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2)화 (2/49)

“으음…….”

무거운 눈을 뜨고 햇살을 마주보는 순간 전신에서 동통이 일었다. 여러 명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에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별하는 신음을 억눌러 삼키며 경직된 몸을 모로 웅크렸다. 그 때 얼굴 바로 옆을 휙 지나가는 벌레들을 발견하곤 반사적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윽.”

바닥이 돌연 크게 요동치더니 이윽고 벌러덩 뒤집혔다. 풍덩! 물에 빠진 별하는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내저어 헤엄쳤다. 대번 흐트러진 숨을 가쁘게 토해 내며 저만치 밀려난 나무판자를 급히 잡으려다가 발끝에 닿는 어떤 감각에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운동화 밑창이 바닥에 닿고 있었다.

그대로 몸을 세워 일어나자 명치가 드러났다. 얼핏 모래에 파묻힌 운동화가 내려다보이는 얕은 수심이었다. 깊이를 짐작도 할 수 없는 망망대해가 아니라.

“…….”

별하는 멍한 얼굴로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자잘한 물결이 교차하는 바다는 온통 새파랬다. 파스텔 연두색에 형광이 도는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색감은 하늘빛까지 더해 영롱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는 어떠한 감흥도 없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작은 구조물조차 없이 아득히 펼쳐진 수평선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나무판자가 파도에 떠밀려 옆을 스쳐 지날 때서야 제 뒤를 돌아보았다.

육지였다. 꼬박 하루를 바다 위에 표류해 있다 천운으로 조우한 육지였지만 별하의 안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핏기 한 줌 없는 창백한 안색으로 육지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눈에 담았다. 사실 육지라고 해야 할지 섬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형이었다.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적도의 백사장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저 멀리 땅끝도 보이고 있지만, 마주 보이는 백사장 뒤편으로는 숲이 진을 이루고 있었다.

높다란 야자수와 온갖 열대식물들로 얽히고설킨 녹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밀림이었다. 마치 생명체들이 무섭게 퍼지기 시작한 원시 밀림 모습으로, 어디에선가 거대한 파충류가 땅을 굴리며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휴화산의 형태로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것에까지 눈길이 닿은 별하는 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여, 긴 대체…….”

맥없이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좀처럼 깜빡이지 않는 눈 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한쪽 뺨에는 어딘가에 쓸린 듯한 생채기가 울긋불긋하게 나 있었다. 옷과 운동화는 멀쩡했지만 온통 축축했고 손끝은 종일 물에 잠겨 쭈글쭈글하게 불어 있었다.

“…….”

별하는 피로감에 찌든 눈으로 엷은 구름도 없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셔 금방 고개를 내렸지만 여전히 물속에서 나갈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폭풍우를 만나 크루즈에서 떨어진 그 순간부터 낯선 곳에 도달한 지금 이 순간까지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정확히 어떤 사고를 당했고, 어디를 떠돌다 어디에 와 있는지를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곳은 자신이 지금까지 지나온 곳도, 가려던 장소도 아니라는 것만 정확히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별하는 소금기가 들러붙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비틀비틀 물 밖으로 나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현재 무엇보다 시급한 용무가 도사리고 있었다. 갈증이었다. 간밤부터 시작된 갈증을 더 참기가 어려워진 그는 곧장 백사장을 밟았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모래는 그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이 없는 듯 몹시 새하얗고 부드러웠다. 바람결을 따라 만들어진 모래밭에 흐트러진 자국을 찍으며 안으로 들어가던 발길이 녹음 앞에서 우뚝 멈췄다.

열대우림은 낯선 이방인의 출입을 원치 않는 듯 예상보다도 빽빽했다. 들어갈 만한 길을 찾을 수 없었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도 않는 형세였다.

별하는 강렬한 갈증과 싸우는 중에도 우거진 삼림 앞에서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원하는 바를 찾아낼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천운으로 이곳에 떠밀려 온 것처럼 운 좋게 현지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지인과 외교부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시작했던 곳으로 무사히 돌아간다. 얼음을 가득 채운 차가운 콜라와 고구마무스를 듬뿍 올린 페퍼로니 피자를 뱃가죽이 늘어질 때까지 밀어 넣은 후 초등학생 때부터 사용한 제 침대 위에 눕는 장면까지 떠올리던 별하는 턱을 굳게 물었다.

상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확실한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한다.

그는 언제 적부터 벽에 가로막힌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리며 해변의 먼 곳을 내다보았다. 해변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라도, 뭐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전 어깨 너머로 배운 식수를 만드는 방법이 얼핏 떠올랐지만 도구라곤 너덜너덜해진 몸뿐이라 다른 수가 없었다. 여기서 탈진해 쓰러지기 전에 생각은 그만두고 어서 움직여야 했다.

별하는 숨조차 쉬이 넘어가지 않는 목울대를 억지로 움직여 갈증을 견뎠다. 금방 마르기 시작한 남방을 벗어 허리에 둘러 묶고 밀림의 그늘을 따라 걸었다.

유리구슬을 뿌려놓은 듯 유난히 반짝거리던 백사장도 시간이 지나자 시야를 크게 방해하지 않았다. 소금기를 씻어내지 못한 채로 해변을 걷고 있음에도 피부가 끈적이거나 꿉꿉한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따가운 햇볕에 목덜미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별하는 머리에 뒤집어쓴 남방을 내려 목에 걸고 투명한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드는 물속으로 발을 담갔다. 바지 앞이 잠기는 곳까지 걸어 들어가 전방의 먼 곳을 내다보았다.

“……뭐야, 이게.”

똑같은 전경이었다. 몇 시간 전쯤 지나온 곳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풍경에 별하는 적잖은 당혹감을 느꼈다. 파스텔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 밀림이 몇 시간이고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설 때만 해도 가까운 모퉁이를 돌면 감시 초소든 부족의 움막이든 발견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인공물이라고는 작은 간판조차 없는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망연히 응시하며 생각했다.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몇 시간이 지난 게 아니라 사실은 단 몇 분이 흘렀던 건가? 그것도 아니면 갈증을 참고 참다 결국에 자신이 자각할 틈도 없이 미쳐버린 게 아닐까?

탈수가 꽤나 진행된 이는 시간 감각도, 기본적인 상식도 올바르게 떠올리지 못한다. 여기서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해 들어 두려움을 느꼈다.

별하는 제 몸을 감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신발 끈이 보일 정도로 맑은 바닷물은 미지근했다. 문득 충동에 휩싸였다. 이것을 들이켜면 지금 이 지독한 갈증을 잠시라도 잠재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모래를 한 움큼 삼킨 듯한 목구멍이 멋대로 움직였다.

“…….”

충혈된 눈을 들어 다시 먼 전방을 응시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요인을 최대한 궁리해 찾았다. 근육통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극심한 두통 때문에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혹 저도 모르게 자제심을 잃고 바닷물을 마셔버릴까 봐 물 밖으로 비틀비틀 향했다. 물밑의 흰 모래는 저탄성 스펀지처럼 폭신폭신했다. 알록달록하고도 다양한 해양생물들은 투명하고 깨끗한 물속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쪽 사정과는 전혀 다른 별하는 멍하니 앞만 보며 물살을 갈랐다.

그 때 모래에 묻힌 바위를 잘못 밟아 쭉 미끄러졌다.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는 순간 물속으로 첨벙 잠겨들었다.

“어읍!”

모래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머리끝까지 잠긴 그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잘못 밟은 바위 위치를 확인하고 몸을 세워 일어나려다 문득 눈길이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기다란 해초가 걸린 검은 반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 아래 숨어 있던 작은 생물체가 번개처럼 모래 속으로 들어갔다.

뽀로록―

짧게 숨을 뱉어낸 별하는 바위를 다시 툭 건드렸다. 흰 먼지를 일으키며 밀려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것을 번쩍 주워 들었다.

“푸흡!”

수면으로 나와 얼크러진 시야를 걷어내지도 않고 손에 쥔 것부터 살폈다. 검게 썩은 반구는 속이 비어 있었는데 낯설지 않은 모양새였다. 얼핏 박 같았지만 수박 껍데기와 더 닮은 모습이었다. 매끈하면서도 단단한 겉면을 돌려보던 별하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번득 고개를 들었다.

“……!”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물살을 가르고 모래를 뛰어넘어 우거진 밀림 앞에서 급한 걸음을 멈췄다.

별하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칼을 헝클이듯 쓸어 넘기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뜨거운 백사장 위에서 춤추는 그늘을 이리저리 오가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형체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열대식물을 상징하는 아름드리나무가 금방 시야에 들어왔다. 목울대가 절로 움직였다. 야자수였다.

흡사 버드나무처럼 곡선으로 늘어진 큰 줄기 아래 새파란 과실이 주렁주렁 붙어 있었다. 그런 야자수들이 백사장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별하의 두 눈에 강렬한 생기가 어렸다. 미적지근하면서도 밍밍한 맛을 떠올리자 혀 밑으로 침이 고였다.

이제는 따끔거리기까지 하는 목을 마른침으로 달래고 곧장 야자수로 다가갔다. 근방에 포진해 있는 야자수들을 쭉 둘러본 뒤 그중 몸길이가 가장 낮은 하나를 선택했다.

“하아…….”

별하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가까이서 확인한 야자수는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3미터도 넘을 듯했다.

004.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상태가 몹시 좋지 못한 지금에는 나무를 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고 해서 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죽을 수밖에 없기에 우선 움직여야 했다.

일단 묵직한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 두툼한 야자수의 줄기를 양손으로 잡았다. 높이를 대강 가늠한 후에 머뭇거림 없이 훌쩍 뛰어올랐다.

반대편 손목이 잡히는 두께의 줄기를 잡고 한 발 한 발 밟아 올라가는데 거북이 등껍질 같은 마른 외피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손에서 힘이 빠져 미끄러질 때마다 안쪽 팔꿈치가 쓸려 발갛게 부어올랐다. 수차례 미끄러져 같은 자리를 맴돌아도 별하의 눈길은 야자수 열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읏.”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윗동까지 올라간 그는 소복하게 붙은 열매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한 손으로 쥐기에 버거울 정도로 큰 열매 아래쪽을 잡아 돌리자 생각보다 쉽게 손에 떨어졌다.

“좋았어.”

생명수를 획득한 별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손 안의 것을 푹신한 모래 위로 떨어뜨렸다. 곧바로 눈에 보이는 열매들을 차례차례 돌려 땄다. 손이 닿는 거리의 열매를 전부 모래 위로 떨어뜨린 뒤 올라올 때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디뎌 바닥에 안착했다.

따뜻한 모래에 두 발을 붙인 그는 지체하지 않고 가장 큰 코코넛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볼링공처럼 단단한 과실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어떻게 껍데기를 뜯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던지거나 밟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우선 도구가 필요했다.

밀림 주변을 살피는 그의 시야에 비슷한 크기의 돌멩이가 들어왔다. 얼른 그것을 주워 들어 코코넛에 내리쳤다. 퉁! 퉁! 묵직한 소리를 울리며 겉면만 벗겨질 뿐 생각대로 쪼개지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별하는 다시 밀림 주변을 맴돌았다. 생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모양의 덤불과 뒤엉킨 수풀들을 헤집다 두툼한 나무막대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것을 양쪽으로 그러잡아 구부리자 강한 탄성이 느껴졌다. 완력으로 부러지지 않는 막대기를 비스듬히 세워 가운데를 힘껏 밟았다.

우지끈― 두 동강 난 막대기의 날카로운 단면을 확인한 그는 짧은 한숨을 뱉어냈다.

“후우.”

얕게 패인 코코넛 껍데기에 날 끝을 대고 찔렀다. 새파란 표면이 워낙에 질겨 작은 균열도 일지 않았다. 양손으로 막대기 끝을 붙잡고 내리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정수리에서부터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땀방울이 연이어 모래밭에 파묻힌 돌멩이에 흔적을 드리웠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별하는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눈을 빛냈다. 얼른 돌멩이를 주워 들고 코코넛 껍데기에 날 끝이 박힌 막대기 윗동아리를 쾅 내리쳤다.

그 순간 단단한 껍데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쩍 쪼개졌다.

“―!”

안쪽에서 강한 향취가 확 퍼져 나왔다. 흡사 꿀과 설탕, 온갖 시럽을 뒤섞은 듯한 단물 냄새였다.

별하는 혹여 내용물이 상할까 갓 태어난 생명체를 다루듯 조심히 들어 올려 갈라진 사이에 입술을 붙였다. 그것을 곧장 기울이자 안쪽에서 단물이 쏟아져 나왔다.

“읏, 음.”

메마른 입술과 혀를 녹이며 들러붙은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액체에 별하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껍데기가 길게 패여 거의 마시지 못하고 옷에 다 흘려버렸지만 황홀감은 꺼지지 않았다. 마지막 한 방울이 혀끝에서 녹아 없어지자마자 다른 코코넛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구멍이 좀 더 좁게 나도록 힘을 조절해 쪼갰다. 돌멩이에 손가락이 찍혀 멍들거나 긁혀서 피가 맺혀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직 단물을 마셔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별하는 좁다랗게 난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을 한 방울도 허투루 버리지 않으려 입술을 바짝 갖다 붙여 들이켰다. 꿀꺽꿀꺽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릴 때마다 입술이 점점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연달아 코코넛 다섯 개를 깨끗하게 비워냈을 때, 별하는 사명을 다한 듯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흥분에 차 거칠게 오르내리던 호흡이 어느새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야자수 그늘로 불어드는 청량한 바람결을 느낀 순간 그는 기절하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끼룩―

어디선가 낯선 기척이 울렸다. 줄곧 굳게 잠겨 있던 눈이 반사적으로 떨어졌다. 별안간 잠에서 깬 별하는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물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물체가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곳이 어딘지 금방 인지하지 못하고 새하얗고 새파란 풍경을 끔뻑끔뻑 돌아보았다.

“…….”

야자수 그늘 속 모래에 누운 제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갈증은 이제 없었다. 허기가 느껴졌지만 지금의 이 당혹감과 난처함, 위기의식만큼 크지는 않았다.

별하는 모래밭에 처박힌 코코넛을 굴려와 이전에 터득한 방식으로 단단한 껍데기를 열었다. 아직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일단 충분히 목을 축였다.

납작하게 들러붙은 복부가 볼록 나올 때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늘 밖으로 나가 따가운 햇볕 아래 선 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섬의 끝에서부터 반대편 끝까지 쭉 돌아보았다.

그때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눈으로 인지한 풍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했지만 방어기제가 한풀 꺾인 지금은 확실히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낯선 풍경과 지리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장소, 눈앞의 현실이 가리키는 의미는 단 한 가지였다.

조난.

조난을 당했음을 자각하자마자 별하의 안색이 하얗게 일변했다. 폭풍우에 휘말린 크루즈에서 떨어져 망망대해를 표류했을 때의 공포감과 두려움이 다시금 떠오른 것 같았다. 용케 여태까지 살아 있는 자신의 질긴 운명에 놀란 것인지도 몰랐다.

끼룩― 끼룩―

해변에 모여든 새들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별하는 불규칙한 숨을 아연히 몰아쉴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정말 조난당한 게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지만 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후로 얼마나 지난 건지 시간 감각도 엉망이었다.

손목에 감긴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몇 월 며칠의 2시인지 알 수 없는 지금은 태양의 기울기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혼란한 정신을 최대한 가다듬으려 노력하던 별하는 이내 몸을 움직였다. 진실로 조난이라면 무엇보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눈부신 해변을 등져 시원한 공기를 퍼트리는 밀림으로 향했다. 그 무성한 안쪽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르기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나뭇가지를 족족 주워 들었다. 크기에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모아 다시 해변으로 되돌아왔다.

끼룩― 끼룩―

머리꼭대기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동서남북을 가늠한 후 밀림의 그늘이나 파도가 닿지 않는 모래밭 한가운데를 빙 돌았다. 새 도화지처럼 깨끗한 모래 위에 발자국을 만들어나가다 곧 가장 큰 나뭇가지 하나를 그 위에 꽂았다.

가져온 나뭇가지들을 차례차례 줄지어 꽂는 모양새가 어떤 형상을 만들려는 생각 같았다.

되도록 간격을 넓혀 나뭇가지를 꽂고 나서 자잘한 가지들을 뭉쳐 꼭짓점을 이었다. 모자란다 싶으면 재차 밀림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주워와 모래 바닥에 늘여놓았다.

끼룩― 끼룩― 끼룩―

한참 작업에 열중해 있는 중 물가의 어수선한 기척이 불현듯 신경을 건드렸다. 별하는 턱 끝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좀 전 그의 잠을 깨운 불청객들이 여전히 야단스럽게 소리를 내며 놀고 있었다. 무리의 중심에서는 맛있는 먹이라도 발견한 건지 물속에 대가리를 처박고 저들끼리 정신없이 헛날개짓을 해대고 있었다.

꼬르륵―

문득 공복감을 느낀 그는 굽은 허리를 세웠다. 코코넛을 따 먹을까 하다가 씹을 수 있는 음식이 더 그리워 금방 포기했다.

바닥에 글씨를 만들다 말고 일어나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들었다. 한적한 해변에 내려앉아 먹이도 먹고 휴식도 취하는 새들에게로 향하며 그것을 허공에서 휘휘 저었다.

“훠이.”

놀란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물러났다. 끼룩― 끼룩―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자리에 역시 뭔가가 있었다. 물고기인가 싶어 종류를 확인하려 가까이 다가가던 발걸음이 일순 우뚝 멈췄다.

얕은 밀물을 따라 떠밀려 드는 물체는 해초였다. 시커먼 해초로 뒤덮인 아래쪽에서 언뜻언뜻 내비치는 것은 샛노란 색의 무엇이었다. 정확히는 형광 노란색의.

별하는 숨을 삼켰다. 인위적인 색깔은 열대어의 비늘 같은 게 아니었다. 낯익은 그것은 사람의 옷가지였다.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번뜩 깨닫고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사체의 맛을 보았는지 새들은 멀리 날아가지 않고 호시탐탐 이쪽을 기웃거렸다.

“제, 기랄.”

나뭇가지를 휘둘러 그들을 멀리 쫓아낸 별하는 멀찍이서 사체를 살폈다.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도 있었지만 사체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해초에 뒤덮인 그것은 저처럼 파도에 떠밀려 이곳까지 닿은 듯했다. 지명도 모르는 오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에게서 제 모습을 겹쳐본 별하는 선명한 오한을 느꼈다. 운이 조금만 더 나빴었다면 저 자리에 누운 이는 바로 자신이었으리라.

크루즈에서 떨어져 굽이치는 바다에 빠졌을 때는 확실히 죽음을 예감했었다. 그 당시 워낙에 위급했던지라 상황이 잘 떠오르진 않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나무판자를 붙잡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지금 이곳에 두 발로 서 있게 된 것이었다.

자신에게 특출 난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운이 나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니, 인생 최대의 악운을 아주 약간 비스듬히 피해갔을 뿐이다.

그는 발길을 돌렸다. 자리를 옮겨 사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끼룩― 끼룩― 방해꾼이 움직이자 불청객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005.

“…….”

완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별하의 만면에 깊은 수심이 깃들었다. 고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시신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생면부지의 인물들이지만 가족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더할 수 없이 무거워졌다. 제 가족이 타지에서 새들에게 먹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상심에 빠져 시름시름 앓아누울까.

별하는 제 친지를 떠올렸다. 배낭여행을 다녀오겠노라 선포했을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서는 써두고 가라며 조언하던 양부모님의 웃는 얼굴이 그들에게 겹쳐 보여서 각오를 무르게 했다.

짧은 한숨을 뱉어낸 그는 신이 나서 모여드는 새들을 향해 막대기를 거칠게 휘둘렀다.

“이놈들아! 가서 물고기나 잡아먹으라고!”

커다란 새들이 괴성을 지르며 물러나면서도 날아가지 않았다. 언제든 기회만 생긴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겠다는 뜻이었다.

“하아…….”

별하는 일단 새들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놓은 후에 사체 가까이 다가갔다. 더 부패하기 전에 묻을 생각이었다.

물에 퉁퉁 불어버린 시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건너 들은 적이 있던 터라 더 초조했다. 혹시라도 잘못 건드려 썩어가는 내장을 목격하고 싶지는 않았다.

막대기를 길게 뻗어 사체를 덮은 해초를 조심히 걷어냈다. 형광 노란색의 물체는 역시나 옷가지였다. 크루즈에서 봤었던 그것이 확실했다.

별하는 신음을 삼켰다. 조난자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면 크루즈 조난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피어올랐다. 동시에 저만 살아남은 데 대한 묘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착잡한 심경으로 사체를 살피던 그는 손을 좀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조난자를 찾아야 하는 계획이 생겨, 내심 마음이 급해졌다.

하반신이 물에 잠긴 채로 엎어져 있는 사체는 남성인 듯 예상보다 신장이 무척 컸다. 젖은 모래에 반쯤 묻힌 상반신 주변을 정리하는데 사체의 손이 보였다.

새하얀 피부는 아직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고 별다른 상처도 없이 깨끗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고와 보일 정도였다. 흰 피부 아래 비치는 핏줄이 유독 새파래서 마치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모습이었지만 염려했던 처참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해초를 말끔히 걷어내고 사체를 뭍으로 끌어낼 준비를 하던 별하의 눈길이 문득 한 지점으로 향했다. 사체의 머리 부분이었다.

레인 코트로 살짝 가려져 있는 머리칼은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굽실굽실한 머리칼이 원래 무슨 색을 하고 있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플래티넘 블론드.

“…….”

불안한 예감이 뇌리에 내리꽂혔다. 별하는 사체의 얼굴을 덮은 머리칼을 묵묵히 내려다보다 막대기로 그것을 거둬 올렸다. 손등 피부만큼 새하얀 얼굴이 태양 아래서 드러나는 순간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

그였다. 크루즈에서 마주쳤던 거만한 하이 알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하이 알파도 천재지변 앞에서는 죽음을 피하지 못한 듯했다. 이런 딱한 상황이 올 줄도 모르고 자신이 내뱉었던 막말을 떠올린 별하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때 조금만 더 인내했더라면 처음 만난 사람과 그렇게 얼굴을 붉힐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눈인사를 주고받는 동승객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후회스러웠다.

가만히 고개를 숙여 사고사한 넋을 애도하는데 문득 죽음이란 것이 피부에 밀착하는 감각을 느꼈다. 차갑고 서늘한 느낌에 치를 떨며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는 그 때, 별하의 시야에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

부드럽게 밀려든 썰물에 사체의 한쪽 얼굴이 얕게 잠겼다가 다시 드러났다. 동시에 코끝에 닿는 물 표면이 흔들렸다. 규칙적으로 자그마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공포영화에서처럼 콧속에 벌레가 숨은 게 아니라면 호흡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별하는 얼른 검지를 세워 사체의 코끝에 가져다댔다.

“…….”

착각이었나, 하던 순간 손끝에 미미한 자극이 느껴졌다. 작고 느린 숨결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멀찌감치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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