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1)화 (1/49)
  • 크루즈가 침몰하고 하루를 버텨 간신히 도착한 적도의 섬.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그리고, 바닷물에 떠밀려온 남자를 발견했다.

    의식을 잃은, 거만한 알파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안전한 곳으로 끌어다 두고, 죽지 않게 물을 먹여주었다가,

    “빌어먹, 안 돼!”

    알파의 러트에 휘말렸다.

    ―무사히, 섬을 떠날 수 있을까.

    001.

    01. The Unknown Island

    권별하는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였다.

    높은 하늘, 선선한 공기와 바람, 미세하게 출렁이는 듯한 중력감, 탁 트인 시야는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귓가를 찌르던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콘크리트 건물을 무너뜨리는 폭격소리도 이곳에는 없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워서 악몽이라도 꾼 것 같았다.

    그가 오랜 내란으로 시끄러운 중동 국가를 배낭여행의 출발지로 선택한 이유는 단지 욕심 때문이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상책이라는 명언이 있듯이 체력과 정신력, 소정의 돈을 쥐고 있을 때 가장 두려운 미지의 세계를 가장 먼저 돌파하고 싶었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 만난 현지 사람들은 무슨 목적에서였든 일단 친절했고, 이국적인 풍경도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낯선 현지식은 얼마 전까지 매일 먹었던 짬밥보다 입맛에 맞았다.

    걱정과 불안이 차츰 사그라든 상황에는, 막무가내로 배낭여행을 시작해 버린 자신이 새삼 멋지게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그런 긍정적인 마음가짐도 한밤중에 날아든 폭격에 돌가루처럼 바스라져 버렸다. 사흘 뒤면 국경을 넘어 테러 청정 구역으로 갔을 텐데 오늘 새벽, 수도에 반군들의 폭격이 날아들었다.

    먼저 국제공항과 기차역이 터졌다. 곧바로 시청과 화폐청에 무장 세력이 들이닥쳐 수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바로 집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대규모 테러였다.

    별하는 급히 대사관에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도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국제 여객선 터미널의 위치를 알려줄 뿐이었다.

    수 시간에 걸쳐 도착한 여객선 터미널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현지인과 대기 중인 군 병력, 별하와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혼재해 마치 수용소 같았다. 이곳 역시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모르는 긴급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지막 국제선 크루즈 하나가 선착장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유럽으로 항행하는 초대형 크루즈는 막 출항 준비를 끝낸 참이었고, 각국 정부의 도움으로 크루즈에 올라탄 게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전이었다.

    “하아…….”

    별하는 손에 든 샌드위치 조각을 내려다보며 작은 한숨을 뱉었다. 빵 사이로 빠져나온 토마토를 슬며시 난간 밖으로 버리곤 차츰 저녁놀이 드리우는 인도양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인간사는 끊임없는 분쟁과 탐욕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너머의 자연은 숙연하리만치 아름답고 깊었다.

    까슬까슬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생각에 잠긴 그의 귓가로 몹시 어수선한 소음이 달려들었다. 수천 명이 탑승한 초대형 선박이지만 일부러 인파를 피해 갑판 귀퉁이로 피신해 왔는데 이곳 역시 시끌벅적했다. 별하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가까운 계단 기둥 뒤쪽, 후미 갑판에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웅성대며 한곳을 주시하는 사람들 사이로 촬영 장비 같은 부품들이 여기저기에 난립해 있었다. 구경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태반이 젊은 여자들이었다.

    후미 갑판의 난간 부근을 정신없이 주시하던 여성들이 갑작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급격하게 깎아지른 성조가 수백만 달러의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들렸다. 관계자가 주변을 정리하려 했지만 소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별하는 샌드위치를 깨끗하게 먹어 없앤 뒤 난간에 기댄 몸을 똑바로 세웠다. 목구멍에 틀어 막힌 듯 잘 내려가지 않는 음식을 두어 모금의 물로 겨우 넘기고 바닥에 내려놓은 배낭을 어깨에 둘러맸다.

    소란스런 자리를 피할 생각으로 구경꾼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사람들의 탄성에 이끌려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슴푸레한 먹구름 뒤에서 새빨갛게 타오르는 노을은 순간적으로 두 눈이 머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미려했다. 거룩하게 느껴질 만큼 영롱한 홍염이었다.

    그런 배경을 뒤로 하고 난간에 기대 선 우뚝한 인영은 탑승객들의 미감을 채워주기 위한 설치물처럼 보였다.

    어떤 얼룩도 없는 새하얀 피부와 건강한 밀밭처럼 흩날리는 플래티넘 블론드, 주변을 아우르는 거대한 신장, 활짝 열린 셔츠 사이로 정교하게 깎아놓은 듯한 근육들이 촬영 조명 불빛에 반짝거렸다.

    옆으로 조각상 같은 다른 모델들이 여럿 서 있었지만 석양을 등진 남자 모델은 그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혹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낸 경이한 존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의심할 것 없는 하이 알파였다.

    악마의 군단을 가소롭게 내려다보는 천사 같은 얼굴이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고매하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구경꾼들의 입가에 야단스러운 웃음이 내걸렸다. 출항하기 전 두려움에 떨던 모습들은 이제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별하는 별 관심을 주지 않고 바로 고개를 돌려 시끄러운 장소를 벗어났다.

    엄청난 높이의 선상은 초호화 크루즈답게 화려한 디너파티 준비로 한창이었다. 석양이 짙어질수록 바람이 꽤 불어와 머리 위를 가로지른 만국기와 흰 테이블보들이 거칠게 펄럭였다.

    인적이 드문 구석 벤치를 발견한 별하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무거운 배낭을 벗어 내렸다. 온종일 도사리던 긴장감이 가시자 온몸의 근육이 삐거덕거렸다.

    별하는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난간 너머까지 손을 뻗은 어둠을 멀거니 응시했다.

    자신의 체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학창 시절에도, 군대에 있을 때도, 크게 체력이 모자란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하지만 혈기와 오기만으로 이 넓은 세계를 맛보기에는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이왕 시작한 중에 후회는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잘할 수 있을까?

    무사히 잘해나갈 수 있을까?

    어째서 시작해 버렸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다다른 별하는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건 길을 떠나왔고 칼은 뽑았으니, 하다못해 6개월은 견뎌본 후에 돌아가든 계속해 나가든 결정해야 했다. 자신과 약속했으니까.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하나의 진실을 마주한 그 오래전부터.

    “…….”

    서늘한 들숨을 마시며 길게 불어내는 그 때 앞을 지나던 여성의 치마가 강풍에 훌러덩 뒤집어졌다. 별하는 순간 눈이 시려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해가 지자 바람이 한층 강하게 불어닥쳤다. 기온도 부쩍 내려간 듯했지만, 지금은 겨우 손에 넣은 4등석의 최하층 객실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답답했다. 조금 서늘하긴 하지만 뻥 뚫린 갑판이 심신에 안정을 가져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졸리면 휴게실에서 잠시 머물 생각이었다.

    별하는 끈이 느슨해진 트레킹화를 슬쩍 벗었다. 엊그제까지 물집이 여기저기 잡혀 있던 발이 무지근하게 부어 있었다. 열이 오른 발을 주무르자 대번에 하품이 나왔다.

    “하암. 벌써 졸리네…….”

    온종일 여기저기 쫓아다녔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기분 같아서는 5만 보 이상 걸은 듯했다.

    배낭을 벤치 끝으로 밀어놓고 잠시 등을 기대려는 찰나, 바로 근처 바닥에 작은 뭔가가 툭 떨어졌다. 엷은 음영 아래서 반짝이는 것을 얼른 주워 든 별하는 아무것도 모르고 휙 지나가는 행인을 불렀다.

    “저, 저기 이거 떨어뜨렸―”

    앞선 인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별하가 유일하게 자신하는 분야가 언어 계통이었기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강한 바람소리에 별하의 말을 듣지 못한 듯한 행인은 아무렇게나 걸친 흰 셔츠를 휘날리며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별하는 잠시 주저했다. 언어 능력과는 별개로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외국인이 상대라면 더욱 그랬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길은 상당히 고역스런 것이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하는 인간이 사람을 꺼린다는 게 모순이었지만, 작금의 이 모든 난관들은 그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 안의 작고 묵직한 물체는 커프스단추였다. 순금으로 이루어진 몸체에 붉은빛과 보랏빛의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어 과하게 화려했다.

    별하는 트레킹화를 구겨 신고 일어나 행인을 쫓았다.

    “저기. 이거 떨어뜨렸어요.”

    배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이자 거대한 신장의 행인이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갑판 조명이 비추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별하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조금 전 사람들 틈에서 압도적인 외모를 과시하던 남자 모델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미남자는 바람에 나부끼는 금발을 내버려 둔 채 심히 무미건조한 얼굴로 힐긋 내려다보았다. 귀찮게 또 무슨 용건이냐는 듯.

    별하는 손에 든 것을 머쓱하게 내밀었다.

    “……이거 떨어져서.”

    “…….”

    “그쪽 단추 맞죠?”

    대답 없는 남자는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다.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다 별하에게 눈길을 던졌다. 어떤 형태를 확인하듯 스쳐보더니 이내 휙 돌아섰다. 한숨 섞인 묵직한 저음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Fucking…….”

    “……?”

    별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곧 의미를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진절머리 나는 무언가를 본 듯한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오메가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당혹감 다음에는 분노였다. 별하는 덩그러니 버려진 고급 커프스단추를 꽉 움켜쥐었다가 남자의 등짝을 향해 던졌다. 난데없이 등을 맞은 남자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

    남자는 제 등을 때리고서 반짝거리며 바닥을 구르는 커프스단추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다 어깨 너머를 스윽 돌아보았다. 별하는 등을 곧추세웠다. 주먹을 쥐어 떨리는 손끝을 얼른 감췄다.

    둘은 인적이 끊긴 갑판 위에서 한참동안 눈씨름을 했다. 누구도 먼저 피하지 않았다. 돌연 남자가 발길을 틀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별하의 코앞에 우뚝 섰다.

    발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마주한 이는 별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올라간, 말 그대로 육 척 장신이었다. 육 척을 훌쩍 넘어 칠 척은 되어 보였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 신장의 평균에 소수점 차이로 미달인 별하는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구부렁한 은빛 금발을 휘날리는 남자를 직시했다.

    신장뿐 아니라 체격, 뼈대에서부터 승부가 안 되는 게임이었지만 별하는 지금 생에 몇 번 겪어본 적 없는 분노 상태였다. 호의를 반드시 호의로 돌려줘야 하는 법은 없지만 초면부터 이렇게나 악질인 인간은 대개가 안하무인이었다.

    천사 같은 외모로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며 안락한 성전에서 살아왔을 그 특별한 존재에게 별하는 혐오감을 느꼈다. 하다못해 티라도 내지 않았다면.

    “훔친 게 아니야. 떨어진 거라고.”

    날이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일부러 더 턱을 치켜들고 별하를 내리깔아 보았다. 군청색 음영이 드리운 엷은 회색빛 눈동자가 얼어붙은 쇠붙이처럼 차가웠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한 눈빛이었다.

    별하는 오기로 버티고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그를 더는 마주보고 싶지 않았다. 세간에 알려진 하이 알파들의 시시한 능력 따위에 겁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체념이었다. 무뢰하기 그지없는 이들에게 맞서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열을 올리는 쪽이 괴로워질 뿐이라는 것을.

    “빌어먹을.”

    상대가 알아먹지 못할 한국어로 작게 중얼거린 그는 먼저 몸을 틀었다. 완전히 돌아서기 직전 남자의 저음이 귓가를 스쳤다.

    “마마는 어딜 갔지?”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제대로 들었지만 어리둥절했다. 한국에 계신 우리 어머니는 왜 찾아?

    002.

    남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별하를 향해 무미건조하게 읊조렸다.

    “마마가 찾는다, 보이. 어서 객실로 돌아가.”

    남자는 별하를 비꼬고 있었다. 별하는 대번 만면을 찌푸리며 목에 걸린 군번줄을 내보였다.

    “콘택트렌즈 반대로 꼈나 봐? 한 달 전에 전역한 군인이야, 망할 거인 놈아.”

    남자의 서늘한 눈매가 단단해졌다.

    “내 눈 앞에서 꺼져. 그 귀여운 얼굴을 밤바다에 처박아 버리기 전에.”

    별하는 어금니를 으득거리며 양주먹을 그러쥐었다.

    “못 꺼지겠다면 어쩔 건데? 너희 파파라도 부르려고?”

    남자의 회색빛 눈동자에 서슬 퍼런 안광이 스쳤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와 별하와 발끝을 가깝게 맞댔다.

    “입 조심해, 오메가. 난 약자에도 평등한 인간이다.”

    “약자? 쯧,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알파 따위가 평등을 입에 올리다니. 그전에 기본 소양부터 배워, 거만한 알파.”

    “…….”

    “아, 미안. 나르시시스트 알파였던가?”

    “…….”

    남자와 별하는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찬바람에 눈동자가 시려도 이를 물고 참았다.

    얼마나 가까이서 대치했는지 상대의 뜨뜻미지근한 숨결이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컬러렌즈를 낀 듯한 투명한 회색빛 눈동자에 한가득 들어찬 제 모습을 번뜩 마주한 별하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팽팽하던 시선이 얼핏 흐트러진 것을 금방 눈치챈 남자는 득의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무시와 조롱으로 점철된 비웃음이었다.

    울컥한 별하의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분노로 달아오른 입술을 씹으며 가슴팍을 확 밀어붙였다.

    생각지 못한 과격한 행동에 비웃음이 걸린 남자의 안면이 굳었다. 남자가 곧장 선방을 날릴 태세를 취하는 별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 때였다.

    톡―

    “―?”

    별하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밤바다 위 어둠이 찾아든 하늘에서 다시 물방울이 이마에 톡 떨어졌다. 빗방울이었다. 남자도 그를 느낀 건지 눈을 들어 위를 확인했다.

    진한 먹구름이 밤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한차례 소나기라도 쏟아질 날씨였다.

    찰나로 별하와 눈길이 마주친 남자는 작게 혀를 차며 휙 돌아섰다. 별하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멀어지는 남자를 미련 없이 등졌다.

    벤치로 돌아가 구겨 신은 신발을 똑바로 하고 배낭을 어깨에 둘렀다. 남자가 걸어가는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틀어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톡―

    뺨에 떨어진 빗방울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먹구름이 자욱하게 하늘을 더없이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단 하룻밤이라도 편히 자고 싶은데.”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는 순식간에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해수면을 강타했다. 시커먼 노도가 하늘을 거슬러 올라 매섭게 들이칠 때마다 거대한 크루즈도 버티지 못하고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내부 스피커에서는 예상 경로를 이탈한 허리케인에 대한 경고 방송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대 최고 등급이라느니, 최악의 경우에 대한 절차 설명이나 수시로 신의 가호를 비는 목소리는 괴담보다 오싹하면서도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이게만 들렸다.

    미처 객실로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중앙 광장의 로비 응접실에 모여 악몽의 시간이 어서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 통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별하는 빗물로 얼크러진 창밖을 걱정스레 내다보았다. 야간 조명이 비추는 갑판은 쉴 새 없이 덮쳐드는 높고 거친 파도에 초토화 상태였다.

    무거운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여우를 피하려다 곰을 만나는 격이었다. 곰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일 수도 있었다.

    똑바로 정신만 차리면 어디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웠지만 당분간은 그러한 신념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수난의 연속에서 온전히 살아 나가기 전까지는.

    “하아…….”

    세탁을 못해 꼬질꼬질해진 체크무늬 남방을 꺼내 걸친 별하는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며 눈꺼풀을 문질렀다. 잠기운이 드리운 눈동자가 고정된 테이블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 장식을 멍하니 좇았다.

    거친 파도와 매서운 비바람소리가 유리창을 들이박아도 응접실은 잠잠했다. 일부러 틀어놓은 듯한 늘어진 재즈 팝 소리가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처럼 나직이 울리고 있었다.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으로 꾸벅꾸벅 졸던 별하는 바로 옆에서 번뜩인 뇌성에 고개를 홱 들었다. 깜깜한 창밖에 새하얀 불꽃이 연이어 내리꽂힌 순간 하늘을 쪼갤 듯한 굉음이 요동쳤다.

    쿠쾅! 쿠콰광―!

    응접실 안쪽에서 동시다발로 여러 사람의 비명이 울렸다. 찰나로 별하의 눈길이 향한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악마의 형상으로 들썩이는 밤바다를 일시에 한낮처럼 밝히는 번개였다. 정확히 번개가 비추는 갑판.

    물바다가 된 갑판 위에 형광 노란색의 천조각이 헝클어져 너풀거리고 있었다. 찢어진 천조각처럼 휘날리는 물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레인 코트였다.

    작업용 레인 코트의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거센 비바람에 저항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젖은 종잇장처럼 고꾸라졌다. 같은 복장의 또 다른 남자가 황급히 안전줄을 잡고 동료를 구하려 다가가다 함께 파도에 부딪혔다.

    응접실의 샹들리에가 거칠게 요동치자 사람들의 비명이 다발로 일었다. 별하는 크게 뜬 눈으로 파도가 덮치고 지나간 난간 주변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안전줄을 부여잡고 있던 그림자들이 없었다.

    “―?!”

    급히 이쪽저쪽을 돌아봤지만 물그림자에 가려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별하는 실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좀 전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안전 요원들이 지금 하필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창가에 바짝 다가간 그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악독한 수마가 날뛰는 어둠의 저편으로 두 사람 모두 휩쓸려간 것 같았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밖을 살피던 별하의 눈길이 한 곳에 박혀들었다.

    야간 조명이 닿지 않는 난간 너머로 노란색 천조각이 슬쩍 보였다. 파도가 물기둥마냥 난간 위로 높이 솟구칠 때마다 펄럭이는 천조각은 레인 코트였다. 휩쓸려간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크루즈 외벽을 붙잡고서 버티고 있었다.

    별하는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응접실을 뛰쳐나가며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누가 배에서 떨어질 것 같아요! 안전 요원 좀 불러주세요!”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날아왔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혹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겁을 먹은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별하는 머뭇거릴 새 없이 갑판과 이어진 중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와 동시에 선체가 크게 요동치며 기울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물폭탄이 갑판을 덮쳤다.

    “으, 윽…….”

    거세게 불어닥치는 비바람과 파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들었다. 팔로 젖은 눈가를 가린 별하는 안전줄을 붙잡고 급히 난간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의 아우성인지, 인간의 영혼을 붙잡으러 달려드는 수마의 속삭임인지 두 귀가 먹을 듯이 시끄러웠다.

    들이친 파도에 떠밀려 갑판 가장자리에 부딪친 그는 신음을 삼키며 난간 너머를 내다보았다. 시커멓게 일렁이는 밤바다는 번개가 내리꽂힐 때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거대하게 꿈틀거렸다. 까마득한 곳에서부터 휘몰아쳐 드는 폭풍 속에서 흔들리는 크루즈는 한낱 비루한 낙엽 같았다.

    난간 외벽에 난 기둥을 더듬어 지나 노란색 천조각이 보이던 곳까지 닿은 별하는 신음을 삼켰다. 역시나 한 남자가 매달려 있었다. 밧줄을 움켜잡은 손이 조각상처럼 새하�R고 펄럭이는 레인 코트 아래 숨은 남자의 얼굴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시체처럼 시퍼��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죽음에 대항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견뎌요! 조, 조금만!”

    남자는 별하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미동이 없었다. 별하는 흠뻑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살폈다. 남자를 고정시켜 안쪽으로 끌어 올릴 뭔가를 찾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온통 빗물과 거친 파도가 내던지는 포말뿐이었다.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선체 난간을 붙잡고 다급히 손을 내밀었다.

    “제 손 잡으세요! 어서! 손을 잡아요!”

    왼손을 최대한 길게 뻗은 별하는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입대 후 4주간의 고된 유격 훈련에서도 나오지 않던 큰 목소리였다.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폭풍우를 버티고 있던 남자의 두 눈이 번뜩 이쪽으로 향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어두운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빛이 어른거렸다. 생명줄을 발견한 남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별하의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 같은 피부와 맞닿는 순간 별하는 온힘을 다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윽!”

    예상보다 큰 무게감에 양손으로 남자를 끌어 올리는데 연거푸 들이치는 파도에 부딪쳐 난간을 넘질 못했다.

    “조, 좀 더! 힘내 봐요! 다시!”

    “사, 살…… 살려줘…….”

    “힘을 내요!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면!”

    “흐윽…….”

    난간에 매달린 남자는 쉬이 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까지 무서운 힘으로 끌어당겼다. 젖은 운동화가 빗물에 쭉쭉 미끄러져 나가 힘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들이치는 파도에 별하의 찡그린 눈가가 금세 새빨개졌다.

    “한 번만 더! 하나 둘!”

    구호에 맞춰 끌어 올리자 남자는 안간힘을 다해 별하에게 매달렸다. 바짝 세운 손톱이 얇은 남방을 뚫고 피부를 파고들 정도였다. 별하는 어금니를 악다물고 눈앞의 고난에 온 힘으로 저항했다. 이윽고 야간 조명이 어른거리는 난간 위로 남자의 하복부가 올라왔다. 무릎이 꺾이지 않게 조심하며 마지막 허들을 넘으려는 찰나였다.

    서둘러 난간을 넘으려던 남자가 발을 헛딛으며 일순 무게 중심이 흐트러졌다. 이제 살았다고만 생각한 인영이 눈 깜짝할 새에 굽이치는 암흑세계로 끌려 내려갔다.

    “으아악!”

    별하는 날숨도 내뱉지 못하고 제게 매달린 남자와 함께 난간 밖으로 고꾸라졌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강한 힘이 별하의 등을 붙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읏!”

    별하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새된 비명을 지르는 남자에게 집중했다. 소매 끝에 핏물이 든 그의 팔 옆으로 노란색 레인 코트를 입은 팔이 뻗어 나왔다.

    레인 코트 끝자락으로 보이는 팔은 창백하리만치 새하�R지만 발버둥치는 남자를 단번에 끌어 올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남자가 무사히 난간을 넘어 갑판 위로 쓰러진 그 때였다. 거센 태풍에 속절없이 흔들리던 크루즈가 이내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그것도 파도의 안쪽으로.

    어딘가에서 남녀의 비명이 연달아 교차했다. 그 순간 번개가 번쩍 내리쳤다. 삽시에 낮으로 일변한 풍경 속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

    별하는 뿌옇게 얼크러진 시야를 걷어내며 눈앞의 광경을 아연히 올려다보았다.

    파도였다. 단순히 갑판을 때리는 심술궂은 파도가 아니었다. 수천 명을 태운 크루즈를 한입에 집어삼킬 만한 거대한 해일이었다. 불과 철로 만들어진 크루즈는 마치 종이배처럼 해파의 골로 먹혀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천재지변에 모든 소리가 생명을 다한 듯 세상이 고요해졌다. 전쟁터 같은 바다를 얼려버린 정적 속에서 별하는 가만히 난간을 붙잡았다. 옆에서 나직한 저음이 귓가를 스쳤다.

    “Shit.”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크루즈를 압도하는 새카만 그림자에 빨려 들어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003.

    자꾸 눈가를 건드리는 느낌에 별하의 미간이 어렴풋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햇볕을 피하려 했지만 의식을 찾은 후부터는 눈꺼풀을 뚫고 찔러드는 빛을 더 견디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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