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화 (4/49)

코코넛도 코코넛이지만 그것보다 높은 칼로리를 지닌 음식을 섭취해야 했다.

008.

당도 높은 과육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울창한 밀림은 당장 성체 표범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는 음지였다. 적도 부근의 무인도 혹은 대륙의 극단일 가능성도 있기에 5미터를 훌쩍 넘기는 바다악어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섣불리 겁에 질리기에는 전날 소란의 흔적과 나뭇가지로 급조한 구조 요청 글자 외에 흰 눈이 쌓인 듯한 모래사장이 깨끗했다. 그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 해변을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이곳에 온 첫날 해변을 따라 몇 시간을 걸었지만 다른 길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별하는 막막한 기분에 휩싸인 채 비틀거리며 주변을 서성였다.

꼬르륵―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나 근해에 선박의 경로가 없다면 영영 이곳에 갇힐 수도 있는 위급 상황이었다. 당장 뗏목을 만들든, 온 해변에 SOS 문자를 새기든, 결코 가만히 있어선 안 되는 사활이 걸린 상황인데도 허기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배가 고팠다. 크루즈 갑판에서 버린 샌드위치 속 토마토마저 아쉬울 정도였다.

꼬르륵― 꼬르르륵―

별하는 등에 달라붙은 배를 움켜쥐고 바다를 내다보았다. 밀림으로 들어갈 수 없는 대신 모래 지면이 훤히 비치는 물에서 낚시라도 할까 싶었다. 정 안되면 불가사리라도 주워서 구워 먹을 생각이었다. 어릴 적 오메가 연맹에서 강제로 배운 잡 지식으로 불은 어떻게 해서든 지필 수 있었다.

안전 장비를 겸해서 물속에 가지고 들어갈 꼬챙이를 주우러 백사장을 가로지르던 그 때였다. 새하얀 해변 저 멀리서 아른거리는 물체가 시야로 들어왔다. 야자수처럼 우뚝 솟은 어떤 형상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발이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구겨진 흰색 셔츠는 가슴 아래까지 열려 있었고 짙은 색의 슈트 바지는 오래된 중노동에도 말끔했다. 탄탄하면서도 미끈하게 뻗은 팔다리가 유기적으로 교차해 움직이는 폼이 그 형상의 정체를 또렷하게 상기시켰다.

알파.

멍청한 로우 알파들보다 더 좆같은 하이 알파 새끼.

별하는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제기랄. 젠장. 씨발― 평소 입에 담지 않는 온갖 거친 욕설을 속으로 내뱉으면서도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빌, 어먹을.”

알파가 일으키는 발정기에는 극렬한 호르몬 작용이 일어나 행위 중의 기억이 분명하지 못하다. 고통을 감소시키고 지속적인 노팅으로 임신 확률을 높이기 위한 알파의 특성 중 하나였다.

알파 개체마다 능력의 폭이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분명 눈앞의 하이 알파는 이상한 체질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찝찝한 악몽 같은 기억은 잊으려 애쓸수록 더 또렷하게 다가왔고, 몸을 깊게 섞으며 순간순간 느꼈던 감각들이 뼈에 새겨진 것만 같았다.

지금은 피부 아래 얌전히 숨어 있다가 혹 또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저를 한 입에 집어삼킬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별하는 오메가의 특성이 발현되는 사춘기 이후 발정억제제 투약 시간을 잊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이정도로 극심한 증상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전에는 멋대로 뒤가 젖고, 고열을 겪고, 평소보다 섹스 욕구가 강해질 뿐 그 이상의 탐욕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한 이유에 연애 경험 부족과 오메가의 특성이 강하지 않은 로우 오메가란 인종 차이도 있었지만, 성장 과정 중 제 주변에 강력한 페로몬을 지닌 알파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별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날 저를 겁탈했던 알파를 예의 주시했다.

돌발적인 러트는 수 시간 만에 끝났지만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이 알파라면 충분히 그랬다. 짧은 주기로 발정하는 열성 로우들과 달리 주기가 긴 우성 하이들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또 어떤 생체 경고가 작동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럴 낌새가 보인다면 별하는 밀림으로라도 뛰어들 생각이었다. 표범에게 물려 죽든, 바다악어에게 찢겨 죽든, 오만한 알파의 노리개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이런 오지에서.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며 걸어오던 알파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이쪽을 발견한 듯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수 미터 거리에서 마주한 그들은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햇빛이 강해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수증기처럼 피어올라 뒤섞이던 호흡들이 지금은 차디찬 냉기를 머금은 듯 고요했다.

“…….”

“…….”

별하는 쯧, 혀를 차며 먼저 눈길을 돌렸다. 오메가와 알파의 입장 차이만 아니었더라면 일말의 관심도 없었을 인간을 의식하고 싶지 않았다.

환멸이 날 정도로 거만한 알파의 페로몬과 정액이 미치도록 감미롭게 느껴졌었던 기억을 어떻게 해서든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뇌를 끄집어내 바닷물에 뽀득뽀득 씻은 다음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고 싶었다.

알파 역시 어제의 사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는지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별하를 집요하게 응시하다 곧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하는 습관처럼 혀를 찼다. 지금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서 일단 자리를 어디로 옮길까 궁리했다. 신발과 남방을 챙겨 들고 알파가 걸어온 반대 방향으로 가려다 문득 하나를 떠올렸다. 모래밭에 써놓은 SOS 구조 글자였다.

어제 주린 배를 잡고 시간을 들여 작업해 놓은 건데 저걸 포기해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강간범으로 낙인찍혔을 놈이 가장 먼저 구조되는 상상을 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별하는 한숨처럼 읊조렸다.

“씨발.”

물론 다른 장소에서 똑같이 만들 수 있었다. 더 멋들어지게 만들어낼 자신도 있었다. 허나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강제로 히트를 당했을 뿐인데 저걸 고이 놔두고 가야 하는 현 상황이 미치게 불만스러웠다. 누구 좋으라고?

햇빛에 반짝거리는 모래밭을 가로질러 나뭇가지들을 쌓아놓은 곳으로 향했다. 글자 하나라도 흩뜨려놔야 성이 풀릴 낌새였다.

휘이―

그 때 어디선가 작은 새소리가 울렸다. 별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나무 그늘에 서 있던 알파와 눈길이 맞닿았다.

“……?”

“…….”

작은 새소리가 사실은 알파의 휘파람소리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별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얼굴까지 험악하게 구겨지기 직전, 알파 쪽에서 뭔가가 휙 날아왔다.

별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들어 내려다보았다. 손 안에 딱 들어온 원형의 새파란 그것은 덜 자란 파인애플 같기도 하고, 학창 시절 즐겨 먹던 메론빵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뭐야.”

어리둥절하게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휘이― 짧은 휘파람소리가 귓전에 와 닿았다. 별하가 고개를 들자마자 다시 하나가 날아들었다. 좀 전보다 알맹이가 큰 그것을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잡아내고 알파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뭐야, 이게?”

날이 선 물음에도 알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뚫어지게 직시하던 눈길을 내려 제 손에 남은 하나를 가만히 굴렸다. 바람결이 금발을 살며시 흩뜨리며 멀리 날아갔을 때쯤 나직이 대답했다.

“슈가애플.”

흰 피부 위에 도드라진 붉은 입술이 잠깐 열렸다가 다시 굳게 닫혔다.

“……슈가, 애플? 사과?”

이름만 애플이었지, 모양새는 사과가 아니었다. 별하는 난생 처음 보는 과일을 양손에 꼭 쥔 채로 알파를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크루즈에서의 건방지고 오만한 모습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얼핏 태연해 보였지만 분명 이쪽을 심히 의식하고 있었다.

새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구해줘 고마웠던 건지, 코코넛 단물을 떠먹여 줘 감동을 받았던 건지, 아니면 불시에 찾아온 러트를 그렇게 무시하던 오메가로 무사히 잘 보낸 것에 대한 보답인 건지, 별하는 태도가 급변한 알파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기야 이런 곳에서 눈을 떴으니 제정신일 리 없지.

꼬르륵―

더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 알파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SOS 글자는 내버려 두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손에 쥔 것부터 들여다보았다. 흡사 부처의 머리 모양을 닮은 겉면을 돌려보다가 꾹 누르자 보들보들한 질감이 느껴졌다.

별하는 바로 앞니로 과일의 껍질을 깨물었다. 뜯거나 갉아낼 생각이었는데 쉽게 껍질이 벗겨졌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설탕물과 단내를 느낀 순간 정신없이 그것을 먹어치웠다. 입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씨까지 아득아득 씹어 삼켰다.

진득하게 젖은 손가락 사이사이,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과즙까지 혀로 핥은 다음 나머지 하나를 앞니로 벗기는데, 멀찍이 그늘에 앉은 이와 눈길이 딱 마주쳤다.

“…….”

“…….”

알파는 느지막이 고개를 돌려 우뚝한 옆모습을 보였다.

……젠장.

별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간신히 삼키고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폭신폭신한 과육을 깨끗하게 해치운 후에도 혀끝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한 단맛을 알파가 놔둔 코코넛으로 씻어냈다. 간에 기별도 안가는 양이었지만 복부가 쪼그라질 듯한 허기는 간신히 물리친 느낌이었다.

배가 차자 급격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과일이 어디서 났는지 알아내 성에 찰 때까지 뱃속에 집어넣고 싶은데 갑자기 기력이 쭉 빠졌다.

009.

건조하지만 시원한 바람과 고운 모래의 폭신함, 허기가 멀리 밀려나간 느낌이 편안했다. 간만에 느끼는 안락한 느낌에 고된 육체가 매몰되듯 가라앉았다.

그 자리에서 드러누운 별하는 새파란 하늘 아래 하늘거리는 열대나무의 긴 이파리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이대로 잠들면 위험하다는 걸 아는 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기 전에 SOS 구조 글자도 부숴야 했고, 만행을 저지르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휘파람이나 불어대는 빌어먹을 알파에게 주먹을 맛보여 줘야 하는데 지금은 만사가 귀찮았다.

잠시만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허기에 밀려나 있던 히트 후유증이 다시금 스멀스멀 덮쳐들었다. 미열과 함께 전신에서 느껴지는 불협화음이 무척이나 불쾌하고 불편했다.

“하아…….”

소리 없는 한숨을 불어낸 그는 멀찍이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 등을 돌려 누웠다.

꾸르륵― 꾸르르륵―

한적한 파도소리 사이로 이따금씩 울리는 고동은 뱃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소리였다.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내리 잠만 자던 별하는 극심한 허기에 번득 눈을 떴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자 진한 다홍빛 석양이 그의 몽롱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잠이 덜 깬 눈을 급히 문질러 시력을 되찾은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서서히 어둠에 먹혀드는 해변은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밀림 주변은 먹을 칠해놓은 듯 깜깜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전연 분간할 수 없었다.

“…….”

괜히 등골이 서늘해진 별하는 멀지 않은 나무 밑을 돌아보았다. 낮에 누군가가 햇빛을 피하던 곳이었다. 낯익은 긴 그림자가 모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이라도 자는지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저런 안하무인 알파라 해도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런 오지에서는 존재 자체로 의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언어가 통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혹여 맹수가 튀어나와도 일단 힘을 합쳐 싸울 수 있을 테니까.

별하는 작은 한숨을 지으며 쪼그라든 배를 더듬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프다는 표현을 간혹 다이어트를 하던 주변 지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체질적으로 운동을 좋아해 날씬한 데다 식탐도 없는 그에게 이런 감각은 그저 생소할 뿐이었다.

이 밤에 낚시는 어불성설일 테고 불가사리나 조개라도 주워볼 생각으로 일어나려던 그는 문득 제 물건들 옆에 둥그렇게 쌓인 형체를 발견했다. 이제 제법 어두워져 시커먼 형체가 바위인지, 코코넛 껍데기 무덤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눈 초점을 맞춰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에 코끝에 낯설지 않은 어떤 냄새가 스쳤다. 단내였다. 낮에 알파에게 건네받은 과일이 돌무더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뒤편에는 코코넛도 채워져 있었다.

섬광을 흩뿌리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석양의 잔영에 그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한잠에 빠진 듯한 알파의 그림자를 힐긋 돌아보곤 곧장 과일을 집어 들었다. 이전보다 훨씬 익숙해진 폼으로 그것들을 해체해 나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슈가애플과 냉장고에 넣어둔 듯 이상하게 시원한 코코넛을 차례차례 해치웠다.

껍질을 수북하게 뜯어내느라 입술이 부어오르고 턱과 손, 팔이 온통 진득한 과즙으로 흥건해졌을 때쯤, 여름날의 산타가 가져다 놓은 과일이 거의 동났다. 남은 코코넛을 더 먹을 수 없을 만큼 배가 불렀다. 갈증도 더는 없었고 덥지도 않았다. 건조한 피부를 스치는 밤바람이 상쾌했다.

어느새 밤을 맞이한 해변은 해질녘보다 시야가 밝았다. 밤하늘에 커다랗게 떠오른 보름달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밤바다와 모래사장을 새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밤하늘에 무수히 떠오른 별들은 서울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도를 갖고 있었다. 은하수가 바로 머리 위에서 흐르는 듯했다.

별하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런 숨 막히는 풍광 속에 덩그러니 내버려진 자신의 처지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했다.

죽을 수 있겠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신도 꿈 많은 청년을 막상 죽이려니 불쌍했던지 이런 풍경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구나 생각했다. 사형수의 마지막 날, 원하는 식사를 주는 것처럼.

“…….”

감정이 울컥 북받쳐 오른 별하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뭇잎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꽉 다물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모님의 조언대로 유서를 쓰긴 했지만 거의 농담 식이었고 제대로 작별인사를 올리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현실이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알파의 도구로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오메가를 물심양면으로 돌봐주신 은인들께 정말 감사했다고, 이 말만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별하는 먼 옆 사람이 혹 제 눈물을 눈치챌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무 아래에서 나와 모래밭을 가로질렀다. 맨발이 부드러운 모래 속에 묻혀 들어가 얕은 발자국을 만들어냈다.

파도가 밀려드는 젖은 모래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그는 바다 너머의 아득한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목소리를 잃고 물고기가 되어도 좋았다. 기나긴 바다를 헤엄쳐 사랑하는 이들이 잠든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얀 포말이 상념에 잠긴 별하의 발등을 부드럽게 감쌌다가 떨어져 나갔다. 까만 속눈썹에 달린 물기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낸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후우…….”

사납게 들이치던 감정들이 점차 가라앉았다. 며칠 동안 하늘에서도, 바다에서도 희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천만다행으로 당도가 높은 열대과일을 발견해서 당분간은 구조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일을 다 먹어치운 다음에는 물고기나 어패류를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 식수가 관건이었지만 야자수 역시 발에 채일 정도였다. 최대한 아껴 먹는다면 족히 몇 달은 버틸 수 있었다. 아마도.

별하는 애써 긍정적으로 앞날을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더 깊게 파고들어 갔다가는 정말 모든 게 끝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도 감사히 받아들여야 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그는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과일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느라 진득해진 몸을 씻고 싶었다. 밤에도 발아래 모래알갱이가 또렷이 비칠 정도로 맑은 바다는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피부에 스치는 잔물결을 느끼며 복부가 잠길 수심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잡아채는 위력에 몸이 홱 돌아갔다. 깜짝 놀란 별하는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알파가 서 있었다. 헝클어진 금발이 눈가를 덮은 알파는 별하만큼 당황한 안색으로 숨을 얕게 몰아쉬고 있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별하 역시 어안이 벙벙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쪽이 누군데 어째서 다짜고짜 고함을 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너야말로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꿈이라도 잘못 꿨어?!”

별하는 잡힌 어깨를 휘둘러 알파의 악력에서 벗어났다. 알파는 위력을 더 행사하지 않았지만 색이 옅은 눈동자가 심히 동요하고 있었다. 별하의 신변을 살피듯 물속에 잠긴 다리까지 눈으로 훑어 내리더니 짜증스럽게 제 금발을 쓸어 넘겼다.

알파의 행동을 전혀 납득하지 못한 별하는 그의 옆을 휙 지나며 들으란 듯 혀를 찼다.

“안하무인 알파 새끼.”

한국어로 중얼거렸지만 알파의 눈길이 대번 떨어져 나갔다. 생소한 언어를 마치 완벽히 이해한 것처럼.

먼저 물 밖으로 나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바로 등 뒤에서 낮은 저음이 울렸다.

“미안하다.”

별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의 신장이 높아 턱을 살짝 들고 눈을 치떴다. 입을 꾹 다문 모양이 알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정확히 사과하는 그 의미를.

알파는 눈길을 내리깐 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너에게 몹쓸 짓을 했어. 미안하다.”

“……미안, 하다고?”

“그런 상황에서 러트가 올 줄은 예상 못 했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

“힘들겠지만 이해해 줘.”

말을 더 할 듯 말 듯한 알파의 금빛 속눈썹이 엷은 음영 속에서 반짝였다.

별하는 눈길을 맞추지 않는 알파를 묵묵히 직시했다. 이쪽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감정적인 소모가 큰 사건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이라는 투로 제 양심을 지키려는 알파가 가증스러웠다.

“빌어먹을 알파 아니랄까 봐.”

꼴 보기 싫다는 듯 뇌까리며 돌아서는 별하를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붙들어 세웠다.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 아니야.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지도록 하지.”

별하는 두 눈썹을 세우며 방금 들은 말을 따라했다.

“책임지겠다고?”

무엇을? 알파는 눈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 꽤나 단호했다.

“짝이 될 순 없지만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는 너의 알파가 되어줄 수 있어.”

“…….”

“네가 원한다면.”

달빛에 반짝이는 두 시선이 한참 동안 맞물렸다. 별하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알파를 쳐다보다가 숨을 짧게 훅 불어냈다.

010.

별하는 뺨에 난 생채기가 간지러운지 손등으로 더듬더니 기어코 입을 벌리고 웃었다.

“하하!”

“……?”

“대단하신 하이 알파도 이렇게 인간적인 면을 갖고 있었네. 정말 인간적이구나, 너. 베타들이 울고 가겠어.”

이번에는 알파가 침묵했다. 별하는 눈꼬리에 맺힌 물기를 닦으며 웃음기라곤 없는 이를 마주했다.

“그래서 네 말의 요지는 또 대달라는 거지?”

알파의 우뚝한 미간에 엷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니라고 금방 대답하지 못하는 이를 보며 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꿈을 깨뜨려 미안하지만, 아무 때나 꼴리는 대로 발정하는 알파 따위 트럭으로 줘도 안 가져. 히트든, 러트든, 씨발, 그게 뭐든 이런 곳에서까지 망할 알파의 성욕 해소 도구로 취급받느니―”

“…….”

“널 죽여버리겠어.”

사실 알파의 러트가 얼마나 강력한지 별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메가의 입장에서 100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고통스런 히트보다도 수십 배는 강력하다고 세뇌당하듯 배웠었다.

그 어떤 합성 각성제나 환각제도 침범하지 못하는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해 신체는 평소의 몇 배나 많은 열에너지를 방출하면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 목적의식은 페로몬이 활개를 치는 발정기 내내 죽음을 불사할 정도라는 게 일반적인 알파의 정설이었다. 우성의 하이 알파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알파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습적인 러트를 겪었으니 그 고통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이 모든 상황이 별하에게 혹독한 고난이었고 악몽일 따름이다.

알파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자괴하는 듯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만인에게 떠받들려지고 세상의 모든 혜택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그였지만 이런 상황에는 면역이 없는 듯했다. 마치 열성 오메가를 처음 안아본 것 같은 태도였다. 그것도 하이 알파인 저를 거부하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 널 그런 식으로 취급할 생각도 안 해봤다. 진심이야.”

알파의 목소리는 깊고 어두웠다. 제게서 돌아서는 이를 내려다보며 초조한 듯 이어 말했다.

“오해하게 만들었다면 사과하지. 내 양친의 존함을 걸고 맹세해. 두 번 다시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

별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리도 순순히 반성하는 알파는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러트를 내세워 으름장을 놓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메가 인권 관련 법률이 특별히 강화된 지금도 성폭행이나 강간, 성추행은 비일비재했다. 강제로 뒷덜미를 물어 짝으로 만들어버리면 오메가는 눈물을 삼키며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별하는 제 가까운 친족과 동창생, 군대 동기 중에도 안하무인인 알파에게 코가 꿰여 성욕 배출구 취급을 받으며 우울하게 살아가는 경우를 번번이 지켜봐 왔기에 그들의 감언뿐 아니라 어떤 것도 절대 믿지 않았다.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이 알파에게도 역시 신뢰감은 느끼지 못했다. 다시 러트가 발현된다면 어느 때고 어제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무릇 발정이란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는 욕망 그 자체이기에.

그럼에도 가볍게 무시하며 웃어넘기지 못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가 주는 위력을 떠나 저를 올곧이 직시하는 눈동자가 이성의 끈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감마해 언젠가 필요한 때에 쉬이 끊어낼 수 있도록.

이것이 하이 알파인가.

별하는 벗어날 수 없는 오메가의 운명에 씁쓸한 입맛을 느꼈다. 이런 때에도 진한 페로몬을 풍기는 알파와 더는 입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마주 댄 눈길을 먼저 거둬들이고 해변을 걸어들어 갔다.

몹시 보드라운 모래를 밟아 달콤한 열대과일 냄새가 진동하는 자리로 돌아가는데, 미지근한 밤바람을 타고 이제 더는 낯설지 않은 저음이 날아들었다.

“파비안 블랙그레이.”

못 들은 척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별하는 걸음을 멈추고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알파는 여전히 파도가 밀려드는 그 자리에 서서 별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이름이다.”

“…….”

“네 이름은?”

맑은 회색빛 눈동자를 단 한 번도 감지 않고 조심스럽게 묻는 파비안의 등 뒤로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별들 사이로 자그마한 혜성 하나가 막 파비안의 금발 너머로 사라졌다.

별하는 그곳에서 눈길을 내리며 짧게 입술을 달싹였다.

“별하.”

달빛에 비쳐 유난히 새하얀 파비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벼라?”

“별. 하.”

“아, 별하.”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봐도 될까? 네 이름의 뜻.”

“……어째서?”

파비안의 고개가 느릿하게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별하는 억양 없이 되물었다.

“여기서 나가면 다신 안 볼 사인데 그런 것까지 알아야 될 필요가 있어?”

파비안은 상대의 퉁명스런 태도에도 인상을 찌푸린다거나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비싼 커프스단추를 주워줬을 때도 보지 못한 온순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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