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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97화 (797/805)
  • 797화

    꿈에서 깨어난 지금도 그날의 키시아르를 봤다는 어렴풋한 느낌과 통로를 헤매고 다니던 때의 끔찍한 감각만 남았을 뿐, 새로 얻은 정보나 구멍이 메워진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펠레타 성의 비밀 통로를 그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역시…… 이번 꿈은 그때였겠군.”

    그때가 언제인지 키시아르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 단어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유더 또한 이전 생의 키시아르 라 오르가 자신의 후임 유드레인 아일에게 죽임당하는 그 순간을 꿈에서 보았노라 굳이 제 입으로 자세히 읊고 싶진 않았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네.”

    “몸은 좀 괜찮나? 저번처럼 어딘가 안 좋은 곳은 없고?”

    “괜찮습니다.”

    실제로 몸이 아픈 곳은 없었다. 흰 장갑이 등장하는 꿈을 꾸었던 때처럼 이상 반응이 오거나 식욕이 뚝 떨어지는 기분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할 텐데도, 유더는 제 몸에서 반쯤 흘러내린 담요만 내려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꿈속의 마지막에 제 손을 꽉 잡고 먼저 앞서 나아가던 남자의 모습을 되새기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나타나든 제가 먼저 손을 놓을 일은 없을 것이라던 마지막 목소리처럼, 키시아르는 지금도 유더의 한 손을 똑같이 겹쳐 쥐고 있었다. 그것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어라 참기 어려운 기분을 들게 했다.

    그는 악몽 속에서 유더를 구했다. 그게 무슨 꿈인지 알았을 텐데도,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이.

    “유더?”

    유더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여긴 듯 키시아르가 그를 불렀다. 유더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허락하신다면…… 그냥,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도 되겠습니까.”

    눈을 조금 크게 떴던 키시아르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얼마든지.”

    그는 유더가 갑자기 안 하던 요청을 한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어깨 위에서 흘러내린 담요를 잡아 더 단단히 둘러 준 뒤 유더가 좀 더 편안히 기댈 수 있도록 꽉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빈틈없이 서로에게 기댄 채 앉아 난로를 바라보았다. 안온한 고요함 속에서 유더는 문득 저를 감싸는 익숙한 향을 느꼈다. 평소 가까이 닿으면 느낄 수 있었던 정도의 미약한 체향과는 조금 달랐다. 이건 2성 발현자의 의지가 섞여 있는 향이었다.

    평소에는 주인의 몸에 정갈히 잘 갈무리되어 있던 향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유더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유더는 그에 반응하여 꿈틀거리기 시작한 제 향을 막지 않고 똑같이 흘려보냈다.

    스르르 흘러 나간 향이 키시아르의 향과 천천히 뒤섞이기 시작하자 마치 몸에 오감 외의 다른 감각이 생겨난 것처럼 그 모든 움직임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향들이 어떤 의도를 띠고 어떻게 섞이고 있는지, 서로의 육신을 어떻게 감싸며 매만지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을 느끼는 동안 몸에 조금씩 열기가 솟았다.

    비각성자가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의 털을 핥아 위로를 전하는 짐승들의 의사 표현과도 비슷했으며, 한편으로는 들리지 않는 대화와도 같았다.

    유더는 그토록 바쁘고 활기찬 하루를 보냈음에도 이전까지는 가만히 죽어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는 듯한 감각 속에서 깊이 숨을 내쉬었다.

    “하아…….”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이상한 소리지만, 분명 그랬다.

    그 숨결에 반응한 듯 키시아르가 유더의 몸을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 유더는 시선을 돌려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표정 없이 창백한 얼굴이 진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 안에 비쳤다.

    잠시 후, 유더는 먼저 고개를 들어 홀린 듯 그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느리게 맞붙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간 혀가 얌전히 있던 키시아르의 것을 건드리자, 잠시 멈칫한 키시아르가 이내 다정하게 휜 눈을 내리깔며 유더의 뒷 목을 받치듯 감쌌다. 겹친 고개의 방향이 바뀌며 입맞춤이 단번에 깊어졌다.

    혀가 얽힘과 동시에 머리칼 사이로 들어와 어루만지는 손끝의 감각에 전신이 곤두서고 저릿한 쾌감이 올랐다. 하지만 그런 열기보다는 키시아르와 조금 더 가까이 닿으며 느껴지는 감각 쪽이 더욱 좋았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숨결이 흘러나왔다. 마주친 시선은 깊었으나 이번에도 아무런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이번에는 키시아르 쪽에서 유더를 끌어안으며 입술 밑을 어루만지다 그대로 재차 두 번째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아까 서로 얽히던 향과 다를 바 없이 깊고 긴 입맞춤이 끊임없이 계속 반복되었다. 간혹 유더의 숨이 차 신음이 흘러 나가면 일시적으로 떨어졌지만 그때도 맞잡은 한 손과 몸은 서로에게서 멀어질 줄 몰랐다.

    입맞춤이 점점 깊어질 때마다 몸이 점차 기울어 마침내 두 사람의 몸이 소파 팔걸이에 거의 눕듯이 걸쳐질 때조차도 누구 하나 그에 대해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는 쪽이 더 맞았을 것이다.

    이 순간에도 얽히고 있는 향 덕분에 솟아오른 열기 속에서 유더는 그저 눈앞의 키시아르 라 오르를 원했다.

    그리고 그건 키시아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끊이지 않는 입맞춤 속에서 옷이 떨어지고, 맨몸이 닿았다. 아래쪽은 이미 위보다 더한 열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유더는 제 몸이 이미 따로 적실 필요 없을 만큼 부드러워진 상태임을 알았다.

    배어 나온 끈적한 액체로 젖어 녹아 버릴 듯 이완된 몸이 부끄럽다는 생각 따윈 이제 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껍기까지 했다.

    “……내일을 생각해야 한다 해도, 원치 않겠지?”

    문득 낮은 질문이 들려왔다. 그건 이전처럼 일부러 이성을 일깨워 상황을 식게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아니었다. 유더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이의 확인에 더 가까웠다.

    유더는 대답 대신 키시아르의 아랫입술을 다시 한번 빨아들이며 가볍게 이로 물었다.

    눈앞의 존재를 원한다는 의도를 전하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를 몸에 받아들이고 삼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끌어안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 다른 건 필요치 않았다.

    다가올 내일도, 그다음도, 무엇이든지 간에.

    그 강렬한 열망에 반응한 듯 키시아르의 눈빛이 달콤하고도 아프게 흐려졌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더보다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찾을 수 없는 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눈에 비친 유더의 얼굴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유더는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두 개의 몸이 완전히 겹쳤다. 조금의 틈도 없이 붙어 있는 나신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향이 뒤섞여 하나의 향처럼 공간 전체를 메우고 진동했다. 

    유더는 세상이 아무리 뒤흔들려도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사내를 온몸으로 안아 감싼 채 고개를 묻었다. 맞닿아 있는 피부를 통해 뜨겁게 약동하는 두 개의 심장박동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속절없이 끓어오르는 감정의 여파로 머리가 어지럽고 상대의 것을 삼킨 배가 터질 것처럼 차오르는 순간에도, 그는 고통이 아니라 더한 갈구를 바라며 몸부림쳤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이곳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강렬히 찾아들었다.

    이보다 서로 더 깊이 닿을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더가 감정을 이기지 못해 키시아르의 몸을 꽉 끌어안을 때마다 사내는 그에 응답하듯 입을 맞추었다. 서로 너무나 깊이 달라붙어 있는 나머지 오히려 움직이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러기를 멈추지 않았다.

    식지 않은 열기 사이로 언어가 되어 나오지 못한 감정만이 오래도록 흘러넘쳤다.

    “하아…….”

    유더는 오랜 입맞춤 끝에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벌려 숨을 내쉬었다. 반쯤 꺼진 소파 위로 거의 식어 가는 난로의 불빛이 타닥이며 비쳤다.

    그의 몸을 품에 안은 채 누워 있던 사내가 그에 반응하듯이 다정히 귀 아래 입술을 비볐다. 아직 겹친 상태의 나신을 감추고 있는 건 방을 메운 어둠과, 처음에 유더를 감싸고 있던 담요뿐이었다.

    관계가 소강된 뒤에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열기 덕에 유더는 비로소 제 안에 있던 말들을 매끄럽게 흘려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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