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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804화 (805/805)

805화

“아버지께서 드디어 오신 건 그렇다 치고, 불청객이 따라와 무척 시끄러워졌거든요.”

“불청객이라.”

“디아카 가문의 막내 공자라더군요.”

‘…뭐? 키올레가?’

키올레가 디아카 가와 황궁기사단을 대표해 온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놈의 이름이 여기서 헤른 공작과 함께 등장할 것이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왔다는 소식이 어째 안 들어온다 싶더니… 어떻게 된 거지?’

유더와 마찬가지로 키시아르 또한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상당한 흥미를 느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흐음. 디아카의 막내 공자라. 나도 잘 아는 이군. 그가 헤른 공작과 함께 왔다니 상당히 흥미로운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던가?”

“듣기로는 샬로인에 오던 도중 우연히 마주쳤다고 들었어요. 그 공자가 묵을 숙소가 본래는 황궁기사단에서 마련한 곳이라던데, 아버지께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그곳에 묵게 하는 건 우리 헤른의 수치라 여겨 숙소를 내주기로 하셨다더군요.”

그러니까… 기사단 따위에서 내어 주는 숙소에 같은 4대 공작가의 사람이 묵는 게 남부의 지배자와도 같은 헤른 공작이 보기엔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걸 디아카의 공자 쪽에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신 이상 방법이 있겠어요?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오게 된 결과 후폭풍은 아랫사람들과 제가 맞고 있지요.”

“다른 숙소로 가겠다고 주장하는데도 계속 손님 자격으로 머물고 있단 건가?”

“네. 아버지께서 엄명을 내리셨거든요.”

그렇게 말한 뒤 마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께선 워낙 속뜻을 알 수 없는 행동을 자주 하시는 분이라 말씀대로 정말 헤른의 체면 때문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디아카 가에게 다른 뜻이 있다 여겨 그러시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그 디아카 가의 공자와 하인들의 행동이 상당히 수상할 때가 있거든요.”

마이라의 입술이 아까보다 더 크게 비틀렸다.

“무어라 꼬집어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런 언행이 오히려 그의 속내를 숨기고 일부러 꾸며낸 게 아닌가 싶은 면모가 느껴지니… 아버지께서 의심 때문에 동행해야겠다 판단하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죠.” 

‘음…….’

유더는 마이라의 말에서 몇 가지 정보를 잡아냈다.

우선 헤른 공작이 자신의 호의를 상대가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 않는 성격이란 것.

어디 가서 고집 세고 멍청하기로는 지지 않을 키올레조차 꺾여 강제로 ‘손님’ 자격으로 끌려오고, 제 뜻을 관철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당찬 마이라조차 아버지라면 어쩔 수 없다 고개를 내저을 만큼 고집이 세다는 것.

마지막으로 변덕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나름의 정치질에 제법 능해 보이는 인간이란 것까지도.

‘키올레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원래 그랬던 놈이라 원인 짐작이 오히려 안 되는군.’

그래봤자 키올레 다 디아카다. 어차피 2공자의 장례식에 참석하면 곧 만나게 될 테니 원인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더는 키올레에 대해선 정말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헤른 공작은 여태 존재감을 드러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어떤 성격일지 영 짐작이 안 되었는데… 이번에는 볼 수 있을 테니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 둬야겠어.’

유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키시아르는 태연하게 웃으며 ‘저런. 고생이 많았겠군.’ 하고 마이라에게 위로를 건넸다.

“그래서, 헤른 공작의 건강은 많이 나아졌다던가? 자식을 앞세운 장례식이 곧이라 상심에 건강이 상하진 않았을지 염려되는군.”

“예. 말씀대로 상심이 얼마나 극심하신지 침실에 쓰러져 하루를 보내시며 시중드는 고운 여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중이지요. 행여나 바깥에서 보기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길까 참으로 걱정되더군요.”

겉으로는 몹시 예의 바른 말을 주고받고 있지만 키시아르와 마이라, 그 어느 쪽도 진심 어린 어투가 아니었다. 마이라의 잘 포장된 신랄한 말투 속에서 유더는 그녀가 제 아버지의 행동에 얼마나 치가 떨리는 중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생이 죽었는데 아버지란 인물이 오자마자 침실에서 여자만 끼고 살며 뒤처리하느라 고생만 시킨다면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마이라 측과 마병단이 현재 함께 처리 중인 샬로인의 현안과 관련된 몇 가지 간단한 대화를 마친 뒤, 키시아르는 먼저 손을 내밀어 마이라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바쁠 와중에도 공녀가 이리 시간을 내어 직접 여기까지 소식을 전하러 와 주었다는 사실에 무척 큰 고마움을 느끼네. 보좌와 함께 반드시 참석하도록 하지.”

“별말씀을요.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보란 듯 밝혀내 주신 분이시니 누구보다도 참석하실 자격이 있으시지요. 그 애도 공작님께서 방문해 주신다면 몹시 감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꼭 방문하여 아쉴라브의 가는 길을 지켜봐 주세요.”

그렇게 말한 뒤 마이라는 가슴에 손을 얹고 우아하게 인사하려다, 갑자기 현기증이 난 듯 잠시 비틀거렸다.

“아…….”

여전히 당당한 태도이나 베일로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그녀의 얼굴 속에 짙게 묻어났다. 정말 보통 고생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을 본 키시아르가 턱을 가볍게 문지르며 유더에게 눈짓을 했다.

“아무래도 그대로 내려가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겠군. 보좌, 1공녀가 돌아가기 전 잠시 의료부에 방문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만…….”

“거절하지 말게. 공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곧 우리의 문제야. 수도에서 온 우리 약사와 사제의 실력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들 만큼 실로 굉장하니 의심하지 않아도 좋네.”

마이라는 그게 과장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한숨을 내쉬고는 감사를 표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유더는 마이라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섰다. 가는 길에 작은 바람을 불러내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식혀주자 마이라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죠? 실내인데… 바람이 부는군요?”

“제가 불러낸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불러내어 혹시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시원해서 좋았어요.”

마이라는 안심하면서도 신기한 눈빛으로 유더를 슬쩍 훑었다. 그녀의 눈속에서 익숙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이전 생에도 많이 받아 본 눈빛이기에 유더는 조용히 입을 열어 먼저 물꼬를 터주기로 했다.

“제 힘에 뭔가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티가 났나요?”

마이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바람을 다루는 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몹시 어려운 일이라 들었는데, 참으로 쉽게 하여 놀랐어요. 능력을 다루는 일이 힘들지는 않나요?”

그간 받아 본 수많은 무례한 질문들에 비하면 이건 몹시 순수하고 귀엽게까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유더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 힘은 제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한번도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대단하군요……. 자연의 힘을 다룰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지요?”

“예.”

마이라는 이후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그 사이 몇몇 단원들이 지나가다 그들과 마주쳐 인사를 건넸다. 그중에는 전신을 로브로 감싼 누군가를 데리고 지나가던 칸나도 있었다.

‘음… 가려둔 걸 보니 호산라인가?’

가까이 다가오며 보니 과연 로브를 쓴 인물은 드러난 손의 피부가 붉었고 한쪽 다리를 절었다. 호산라가 맞았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유더도 안녕.”

“응.”

마이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칸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칸나에게 한쪽 팔을 가볍게 잡혀 있던 호산라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칸나의 뒤에 거의 몸을 숨겼다.

“왜 나와 있었어?”

“지하에서 일하니 조금 답답한 것 같아서 잠깐 산책하던 중이었어. 오늘은 날씨가 좋잖아? 곧 돌아갈 테니 이따가 보자.”

마이라는 알아듣기 어렵겠지만 유더는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깔끔하게 자신들이 나와 있던 이유를 설명한 칸나가 이내 밝은 태도로 사라졌다. 모습만 보아서는 죄인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모습이라 여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뒷모습을 훑던 마이라가 의료부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 입을 열었다.

“못보던 얼굴이군요. 아까 그 단원은 수도에서 온 사람인가요?”

“예. 정과 부단장 칸나 완드입니다.”

“나와 거의 나이 차이도 없어 보이고 연약해 보이던데 대단하군요.”

“각성자의 능력은 육체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연약하다는 기준도 그와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칸나는 저희 중 누구보다도 강한 능력과 의지를 지닌 단원입니다.”

“…….”

마이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유더는 혹 제가 너무 딱 잘라 냉정하게 말했나 싶었으나, 잠시 후 들려온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그렇네요. 나도 겉만 보고 나를 연약하다 말하는 말들을 참으로 싫어했는데 다른 이를 똑같이 평가하고 있었군요.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주어 고맙게 생각해요.”

“…아닙니다.”

“각성자든, 아니든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거죠. 맞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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