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안이 또렷한 눈동자로 직시해 왔다. 불빛에 비친 두 눈동자가 조금 다른 색감으로 반짝거렸다. 이내 굳게 닫힌 입매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그는 두 눈가를 휘며 작게 웃었다.
“명심하지.”
“…….”
깊고도 신비로운 눈매를 뽐내듯 눈웃음을 짓는 이에게 당황한 별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원한 게 아닌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파비안은 반응이 좋지 못한 이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다시 지포라이터를 달칵거렸다. 별하 역시 굳은 얼굴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이상한 분위기를 애써 외면했다.
당연하던 침묵이 새삼 어색한 기류를 자아냈다.
“…….”
“…….”
별하는 별안간 열기를 느꼈다. 레인 코트 안쪽이 후덥지근해 등 쪽이 불편했다. 이마에 송송 맺혀드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툭 뱉듯 말했다.
“그리고 낌새가 오면 바로 말해.”
“낌새?”
“네 러트. 그때는 따로 떨어져서 지내야 하니까 미리 알려줘.”
파비안은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지.”
“작은 신호도 놓치지 마.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혹시라도 빌어먹을 사단이 다시 일어난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어. 100퍼센트 임신이야.”
“…….”
“지옥행이라고.”
파비안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까딱였다. 별하는 참고 참다 결국 레인 코트를 벗었다. 축축한 머리칼과 남방을 툭툭 털어내며 여전한 빗줄기를 내다보았다.
정말 며칠 동안 내리 쏟아질 기세였다. 점점 더 암울해지는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방안을 강구하는 그 때,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았다.
“……?”
별하의 옆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파비안이 느릿하게 눈길을 내렸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물기를 머금은 플래티넘 블론드가 보드랍게 흘러내렸다. 미처 가리지 못한 두 뺨이 불빛에 비쳐 유독 불그스름했다.
02. Made By
오늘로 나흘째였다. 나흘간 끊임없이 내린 비를 모은다면 서울은 옛날 옛적에 물바다가 됐을지도 몰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전만큼 기세가 사납진 않았지만 활동하기에 적합한 날씨는 아니었다.
시원한 코코넛과 달콤한 슈가애플, 씨가 가득 박힌 바나나로 끼니를 해결한 별하는 야자수 그늘 아래 드러누워 희끄무레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과일뿐이지만 먹을 게 있고, 비루하지만 쉼터가 있고, 일주일을 훌쩍 넘겨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하지만 옷도 있었다. 더없이 심심한 생활에도 벌써 적응이 돼서 크게 불편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견디기 힘들어 슬퍼했다가, 원망하며 화도 냈다가, 어이없어 웃기도 하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제법 평온했다. 먹은 후에는 자고, 자다 일어나서 다시 먹고를 무한 반복하다 보니 복잡하게 사고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했다.
별하는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번잡하게 쫓고 쫓기던 세상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지금의 이 평화로운 일상이 더 현실처럼 느껴졌고, 이대로라면 언제까지고 구조를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아들의 소식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두툼한 삼겹살이 몹시 그리울 뿐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던 별하는 부스스 일어났다. 언제 빗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짧은 머리칼을 대충 정리하며 옆자리를 힐끔 곁눈질했다. 이른 아침부터 길을 찾으러 나간 파비안의 자리에는 이불 대용의 커다란 나뭇잎이 깔려 있었다.
“…….”
평화 협정을 맺은 그날부터 개인적으로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대부분 식사를 함께하고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딱히 오가는 대화가 없어도 전해지는 분위기로 서로의 생활을 적당히 공유했다.
별하는 제 걱정과 달리 무난하고 차분한 파비안의 성향에 꽤나 만족했다.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알게 된 그의 성격은 상당히 좋지 못했던 첫인상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어떤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순한 양이었다.
음식을 공수해 오고 장작거리를 찾아오는 일은 파비안이 전담했다. 바람에 지붕이 뒤집어져 빗물이 새도 그가 먼저 나서서 수습했다. 간혹 뭔가를 물어보면 곧잘 대답해 주었고 그와 관련된 사항도 세심히 알려주었다. 유머가 없는 만큼 거짓도 없었다.
혹 밤중에 덮치지 않을까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그런 낌새는커녕,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별하는 자신에게 사람을 보는 재주나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허나 눈으로 보여지는 일관된 태도는 신뢰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많은 시간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고난에 대응하는 방식이 곧 그 사람의 본성이라 믿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다만 가끔씩 밀려드는 미묘한 기류가 그를 불편하게 했다. 무의식적으로 눈이 마주쳐 서로 뻘쭘하게 고개를 돌릴 때가 여러 번이었다. 옷을 입고 벗는 것도 괜히 신경 쓰여 눅눅한 남방을 한 번도 벗지 못했다.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 그쪽으로는 최대한 보지 않고 모른 척하려 했지만, 별하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기척에 반응하고 동요했다. 그러면 파비안 역시 보석 같은 눈동자를 떨구며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빌어먹을.”
그는 짜증스럽게 욕설을 뇌까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며칠간 씻지 못해 몸이 근질거렸다. 이제 발정기의 후유증은 완전히 날아가 미열도, 한기도 없었다. 빗줄기가 잦아든 참에 목욕 겸 수영이라도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할 생각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물고기도 잡고 싶었다. 모닥불에 생선을 구워 먹는 상상만으로도 혀 밑으로 침이 고여 들었다.
별하는 곧장 해변으로 향했다. 숲에 들어올 때는 구만리를 걸은 것 같았는데 나갈 때는 잠시였다. 금방 밀림을 나선 그는 어느새 익숙해진 해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늘에는 아직 먹구름이 정체해 있었지만 비는 거의 그친 상태였다. 바다는 본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고 바람도 문제가 될 만큼 세지 않았다.
별하는 해변의 양단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파비안이 있을까 해서였다.
“설마 없겠지…….”
다행히 어디에서도 흰 피부의 미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별하는 해변, 파비안은 밀림이라는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게 안쪽에서 길을 찾는 중인 듯했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포슬포슬하게 젖은 모래를 밟았다.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발목에 감기는 밀물에서는 전날의 험악한 기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차긴 했지만 여름날의 제주도 바닷물보다 따뜻했다.
바로 남방을 벗었다. 안쪽의 눅눅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훌훌 벗어 던지고 곧장 물에 들어갔다. 서늘하게 다리 사이를 휘감던 바닷물은 이내 뜨뜻하게 피부를 감쌌다. 허리 깊이까지 들어간 별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한 안락감에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하아…….”
태양이 숨어든 중천에서부터 아득히 먼 수평선까지 이어진 구름들의 향연이 인상파 그림처럼 무척 강렬했다. 정적이면서도 화려한 그 풍경을 잠잠히 바라보던 별하는 손으로 물을 떠 어깨를 적셨다. 뼈가 도드라진 목덜미를 지나 마른 얼굴을 적시며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이마를 반쯤 가린 머리칼이 유독 새카맸다. 곧은 눈썹과 검은 속눈썹이 도드라진 눈매는 언뜻 날렵한 듯하면서도 유순해 보였다. 흑백이 선명한 눈동자는 촉촉하게 빛이 났고 콧방울은 아담했다. 도톰한 입술에는 핏빛이 완연했다.
누구처럼 강인한 윤곽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선과 맑은 피부가 그의 여린 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별하는 양손으로 물을 떠 다시 얼굴을 적셨다. 그러다 문득 허전한 목덜미를 깨달았다.
“……?”
군번줄이 없었다. 언제 떨어져 나간 건지 의심스런 기억조차도 없었다. 잠깐 당황했다가 언제 없어졌는지 깨닫지도 못한 물건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곧 숨을 훅 들이켜 머뭇거림 없이 그대로 입수했다.
014.
투명한 물속은 바깥보다 훨씬 따뜻했다. 바닥 모래는 여전히 새하�R고 알록달록한 해양 생물들은 저마다 바쁘게 해류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감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기심을 보이며 제게 다가오던 물고기들과 눈이 마주쳐 입술 밖으로 공기방울이 빠져나왔다. 뿌르릅― 그것을 잡으려 얼른 손을 뻗었지만 물고기는 별하의 움직임을 비웃듯 유유히 물살을 가로질러 금방 저만치 도망갔다.
해초류와 갑각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모래 바닥의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눈에 익은 모양새가 하나도 없었다. 멋모르고 섭취했다가 병이라도 생길까 선뜻 줍지 못했다. 물에 들어온 김에 불가사리라도 잡으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별하는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숨을 참으며 물질을 했다. 근육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팔다리를 내저어 열대의 바다 그 자체인 물속을 유유히 누비고 다녔다. 점차 가슴이 부풀어 오르면서 경이로운 주변 경관이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을 때, 돌고래처럼 물을 뿜으며 수면으로 올라왔다.
“하아…… 하아…….”
가슴팍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토해 냈다. 얼굴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들이 조금 마른 어깨와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배꼽이 잠기는 수심에 우뚝 선 별하는 바다와 맞닿은 수평선을 아연히 내다보았다.
“하아…….”
한 번의 호흡으로 이 정도밖에 움직이지 못하는데 저곳까지 닿기 위해서는 숨을 얼마나 참아야 하는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파비안과 자신은 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
별하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불어냈다. 여러 가지 상황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햇볕이 미약한 날씨도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반사광이 없어 물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오히려 편했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수면 위로 드러누웠다. 위를 향해 반듯이 누워 두 발을 내저으며 잔잔한 물살을 탔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물이 흐르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갖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물에 떠 있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바닥에 발을 붙였다. 아무도 없는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입고 있던 팬티를 벗었다. 물속에서 대충 비벼 빤 후에 그것으로 몸을 문질렀다. 팔과 가슴, 복부, 다리, 손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 꼼꼼하게 문질러 닦았다.
목욕타월을 대신한 팬티를 다시 세척하는데, 별하의 눈길이 무의식적으로 위를 향했다. 희끄무레한 구름이 드리운 머리 위 상공을 가로지르는 뭔가가 있었다. 낙오된 철새인가? 했다가 그것이 비행기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여, 여기―!”
크게 소리치며 다급히 물길을 헤쳤다.
“여기예요―!! 여기 사람 있어요―!!”
물살에 떠밀려 비틀거리면서도 비행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래를 잘못 밟아 뒤로 넘어진 별하는 물을 한가득 먹고 콜록콜록 기침을 토해 냈다. 왼쪽 발등에서 찌릿한 통증이 일었지만 느끼지 못했다.
엄청난 고도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여기를 볼 수 있을 리도,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리도 없는데 그의 외침은 멎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여기예요! 여기―!!”
비틀거리며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와서는 별하는 달려갔다. SOS 구조 글자를 만들어두었던 곳에 도착한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몇 시간에 걸쳐 만들었던 글자들이 온데간데없었다. 비바람에 휩쓸린 듯 나뭇가지들이 쓰레기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비행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구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별하는 텅 빈 하늘과 엉망이 된 모래밭을 아연히 쳐다보다 이내 돌아섰다. 채 몇 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또다시 가랑비를 흩뿌리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제기랄! 여기 사람 있다고―!!”
눅눅한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별하는 플루메리아나무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비 내리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넋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헤엄쳐 그보다 먼 곳으로 날아간 듯했다.
불현듯 옆에서 기척이 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별하의 곁으로 다가온 파비안의 안색이 창백했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목소리도 경직돼 있었다.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가 보이지 않아 꽤나 걱정했었던 것 같았다.
별하는 시선을 내리며 한숨을 불어냈다. 바위에서 일어나 파비안의 옆을 비켜 지나며 물었다.
“길은 있었어?”
“……아니. 아직 못 찾았어.”
“애초에 길이 없으니 못 찾는 거겠지.”
“…….”
“이곳에 갇혔어.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여기서 죽을 거야. 너도, 나도.”
별하는 눈에 띌 만큼 긍정적인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될 만큼 부정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현실의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보면 꽤나 긍정적인 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파비안은 기분이 무척 저조한 이를 묵묵히 뒤따랐다.
“빌어먹을.”
별하는 작게 뇌까렸다. 숨기지 못한 한숨이 잇달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무거운 걸음을 이어나가는 그를 뒤에서 응시하던 파비안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 아직 정해진 건 없어.”
“벌써 끝난 현실을 우리만 모르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파비안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앞선 이의 발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끝난 건 아무 것도 없어. 숨 쉬고 있잖아.”
“…….”
“아직 살아 있어. 나도, 너도.”
별하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느릿하게 심호흡을 한 뒤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파비안이 흰 꽃을 피운 야자나무 앞에 서 있었다. 무덤덤한 듯 진지한 얼굴에는 상대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별하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우월한 하이 알파,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 바닥 세계를 알지 못하는 최상위 인간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얻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완전히 다른 인종이었고, 적군 아닌 적군이었다. 배낭여행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에서 안전하게 살았더라면 결코 겪지 못했을 이 상황이 새삼 기묘하게 느껴져 그를 더 심난하게 했다.
“……그건 그래.”
순순히 나온 대답은 진심이었다. 별하는 그런 제 기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얼른 뒤돌아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새소리가 들렸다. 휘이―
그는 앞서 가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선 파비안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숲 안쪽을 가리켰다.
“이쪽이다.”
별하는 크게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치가 전혀 아닌데도 아직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렸다. 저를 기다리는 파비안에게로 돌아간 그는 알려줘서 고맙다는 눈길을 보냈다.
먼저 들어가라는 친절한 손길에 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상한 기분을 참고 앞서서 수풀 사이를 걷는데 밖으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읏.”
파비안이 대번 손을 뻗어 별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조심해.”
별하는 중심을 잡은 뒤에도 굽은 등을 펴지 못했다. 줄곧 참고 있던 발등의 통증이 커져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으으…….”
파비안이 서둘러 몸을 낮춰 앉아 별하의 발을 살폈다. 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부위를 들여다보며 화가 난 듯 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거지?”
신경을 찌르는 듯 아픔은 서서히 물러갔지만 뜨겁게 욱신거리는 통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무에 몸을 기댄 별하는 얕은 호흡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아까 물에서 급하게 뛰다가 돌 같은 거 잘못 밟았나 봐.”
“접질린 게 아니야. 뭔가에 물렸어.”
“물렸다고?”
파비안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다른 증상은? 마비된 느낌이 있어? 호흡이 힘들진 않나? 구역감은?”
별하는 그의 반응에 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환부 형태로 봐서 해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어쩌면 다른 맹독성 개체일지도 몰라.”
“죽, 는 건가?”
담담히 물었지만 목소리가 잔뜩 굳어 있었다. 파비안이 고개를 들어 의기소침해진 별하를 올려다보았다. 나무 그늘에 묻힌 와중에도 엷은 색소의 눈동자가 몹시 반짝거렸다.
“인간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아.”
“…….”
“다른 증상이 없으니 단순한 항염 반응일 수도 있어. 통증은 며칠 가겠지만.”
별하는 말없이 파비안을 내려다보았다. 어렸을 때 즐겨보던 만화 속 주인공의 머리칼과 똑같은 금발을 스쳐보며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 꿈이라면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련의 사건들을 신기해하며 즐기기라도 할 텐데.
나무에 기댄 몸을 세운 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파비안은 별하의 부은 발을 손에서 내려놓고 잠시 침묵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견디는 수밖에.”
“…….”
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처지에 견디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말대로 무조건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소리 없는 한숨을 뱉으며 절뚝절뚝 걸어들어 가는데 파비안이 앞을 막아섰다.
“……?”
별하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015.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으리라. 별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참아줘.”
“잠깐이면 돼.”
“싫다니까. 안 그래도 멘탈 붕괴 직전인 사람을 수치사하게 만들 일 있어?”
“이런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야.”
별하는 얼른 파비안의 옆을 비켜 지났다.
“네가 사는 곳에서는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나한텐 아니야. 기어서라도 혼자 가는 게 편해.”
다리를 절뚝이지 않으려 일부러 더 힘을 줘 걸었다. 그러다 작은 돌부리에 새끼발가락이 걸려 발이 살짝 틀렸다.
“으윽.”
머리끝이 쭈뼛하는 통증에 별하는 끙끙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강한 위력이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으, 앗!”
결국 허락을 구하지 않고 별하를 양팔로 안아 올린 파비안이 숲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안, 비, 빌어먹을, 내려줘!”
“쉿.”
“이, 이런 미친 알파 같은 짓을!”
별하는 뜨뜻한 체열이 감겨드는 품에서 빠져나가려 다급히 팔다리를 내저으며 바동거렸다. 파비안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그럼에도 그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안았다.
“네 정성 잘 알겠으니까 이제 내려줘. 내 발로 걷겠어, 내 발로 걷게 해줘.”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애원하다시피 하는 별하의 얼굴이 새빨갰다. 파비안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희미한 숨소리도 없이 편안히 걸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하게 말했다.
“정 어렵다면 잠시 눈 감고 있어. 금방 도착하니까.”
별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제일 어려워!”
파비안은 끄떡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 붉으락푸르락하는 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내려줘.”
“…….”
“내려달라니까.”
“…….”
“안 들려? 이 망할 알파 새끼야.”
“…….”
“하아……. 정말 미치겠군.”
“곧 도착해.”
파비안의 고집에 별하는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죽지 못해 안겨 있기는 했지만 손은 어디에 둬야 하는지, 자세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눈 둘 곳도 찾지 못했다.
바깥으로 고개를 돌려 애써 다른 곳을 쳐다보는데 자꾸 귓가가 간지러웠다. 따뜻한 호흡이 규칙적으로 귓가와 목덜미의 솜털을 스치고 있었다.
별하는 곤혹스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완전히 밀착한 상태에서 알파의 진한 체향을 맡고 있으려니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꾹 다문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급상승한 체온이 스스로 느껴질 만큼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무 의미 없는 단순한 신체 반응이라고 계속해 되뇌면서도, 묘한 분위기에서 오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 파비안은 묵묵했다.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별하를 일절 내려다보지 않고 갈 길만 갔다.
나뭇가지 밑으로 길게 늘어진 넝쿨들을 차례로 지나는 중에 넓적한 잎이 달린 넝쿨 한 줄기가 별하의 얼굴을 찰싹 때리고 지나갔다.
“흐앗.”
찰나로 눈이 마주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
파비안이 사과했다.
“미안.”
“…….”
별하는 간질간질한 얼굴을 문지르지도 못하고 어금니만 굳게 물었다.
이제 곧 그칠 듯한 가는 빗방울들이 나뭇잎을 타고 가만히 흘러내렸다. 바람도 더는 불지 않아 밀림은 고요했다. 작은 짐승과 벌레들이 움직이는 소리들밖에 없었다. 간혹 먼 곳에서 큰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복잡한 지형을 지나 금방 자리에 도착한 파비안은 품에 안은 이를 조심히 내려주었다. 별하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멀찍이 물러났다. 그늘 진 야자수 뒤로 슬쩍 몸을 묻는 모습이 놀란 짐승 같아 보였다.
홀로 잔잔히 타오르는 모닥불 기척이 정적 속을 오갔다. 파비안은 제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 빗방울이 날리는 밖에서 나직이 물어왔다.
“발은 좀 어떻지?”
별하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이제 괜찮아. 다 나았어.”
사실은 발목까지 시큰거렸지만 누군가의 관심을 이 이상 받고 싶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파비안은 바닥에서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들었다. 쌓아둔 과일 더미에서 코코넛 열매 하나를 가져와 가볍게 쪼갰다. 먹기 좋도록 입구를 완만하게 깎아낸 뒤 그것을 별하에게 내밀었다.
“수분을 많이 보충하는 게 좋아. 염증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라앉을 수 있게.”
별하는 모닥불만 뒤적일 뿐 받아 들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파비안은 그것을 별하의 곁에 내려놓았다. 몇 개를 더 쪼개 옆에 두고 조용히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해가 저물자 비도 그쳤다. 며칠간 쉬지 않고 하얗게 퍼부어대던 하늘에는 어느덧 별이 총총 떠올랐다. 서서히 물러가는 먹구름 뒤로 고개를 내민 하현달이 유난히 밝았다.
대기 온도는 평균치로 돌아왔고 모닥불도 크게 타오르는데 별하는 강한 한기를 느꼈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덜덜 떨려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런 중에도 정신을 똑바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 꾸벅꾸벅 졸았다.
달뜬 숨결을 가쁘게 내쉬며 혼몽에 잠겨 있는데 서늘한 뭔가가 그의 젖은 이마를 살짝 눌렀다. 별하는 겨우 눈을 떠 제 옆의 흐릿한 형체를 아슴아슴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비 와……?”
잠긴 목소리에는 병색이 깃들어 있었다.
낮부터 점점 상태가 나빠져 가는 별하를 멀리서 지켜만 보던 파비안은 더 이상 안 되겠어서인지 가까이 다가와 살폈다. 왼쪽 발의 부기가 이제는 정강이까지 타고 올라간 상태였는데 그나마 다행으로 진물이 나거나 곪으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쳤어.”
별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잔뜩 웅크렸다.
“정말……? 너무 추운데.”
“그친 지 좀 됐어.”
“너무 추워. 서울의 한겨울 같아.”
“…….”
“우리 어머니가 얘기, 해 주셨는데…… 가장 추운 날에는 영하 23도까지 내려간 적도 있대. 서울 와봤어……?”
열을 재는 손길이 별하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스쳤다.
“아니.”
별하는 고개를 기울여 파비안의 손등에 상기된 뺨을 붙였다.
“하아……. 이상해. 추운데 시원하다…….”
파비안은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내맡겼다. 그의 팔을 끌어안듯 붙잡고서 열 오른 피부를 눅이던 별하는 그렁그렁하게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