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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화
“직접 그 뜻을 드러낸 적이 많았나 보군.”
“예. 산맥에 있는 동안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었을 겁니다. 그분은 취할 때마다 컬리에바 부관님이 귀여움받는 제자란 이유로 지루한 자리를 피해 남부에서 편히 살고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장군님의 부관 자리도 본래는 그분의 것이었다고 자주 아쉬워하셨습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결했다. 갈렉상트르 발포스가 메그나 컬리에바 부관에게 일적으로든, 같은 제자 입장에서든 깊은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컬리에바 부관도 당연히 발포스 특무관을 그리 좋아하지 않겠군?”
“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따로 뵈었을 때 그런 기색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컬리에바 부관님은 발포스 특무관님에 대한 발언 자체를 삼가시는 느낌이었습니다만…….”
“그렇군.”
대답한 뒤 입술 아래를 가볍게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던 키시아르가 무언가 떠오른 듯 새로운 질문을 했다.
“혹 그 두 사람이 예전부터 쭉 그런 사이였다던가? 같은 지노의 제자 출신이라면 처음부터 그리 사이가 나쁘지만은 않았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네.”
유더는 그것이 당연한 질문을 하는 듯하면서도 어떤 뜻이 내포된 말 같다고 느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뭔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선즈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잘은 모르지만, 그 말씀을 들으니 떠오르는 소문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무엇이지?”
“음,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 소문도 신빙성은 없습니다만… 발포스 특무관님이 젊은 시절 컬리에바 부관님께 홀딱 반해 뒤를 쫓아다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일설에는 진짜 그런 사이였다고도 했는데…….”
선즈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흥미 위주의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알겠네. 그러면 발포스 특무관의 업무 능력은 어떻다고 보는가?”
키시아르가 웃으며 화제를 부드럽게 돌렸다. 선즈가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 듯했다.
선즈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검술 실력은 컬리에바 부관님보다 훨씬 떨어지신단 소문입니다만, 업무적으로는 불만이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일은 잘한단 뜻이군?”
“그분과 함께 정찰을 여러 번 나갔었습니다만, 몬스터나 외부의 침입 기색을 아주 잘 막으시더군요. 사실 성정이 조금 제멋대로이신 것만 빼면…….”
말끝을 흐린 선즈가 머쓱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당시 저 같은 말단 병사들의 사소한 실수나 개인 사정 정도는 잘 눈감아 주시는 분이라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즉, 발포스는 당시 1년 넘게 길어지는 주둔 상황에 늘어질 대로 늘어진 병사들의 해이한 군기를 보아 넘겨 주는 대신 본인도 굳이 제멋대로 구는 성격을 숨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일이라도 제대로 하긴 했다니 다행인가.’
선즈의 이야기를 들은 키시아르는 그의 부끄러운 과거를 탓하지 않고 웃었으나, 이내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그랬군. 그런데 말이네… 남부군 특무관이 자네들과 함께 굳이 정찰을 자주 나가야 할 정도로 당시 인력이 모자랐었나? 내가 알기로 그건 특무관이 해야 할 주업은 아니었을 텐데.”
제국군에는 특무대라는 전통 있고 유명한 특수 부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부대의 대장급 장교가 바로 특무관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특무대란 검술에 유독 뛰어난 군사들을 모아 만든 곳으로, 과거에는 오러의 파편을 낼 수 있는 수준의 기사들과 맞상대가 가능할 만한 이들이 포진해 있었다고 들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당백이 가능한 자들만 모은 제국군의 비장의 무기와도 같은 부대라는 뜻이었다.
‘뭐, 그것도 다 옛이야기긴 하지만.’
현재의 특무대는 예전의 명성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뛰어난 기사의 수가 줄어든 만큼 제국군 특무대의 실력자 수 또한 줄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십수 년쯤 지나면 선즈의 각협 부대가 특무대를 압도할 만한 위치로 올라설 터다.
‘그렇다 해도 특무관 정도의 지위를 가진 자가 말단 병사들과 그리 자주 돌아다녀야 할 만큼 할 일이 없진 않았을 텐데.’
키시아르의 지적에 선즈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일은 특무관님이 본래 하셔야 할 일이 아니시지요. 처음엔 정찰을 거의 나가지 않으셨는데, 언젠가부터 심심하셨는지 개인 임무 도중 정찰대들 사이에 자주 합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함께 정찰을 다니는 게 아니라 잠깐씩 합류하며 지냈다는 거군.”
“아, 네. 그쪽이 더 맞겠습니다.”
한마디로 발포스 그놈은 툭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심심하면 괜스레 정찰하는 병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지노는 그런 자유로운 태도를 허락했나?”
“그래도 그분께서 정찰을 하며 실적을 많이 올려 주셨기에 장군님께서 무어라 하진 않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붉은 돌이 떨어진 뒤로 그 주변에는 타국과 알 수 없는 세력들의 손길이 잊을 만하면 뻗쳤다. 황제가 혹시 모를 붉은 돌 유실 가능성을 막고, 평범한 제국민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남부군을 그곳에 보냈다지만 그게 곧 적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이 회수를 위해 갔을 때조차 어떻게 정보를 알았는지 찾아와서 공격하려 든 암살자들이 있지 않았던가.
‘그놈들의 정체는 끝까지 알아내지도 못했지.’
유더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키시아르는 질문을 이어 나갔다.
“발포스가 정찰하며 외부의 침입을 잘 막아 냈다는 건 관찰력이 좋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병사들을 운용해 막아 내는 능력이 좋았다는 뜻?”
“으음… 전자입니다. 직접 전투를 하기보다는 적들이 산맥에 침투한 기색을 아주 잘 파악하셨습니다. 저는 능력 특성상 밤눈이 밝은 편이라 동료들을 대신해 야간 근무를 자주 섰는데, 그분이 정찰을 위해 외부를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일을 할 때는 제대로 하시는 것 같더군요.”
일순, 키시아르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하기는 투시 능력을 지녔으니 멀리서 밤의 어둠 사이에 몸을 숨기고 다니는 이라 해도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겠군.”
“하하, 예.”
이후 키시아르는 선즈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몇 가지 말을 더 나누다가 대화를 끝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질문은 이 정도로만 하겠네. 충분히 좋은 답을 들은 것 같군.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스러웠을 텐데 고맙네.”
“아닙니다. 단장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나를 비롯하여 황제 폐하 또한 자네의 충성과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지.”
선즈는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자신이 뭔가 대단한 답을 했다고 생각지 못하여 당황했으나, 이내 쑥스러우면서도 감격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그가 문을 닫고 나서 기척이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그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뒤, 유더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처음에는 메그나 컬리에바와 갈렉상트르 발포스 사이의 옛 관계나 좀 캐내 볼까 했는데, 이거야 원. 어쩌면 더 큰 줄기를 잡은 걸지도 모르겠어.”
키시아르의 미소는 여전히 깊고도 미묘했다.
“일단 앉아서 듣겠나? 다리가 아플 텐데.”
“전 괜찮습니다만…….”
“내가 괜찮지 않아.”
잠시 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더는 키시아르와 마주 앉는 게 아니라 밀착하여 나란히 앉은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탁자 위에는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케이크 접시까지 완비된 상태였다.
“자. 먹으면서 듣게.”
“대체 이건 언제 가져다 두신 겁니까?”
“능력은 이럴 때 쓰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밀고 당기는 능력을 누가 소리소문없이 케이크 접시를 가져오는 일에 쓴단 말인가? 기가 막혔으나 유더는 제가 포크를 들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을 기색인 사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초콜릿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키시아르가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추측한바, 메그나 컬리에바와 갈렉상트르 발포스 사이에는 과거에 분명 지금보다 깊은 사적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네.”
습관적으로 다음 조각을 자르려 했던 유더의 손이 일순 우뚝 멈추었다.
“…선즈가 말했던 그 소문이라는 게 사실이라 보신단 뜻입니까?”
“그래.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관계가 아니겠지. 그리고 발포스 그자는…….”
키시아르가 유더의 멈춘 손 위에 제 손을 얹어 겹치면서 낮게 웃었다.
“분명 간자야. 아주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