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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94화 (794/805)

794화

말이 끝난 뒤 호산라는 오래된 추억 속에 매몰된 듯 입을 다물었다. 유더 또한 다음 질문을 하지 않았기에 방 안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때였다.

침묵을 깨트리듯 똑똑 하는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앉아 있던 호산라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흠칫 놀랐다.

“유더.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 이제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노크한 이가 칸나라는 걸 알게 되자 호산라는 곧 안도했다. 눈동자 속에 어른대던 불안감도 곧 가라앉았다.

그건 그가 아직 칸나가 지닌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짐작조차 못 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신뢰를 느끼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칸나가 그만큼 제대로 일을 잘 해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 끝났어. 곧 나갈 거야.”

“저…….”

호산라가 황급히 유더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제, 제가 드린 부탁은…….”

두려움과 죄책감에 가득 차 감히 눈을 마주하지조차 못하면서, 옷자락을 쥔 손에 들어간 힘은 피부가 다 희어지도록 거세다.

사실 그 정도야 가볍게 뿌리치면 그만이었으나 유더는 잠시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변함없어. 하지만 단장님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고, 네 이야기를 토대로 더 알아봐야 할 점도 있을 듯하니 나중에 다시 말하도록 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모두들 저와 같은 의견이리라 여겼으나 지나치게 가차 없이 말해서 호산라를 필요 이상 자극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유더는 힘없이 옷자락을 놓는 호산라의 정수리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나한은 가일과 두일이 살아 있는 걸 직접 마병단까지 와서 확인했었던 놈이다. 마병단의 방침이 그리 쉽게 사람을 죽이지 않는 쪽임을 파악했을 테니, 호산라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정도는 추측했을 텐데도 여태 찾지 않았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수도에서 마병단원들과 마주쳤을 때조차 호산라의 안위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들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지만 방금 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그건 평범한 반응이라 보기 어려웠다.

호산라는 각성자가 되기도 전부터 오랫동안 나한과 함께한 데다 심지어 절체절명의 순간 목숨까지 구해 준 사람이다. 나한이 그토록 강조하던 진짜 ‘형제’나 다름없는 각성자를 딱 한 명 골라야 한다면 그건 바로 호산라일 터였다. 그런데도 나한에겐 호산라가 그리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호산라가 나한과 나그란의 별에 들어오기 전부터 함께했었다던 정보를 들었을 때도 여태까진 그저 단순히 오래된 주종 사이 정도일 것이라고만 여겼었단 말이지.’

기울어져 있는 저울추 같은 감정. 그리고 관계.

그것조차 전부 현자의 세뇌 때문인 걸까? 아니면…….

유더는 알 듯 말 듯 한 기분 속에서 생각에 잠긴 채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남국인 사생아를 그토록 괄시했다는 그 대단한 가문은 대체 어디였지? 그 부분은 아직 못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여태 그 어떤 질문을 들었을 때도 주저함을 크게 보이지 않았던 호산라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건…….”

“왜?”

“…….”

“뭔가 문제라도 있나?”

“…그건, 제가 드린 부탁과 아무 연관도 없지 않나요?”

처음으로 나온 실질적인 거부였다.

‘다른 부분도 아니고, 여기서 갑자기 대답을 안 한다고?’

유더는 호산라의 얼굴을 잘 관찰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있을 수 있다면? 그래도 대답할 수 없나?”

호산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미미하게 찌푸린 얼굴 위에 식은땀이 맺혔다. 망설임 같기도 하고, 고통을 누르는 사람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손가락 끝이 조금씩 떨리며 몸 근육 이곳저곳이 움찔움찔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점점 크게 끓어오르기 직전의 물거품처럼.

“그렇다면, 말씀드려야겠지만… 저는…….”

“잠깐. 알겠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유더는 그가 힘겹게 입을 열기 전, 손을 들어 대답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호산라의 몸에서 일어나던 미약한 반응들도 일제히 멈췄다.

그것을 보고 유더는 확신했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는 거지, 너.”

“…….”

“서약인가?”

“…대답할 수 없어요.”

“같은 게 나한에게도 있나?”

“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다. 유더는 그것만으로도 대답을 얼추 얻었다.

“그렇군. 알겠다. 더는 관련하여 질문하지 않도록 하지.”

유더는 방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칸나가 방 안쪽의 광경을 흘긋 살피며 빠르게 가까이 다가왔다.

“끝난 거야?”

“응.”

“호산라가 너한테만 말하려던 건 뭐였어?”

“너도 이미 예측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

“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역시 나한에 대한 건가.”

칸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정답을 입에 담았다.

“투항하도록 본인이 설득해 보겠대? 아니면 그냥 살려 달래?”

“글쎄. 가능하면 그냥 살려 주길 바라는 것 같던데.”

“욕심이 과하시네. 우리가 나한을 살려 주면, 뭐. 그걸 나한 쪽도 바란대?”

칸나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녀는 유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자문자답했다.

“나한 같은 사람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 싫다고 할걸.”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유더가 짤막하게 동의하자 칸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유더 넌 뭐라고 했어?”

유더는 칸나에게 호산라와 나눈 이야기를 모두 전달했다. 그간 조사할 때는 들을 수 없었던 과거 이야기를 드디어 알아냈다는 사실에 칸나의 표정 위로 약간의 흥분이 실렸다.

유더는 마지막에 호산라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가문의 이름까지 언급한 뒤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 알아낸 건 여기까지야. 네 생각은 어때.”

“흠……. 역시 스스로 입을 여는 게 내 힘으로 백번 노력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드네.”

칸나가 제일 먼저 언급한 건 그 부분이었다. 그녀는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정보를 읽는 거라서 그런 먼 과거의 정보는 아무리 중요해도 확실히 읽기 힘들거든. …그래도 네가 오늘 알려 준 정보들 덕에 앞으로는 읽기가 좀 더 수월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뒤 칸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앞으로 할 일을 하나하나 손꼽아 이야기했다.

“출신 가문의 이름은 서약이 걸려서 말을 못 한 것 같다니 그건 내가 내 능력으로 혹시 알아낼 수 있나 다음에 시도해 볼게. 서약이 걸린 부분을 뚫어 보는 건 처음이라 어떨지 모르겠네. 나한과의 관계 부분도 좀 더 다양하게 찔러 보면 네가 미심쩍다고 느낀 부분에 대해 자세한 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꼽던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다.

“나한에게 적용되었을 세뇌 명령.”

칸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역시 그건 ‘나그란의 별을 위하라’는 부분인 게 맞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이들과 달리 현자를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으면서도 나그란의 별을 위한 목적에는 누구보다 충실했던 게 말이 되니까.”

유더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현자가 굳이 그렇게 간접적인 세뇌를 걸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당시 나한과의 신뢰 관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던 탓이 클 것이다.

당시의 현자에겐 나한보다 호산라가 훨씬 더 쓸모 있는 인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호산라는 나한의 하인이었다.

만약 나한이 현자의 곁에서 떠나겠다고 결정한다면 호산라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나한을 따랐을 것이다. 그건 그가 현자를 완전히 신뢰하는 세뇌 상태라 해도 깰 수 없는 절대적 명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쓸모 있는 호산라가 떠나는 걸 막고 싶다면 나한이 떠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 나한은 남들처럼 현자에게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당시의 현자는 상당히 조급했을 것이다.

‘나한의 능력도 생각 외로 괜찮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더 그랬을 테고.’

“간접적인 방법이라 해도 그 당시에는 괜찮게 여겨졌겠지? 내 생각엔 나한에게 나그란의 별이란 이름을 정하도록 만든 것부터가 세뇌의 시작이었을 것 같긴 해.”

생각에 잠긴 유더의 앞에서 칸나가 스스로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그런가.”

“응. 이름을 지어 주는 것만큼 책임감을 느끼게 만드는 방법도 없잖아? 나도 예전에 동물을 키워 봐서 알지만, 내가 이름을 지어 준 아이는 아닌 아이보다 훨씬 애착이 가고 사랑스러웠거든.”

“…책임감이라.”

이름을 지어 주는 게 책임감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칸나의 말을 곱씹던 유더는 문득 이름이란 단어에 이끌리듯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 준 한 사내를 떠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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