, 안.”

처음 부른 이름이었다. 대화를 할 때도 ‘너’, ‘그쪽’, ‘헤이’로만 지칭했기에 언급된 적이 없었다.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바람결에 실려 이름의 주인에게로 흘러들었다.

파비안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급히 몇 걸음을 내디뎌 그늘 밖으로 나온 별하는 그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주저했다.

별하는 자신이 파비안을 왜 불러 세운 건지 알지 못했다. 다만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이곳에서 그런 일이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파비안이 이대로 영영 사라질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별하……?”

별하는 대뜸 물었다.

“악수, 할 수 있어?”

“…….”

파비안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선뜻 손을 내밀었다. 별하는 주저 없이 그에게로 다가가 햇빛 아래서 저를 기다리는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건조하면서도 따뜻한 피부가 맞닿자마자 느슨한 악력이 별하의 손등을 감싸듯 덮었다. 별하는 군대나 사회에서 형식적으로 악수할 때보다 더 강한 힘으로 파비안의 손을 잡았다.

“…….”

“…….”

틈 없이 밀착한 손바닥 안쪽이 찌릿했다. 뒤섞인 체온이 뜨거운데도 불쾌감은 전혀 없었다. 반대로 익숙한 체온에 마음이 누그러져 이대로 조금만 더 맞닿아 있고 싶었다.

별하는 상대가 곤란해지지 않게 먼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파비안도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서로의 손끝을 스치며 완전히 떨어져 나갔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포옹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싫어했을 별하도 파비안을 가볍게 안았다. 그의 너른 어깨를 살짝 짚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미안. 우리가 오메가, 알파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일 없었을 텐데.”

“…….”

“평범한 친구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이곳에서만큼은.”

무심하게 내뱉듯 말하는 별하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비안은 짧은 한숨을 불어내며 그의 축축한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잠깐이야.”

“…….”

“잠깐이면 돼.”

별하는 고개를 들어 파비안의 흰 뺨에 제 뺨을 붙였다. 약간의 누기가 느껴지는 피부는 부드럽게 달라붙듯 밀착했다. 애정을 담은 인사에 파비안 역시 고개를 움직여 반대편 뺨을 붙였다.

답인사를 전한 곳에 가벼운 키스를 더하다 입술끼리 살짝 부딪혔지만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입술로 옮겨가 몇 번이고 쪽, 쪽 입맞춤을 나눴다. 서로의 홍채를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

“…….”

열기를 머금은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지며 젖은 점막들이 맞물렸다. 그 사이로 새빨간 살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서로를 맛보듯 살짝 스치기만 할 뿐 깊은 접촉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먼저 입술을 뗀 파비안은 별하의 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떨어졌다. 덩그러니 남은 제 입술을 곱씹으며 쳐다보는 이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밀림으로 들어갔다.

“…….”

커다란 인영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별하도 느지막이 돌아섰다. 모닥불이 일렁이는 그늘 아래로 들어가 나무에 기대앉았다.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장작이나 가져올지,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낮잠을 즐길지, 아니면 구조 글자나 더 만들지를 고민했다.

“…….”

불현듯 덮쳐든 적막감에 별하는 무기력감을 느꼈다. 할 일을 일부러 만들어내면 적잖이 있겠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배를 채우고자 하는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저 혼자 남겨졌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생각할 정도로 우울감과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코끝에서 파비안의 체향이 느껴졌다. 어지러운 기분을 느낀 별하는 두 무릎을 당겨 끌어안았다.

그와 포옹했을 때 천조각 너머로 느껴지던 파비안의 페니스는 발기한 상태였다. 접촉해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오메가의 체취만으로 이미 한참 전부터 그런 상태가 된 것이었다.

만약 그런 상태임에도 별거를 하지 않았다면 벌써 알파의 러트에 휘말려 첫날의 불상사를 재현하게 됐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이전에 먹은 억제제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백발백중이었다.

별하는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파비안에게 그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동료이기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된 것이지, 사랑의 감정 같은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런 상대와 한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해 섹스를 해버린다면, 그래서 임신을 해버린다면 끝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꼴이었다.

별하는 세운 무릎에 이마를 붙였다.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친분을 나누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도 없었으리라. 후회를 해봐도 사람의 온기를 깨닫고 의지해 버린 시점에서부터 지금의 이러한 비감들은 정해진 결과였다.

그런 감정들을 소화해 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아…….”

그는 한숨을 게워내며 눈을 감았다. 단지 파비안이 자리를 잠시 비운 것뿐인데, 혼자서 왜 이리 심각하게 반응하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앞둔 사람처럼 구는 제 자신이 우스웠다.

고개를 내저으며 자조한 별하는 숨을 천천히 들이켜며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파비안의 흔적을 가만히 음미했다.

달콤하게 감겨드는 페로몬이 어느 때보다 아쉬웠다. 이대로 더 맡았다간 금방 소진해 버릴까 봐 숨을 아꼈다. 주먹을 그러쥐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뎠다가 겨우 한 모금을 들이켰다. 하지만 달콤한 체향은 더 이상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별하는 번득 번지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간신히 누그러뜨렸다고 생각했지만 밑바닥의 미세한 균열을 비집고 나온 감정들까지 수습하지는 못했다.

그를 쫓아가고 싶었다. 러트든, 섹스든, 전부 다 어울려줄 테니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다. 친구니, 동료니, 인류애니 갖은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봐도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와, 파비안과 함께하고 싶었다.

돌연 눈이 뜨였다.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저도 모르게 눈을 뜬 별하는 모로 누운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나무에 묶어둔 레인 코트가 언제 제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주위가 온통 불그스름한 석양에 잠겨 있었다. 부지런히 타오르던 모닥불은 이제 숯불만 남아 있었다. 벌써 저녁이었다.

별하는 빈 옆자리를 멀거니 바라보다 파비안의 기척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해변에는 파도소리뿐이었다. 한참 전부터 어둠이 내려앉은 밀림에서는 작은 벌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야 별거 중인 상황을 깨닫고 마른 눈가를 문질렀다.

아직은 잠기운에 취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우비에라도 젖지 않도록 풀숲에 숨겨둔 장작을 가져와 모닥불에 밀어 넣었다. 꺼져가던 불씨가 장작 주위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꼬르륵―

허기도 없는 뱃속이 요란을 떨었다. 이어서 계속 자려던 별하는 코코넛 열매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나무 이파리 옆으로 달이 떠오른 밤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

여전히 졸린 데도 바로 잠이 들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누운 그는 서서히 피어나는 불꽃을 응시했다. 미미한 바람에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일렁이는 열기를 쫓던 눈길이 그 너머의 빈 자리로 향했다.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느닷없이 잠을 깰 때면 항상 옆자리부터 확인했었다. 혹시나 혼자 남겨진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옆에서 잠든 이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었다. 바로 어제까지의 일인데도 수십 년 전의 아뜩한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별하는 음울해지는 기분을 떨쳐내려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025.

별하는 파비안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 상기하며 어서 잠을 청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곳으로 돌아와 빈 자리에서 잠들어 있기를, 기대하면서.

마음은 그랬지만 잠기운이 찾아오지 않았다. 몽롱하던 정신이 점점 또렷해져서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슬슬 지루해졌다.

꼬르륵― 꼬르르륵―

무시하고 자려는데 연이어 울리는 진동에 마지못해 다시 일어나 앉았다. 과일 더미에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가져와 물컹한 껍질을 벗겨냈다. 단맛이 강해 군침은 돌았지만 맛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별하는 하나를 겨우 먹어치우고 껍질을 밀림 구석으로 던졌다. 나뭇잎 위에 떨어진 것 같은 소리가 어둑한 안쪽에서 일었다. 과즙이 흘러 진득해진 손을 옷에 문질러도 나아지지 않아서 귀찮지만 몸을 일으켰다.

달빛이 비추는 모래밭을 가로질러 고요히 밀려드는 물가에 앉아 손을 씻었다. 검게 젖은 모래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던 게가 이쪽을 발견하고 후다닥 달아났다.

“…….”

그를 멍하니 응시하던 별하는 곧 몸을 일으켰다. 달빛이 비쳐 반짝반짝한 바다를 등져 섬을 바라보았다. 캄캄한 저곳 어딘가에서 혼자 러트를 견디고 있을 알파를 떠올렸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다.

알파가 제대로 위력을 쓴다면 오메가 한 명쯤은 독 안에 든 쥐였다. 손 안의 과일이었다. 단둘뿐인 섬에는 양심을 채찍질할 규율도, 본성을 억제하는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통스런 러트를 참아내는 일보다 오메가를 짓눌러 본능에 순응하는 일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지금의 재난을 겪기 전까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옆에서 손가락질할 누구 하나 없는데도 굳이 힘든 길을 택했다.

기껏 짐작하는 정도였지만, 파비안이라는 알파는 육신의 쾌락보다 자신의 신념에 큰 가치를 두는 남자였다.

별하는 도시 전설 같은 알파에 대해 골몰하며 모닥불이 일렁이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직은 장작이 너끈한 모닥불을 살펴보고 제 자리를 찾아가던 그 때, 돌연 걸음을 우뚝 멈췄다.

좀 전에 먹은 과일 껍질이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

벌레가 꼬이지 않도록 밀림으로 던졌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선뜻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번득 고개를 들었다.

“파비안……?”

어슴푸레한 해변에는 파도소리만이 전부였다. 오늘따라 풀벌레소리도 들리지 않는 휘휘한 밀림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냈다.

“파비안? 너야?”

그 순간 그림자로 캄캄한 밀림 안에서 희미한 기척이 일었다. 빠작―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별안간 이상한 기분을 느낀 별하는 밀림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장난하지 마.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

세상이 멈춘 듯 사위가 적요했다. 어디에서도 파비안의 저음은 들리지 않았다.

우거진 심림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던 원숭이 무리가 이곳까지 온 게 아닐까, 좋게 생각해 봐도 육감이 계속해서 이상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위화감을.

혹여 맹수일까 해서 불이 붙은 장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밀림을 향해 들이밀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어떤 찝찔하게 눅은 냄새가 코를 건드렸다.

“―?!”

냄새를 인지한 순간 바로 앞의 나무 그늘이 크게 흔들렸다. 새카만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가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휙 지나가 옆의 나무 그늘로 숨어들어 갔다.

별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불 붙은 장작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모래밭에 발이 묻혀 들어가 비틀거리면서도 밀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아……. 뭐, 뭐야……?”

놀란 숨을 내뱉는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방금 자다 일어나 헛것을 본 건가 싶어 다급히 두 눈을 문질러 시야를 확보했지만 코 점막에 달라붙은 독특한 냄새는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뭔가가 있었다. 파비안이 아닌 그 누군가가.

별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주변의 캄캄한 나무 그늘을 경계했다. 식은땀이 치솟으며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 뻑뻑하게 굳은 눈동자를 굴리는 순간, 나무 그늘이 다시 흔들렸다.

곧 그늘이 길어지며 아래 숨어 있던 그림자가 모닥불이 비치는 밖으로 떨어져 나왔다.

별하는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사람이었다. 머리, 팔, 몸통, 다리의 구조로 된 생물체는 분명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쪽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먹을 뒤집어쓴 듯 온통 새카매서 이목구비와 다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누르스름한 흰자위만 이따금씩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검은 형태 뒤로 또 다른 검은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었다. 별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냈다.

“이, 이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몇 주 동안 아무도 못 만나서 무인도인 줄로만……. 친구와 조, 조난을 당해 이곳에 왔는데 도와, 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외부와 연락이 가능한가요……?”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에서 영어가 통용될 리 없었지만 지금 별하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경계심을 풀어 자신이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런 뜻에 반해 검은 형태들은 입을 열지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오직 별하에게 두 눈을 꽂은 채 느릿한 듯 큰 보폭으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

위기감을 느낀 별하는 다가오는 이들에게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등을 보였다가는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만 같아 한시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의 뒷걸음질보다 다가오는 이들의 보폭이 훨씬 더 커 금방 거리가 가까워졌다.

일순 알파들의 역겨운 페로몬이 비강을 타고 훅 끼쳐들었다. 그들의 목적을 깨달은 별하는 이를 악다물었다. 저들이 원하는 건 자신이었다.

오메가―

검은 형태들이 모닥불에 다다랐을 때 행색이 언뜻 비쳐 보였다. 밀림 속 그늘보다 더 짙은 그들의 얼굴과 가슴팍, 어깨, 팔다리에 어떤 무늬들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는데 불빛이 닿자 미세하게 발광했다. 그들은 실오라기는커녕 나뭇잎 한 장도 걸치지 않아 축 늘어진 페니스와 고환이 그대로 내보였다.

질겁한 별하는 부릅뜬 눈으로 불청객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다. 낯선 위협감에 오감이 곤두섰지만 대응할 방법이 전무했다. 앞은 암흑 같은 밀림이고, 뒤는 바다였다. 제 아무리 발이 빠르다고 해도 두 명의 알파를 따돌릴 재간은 없었다.

“망, 할…….”

검은 형태들이 모닥불을 통과할 때였다. 발짓을 해 모래로 불길을 덮어버렸다. 사위가 어둠에 휩싸이는 순간 돌변해서는 흰자위를 드러내며 이쪽으로 와다닥 달려왔다.

별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달렸다. 과일 더미를 둔 야자수를 뒤도는 찰나, 새카만 그늘에서 튀어나온 검은 형태의 거구가 그를 낚아챘다.

“으윽!”

별하는 우악한 힘에 대번 끌려가 모래밭에 얼굴을 처박혔다. 뒤로 덮쳐드는 검은 형체들에게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하며 거칠게 저항했다.

“그, 그만둬! 미친―! 우웁! 웁!”

축축한 손바닥에 입을 틀어 막히는 순간 뒷덜미에서 강한 충격이 일었다. 별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모래 위에 엎어졌다.

03. Close By

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밀림의 엷은 그늘에 서서 해변을 가만히 내다보았다.

나무에 기대앉은 이는 상념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두운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일변했다. 멍했다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가, 포기한 듯 허공을 응시했다가, 괴로운 기분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끌어안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는 한참이 지나도록 꼼짝하지 않았다.

잠든 건가?

그 후로 시간이 더 흘러도 움직임이 없었다. 다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 한쪽이 힘없이 스스르 풀려 모래밭에 툭 떨어졌다.

“…….”

파비안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작은 한숨이 빠져나왔다. 그는 그늘을 걸어 나와 별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릎에 이마를 붙인 채 느른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이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던 머리칼이 이제는 바짝 말라 있었다. 짤막한 잔머리가 갓 돋아난 새싹처럼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작고 새하얀 가마와 동그란 뒤통수를 눈으로 쓰다듬듯 훑어 내렸다. 머리칼이 달라붙은 귓바퀴를 지나 그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으음…….”

잠든 이가 고개를 돌려 무릎에 뺨을 붙였다. 꿈이라도 꾸는 듯 고이 내리감긴 속눈썹이 간혹 부드러운 물결을 탔다. 단잠을 자는 아이처럼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움츠린 가슴팍이 벌어졌다가 찬찬히 가라앉을 때마다 빠져나오는 숨 냄새가 못내 달콤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파비안이 느직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잠시 수그러들었던 어떤 충동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머릿속을 장악했다.

“…….”

그는 제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욕망을 묵묵히 참고 견뎠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느끼지 못하는 듯 고요히 호흡했다. 은은하게 감겨드는 별하의 단내를 맡을 때마다 예민하게 곤두서는 감각들이 신경 조직을 주무르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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