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93화 (793/805)

793화

“그 여행자가 현자였나?”

“맞아요.”

호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님과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저희는 살아났죠. 도련님의 얼굴과 제 다리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건졌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어요.”

유더는 호산라 또한 다리 한쪽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언제 다친 것인가 했더니 그때였던 모양이었다.

“네 다리도 나한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벌’을 받아 그렇게 된 건가? 같은 시기에?”

“아……. 네. 그래도 그분이 당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요…….”

호산라는 진심으로 제 다리의 상태는 나한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듯했다. 유더는 그가 자신의 다리를 감추려는 듯 움찔거리며 바지 자락을 꽉 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의 환상을 써서 도망치려 했으니 똑같이 그 대가로 불의 낙인과 도망칠 수 없는 다리를 벌로 내린 거군. 아무리 가문의 치부 취급을 당하며 살았다지만 그렇게까지 악랄하게 벌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벌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행동들이 거의 죽여 마땅한 죄인을 고문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나중에는 아예 불타는 건물에 버려두고 갔다니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제국의 귀족이 남국인과의 사이에서 혼혈 자식을 두었다는 게 자랑스러울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할 만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선 나한이 성인이 되어 영원히 남국으로 꺼져 주는 게 손도 더럽히지 않고 더 좋았을 수도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흠. 뭔가 이유가 있을 것도 같은데. 종교를 미친 듯이 신실하게 믿는 가문이라도 되었나?’

유더는 그 의문을 속내에만 갈무리하며 드러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계속했다.

“그럼 현자와 나한이 나눈 약속이란 건 결국 그때 목숨을 구해 준 인연으로 하게 된 거였겠군.”

“맞긴 한데, 아니기도 해요.”

“무슨 뜻이지?”

“저와는 달리 도련님은 처음에 현자님께 크게 고마워하지 않으셨거든요. 저에게도, 현자님에게도 모두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만 하셨죠. 남국으로 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고… 그 후로 몇 달이 넘도록 치료에도 의지를 보이지 않고, 식사도 들지 않으니 그냥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었어요.”

드디어 가문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음에도 나한은 더 이상 기뻐하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치료와 재활도 거부하며 틀어박힌 채 말라 가는 그를 보며 호산라는 도련님이 죽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고 말했다.

“다행히 현자님이 자비롭게도 저흴 내치지 않아 주셔서 그때를 버틸 수 있었어요. 정말로… 그것만은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해요.”

호산라는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현자가 진실된 자비를 자신들에게 베풀었다고 여기는 듯했으나 유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자신을 그토록 믿던 이들조차 인간 방패로 내세우고 튀는 그런 놈이 아무 대가 없이 자비를 발휘할 리 없지.’

유더는 제 추측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혹시 그때 현자를 따르던 이들은 몇 명 정도였지?”

“셋… 아니, 넷 정도였죠.”

“그중 아직 살아 있는 자는?”

“둘…… 정도지만…….”

“인원이 그렇게 적었다면 그쪽도 어려움이 많았겠군. 떠도는 생활에 익숙했다면 모를까, 아마 아니었을 것 같은데.”

“예……. 그랬었죠. 아무래도 저 같은 자와는 달리 다른 분들은 모자람 없이 사시던 도중 발현하여 고향을 떠난 경우가 많으셨으니까요.”

“그럼 당시 그들이 어려움을 겪었을 일상생활 부분에선 너도 꽤나 도움이 될 수 있었겠어.”

“글쎄요, 청소나 식사 준비 정도를 도와 드리는 게 큰일은 아니라 생각해서 그때 제가 계속 담당하기는 했지만…….”

왜 갑자기 그런 사소한 문제를 물어보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보이는 호산라를 보며 유더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역시. 호산라를 공짜 하인으로 쓰려고 봐준 거군.’

호산라의 말마따나 야외에서 몇 사람 분량의 식사 준비나 설거지, 빨래 정도를 하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건 그런 일에 이미 익숙한 사람일 때만 그렇다.

온갖 고된 생존 훈련을 견뎌 낸 마병단원들조차 노숙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로가 쌓여 힘들어한다. 하물며 발전된 수도에서 관리 일을 하며 여행 한 번 길게 해 본 적이 없을 현자에게는 그런 부분의 도움이 당시 생각 외로 절실했을 것이다. 우아한 척하며 깨끗하게 살려면 보이지 않는 노력이 그 뒤에 숨어 있어야만 하니 말이다.

말은 안 해도 꾀죄죄하고 힘든 떠돌이 생활에 힘들어 질려 갔을 놈이 어린 나이에 이미 험한 사막까지 건너 본 경험이 있는 데다 내내 남의 수발을 들며 살아온 호산라 같은 전문가를 만나 얼마나 편안해졌을까.

정확한 파악은 어려워도 그 편안함의 정도가 삶의 의지 없이 누워만 있던 환자 한 놈을 묵인해 주는 정도는 충분히 되었으리라는 짐작 정도는 가능했다.

중요하지만 너무나 사소해서, 그렇기에 당사자조차 자각하기 힘들 빈틈이었다.

“그럼 나한이 현자와 약속을 하게 된 건 정확히 어느 때지?”

“얼굴의 화상이 거의 아물어 이제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했던 시기쯤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현자님께서 찾아와 나한 님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죠.”

현자는 묻는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던 나한을 앞에 두고 긴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분께선 도련님의 마음속에 뜨거운 불길이 타고 있다고 하셨어요. 누군가를 따뜻하게 덥혀 줄 수도 있었던 그 불을 받아들인 이가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라고 하셨죠.”

전체적으로 거의 나한의 상황을 빗댄 듯한 비유였다. 아마도 호산라에게서 자연스럽게 빼낸 그간의 정보를 토대로 나한을 설득할 만한 말을 짜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경전에나 나올 듯한 단어만 사용한 게 현자놈답기도 했다.

“그 말에 나한이 반응하던가?”

“처음엔 싫어하셨죠. 혹시 우리의 뒷조사를 했느냐며 화도 내셨고요. 그렇지만 현자님께서 그 불로 다른 걸 태워 보는 건 어떻겠냐고……. 세상에는 도련님이 지닌 그런 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하시며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말씀하니 처음으로 반응을 하시더군요.”

현자는 그때야 그들에게 속 시원히 자신이 여태 해 온 일을, 그리고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열어 놓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각성자라는 이유로 핍박당해 고향을 떠난 현자와, 비슷한 이유로 그를 따르게 된 일행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각성자라는 게 밝혀지면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버려진 나한과 호산라.

현자는 앞으로 그들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이 안전하게 숨어 쉴 곳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니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도 이야기했다.

호산라의 마음은 대번에 움직였으나 나한은 달랐다. 그러나 현자는 자비로운 얼굴로 나한에게 제의했다.

“같은 각성자이니 저희 모두는 형제자매와 다름없다고… 그러니 형제가 하는 일을 너그럽게 지켜봐 달라고 하셨어요. 남을지 말지 결정하는 건 그다음이어도 괜찮다고…….”

그 말의 어떤 부분이 나한을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한은 그 제의를 일단 받아들였고, 현자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각성자라는 이유로 친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버려져 죽어 가던 이를 구해 준 사건이 있었어요. 그분을 데리고 도망칠 때 나한 님의 능력이 정말 도움이 되었죠. 모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나한 님은… 그날 밤에 현자님을 찾아갔죠.”

“그날이 약속의 날이었겠군.”

“네. 나한 님은 현자님의 마음이 변치 않는 한 돕고 싶다고 말했어요. 현자님은 그 말에 몹시 기뻐하시며 그날을 기념해 우리 모두의 이름을 나한 님이 지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나그란의 별.”

유더의 중얼거림에 호산라가 자랑스럽고도 그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조금 몽롱해졌다.

“맞아요. 그 이름을 그때 나한 님께서 지으신 거예요. 어려운 각성자들과 함께 언젠가 완전한 우리만의 낙원으로 떠나겠다는 목표가 담긴 이름이었죠. 그리고… 그분의 이름도요.”

“이름도?”

“본래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셨어요. 거의 불리지도 않은 이름이라 나한 님은 그 이름을 정말 싫어하셨죠. 그래서 그날 나한이란 단어를 새로운 이름으로 삼으시게 된 거예요. 이전까지의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난단 의미로요.”

나한이라는 단어의 뜻은 복수라고 했었던가. 이전에 들었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이 정해진 뒤, 현자님은 나한 님께 약속하셨어요. 그 이름을 지은 건 나한 님이니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요. 그렇게 하면 정말 낙원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함께 가자고 했죠.”

그것이 그들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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