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8화
관계가 소강된 뒤에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열기 덕에 유더는 비로소 제 안에 있던 말들을 매끄럽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아까… 호산라가 저를 보고 싶어 한다기에 만났습니다. 나한의 구명을 요청하더군요. 저는 이 기회에 그에게서 그들의 과거를 듣는 게 좋겠다 여겼고, 마침내 현자가 나한에게 어떤 세뇌를 걸었는지 알아냈습니다.”
“어떤 세뇌였을까.”
“-나그란의 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 입니다.”
키시아르는 놀라지 않았다.
“집단에 충성을 다하는 것과 사람에 충성을 다하는 건 비슷해 보여도 결국 다른 이야기지. 당시의 현자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던 모양이군. 혹은 알면서도 그것이 최선이라 여길 만큼 급했거나.”
“네. 당시 현자가 나한에게 집단의 이름을 짓도록 한 뒤 그 말을 하며 부탁했다고 하는데, 칸나는 이름을 지은 행위가 세뇌의 근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유더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입술을 잠시 닫았다.
“실은,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만으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자의 말도 믿게 될 정도의 감정이 자라날 수 있다는 게 제게는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더군요. 해당 사항에 대해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어서겠지요.”
“그럴 수 있지. 이름을 지어 본 적이 없었나?”
“네.”
칸나는 이름 속에 그것을 지어 준 이의 마음과 바람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단순한 책임감, 그 이상의 감정을 이름이란 것 하나만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유더에게 악몽을 선사할 만큼 그를 뒤흔들었던 생각은 그 말로 인해 자라났다.
유더는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키시아르의 숨결을 느끼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제가 받았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본명인 유더라는 이름도 있는데,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정작 유드레인이라는 두 번째 이름이었다.
“이름에 지은 이의 바람이 들어가는 것이라면, 거기에 들어간 바람도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상하지요. 여태 단 한 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지은 이의 뜻은커녕, 이름의 온전한 의미조차 죽는 그 순간까지 알아보려 한 적이 없었다.
답을 알 수 없는 그 무의미한 작은 생각이 유더를 고요하게, 그러나 해일처럼 뒤흔들었다. 스스로도 왜 그렇게까지 반응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 생각 때문에 급격히 피로해진 게 악몽을 꾼 원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유드레인이란 이름을 지어 준 이는 이전 생의 키시아르다. 따라서 본래라면 키시아르에게 굳이 이 사안에 대해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더는 상대가 이상행동을 보일 때 염려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이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상태였다. 아까 키시아르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지만 유더의 꿈에 연결을 시도할 만큼 간절했다면 분명 지금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큰 염려를 느꼈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그 꿈속에서 저를 건져 내 준 이를 위해 이 정도는 말해 두고 싶었다.
과연 유더를 어루만지던 키시아르의 손길이 일순 멈추고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사내가 조용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랬군.”
“네.”
“그렇다면 깨어난 지금은 어떻지? 아직 그 답이 알고 싶진 않고?”
유더는 잠시 타오르는 난로를 응시하다 대답했다.
“…그건 어차피 답을 알 수 없을 일입니다. 더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알고 싶긴 하단 거군.”
“…….”
대답 속에 숨겨 둔 미약한 뜻을 집어낸 사내가 유더의 어깨 위에 입을 맞추며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멎은 뒤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만으로 정말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는 건 현실적인 해결 방책이 아니라 희망 사항에 가까울 거야. 마음에 걸리는 일을 눌러두고 외면하는 것보다는, 때로 불명확한 답이라도 들어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
“불명확한 답이라면…….”
“이를테면 내 생각이라든가.”
막힘 없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설마 했던 말문이 그대로 막혔다.
사내는 굳어 버린 유더의 몸을 부드럽게 쓸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살면서 이름을 지어 본 경험이 그리 많진 않지만 언제나 머리를 쥐어짜곤 했었지. 이름을 짓는 일에 책임감과 여러 감정, 바람이 동반된다는 말엔 나 또한 동의하는 바야.”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드레인이란 이름을 지었던 사내는 아니라지만, 그 또한 결국은 키시아르였다.
“나단에게 이름을 줄 적에는 그 녀석의 미래가 단어 그대로 축복스럽기를 바랐지. 그것을 굳이 남국의 격언에서 따온 이유는 스스로의 뿌리를 사랑할 수 있는 이가 되길 원해서였고. 주커만이란 성도 오래전 후손이 끊겨 반납된 기사 가문의 성 중 가장 용맹한 이를 배출한 곳으로 골랐어.”
전설에 의하면 무려 혼자서 백 마리가 넘는 몬스터를 일검에 양단했다는 기사를 배출한 가문이었다며 키시아르가 묻지도 않은 설명을 줄줄이 해 주었다.
그다음은 마병단이었다.
“마병단이란 이름을 짓기까지도 꽤나 고역이었지. 우리가 지닌 능력을 단번에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이미 있는 것들에서 따와야만 했거든. 결국 때로는 마법 같은, 그리고 때로는 병장기와도 같은 힘이란 의미를 담아 지었네. 이건 알고 있었나?”
“마병단을 외부에 소개할 일이 있을 때마다 들은 것 같습니다.”
키시아르가 1대 단장이자 창단자이니 당연히 이름도 그가 지었겠지만, 그것에 대해 본인이 스스로 언급하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속마음을 말하자면, 실은 각성자가 마법사와 소드마스터와 비교하여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존재이며 그 둘 모두를 합친 것만큼 대단한 힘을 지닌 단체라는 뜻을 주고 싶었거든.”
키시아르는 애초에 마병단의 이름을 처음 지을 땐 두 번째 뜻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 뜻을 밝혔을 때 너무나 대단한 패기가 느껴지는 이름이라 주변의 반감을 쉽게 살 수 있단 이유로 황제가 우려를 표해 첫 번째 뜻으로 순화했다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뒷이야기였다.
“그건… 황제 폐하의 말씀 쪽이 옳은 것 같습니다.”
“이런. 너라면 이 패기를 이해해 줄 거라 믿었는데.”
키시아르가 장난스레 중얼거리며 유더의 손을 겹쳐 만지작거렸다. 유더는 그가 마음대로 자신을 매만지도록 내버려 두면서 대꾸했다.
“각성자가 다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힘을 지녔다는 말씀엔 동의합니다만, 두 번째 뜻을 내세웠다면 제대로 된 일을 하기도 전에 수십 년 정도는 내내 기존 세력의 견제에 시달렸을 겁니다.”
키시아르의 손이 일순간 멈추었다.
“그건… 경험담이군.”
“네.”
실제로 이전 생의 마병단은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으로 군림하는 동안 전 대륙의 소드마스터와 마법사들에게 내내 견제를 당했다. 이름의 뜻까지 애초에 저런 의미였다는 걸 알았다면 그 열 배는 되는 견제가 몰아쳐도 할 말이 없었으리라.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으니 그때처럼은 되지 않겠지만.’
그때는 앙숙처럼 사이가 나빴던 마법사 단체들이 서부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 이후로 지금의 마병단에 보이는 태도를 보면 그야말로 같은 놈들이라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키시아르가 소드 마스터라는 게 밝혀진 이상 현존하는 소드 마스터들의 반응도 이전과는 훨씬 빠른 속도로 크게 달라질 것이다.
거기까지 상기한 뒤 유더는 자신이 어느새 평소처럼 생각할 만큼의 여유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키시아르의 말은 분명 그의 말마따나 ‘불명확한 답’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제게는 상당 부분 도움이 되긴 한 듯했다.
유드레인이란 이름을 지을 때의 그 사내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영원히 죽음이 반복되는 꿈을 꾸고 있었던 때만 해도 그딴 것이 영원이라면 결코 알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이름들을 언급하는 키시아르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깊은 고민과 노력, 애정의 흔적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런 그에게 과연 ‘영원’이란 단어는 어떤 의미일까.
유더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아까까지는 결코 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전에, 유드레인이란 이름의 뜻은 영원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고 알려 주셨었지요.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야.”
키시아르의 답이 아주 조금 늦었으나 유더는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제겐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라 의미가 체감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단장님께서는 혹 그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