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화
“내가 추측한 바, 메그나 컬리에바와 갈렉상트르 발포스 사이에는 과거에 분명 지금보다 깊은 사적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네.”
습관적으로 다음 조각을 자르려 했던 유더의 손이 일순 우뚝 멈추었다.
“…선즈가 말했던 그 소문이라는 게 사실이라 보신단 뜻입니까?”
“그래.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관계가 아니겠지. 그리고 발포스 그자는…….”
키시아르가 유더의 멈춘 손 위에 제 손을 얹어 겹치면서 낮게 웃었다.
“분명 간자야. 아주 확실히.”
“그가 간자라고요? 대체 어떤 부분에서 그걸…….”
“쉿. 잠깐만.”
키시아르가 눈을 찡긋하며 말을 멈추었다. 긴 손가락이 유더의 손을 잡은 채 유려하게 움직였다. 멈췄던 포크를 들어 정확히 한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케이크를 잘라 조각낸 키시아르는 그것을 꾹 찍어 입가로 들어주기까지 한 뒤에야 비로소 손을 떼었다.
“자. 조급해하지 않아도 계속 설명해 줄 테니 걱정 말게.”
“…….”
유더가 약간 떨떠름하게 케이크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하자 다음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전의 회수 작전 때 붉은 돌을 훔쳐 가려 침입했다 죽었던 용병들. 당연히 기억하고 있겠지?”
“네. 의뢰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준비가 아주 철두철미했던 놈 같았죠.”
당시 그놈들을 움직인 의뢰인 놈은 임무의 자세한 부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나 겁은 적당히 상실한 각성자 용병들을 국외에서 섭외했고, 산맥을 내내 지켜 왔던 남부군의 포위망을 손쉽게 뚫고 붉은 돌이 있는 곳까지 보내게 할 만큼 내부 정보에 능했다. 게다가 들킬 때를 대비해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용병들에게 서약과 이중 금제까지 거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래. 남부군 말단 병사들의 기강이 당시 상당히 흐트러진 상태였다고는 하나, 며칠이나 산속에서 대기하는데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 그래서 당시 나와 폐하는 그들에게 명을 내린 자가 분명 군 내부에 있으리라 생각했네. 그것도 분명 높은 사람일 거라고.”
“그건… 혹 지노 장군님까지 의심 범주에 넣으셨었다는 뜻입니까?”
유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키시아르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노 장군이라고 예외가 될 수 있겠나? 당시 지노 장군은 결국 남부군의 포위망이 며칠이나 뚫려 있었음에도 알아채지 못했고, 용병들의 흔적과 배후의 증거도 완벽하게 파악해 내지 못했어. 믿고 일을 맡긴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짜 실수였을 뿐인지, 아니면 실수를 가장한 배신인지 확신하기 어려웠지.”
그 한마디에서 유더는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가 여태 걸어왔을 수많은 어려움의 일부를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의심받아 마땅할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지노 보델리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단순한 남부군 장군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제국을 넘어 전 대륙에서 가장 존경받는 소드 마스터였다.
얻는 것 하나 없이도 그저 충심을 다해 주군인 황제를 모시고 아래 기사들에게 모범이 되며 부와 명예를 탐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그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쩌면 황제의 얼마 안 되는 아군 중 하나를 잃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만약 전 세계가 존경하는 소드 마스터의 모범이자 살아있는 전설 같은 장군이 억울함을 토로하며 황가에 등을 돌린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황가에 적대적인 4대 공작가를 비롯한 귀족파 세력들은 그 기회를 아주 달가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유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칼날 같은 눈빛과 달리 그 아래쪽의 입은 기계 장치처럼 계속해서 케이크를 넣고 씹기를 반복하는 중이었기에 평소와 같은 싸늘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그 모습이 귀여워 참을 수 없다는 듯 슬그머니 웃었다.
“뭐, 지노가 아직 멀쩡한 걸 보면 알겠지만 우리 쪽에서도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지노 보델리 본인은 결백하다고 결론을 내렸네. 하지만 그의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배신했을 가능성은 무척 컸지.”
키시아르와 케일루사 황제는 당시 그 누군가가 분명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붉은 돌 회수 작전을 접해 들을 수 있을 만큼 지노 장군과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지노 장군 본인에게까지 알리고 남부군 내부를 비밀스레 샅샅이 뒤졌음에도 배신자의 존재는 찾아낼 수 없었다.
“지노는 그 사실을 몹시 면목 없게 여겼어. 아마 은퇴를 생각했다는 건 그 때문이었을 거야.”
“배신자가 장군의 측근이라면 그분이 물러나는 게 그자들을 뒤흔들기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겠지요.”
“그래. 어쨌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둘이었네. 하나는 용병들에게 정보를 넘긴 배신자가 지노의 눈마저 속일 만큼 뛰어난 자일 수 있다는 것. 둘은 그런 자를 내부에 둔 채로는 앞으로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키시아르가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우리는 남부군의 근본적인 권력 구조를 뒤엎을 체질 개선을 시작했네. 그게 뭔지는 내 보좌도 잘 알고 있겠지?”
유더의 머릿속에 일순 선즈와 에몬의 얼굴이 번개 같은 충격과 함께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군요. 그래서 각협 부대가 생겨났던 거군요.”
배신자가 기존 세력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면 완전히 새롭고 강력한, 그러면서도 의심할 구석 없는 자들을 위로 올려 기존 세력을 대체하는 편이 좋다.
이제까지 존재감이라곤 전혀 없던 말단 병사 출신들이자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각성자 병사들은 그 역할로 쓰기에 너무나 적절한 인선이었다.
“그래. 네가 그때 그곳에서 선즈와 에몬 같은 자들을 비롯한 각성자 병사들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던 게 대단한 한 수였어.”
그게 아니었더라면 키시아르는 남부군 내부를 뒤엎기 위해 각성자 병사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지노 장군의 은퇴를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 보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각성자 병사들의 존재를 알렸던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효과였다.
“아무튼, 지노와 우리의 눈까지 피해 가며 남부군 내에서 활보했을 자가 누구인지 그간 참으로 궁금했었는데… 위쪽에 있는 자들의 입장에선 알 수 없는 군 내의 인간관계 뒷면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되고 나니 드디어 범인의 윤곽이 느껴지지 않겠나?”
“확실히… 갈렉상트르 발포스의 위치라면 지노 장군의 제자이며 동시에 특무관이니 정보를 캐내거나 자유롭게 움직이기 쉬웠겠군요. 굳이 할 필요 없는 정찰 임무에 계속 참여했다는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래. 아마 그자가 적의 침입 발견을 유독 잘하는 사람이라던 것도 우연이 아닐 거라 생각하네. 공 아닌 공을 세워 지노에게 능력만은 괜찮다고 인정을 받아 그 장소를 떠나지 않고 계속 있을 수 있도록 수를 썼던 것이겠지.”
“음……. 사생활은 엉망이라도 업무는 제대로 하여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도 오히려 지노 장군과 주변의 눈을 가렸을 수 있겠군요.”
“그래. 지노는 훌륭한 장군이자 검사이지만 제 기준에 차지 않는 이들에겐 관심조차 잘 주지 않으려 하는 냉정한 면이 있거든.”
“적의 침입도 그자가 꾸민 짓이라 보십니까?”
“아까 선즈와 마지막에 가벼운 대화를 더 나누는 척하며 슬쩍 그가 본 것들을 더 들어 본 결과로는 그래.”
키시아르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선즈는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그가 본 갈렉상트르의 행동과 몇몇 흔적, 그리고 이전에 내가 조사하면서 알게 된 당시 군부대 주둔 지역 주변에서 일어난 의심 현상 중 몇 가지가 대단히 일치하더군.”
그저 이야기를 부드럽게 끝낼 요량으로 마지막에 별것 아닌 이야기를 좀 더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나는 발포스의 근무 기록 및 당시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네. 그자의 근무 기록이 우리가 그곳에 방문한 날 전후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면 아마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군.”
“거기에 마병단의 조사까지 더한다면 움직일 수 없는 증거 확보가 가능할 겁니다.”
“그래. 물론 그것도 필요할 테고.”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벌써 다 먹었군. 한 조각 더 먹겠나?”
“괜찮…….”
유더는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뒤편에서 부드럽게 허공에 떠서 이끌려 날아오는 접시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