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화
“그건 그렇고, 벌써 다 먹었군. 한 조각 더 먹겠나?”
“괜찮…….”
유더는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뒤편에서 부드럽게 허공에 떠서 이끌려 날아오는 접시를 보았다.
이미 앞에 놓인 것을 어쩌겠는가. 유더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 혼자 먹고 있으려니 조금 그렇습니다. 단장님도 같이 드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키시아르의 눈빛이 이상하게도 기쁨으로 반짝였다. 유더가 바랐던 반응과는 정반대였다.
“권유인가? 나야 아주 좋고말고.”
“…….”
키시아르는 정말로 흔쾌히 새로운 포크를 가져왔다. 그 모습을 보며 유더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 쪽에서 뭔가 권유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가?’
그들의 관계에서 소소한 뭔가를 권하는 건 거의 키시아르 쪽에서 먼저 하는 일이었다. 산책도, 요리도,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유더가 먼저 음식을 권한 일이라고 해 봤자 이전에 갑작스레 오두막에서 맞이했던 발정기 이후 키시아르가 잡아 온 생선과 열매를 간단히 조리했을 때 정도뿐이었다.
‘그건… 권유라고 하기도 뭐하긴 하지.’
유더는 키시아르에게 느끼는 강렬한 감정들과 별개로 뭔가를 편히 권해도 좋은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신분과 직급이 다르다지만 이 정도로 가깝다 못해 몸과 마음을 깊이 얽은 사이에서 그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도 알았다. 친구라 부를 만한 마병단 동료들과는 나름대로 작은 뭔가를 주고받은 적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물론 그때도 유더가 먼저 준 적은 없었으나 적어도 뭔가를 받았을 때는 하다못해 훈련 메뉴를 새로 짜 주는 일로라도 돌려주는 걸 당연히 여겼고, 그것에 대한 부담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하게 행동했던 일들이었기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키시아르는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조금 아픈 듯 조여 왔다.
‘이전 생에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럴 이유는 없었는데…….’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뭔가를 권한다는 생각을 하면 제일 먼저 거절의 기억과 감정이 떠오른다. 아마 그게 여태까지 일방적으로 상대의 권유만 받은 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터다.
그렇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키시아르는 본인이 준 케이크를 같이 나누어 먹자는 말만 듣고도 저렇게 기뻐하는 이였다.
“왜 그렇게 보지? 그리 보지 않아도 준비된 건 아직 많아. 너무 많이 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천연덕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뜬 사내의 말 때문에 유더의 상념은 순식간에 깨져 나갔다.
“배고파서 쳐다본 게 아닙니다……. 그보다 애초에 갑자기 이건 왜 자꾸 주시는 겁니까?”
“헬렘이 잔소리를 하러 왔었거든.”
키시아르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네가 수도에 있었을 때보다 마른 것 같은데 주군은 뭘 하는 거냐고 말이지. 맞는 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간 여러 일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런 시간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어. 큰 반성을 했지.”
“그게 무슨…….”
유더가 황당해하자 키시아르가 한숨을 폭 내쉬며 한쪽 뺨을 감쌌다.
“참고로 헬렘만 그런 게 아니네. 우리의 성질 대단한 약사도 대마법사의 브로치를 찾으러 왔을 때 대놓고 혼을 내더군. 칸나 완드도, 에버 벡도, 심지어 그 얌전한 가케인 볼룬발트와 겁 많은 마법사 알릭까지도 각각의 보고 때 비슷한 말들을 했었다면 믿겠나?”
“아니… 저는 알아서 식사할 수 있는 성인입니다. 제대로 먹을 만큼 먹었고 크게 몸의 변화가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내 보좌가 스스로에게 그리 박정히 말하는 사람임을 알기에 다들 그러는 거지.”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잘라 말한 한마디에 유더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염려와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
“그리고 나도.”
유더는 낯설게 포크를 쥔 제 손을 내려다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저 사내에게는 이길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그저 낯부끄럽고 이상하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마음에 차실 만큼 가져오십시오. 다 먹을 테니까요.”
비장한 대답을 들은 키시아르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유더는 그가 왜 그리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간만에 보는 그의 큰 웃음만은 어쨌든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이후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거침없이 다섯 종류의 조각 케이크와 각종 과자를 한꺼번에 끌어당겨 가져다주면서 그가 갈렉상트르를 확실하게 간자라 여기게 된 가장 큰 심증이 어디서 왔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예상했겠지만, 그건 이전 게임 이야기 덕이 컸네. 그때 일어난 일들이 현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좋지 않은 선택과 그 답안이라 여긴 뒤 과정을 되짚어 보면 지금의 상황에서 놓칠 수 있었던 새로운 정보가 보이기 시작하거든.”
“그렇다면 갈렉상트르 발포스가 붉은 돌을 빼앗아 넘기려 한 곳은 어디일까요.”
“일단 4대 공작가는 아니지.”
키시아르가 여상히 답했다.
“그들도 붉은 돌을 궁금해하긴 했겠지만 꼭 얻어야 할 만큼 간절하지도, 큰 매력을 느끼지도 않았을 테니까. 당시 그자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황제 폐하가 그걸 회수하여 수도까지 가져오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손 안 대고도 이득을 보기 좋았지.”
키시아르와 마병단을 물 먹일 수 있다면 언제든 힘을 보탤 놈들이긴 했겠지만, 붉은 돌에 한해서라면 4대 공작가 측에서 굳이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유더도 그에 동의했다.
“그랬겠지요. 그렇다면 역시 타국이겠군요.”
“정확히는 남국 쪽일 거라고 보네.”
두 번의 삶을 거치면서도 여태 미지에 싸여 있던 적의 정체를 완전히 확언하는 발언이었다.
“선즈가 보았던 현상 중 많은 수가 남국에서 자연지물을 이용해 전하는 전통적인 신호 체계와 상당히 겹치더군.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알지만 그래서 오히려 제국인인 갈렉상트르에게 소통용으로 가르칠 만하다 여겼을지 모르지.”
“그런 건 대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것도 조사하신 겁니까?”
“이번 일 때문은 아니고 본래 알고 있었어.”
“어떻게 말입니까?”
“어린 시절 나단과 비밀스러운 장난을 치려면 궁중의 똑똑한 자들도 쉽게 알아채지 못할 우리만의 암호들이 필요했거든.”
키시아르가 입술 끝을 올렸다.
“당시엔 그런 걸 멋지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었지. 다른 이들이 무시하는 타국의 전통 놀이에서 쓰이는 수신호나 제국에서는 잘 모르는 암묵적인 신호 같은 걸 이용해 몰래 궁을 빠져나가 노는 일 말이야.”
덕분에 선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금세 후보를 특정해 볼 수 있었으니 그런 일들도 다 어딘가엔 쓸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며 키시아르가 웃었다.
그 웃음 속에 어린 시절 장난꾸러기로 유명했다던 황자의 면모 일부가 보이는 듯도 했다.
유더는 어느새 비어 있는 다섯 개의 접시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결국 또다시 남국이군.’
이전 생의 갈렉상트르 발포스도 남국의 간자였을까? 그래서 그들의 힘을 빌린 수법으로 경쟁자인 메그나를 밀어내고 남부의 장군 자리를 거머쥐었던 것일까?
‘확신할 순 없지만… 생각해 보면 그 결합은 발포스와 남국 모두에게 그리 나쁜 결론이 아니야. 발포스는 정상적으로는 결코 얻지 못했을 장군 자리를, 그리고 남국 입장에서는 남부에서의 보다 자유로운 활동권을 얻게 될 테니.’
남국은 오랜 시간 동안 제국 남부를 자주 건드려 왔다. 때문에 남부는 암암리에 가장 많은 남국인들이 머무는 지역이기도 했고, 남국인 혼혈도 가장 많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하다못해 얼마 전에 잡아들인 아톤과 남국인 상인 놈들의 본래 본거지도 이 남부가 아니던가.
이전 생의 발포스 장군이 마병단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남부에 대재앙이 일어났을 때도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지만 생각해 보면 딱 하나 정도는 열심히 했었다.
그건 바로 카치안 황제가 남국과의 교류를 결심하던 시기에 남국 측의 의견을 대신 취합하고 전하는 일이었다.
황제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직위를 가졌으면서도 남부의 상황을 잘 알고 있고, 가장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인사가 바로 남부의 장군인 그였기에 모두가 당연한 인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 일을 제법 열심히 잘 해내기도 했다.
남국이 사막 이북의 다양한 나라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시작점이 오르 제국과의 교류였음을 생각하면 그건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놈들은 각성자의 능력이 쓸 만하다는 사실도 우리만큼이나 빠르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병단 같은 직접적 단체만 없을 뿐, 아톤과 그놈의 부하들 같은 뛰어난 각성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지.’
붉은 돌을 얻고 싶어 암암리에 입을 대던 타국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여태 남국이 보여 준 다년간의 치밀함과 준비성은 그런 나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전 생에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그자들의 집념이 비로소 피부로 선명히 다가오는 듯한 싸늘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유더는 마지막 빈 접시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톤에게 물어볼 것이 하나 더 늘었겠군요.”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손님이 방문했다.
아쉴라브 2공자의 정식 장례식이 드디어 열린다는 소식을 들고 찾아온 마이라 1공녀였다. 그녀는 장례식에 걸맞은 검은 옷에 짧은 베일을 쓴 채 키시아르의 책상 위에 직접 서신을 올려두었다.
그것은 검은 봉투에 흰 이파리를 장식한 귀족의 전통적 장례식 관련 서신으로, 중요한 손님을 직접 망자의 마지막 길에 초대하려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가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펠레타 공작 전하. 그간 별고 없으셨을까요.”
“물론이네. 공녀는 많이 피로해 보이는군. 괜찮나?”
“물론이라고 답변드리고 싶습니다만,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군요.”
마이라 1공녀의 입술이 베일 사이로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아버지께서 드디어 오신 건 그렇다 치고, 불청객이 따라와 무척 시끄러워졌거든요.”
“불청객이라.”
“디아카 가문의 막내 공자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