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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99화 (799/805)

799화

“사실 제겐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라 의미가 체감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단장님께서는 혹 그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소 질문을 받으면 거의 곧바로 잘도 대꾸하던 키시아르가 드물게도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말을 덧붙였다.

“답하기 어려우시다면 굳이 꼭 억지로 답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니. 어렵지 않아. 오히려 간단한 편이지.”

키시아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뜻을 좀 더 깊이 해석하기 위해 책을 보았던 때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영원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어떤 것처럼 느껴지지만, 고어를 사용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 그들은 시작과 끝을 끈의 양 끝으로 보았다고 하거든. 바로 이렇게.”

키시아르가 유더의 눈앞에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은 아까 벗어 던진 겉옷에 달려 있던 매듭용 끈 중 하나였다.

“하나의 끈으로 존재할 때, 시작과 끝은 반대편을 보고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 그렇지만 이 두 개가 서로 맞닿으면……. 보게.”

키시아르가 끈의 양 끝을 모아 맞닿게 만들자, 그것은 더 이상 일직선이 아니라 둥근 모양을 그리는 원이 되었다.

“시작과 끝이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둘을 구분할 수 없게 돼. 영원히 함께 돌며 순환하게 되는 거야.”

유더는 서로 맞닿은 끈이 그리는 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래서 시작과 끝이라 쓰고 영원이란 뜻이 된 거군요.”

“그래. 끝이 나면 모든 게 사라진다고만 여겼던 기존의 생각을 깨부수는 발상의 전환이지. 무한하며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도 변치 않는 존재로.”

키시아르는 끈을 묶어 완전한 원으로 만들었다.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끝인지 이제 더 이상 구별할 필요가 없어지는 원. 한쪽의 끝은 다른 한쪽의 시작이 되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걸 알게 된 이후 내게 있어 영원이란 단어의 의미가 상당히 바뀌었네. 이제껏 가졌던 막연한 목표와 이상이 아니라 위안이자 염원으로.”

막연한 목표와 이상이 아니라 위안이자 염원.

곧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감정적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키시아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유더를 깊이 끌어안으며 머리를 기대었다.

“이건 순전히 지금의 내 생각일 뿐이라 실제 그 이름을 지은 쪽은 어땠을지 알 수 없지. 그래도, 아마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면… 네겐 거기까진 필요치 않은 이야기일까?”

그 짧은 말을 통해 키시아르는 많은 것을 유더에게 전달했다.

유더의 확언 없이도 그는 그간의 정보를 통해 이미 유드레인이란 이름을 지은 게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유더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리고, 유더가 이전 생의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느끼는 모든 차갑고 시린 감정과 의문들 또한 그가 충분히 인지하고 염려 중이란 것까지도.

유더는 제 몸을 안은 채 힘차게 박동 중인 사내의 심장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 오랜 생각 끝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뇨. 듣고 싶다고 요청했던 건 저였으니까요. 모두 다 충분한 답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인사를 들은 사내의 팔에 아까보다 조금 더 깊이 힘이 들어갔다. 유더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앞에서 동그란 원 모양으로 묶인 채 흔들리는 끈에 시선을 주었다.

끝이지만 끝이 아닌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

영원.

계속 보다 보니 그것이 죽고 나서 끝나지 않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저의 생과도 조금쯤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치면… 어쩌면 정말 이름에 어울리게 살게 된 건가.’

우스운 농담이다. 하지만 그 덕에 지금 온기를 나누고 있는 사내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그도 나쁘지 않을지 몰랐다.

아니, 분명 나쁘지 않았다.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수도에서 온 지원자들은 훌륭하게 남부에 적응하며 자신들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헤른 가 2공자의 죽음과 갑작스러운 몬스터 등장으로 인해 혼란에 사로잡혀 있던 남부도 순식간에 빠르게 안정되었고,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생활을 되찾았다.

유더에게도 더는 이전과 같은 악몽이 찾아오지 않았기에 겉보기에는 옛날과 똑같이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키시아르의 한 발짝 뒤에 서서 남부 지부를 찾아온 특별한 방문객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공작 전하. 아니, 마병단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노 장군. 건강해 보여 기쁘군.”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지노 장군은 예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와 거의 달라짐이 없었다. 노화가 더딘 소드 마스터라지만 그래도 대단한 동안이었다.

몸에 쌓은 오러가 많고 수련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노화가 더욱 더뎌지며 검을 쓰기 가장 좋은 신체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는 소드 마스터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건 그 나이에도 장군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 어느 정도 실력인지 이전 생에는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단 말이지.’

유더가 무표정한 얼굴로 지노 장군을 살피는 동안, 키시아르는 장군과 악수를 나누고 편안히 대화를 나누었다.

“장군이 모처럼 정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좋군. 옛 생각이 나는걸.”

“하기는, 이 옷을 입을 일이 잘 없기는 했지요. 하지만 이번은 온 김에 장례식에도 참석해야 할 테니 어쩌겠습니까.”

“헤른 2공자의 죽음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

헤른 2공자의 시신은 살해한 범인이 잡힌 뒤로 검사를 마무리하고 현재 1공녀가 수습해 간 상태였다. 장례식 또한 준비 중이었으나 정작 아버지인 헤른 공작이 아직 오지 못해 시일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라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참 기쁜 소식을 듣지 않았겠습니까? 마병단장님께서 이 나라의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되셨다는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하하. 오자마자 그것부터 묻다니, 정말 궁금했나 보군?”

키시아르가 능글맞게 웃음을 흘리자 지노 장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 이후로 이 제국에 검의 극의를 깨달은 이가 나오지 않아 얼마나 상심했었는지는 단장님께서도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그렇게 말한 뒤 지노 장군은 몹시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정말 그것이 사실입니까?”

아무리 소문이 사실과 다름없이 돌고 있다 해도, 본인의 입으로 직접 확언을 듣는 건 다르다. 그는 키시아르의 입으로 사실을 확신받고 싶어 했다.

키시아르는 뜻을 알기 어려운 얼굴로 웃고 있다가는, 장군이 애가 탈 때쯤 되어 비로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장군이 들은 대로일 거야. 그렇게 되었네.”

“이럴 수가. 오! 신이시여.”

지노 장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곧바로 키시아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젠가 제가 새로운 소드 마스터를 맞이할 날이 온다면 그것이 단장님이 되시길 언제나 꿈꾸어 왔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졌으니 이 늙은 검사는 이제 더는 여한이 없습니다.”

감격에 젖은 장군의 뒤쪽에서 그의 부하들이 어쩔 줄 모르고 함께 털썩 무릎을 꿇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지 말게, 장군. 나는 이제 황자가 아니라 펠레타 공작이자 마병단장이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부하들이 뒤에서 난감해하지 않나.”

“아, 죄송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만 예전처럼…….”

지노 장군은 그제야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키시아르를 바라보며 젖은 눈으로 미소 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래전, 어린 황자님들께 검을 알려 드렸던 기억은 제 인생에서 가장 보물 같은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토록 재능이 넘치던 분께서 더 이상 검을 잡지 않기로 하셨던 때에는 너무나 안타까웠었는데… 실은 계속 잡고 계셨던 거군요.”

“하하. 장군에게조차 숨겼다고 섭섭한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어려우실 시절에도 검을 포기하지 않으신 데에 같은 검사로서 존경을 표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정말이지… 제국의 복이 아닐 수 없군요.”

그는 키시아르가 자신에게조차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숨기고 있었단 일 정도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키시아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칭찬이 짰던 스승께 이리 칭찬을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런데 말이네, 장군.”

“네.”

“소드 마스터는 나뿐만이 아니라는 소문까진 혹시 듣지 못하고 온 건가?”

“예?”

지노 장군이 눈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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