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5화
이름을 지어 주는 게 책임감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칸나의 말을 곱씹던 유더는 문득 이름이란 단어에 이끌리듯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 준 한 사내를 떠올렸다.
‘…….’
답을 알 수 없는 일을 두고 궁금해하는 건 시간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설령 그때의 키시아르 라 오르가 유드레인이란 이름을 지어 주면서 뭘 느꼈었다 한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더는 결국 제 안에서 치솟아 오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어 묻고 말았다.
“…정말 일반적일까.”
“응?”
“이름을 지어 주는 행위가 책임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
열심히 추측을 전개해 나가던 칸나가 뭔가 잘못 말했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난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 유더가 그렇게 말하니까 또 아닌가 싶기도 하고?……. 현자도 나처럼 생각해서 한 행동일 테니 일반적이지 않을까? 아니면,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이 더 있었어?”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한과는 관계없이, 그냥 그게 일반적인 판단일까 싶어져서.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없거든.”
“아, 정말?! 유더는 엄청 산골에서 살았다고 하지 않았었나? 가축을 키운 적은 없었던 거야? 강아지나 고양이도? 아니, 하다못해 물건에도 이름을 붙인 적 없어?”
깜짝 놀란 칸나가 우다다 질문을 쏟아부었다.
“개나 고양이 말고 가축이라면 잠깐씩 키운 적은 있지만 이름을 짓진 않았어. 물건은… 물건에 이름을 왜 붙이지?”
유더가 미간을 찌푸리자 칸나가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 있잖아. 아끼는 물건에 애칭을 붙이는 사람들. 우리 단에도 무기에 이름 붙인 사람이 꽤 있어. 의미도 얼마나 공들여서 고르는데. 나한만 해도, 봐! 낙원의 별이라니. 완전 정성 들인 티가 나잖아!”
“…….”
그리 말하니 대충 알 것 같았다. 무기에 이름을 붙이는 놈들이 유더가 알기로도 분명 꽤 있긴 했으니까. 다만 유더는 그런 행위에 전혀 관심을 둔 적이 없어 그러거나 말거나 넘겼을 뿐이었다.
“이름을 붙여서 정말 책임감과 애정이 생기나 안 생기나 궁금하면 유더도 검에 이름을 붙여 보는 건 어때? 네가 쓰는 검이랑 검집, 둘 다 받은 것 아냐? 엄청 중요하게 여기잖아.”
유더는 제 허리춤에 잘 매달려 있는 검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검과 검집, 둘 다 키시아르에게 받은 물건이고 어디서도 같은 물건을 보기 어려울 만큼 귀한 선물이니 당연히 공들여 잘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타인에게까지 티가 날 정도였던가?
유더는 검 손잡이를 조금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네 말뜻은 알겠어.”
“에이, 유더의 이름 짓는 감각은 좋을지 나쁠지 궁금했는데 아쉽다!”
대체 그게 왜 아쉬울 요소가 되는지 유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결론은 그게 일반적이긴 하단 거겠지.’
이름을 지어 준다는 행위로 인해 세뇌가 가능할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는 게 일반적이라면, 유드레인이란 이름을 지어 준 그 사내에게도 같은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좋은 단어를 골라 만들었다 했었고 실제로 의미 있는 단어로 만들었단 게 밝혀지긴 했으니… 그 비슷한 게 있었을지도 모르지. 변덕이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유드레인이란 이름의 뜻이 고어의 단어 조합으로 이루어졌단 사실조차 유더는 얼마 전에야 알았다. 직역하면 시작과 끝이지만 한편으로는 영원이라는 거창한 뜻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이상한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영원이라.
그 남자는 대체 왜 그런 단어를 선택했을까. 거기에 정말 어떤 의도가 있긴 했었을까.
이름을 지어 준다는 행위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나니 새삼 그것이 조금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칸나가 문득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입을 열었다.
“있지. 생각해 보면 나한이 그만큼 각성자들만의 세상으로 떠나고 싶다는 목적에 집착하고 있는 것도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 때문일지도 몰라. 왜. 이름엔 그걸 지은 사람의 바람이 들어간다고 하잖아.”
유더의 눈이 일순 움찔 떨렸으나 그 움직임은 너무나 미약해, 칸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를 들어 칸나라는 내 이름은 엄마가 지어 주신 건데, 칸나 꽃처럼 예쁘고 굳세게 크길 바라서 그렇게 지으셨대. 그러니까 나한도 나그란의 별이란 이름을 짓던 순간엔 누구보다 가장 낙원에 가고 싶은 게 그 사람이었을지 모른단 뜻이야.”
“…….”
“아, 물론 지금은 목적도, 수단도 완전히 변질되어 정신 나간 상태가 된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한 뒤, 칸나는 어쩐지 말이 없는 친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응? 유더? 왜 그래?”
평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표정의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유더 아일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 너머로 격렬하고도 아득하게 흔들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너무나 낯설어, 칸나는 일순 제가 무언가를 잘못 말했나 의심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나 그 변화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유더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얼굴로 되돌아와 칸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일단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시간이 너무 늦었어.”
“아… 아! 그렇네! 지하라 시간 흐름이 잘 안 느껴져서 그런가, 완전 잊고 있었어. 얼른 올라가서 쉬자!”
잘못 본 걸까? 아니면 이 이야기를 듣고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던 걸까.
조금 걱정되었으나 그게 뭐든 유더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면 칸나는 억지로 캐묻거나 평소답지 않은 반응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지하에서 벗어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칸나와 헤어진 뒤에도 유더의 머릿속에서 한참 동안 오래된 이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돌아왔습니다.”
유더는 임시 단장 집무실의 문을 열며 작게 중얼거렸다. 키시아르와 아직까지 숙소를 함께 쓰고 있었으므로 그가 돌아올 곳은 이곳뿐이었다.
그러나 저보다 먼저 와 있을 줄 알았던 키시아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색 불빛을 뿌리며 활활 타는 중인 마석 난로를 보아 그가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유더는 길게 숨을 내쉰 뒤 난롯가 옆에 놓인 옷걸이에 겉옷을 벗어 걸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품에 넣어 둔 이논의 해석본과 책을 책상 위에 놓고 제 몫의 의자에 앉으니 그제야 눈가가 아릿하게 쑤셔 왔다.
마력의 혜안을 얻은 이후로 몸이 극도로 피로해지면 가끔 겪는 증상 중 하나였다.
‘바쁜 하루긴 했지.’
그렇지만 키시아르가 돌아오면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의 보고도 해야 하고, 처리해야 할 일도 더 있다. 쉬는 건 아직 이른 소리였다.
‘이논이 준 해석본을 지금 미리 봐 두는 게 낫겠지. 키시아르 쪽은 읽는 속도가 나보다 훨씬 빠르니까 금방 볼 수 있을 테지만 난 아니니…….’
손끝을 뻗어 해석본을 집었으나, 왠지 손이 평소처럼 빠르게 잘 움직이지 않고 몹시 둔했다. 피로 때문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봐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의욕이 전혀 들지 않은 탓에 몸이 영향을 받았다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피곤해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바로 해치우는 성정이기에 이런 일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유더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전 생에 마병단장일 때는 가끔 있었던 일이었다.
‘그때였다면 술을 마셨을 텐데, 지금은 그것도 없고.’
애초에 그걸 마셔서 취한다고 느꼈던 감각이 사실은 약한 독에 중독되었을 때의 감각과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누군가 준다 해도 더 마실 순 없을 것이다.
유더는 타오르는 난로를 바라보다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타닥이는 소리가 그나마 하루 종일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해야 하는 일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다른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나마 이렇게 감각을 차단하고 쉬는 게 최선이다.
키시아르가 돌아올 때까지 아주 잠깐만 그렇게 있을 생각이었다.
‘…….’
그렇지만 다시 의식이 혼몽하게 깨어났을 때, 유더의 눈앞에는 어느샌가 아주 오래전 보았던 날의 풍경들이 다시 펼쳐져 있었다.
‘…이거 오랜만이군. 환상인가 했는데 진짜라니 놀랍기 그지없어.’
우울한 잿빛 펠레타 성. 불 꺼진 난로. 그날의 키시아르.
유더는 제가 쥔 검을 내려다보다 이를 꾹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