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화
“칭찬이 짰던 스승께 이리 칭찬을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런데 말이네, 장군.”
“네.”
“소드 마스터는 나뿐만이 아니라는 소문까진 혹시 듣지 못하고 온 건가?”
“예?”
지노 장군이 눈을 깜박였다.
“분명 들었을 텐데 말이야. 이번에 이곳에서 오러를 사용한 검사는 나 하나가 아니라는 걸.”
“그야……. 그런 말도 듣기는 했습니다만, 당연히 무언가 와전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지노 장군의 판단이 이상한 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소드 마스터가 둘 나타났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열광했지만, 조금이라도 검에 대해 아는 이들이라면 당연하게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제국 내의 소드 마스터만 세어도 수십을 헤아릴 때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대륙 전체를 탈탈 털어도 열 명을 찾기 힘든 수준이다.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으로 한정하면 그 수는 더 적었다.
이전 생에는 ‘소드 마스터만이 장군으로 임명될 자격을 갖춘다’는 오르 제국의 오래된 전통조차 현 대장군 무커와 눈앞의 지노 장군 이후로 맥이 끊겨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로 채워야 했을 정도였다.
‘카치안 황제가 몹시도 굴욕적으로 여겼었지.’
덕분에 소드 마스터가 없어도 제국의 무력이 여전히 대단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마병단장 유더 아일이 나서서 국외의 내로라하는 소드 마스터들과 대련이란 이름의 싸움질을 해야 했다.
아무튼 그런 소드 마스터 부족 현상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당사자인 지노 장군이 단번에 그 소문을 믿었다면 오히려 그의 판단력을 의심해야 했으리라.
“와전이 아니네. 전부 사실이야.”
키시아르는 지노 장군에게 밝고도 명랑한 목소리로 진실을 알려 주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부관 나단 주커만이 그 주인공이지.”
유더와 마찬가지로 키시아르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나단 주커만이 지노 장군과 그 부하들의 경악 어린 시선들을 무심히 받아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그간 숨겨 왔던 정체가 드러나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싶었었는데, 의외로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정확히는 그것이 키시아르의 뜻이기만 하다면 자신의 힘이 널리 밝혀지든 말든, 남들이 그걸 믿든 안 믿든 정말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쪽에 가까워 보였지만.
지노 장군은 그런 나단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맙소사……. 자네가…… 정말로?”
“…….”
“어린 시종이었던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기사가 되었다기에 그저 부관으로 삼으려 준 명예직인 줄 알았더니, 어찌 이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특별한 행운이 있었던 게 아니네. 나단의 재능과 잠재력이 그만큼 뛰어났을 뿐이지.”
대답한 건 나단 주커만이 아닌 키시아르였다.
“기억나나, 장군? 오래전 내게 검을 가르칠 때, 나단이 항상 뒤에서 보고 있었던 모습을.”
“그야… 예. 기억합니다. 시종이 참관하도록 해 달라고 떼를 쓰시다 급기야 저와 내기까지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나단은 그때도 이미 내가 배운 것들을 복습할 때 뒤에서 본 것만으로 정확히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아이였거든.”
키시아르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크게 자랄 싹이 크게 자랐을 뿐이야. 인재를 내 곁에 썩혀 두는 게 늘 안타까웠는데, 이제라도 제대로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쁘군.”
지노 장군은 그 말에 무언가를 크게 느낀 듯했다.
생각에 잠긴 채 나단 주커만을 바라보던 장군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나라의 검술 인재의 맥은 이제 명운을 다했나 생각했습니다만… 단지 이 늙은 신하의 눈이 편협함에 가려져 있었을 뿐임을 알려 주시는군요. 각협 부대를 만들 때도 그렇고 또다시 많은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하,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런 소릴.”
“아뇨. 그 말씀이 없으셨다면 제가 저 기사에게 증명을 위한 오러 대련을 신청할 것을 짐작하시고 선수를 친 게 아니십니까?”
“음? 그러려고 했나?”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박였다. 아주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유더의 눈에도 장군의 말대로 예상하고 선수를 친 게 맞아 보였다.
‘하긴, 나단 주커만이 진짜 소드마스터라는 걸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굳이 증거를 요청하는 대련을 할 필요는 없지. 그건 추궁이지, 명예로운 방식이 아니니까.’
“나단 주커만 경. 자네 같은 인재를 이제야 알아보게 되어 정말 아쉽고도 미안하군.”
“장군께서 사과하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것이 기사의 목적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나단 주커만의 대답은 아주 간결하고 깔끔했다. 그 모습을 본 지노 장군은 그를 새롭게 다시 본 것처럼 몇 번이나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또다시 끼어들었다.
“장군. 남부까지 흘러온 소문 중에 마병단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가? 분명 있을 텐데 말이야.”
“…아, 서부에서 큰 활약을 했다던 그 단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대답하는 지노 장군의 목소리와 표정은 방금과 달리 살짝 미묘하게 떨떠름했다. 유더는 그가 그 소문 뒤에 분명 저에 대한 온갖 추문도 함께 들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 그가 없었다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비처럼 내리는 거대한 몬스터를 그리 순식간에 피해 없이 잡을 순 없었을 거야. 게다가 검에도 일가견이 있는 실력자지. 때마침 이 자리에 있으니 인사를 나누어 보는 건 어떻겠나? 장군과도 구면일 텐데.”
“아……. 그렇습니까?”
자신과 구면이라는 말에 눈을 깜박인 지노 장군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있는 단장 집무실 내에는 언제나처럼 제법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근처에 서 있는 자신을 그가 바로 발견하리라 여겼으나 지노 장군은 유더와 한번 눈만 마주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음…….”
유더를 지나 얼굴을 모르는 단원들을 훑어 넘긴 지노 장군의 시선이 예전에 붉은 돌 회수 임무 때 만났던 단원들의 얼굴에서 한 번씩 머물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군이 생각하기에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이의 얼굴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그 사람은 바로 화사한 붉은 머리칼과 싱그러운 초록색 눈, 선량한 미모와 탄탄한 몸매를 뽐내는 마병단의 장미 가케인 볼룬발트였다.
“저 친구입니까? 전에 잠깐 보았을 때도 보기 드물게 훤칠하다 생각했었는데… 저쯤 되는 외모라면 여러 의미로… 크흠. 널리 소문이 난 연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도 같군요.”
“……아…….”
“……크읍!”
장군과 시선을 마주한 가케인이 당혹함과 동시에 주변의 단원들이 황급히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모습들이 아주 가상했다.
“그쪽이 아니네, 장군. 내 보좌는 여기 있는데 어딜 보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예?”
키시아르의 부름에 가케인을 날카롭게 훑던 지노 장군이 당황했다. 유더는 뒤늦게야 제 쪽을 돌아보는 장군을 향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아니, 그… 청년이 말입니까? 엄청나게 큰 몬스터를 혼자서 잡은 데다 수도 전역에 소문이 날 만큼 아주 뛰…어난 외모를 갖추어 단장님의 눈에 들었다기에 저는 당연히…….”
장군의 시선이 가케인과 유더 사이를 어지럽게 반복하여 맴돌았다. 아무래도 그는 유더가 소문 속의 주인공이리라고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던 듯했다.
“맞는 소문을 듣고 와서 왜 착각했는지 모르겠군. 내 보좌야말로 몬스터를 잡기에 충분한 체격과 능력, 거기에 넘치고도 남는 미모까지 갖추지 않았나?”
“아 물론… 저 청년도 충분히 키도 커 보이고… 멀끔하니 잘…생긴 것 같습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가케인과 본인의 얼굴을 앞에 둔 상태에서 유더 아일을 지칭해 ‘넘치고도 남는 미모’라 부르는 건 아주 많은 문제가 있다. 유더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난감해하는 지노 장군을 구하기 위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을 난감하게 할 만한 장난은 이제 그만 하십시오, 단장님.”
“장난? 나는 보좌를 두고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닌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장군님을 이 이상 난처하게 하신다면 수습을 위해 제가 여기서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안 되지.”
키시아르가 화사하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지노 장군이 후우 하고 작게 숨을 내쉰 뒤 유더에게 고마움이 살짝 드러나는 눈인사를 했다.
이후의 대화는 사적인 이야기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지노 장군은 마병단 남부 지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샬로인 남부군 주둔부에서 머물기로 했고, 마병단과의 협력에 많은 협조를 약속했다. 그는 이전에 일어난 이상 균열과 몬스터가 또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몹시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지부를 나서기 전, 장군은 나단 주커만과 유더 아일을 번갈아 한 번씩 남다른 눈빛으로 바라본 뒤 의미심장한 인사를 남겼다.
“실은 저도 이제 그만 쉬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습니다만, 이런 인재들을 보고 나니 여러 의미로 깨닫게 되는군요. 다음에는 아쉽게도 오늘 함께 오지 못한 부관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장군과 함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빠져나간 뒤, 유더는 키시아르와 둘만 남은 틈을 타 슬쩍 입을 열었다.
“지노 장군께서 은퇴를 생각하고 계셨던 줄은 몰랐군요. 이전 게임에서도 그런 이유로 사라지셨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다음에 함께 오겠다던 부관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중요한 사람입니까?”
굳이 다음에 데려오겠다고 말한 걸 보면 뭔가 있는 듯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지노의 애제자 겸 후계자라 알고 있네. 실력이 썩 괜찮다고 들었던 것 같군. 황궁기사단장과 함께 추후 소드 마스터가 될지 모를 인재로 점쳐지기도 했었지. 최근 검술 실력이 잘 늘지 않아 지노가 제법 염려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견문을 넓히고자 데려오고 싶어 하는 게 아니겠나?”
‘음… 지노 장군의 애제자 겸 후계자라. 혹시… 그놈인가?’
유더는 이전 생에 지노 장군의 뒤를 이어 남부의 장군이 되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최초로 소드마스터가 아닌 상태로 장군이 되어 구설수에 올랐던 사람으로, 수도에 잘 오지 않아 안면은 거의 없었지만 인식은 별로 안 좋았다.
새로운 남부의 장군이 마병단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무슨 일이 날 때마다 협조를 해 주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런 놈이 그놈만 있던 건 아니긴 했다만, 남부 대지진 때와 그 이후를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이 난다.’
“그 사람의 이름도 알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