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96화 (796/805)

796화

‘…이거 오랜만이군. 환상인가 했는데 진짜라니 놀랍기 그지없어.’

우울한 잿빛 펠레타 성. 불 꺼진 난로. 그날의 키시아르.

유더는 제가 쥔 검을 내려다보다 이를 꾹 악물었다.

모든 것이 녹아내린 듯 흐릿했다. 이지러진 채 흘러가는 기억 조각 속에서 유더는 어느샌가 검을 들어 그 사내의 심장을 찌르는 중이었다.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지닌 액체가 왈칵 솟아올랐다. 쓰러진 사내를 잠시 내려다보다 그대로 검을 버리고 등을 돌려 비밀 통로로 향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유더는 또다시 그 사내를 앞에 두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군. 환상인가 했는데 진짜라니…….’

유더는 멍하니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또다시 검을 들어 그 사내의 웃음 짓는 얼굴 위로 검을 내리그었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비밀 통로를 지나 어둠 밖으로 다시 빠져나왔을 때, 유더는 또다시 키시아르의 앞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이거 오랜만이군. 환상인가 했는데 진짜라니…….’

‘…….’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기를 미친 듯이 반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결국 똑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는 남자의 앞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더는 새카맣게 입을 벌린 펠레타 성의 비밀 통로를 달리며 숨을 헐떡였다.

‘헉… 헉…….’

어느샌가 젖어 든 발밑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물도 없는데 왜 물기 어린 소리가 나는 걸까. 의문 속에서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에는 검붉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그 낙인 같은 발자국이 끝나는 곳은 유더의 바로 뒤였다.

머리가 거세게 지끈거렸다. 유더는 그대로 다시 앞을 향해 뛰었다. 신발 밑창에서 계속해서 액체가 쩍쩍 달라붙었다 떨어지며 철벅이는 소리를 냈으나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체 어디로…….

그때였다. 유더는 어둠 속에서 문득 누군가와 거세게 부딪쳤다.

‘윽…….’

장애물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해 튕겨 나갈 뻔했던 몸을 상대가 빠르게 붙잡아 끌어당겼다. 유더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상대를 밀쳐 내려 애썼으나 상대의 힘이 예상외로 너무나 강했다.

“괜찮아.”

귓가에서 나직한,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괜찮아…….”

다시 한번 이어진 속삭임에 귀에서부터 등줄기가 오싹 떨렸다. 유더는 그때서야 겨우 몸부림을 멈추었다. 그를 끌어안은 이가 등을 천천히 쓸어 줄 때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 미약하게 들었다.

움직일 수 없도록 단단하게 전신을 꽉 감싼 품 속이 이상하게도 저를 지키는 방어벽처럼 느껴졌다.

“날 알아보겠나?”

유더가 진정하자 그제야 상대가 재차 느리게 질문을 했다. 유더는 식식거리던 호흡을 멈추고 가슴팍에 묻혀 있던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통로의 어둠에 묻혀 상대의 얼굴을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을 깜박이자 그때마다 천천히 검은 물이 씻겨 내려가듯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곧은 선을 그리는 턱. 붉은 입술. 희고 매끄러운 뺨. 내리깐 긴 속눈썹과 그 사이로 유더를 응시하는 유리 같은 눈동자.

그리고 방금까지 제가 휘둘렀던 검 아래 사그라지던 것과 똑같은 금빛 머리칼.

“……!”

유더가 또다시 덜컥 굳으며 그를 밀쳐 내려 하자 상대는 아예 유더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자. 만져 보게.”

겹쳐진 두 손이 상대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그 방법은 직접적이었지만 확실하게 상대의 존재를 유더에게 인지시켰다. 처음에 유더는 손끝을 움츠린 채 상대가 이끄는 대로 그의 얼굴을 건드리기만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손이 자유로워졌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것을 어루만졌다.

남자는 유더가 어디를 만져도 괜찮다는 듯 아주 얌전하게 등을 숙인 채 얼굴을 내주었다. 부드러운 속눈썹을 스치면 그것이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말캉한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기이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감각은 잡힐 듯 말 듯 아직 흐릿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상대의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웃음을 담아 흘러나왔다. 왜 웃는지 알 수 없어 손을 멈추자 그가 입을 열었다.

“…기억나나? 전에도 이렇게 만졌었는데.”

“…….”

“그때도, 지금도, 같은 길을 따라가는군. 손끝만으로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을까.”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은 마치 가득 찬 물컵 안에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처럼 유더에게 스며들어 흐릿하게 잠겨 있던 정신을 천천히 일깨웠다.

유더는 느리고도 생경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남자의 눈을 비로소 똑바로 응시했다.

“……키시아르.”

잔뜩 잠겨 찢어진 듯한 목소리에도 남자는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기쁘게 웃었다.

“……단장님?”

“그래.”

사내가 아직 뺨에 닿아 있는 유더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치고 고개를 기울였다.

“나야.”

애틋하게 흐려진 눈빛이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사라지고, 손바닥 위로 입술이 지그시 눌렸다. 유더는 그제야 흠뻑 젖어 있던 피가 어느새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뭐죠? 제가 왜 여기……. 아까는 분명히…… 이곳이 아니라…….”

“꿈이란 것이 다 그렇지. 원한다고 꾸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안 꾸는 것도 아니니.”

키시아르가 부드럽지만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니 이제 나갈까.”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말입니까?”

“여긴 펠레타 성 아닌가? 저기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까까지는 어디로 향해도 ‘그날’의 키시아르만을 마주했었다는 사실이 유더를 저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더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겨 통로 저편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유더는 망설이다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만약 이 끝에 또다시 그 광경이 펼쳐져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번에는 키시아르의 앞에서 또다시 그 광경이 이어지는 걸까?

새카만 혼란 속에서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치 유더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괜찮네. 저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

“내가 이 손을 먼저 놓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말에 답하듯 사내의 손가락이 유더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단단하게 얽혔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빼낼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잡은 손의 힘과 온기에 유더는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다.

발걸음을 옮겨 통로의 끝으로 나아갈 때마다 점점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이제는 그것이 저를 삼키려 드는 검은 입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왜일까. 자문하자 답은 의외로 간단히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

유더는 작게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타닥이며 타오르는 마석 난로의 불꽃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은 잘 잤나?”

“……단장님?”

“응.”

유더를 옆에서 감싸듯 끌어안고 있던 사내가 뺨에 입술을 붙이며 이마를 가볍게 비볐다. 같이 자다 일어난 것처럼 나른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아니, 잠깐. 우리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불현듯 머리에 찬물을 맞은 듯한 기분에 일순 잠이 쑥 달아났다.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어떻게 된 겁니까? 잠깐 눈만 감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펠레타에… 아니. 꿈속에 단장님이…….”

“그래. 꿈속에 연결되었었지. 저번처럼.”

꿈을 꾼 당사자는 유더인데, 오히려 키시아르가 뭘 그리 놀라냐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돌아와 보니 사랑스러운 보좌가 몹시 피로한 얼굴로 잠들어 있지 않겠나? 침실로 데려다주려 했는데 잘 깨지 않고, 보아하니 그리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지 않더라고.”

“그래서… 뭘 하신 겁니까?”

“조금이라도 잘 잘 수 있도록 담요로 둘둘 감싸 꼭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했지. 그랬더니 짠. 어느 순간 거기에 있더군.”

진짜인가 의심될 만큼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이런 상황에서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으니 사실일 터였다.

유더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이번에도…… 보셨습니까?”

“뭘? 네 꿈을?”

“…….”

“내가 본 건 펠레타 성의 지하 통로를 헤매고 있던 너뿐이야. 이전과 달리 여러 번 말을 걸지 않고도 한 번에 잡아챌 수 있어 다행이기는 했지.”

그렇다는 건 키시아르가 자신이 죽는 장면은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유더는 힘을 빼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다행인가.’

말로 들어 이미 알고 있다 해도 그런 장면을 직접 보는 것과 아닌 건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번의 꿈은…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기보다는 그저 조각조각 부서진 파편만 보고 나온 느낌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지금도 그날의 키시아르를 봤다는 어렴풋한 느낌과 통로를 헤매고 다니던 때의 끔찍한 감각만 남았을 뿐, 새로 얻은 정보나 구멍이 메워진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나저나 펠레타 성의 비밀 통로를 그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역시…… 이번 꿈은 그때였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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