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힘을 합쳐야 그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어떤 감정을 공유한 관계였던 간에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 나가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했다. 음식을 조달하고, 난관을 파훼하고, 여기서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머리와 손이 많을수록 유리했다.
파비안을 묵묵히 응시하던 별하는 검지를 세워 밤하늘을 가리켰다. 손길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는 이를 등져 해변 언저리까지 내려온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과일 냄새가 진하게 밴 잠자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힘을 합치는 것까지는 찬성하지만 그 이상은 다가오지 마. 지금 이 거리를 이대로 유지만 한다면 구조될 때까지는 나도―”
그는 섣불리 장담하지 않고 끝말을 잘라냈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에서 눈길을 거둔 파비안이 별하를 돌아보았다. 경고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후로 더 대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별하는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한 밀림을 뒤로 하고 푹신한 모래밭에 몸을 의탁했다. 낮잠을 충분히 자 당장 졸리지 않는데도 억지로 두 눈을 감았다. 집요하게 따라붙던 시선이 이윽고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너의 알파가 되어줄 수 있어.’
더없이 침착한 저음이 불쑥 떠올랐다. 딱히 으스대는 기색은 없었지만 기저에 깔린 특유의 자신감은 분명 알파의 것이었다.
매너 있게 의향을 덧붙여 물어왔지만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오메가는 알파를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수한 능력을 지닌 개체라면 더더욱 그랬다.
“쯧.”
별하는 작게 혀를 차며 모로 돌아누웠다. 괜히 짜증이 나고 불안했다. 여전히 찌뿌둥한 몸에는 미열이 남아 있었고, 호흡할 때마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흔적이 신경을 건드렸다. 그보다 더 그를 화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이런 와중에 상대의 페로몬에 제멋대로 반응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시적인 발정은 이제 끝났는데도 아직 뒤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파비안이 뒤처리를 해주었을 텐데도 안쪽에 정사의 결과물이 남아 있었다. 의식하는 순간 움찔거리는 구멍으로 미적지근하게 식은 정액이 흘러나왔다.
“음…….”
별하는 턱을 물고 신음을 삼켰다. 제 안쪽을 헤집고 들어와 몇 번이나 사정한 알파의 열기가 다시금 생생하게 느껴져 피부 위로 오한이 일었다. 뒷덜미를 지나 머리털까지 곤두섰다. 그런 제 반응에 더 당황해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지금으로선 그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눈을 감고 숨죽인 채로 이 고난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서 구조되기를.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혹 불안한 예감들이 현실에서 눈뜨기 전에.
* * *
열대성 기후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대표되는 한 가지는 높은 강수량이었다.
새벽녘에 기습적으로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흰 모래밭이 검게 젖고, 싱그럽던 수목들도 숙연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산꼭대기의 호수 같은 바다는 먹을 푼 듯 탁했다.
별하는 간밤에 누군가가 재차 가져다준 과일로 아침을 해결한 후 비 내리는 풍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자리를 옮겨 최대한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 몸을 숨겼지만 장대비를 피하지는 못했다.
넓적한 나뭇잎 사이사이로 빗물이 비집어들었다. 정수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눈썹 옆으로 흘러내렸다. 별하는 젖은 얼굴을 닦아내며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이는 시커먼 하늘을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충분히 지옥 같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비만 내린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강풍까지 몰아친다면 그땐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파도에 해변이 잠길 수도 있고, 체온이 떨어져 버티기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티셔츠 위에 남방을 걸치고 있어도 선득해서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011.
본가의 안락한 이불 속을 떠올리며 불안과 싸우는데, 옆으로 높은 채도를 가진 물체가 다가왔다. 별하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인영이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파 파비안이었다.
“…….”
“…….”
멍하니 눈길을 교차하던 별하는 그의 손 언저리로 눈을 내렸다. 노란색 레인 코트였다. 파비안은 그것을 별하에게 내밀었다. 입으라는 듯이. 자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였지만 크게 신경을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사실 알파의 체온은 오메가나 베타보다 조금 높기도 했다.
별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젖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알파의 도움이 반갑지도 않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몸을 낮춘 채 고난이 지나가기를 원했다.
“이런 곳에서 감기라도 걸렸다간 금방 폐렴으로 악화돼.”
파비안의 말은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다. 그럼에도 별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끌어안은 두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한참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파비안이 이내 나무 그늘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간 레인 코트를 펼쳐 별하의 등에 둘러주었다. 동그란 두상이 그대로 드러난 머리에 덜렁거리는 모자를 세워 조심스레 내리 덮었다.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해. ……혹시 모르니.”
별하가 대번 고개를 쳐들었다.
“뭘 몰라? 임신? 그런 거 안 해!”
“…….”
파비안의 당황한 두 눈이 별하의 상기된 얼굴에 가 박혔다. 젖은 금발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새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별하는 발끈한 제 모습을 뒤늦게 자각하곤 턱을 물었다.
“……임신 같은 거 안 해. 배 타기 직전에 약 먹었으니까.”
파비안은 별다른 말 없이 눈길을 내렸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그렇더라도 조심해. 한 번 망가지면 끝이야.”
“너만 정신 놓지 않는다면 이쪽이 망가질 일도 없어.”
“…….”
대화가 끊어진 둘 사이에 수면을 때리는 빗소리가 파고들었다. 어느새 강해진 바람이 해변을 강타했다. 높게 출렁이는 파도가 해안 깊숙이 밀려들었다.
몸을 의탁한 나무도 강풍에 휘말려 거칠게 휘날렸다. 수직으로 내리던 장대비가 사위에서 덮쳐들자 날씨에 크게 개의치 않던 파비안도, 우비를 걸친 별하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별하는 입술을 달달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밀림 주변 수풀은 당장 뿌리까지 뽑힐 기세로 흩날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안쪽은 이 정도로 요란스럽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맹수가 사냥을 나설 리도 없고, 독벌레든 독초든 죽지 않으려 숨어 있을 터였다.
바로 코앞까지 손을 뻗어 오는 시커먼 밀물에 그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웅크린 몸을 일으켰다. 몸이 젖든 말든 단단한 석고상처럼 먼 바다를 내다보던 파비안이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별하는 날아갈 것 같은 레인 코트에 한쪽 팔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여기 더 있다간 휩쓸려갈지도 몰라. 먼저 저체온으로 죽은 뒤에.”
그리곤 바닥에 널브러진 긴 나무막대기 하나를 주워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들어갔다. 희뿌연 장막을 지나 검게 그늘이 진 밀림 앞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물러설 곳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를 뚫을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일단 움직이면 어떤 길이든 보이기 마련이었다.
별하는 나무막대기를 앞세워 허벅지까지 닿는 푸새들을 밀고 들어갔다.
높다란 야자수들 사이로 검푸른 활엽수와 혼재한 관목들이 비바람을 막아 금방 한기가 물러갔다. 넓은 이파리들을 타고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만 제외하면 해변보다 상황이 훨씬 좋았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가시거리가 짧았지만 이정도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단지 주변이 온통 물웅덩이라 쉴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별하는 시야를 막는 큰 이파리들과 나무줄기에 뒤엉켜 커튼처럼 내려온 넝쿨들을 헤치며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쉼터가 되지 못하는 낮은 지대에서 벗어나려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해수면에 맹렬히 달려들어 폭발하듯 부서지던 빗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이미 묵직하게 젖은 운동화로 물웅덩이를 밟으며 수십 미터 높이의 고무나무를 비켜갈 때 뒤쪽을 힐긋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멀어진 해변이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내다보였다.
“…….”
너의 알파라는 둥, 몸조심하라는 둥 지껄여대더니 여기까지 들어오기는 꺼려진 모양이었다. 별하는 비웃음을 지으며 하던 일을 서둘렀다. 비바람을 막을 수 있고 물웅덩이가 없는 높은 지대를 찾아야 했다.
지금으로선 해변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안전할 테지만 구조대가 방문할 때를 대비해 이곳에서 벗어나서는 또 안 되었다. 게다가 수림의 밀도가 생각보다 높아 안으로 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젠장.”
별하는 모자 안쪽으로 비껴드는 빗줄기를 막으며 근방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군락을 이룬 어린 야자수들 사이에 커다란 파초가 서 있었는데, 둥그런 이파리들이 무척 커 아래쪽에 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지면에 포진한 고사리 과들도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진 해변 위치를 확인한 뒤 바로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파라솔에 들어온 듯 머리 위가 가려지자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별하는 흥건하게 젖은 레인 코트를 털어내고 바닥의 지저분한 것들을 대충 밀어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겨우 만들어진 휴식처는 비루했지만 비를 피하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손을 보면 밤을 보내기에도 좋을 듯했다. 깊고 깊은 이곳 밀림에 인간을 먹이로 하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별하는 폭우에 푹 잠긴 밀림을 바라보며 겨우 한숨을 돌렸다. 으스스하게 한기가 들어 팔을 문지르며 체온을 높였다. 허나 단거리 달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지 않는 이상 체온이 올라갈 일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빗줄기와 바람이 점점 강세를 더하고 있었다.
얼른 축축한 옷가지를 털어내고 쥐어짜며 최대한 물기를 소제했다. 그럼에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체온을 끌어내리는 요인에 날씨도 한몫했지만 더 큰 문제는 옷이었다. 상하의가 흠뻑 젖어 무거웠다.
그는 걸레짝처럼 젖은 것들을 당장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습기 하나 없이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따뜻한 햇볕 냄새가 나는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그게 군복이라도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불이라도 지필 수 있다면 그나마 만족할 텐데.
표정을 잃은 흰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했다. 선명한 혈색을 띠던 입술도 지금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별하는 팔짱을 껴 어깨를 웅크렸다. 제 키보다 조금 더 큰 야자수에 등을 붙여 기대고 나지막한 한숨을 불어냈다.
“하아…….”
인적이 전무한 숲은 고요했다. 굵은 빗줄기가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 모래와 흙이 섞인 지면에 곤두박질치며 부서지는 소리, 저들끼리 뒤엉켜 흐르는 소리들이 이쪽 세상의 전부였다.
아직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은 이유도 있었고, 급격한 날씨에 시달려서인지 잠깐의 휴식에도 잠기운을 느꼈다. 등을 기댄 그대로 주저앉은 그는 눈가를 문질렀다. 눈 주위가 금세 붉어져 새까만 눈동자에도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
심신의 안정을 되찾은 것까지는 나름대로 만족했지만 낯선 풍경의 한적한 밀림이 못내 어색했다. 어떤 크리쳐 영화에서 나무를 타고 다니며 성인 남자도 한 입에 집어삼키던 거대한 아나콘다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오싹했다. 혹은 무리지어 숲을 누비고 다니는 밸로시랩터의 알파가 이빨을 드러내며 나타날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별하는 습관처럼 한숨을 뱉었다. 시야에서 아른거리던 인영이 사라진다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괜히 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적군도 때에 따라서는 아군이 된다더니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일말의 정도 없었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은 후부터 불안한 생각들이 끼쳐들었다. 파도에 휩쓸린 건 아닌지, 밀림에서 길을 잃은 건 아닌지. 혼자만 떠나버린 건 아닌지…….
별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가 양반다리를 했다가 어떻게 해도 편치 않아 무릎을 세워 팔을 기댔다. 며칠간 이어질 것 같은 거센 빗줄기를 올려다보며 레인 코트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스윽―
앉은 채로 잠깐 잠들었던 별하는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번뜩 눈을 떴다. 손에 잡히는 대로 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겨눴다.
“―?!”
맹수나 큰 파충류를 예상했지만 소리가 난 자리에는 익숙한 형상이 서 있었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야자수 아래서 젖은 금발을 쓸어 넘기던 파비안이 이쪽 기척을 듣고 돌아보았다.
“……?”
“……?”
서로 의아한 시선을 나눴다. 여전히 매섭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한갓진 밀림 속에서 메아리쳤다. 별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길을 내렸다. 빗물이 튀는 자리에서 살짝 비켜나 앉으며 덤덤하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파비안은 맨몸이 보일 정도로 젖은 셔츠 차림에도 춥지 않은지 피부 혈색이 변함없이 반드러웠다. 입술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도 곧게 뻗어 깨끗했다.
012.
파비안이 물기를 머금어 찰랑찰랑한 머리칼을 거슬리지 않게 쓸어 넘기는 모습이 흡사 TV 광고 속의, 사람 같지 않은 어떤 조형물처럼 보였다.
그쪽 부류가 맞긴 했지만 이런 곤궁한 상황에서도 미모가 죽지 않는다는 데에 별하는 불편을 느꼈다.
파비안은 저를 향한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희뿌연 장막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독백하듯 나직이 말했다.
“좋은 곳을 찾았네.”
“……이 정도면 호텔이지. 근데 너 좋으라고 찾은 곳 아니야.”
퉁명스런 대꾸에도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물론.”
별하는 관심 없는 척 모자를 눌러쓰고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대로 더 쉬고 싶었지만 잠이 달아나 괜스레 자세를 이리저리 고쳐 잡았다.
큰 기척 없이 조용하던 옆자리에서 작게 소음이 들렸다. 자잘한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 서로 뒤섞이는 소리였다.
빗자루를 만들어 바닥이라도 쓸려는 건가? 별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눈치 없이 이곳에 왔으면 방해라도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자신이 자리를 옮길지, 굴러온 돌을 뻥 집어 차버릴지 고민했다.
흠뻑 젖은 풀 냄새, 나무 냄새, 흙모래 냄새, 미미한 바다 냄새 사이로 낯설지 않은 어떤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정체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냄새는 파비안의 페로몬이었다.
발정이 지나갔는데도 어째서 이렇게 진하게 풍기는지 별하는 곤혹스러웠다. 미간을 찌푸리며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다는 듯 굴러들어 온 돌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심할 때였다. 부스럭거리던 소음 속에서 이질적인 마찰음이 울렸다. 챠륵―
“―?!”
굳게 감은 눈을 떠 소리가 난 곳을 홱 돌아보았다. 등을 보이며 몸을 낮춰 앉은 파비안이 나뭇가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별하는 몹시 동요한 기색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뼈대 자체가 남다른 널따란 등판이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런 날씨에도 용케 젖지 않은 나뭇가지, 나무막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강렬하게 별하의 이목을 낚아챈 것은 파비안의 손에 들린 지포라이터였다.
“라, 라이터가 있었어??”
파비안이 고개를 살짝 틀어 제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잠시 눈을 마주하고는 쉬이 그것을 내보였다.
“담배 불 붙이고 주머니에 넣었던 것 같네.”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거 제대로 켜지긴 해? 기름은?”
야자수에 기댄 몸을 세운 별하가 얼핏 관심을 보였다. 파비안은 이곳에 온 처음으로 사심 없이 대화를 걸어오는 이에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하루 동안 햇볕에 말렸더니 작동하더군. 인서트 내부를 확인할 수 없어서 다신 못 쓸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어.”
그리곤 하던 작업을 재개했다. 손가락 한두 마디 두께의 흰 나무막대들을 둥글게 모은 뒤 그보다 더 얇은 막대들을 결대로 여러 갈래 찢었다. 쪼개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나무젓가락처럼 찢어낸 막대기 끝자락에 지포라이터를 가져다댔다. 챠륵―
부싯돌이 굴러가며 스파크를 일으키자 곧바로 불씨가 살아났다. 작은 불티를 날리며 모습을 드러낸 불씨는 금방 막대기에 옮겨 붙었다. 파비안은 그것을 둥글게 모은 나무 탑 안에 밀어 넣었다. 뽀얀 나무막대가 검게 먹혀들다가 이내 선명한 주홍빛에 감싸였다.
별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런 궂은 날, 줄기차게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불을 피울 수 있으리라곤 꿈에서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위에서 빗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나뭇잎을 손보는 이에게 짧은 눈길을 던지고는 모닥불로 다가갔다.
아직 불씨는 미미했지만 떠오르는 태양을 목격한 듯 별하의 안색이 밝아졌다. 푹 눌러쓴 모자를 살짝 뒤로 넘기며 데면데면하게 물었다.
“마른 나무는 어디서 났어? 폭우에 다 젖었을 텐데.”
지붕을 손본 파비안은 파초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돌아갔다. 파초 아래쪽 바닥을 뒤적이더니 대뜸 뭔가를 내밀었다.
“쓰러진 거목들이 있었어. 그 안에서 가져온 거야.”
“…….”
별하는 그가 내미는 것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크고 흰 손에 들린 물체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선명한 녹색의 곡선으로 길게 휘어진 물체는 바나나였다. 커다란 송이는 자라난 형태 그대로 3단 높이였다.
별하는 얼떨결에 바나나를 건네받았다.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묵직한 그것을 아연히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것들은 대, 체 어디서 찾는 거야? 혹시 여기 와본 적 있어?”
파비안은 모닥불이 간신히 닿는 근처에 자리를 잡으며 답했다.
“장작 줍다가 우연히 찾은 거다.”
별하는 무거운 바나나를 야자수에 기대놓으며 중얼거렸다.
“알파라 운도 특별난 건가?”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파비안은 더 말이 없었다.
그들이 잠시 눈을 뗀 사이 작은 모닥불은 가장 큰 나무막대 위로 옮겨 붙어 제법 크게 피어올랐다. 타닥타닥― 마른 나무토막들이 타는 소리가 주변을 날아다녔다.
모자를 완전히 뒤로 젖힌 별하는 넋을 놓고 불길을 응시했다. 멀찍이 떨어져 야자수에 등을 기댄 파비안은 지포라이터를 딸칵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하늘은 어둑해졌고 폭우의 기세는 감사나워졌다. 지붕 이파리들이 흔들릴 때면 빗방울이 안쪽으로 튀어들었다.
라이터를 손 안에 꽉 움켜쥔 파비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비가 그치면 길을 찾아볼까 해.”
열감을 일으키는 불길에 심취되어 있던 검은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파비안은 담담히 이어 말했다.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이곳에 온 후로 어떤 비행기나 선박도 지나가지 않았어.”
“…….”
“섬인지 육지인지 정확한 형태를 알아야 생존 가능성도 높아지겠지. 밀림 형태로 봐서 담수가 흐르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렇다면 사람이나 큰 동물이 살고 있을 거다.”
별하는 우거진 넝쿨 뒤에 몸을 숨긴 재규어부터 떠올렸다.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든다면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급소를 찔러 쫓아낸다고 해도 상처가 곪아 감염으로 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불안한 요소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자칫 길이라도 잃으면 어쩔 거지?”
별하의 물음에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운명이겠지.”
말장난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실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운명대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살아 있는 한 노력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별하는 한숨을 작게 불어냈다. 모닥불 가장 위쪽의 나뭇가지를 들어 이리저리 치솟는 불길을 정리했다.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색이 엷은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별하가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추자 파비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빗줄기를 내다보았다.
“폭풍우.”
“그건 알아.”
“정신 차리고 보니 헤엄치고 있더군. 할 수 있는 데까지 팔다리를 움직였어.”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말을 토대로 상황을 해석해 봐도 짐작이 가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물개라도 되서 이곳까지 헤엄쳐 왔다는 거야?”
물음에 비아냥거림이 가득 묻어 있었다. 좋지 못한 어법이라는 것을 별하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허세 부리는 알파에게서 드는 거부감을 막을 수가 없었다. 파비안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실하게 대답했다.
“잠영은 잘 못해. 자유형으로.”
“……진심이야?”
이번에는 파비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진심이라니?”
“…….”
별하는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불빛에 파비안의 금색 속눈썹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방금 막 샤워를 마친 듯 피부는 촉촉해 보였고, 어디서도 위기의식이 엿보이지 않는 태도는 온순했다.
대화 방식이나 성격, 사회적 지위로 봤을 때 평균치보다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사기꾼 기질이 있다거나, 그렇다고 개그를 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본래 성격인 듯했다. 대외적으로 만들어진 성격이 아닌 본연의 자아.
별하는 착잡한 심경으로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완전 미쳤네. 나는 꼬박 하루를 해류에 떠밀려서 간신히 이곳에 왔는데. 헤엄쳐서 왔다고? 밤낮으로?”
“그러지 않으면 익사할 테니까.”
“…….”
별하는 이 순간만큼 알파에게 감정을 이입한 적이 없었다. 망망대해에 혼자 버려진 그 두려움과 고독감이 다시금 떠올라 어깨를 움츠렸다.
“나였다면 기껏 서너 시간 발 젓다가 포기하고 죽었겠지. 역시 알파.”
“…….”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파비안은 희미한 한숨을 뱉으며 모닥불 가까이 다가왔다. 바나나를 던져놓았던 파초 아래서 나뭇가지를 꺼내 불길 속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첫인상을 그렇게 만든 건 분명 내 잘못이다. 질 낮은 파파라치인 줄 알았으니까.”
별하는 어처구니가 없어 쓴 입맛만 다셨다. 파비안의 저음이 소음들 속에서 부드럽게 울렸다.
“하지만 알파도 사람이야. 별하, 너와 같은.”
“……같다고 단언하기에는 그 괴리감이 너무 거슬리지 않아? 당장 러트가 온다면, 그때도 나와 같다고 말할 수 있어?”
별하는 그의 의중을 이해하면서도 말을 고이 뱉지 못했다. 파비안은 눈길을 떨구었다.
013.
“그런 일 다신 없어.”
“…….”
“믿어줘.”
가라앉은 목소리에 알파의 오만이나 교만은 전연 찾을 수 없었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언뜻 비 맞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별하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자 파비안의 미끈한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명색이 위대한 하이 알파인데 로우 오메가에게 구차하게 변명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부끄러운 만행을 아직 스스로 용서하지 못해서일까.
별하는 새파란 바나나에 힐긋 눈길을 던졌다. 그가 계속해서 가져다주는 과일의 의미는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서는…….”
속눈썹 그늘에 잠긴 회색빛 눈동자가 별하를 향했다. 별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옆 사람을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도 여기서는 되도록 분란 없이 잘 지내고 싶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랑 나뿐이니까.”
“그래.”
“그렇다고 네 똘마니 같은 건 되지 않아. 지금 이 거리만큼 필요할 때 적당히 협력하면서 구조를 기다렸으면 해.”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제 뜻과 일치한다는 듯 작은 불평도 불만도 보이지 않았다. 별하는 그가 대화를 끊어내기 전에 덧붙여 말했다.
“‘너의 알파’ 같은 헛소리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