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화
호산라가 깊은 한숨을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나한 님은, 이곳 귀족의 혈통이셨어요.”
유더의 눈이 순간적으로 움찔 가늘어졌다가는 도로 풀렸다.
누구보다 귀족과 권력층을 증오하던 놈이 사실 귀족 혈통. 그것도 제국의 귀족 혈통이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으나 생각해 보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애당초 외견을 봤을 때 남국계 피가 섞인 혼혈인 건 확실해 보였고, 본래 몸담고 있던 집단을 어떤 이유로 오히려 더욱 증오하게 되는 경우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
출신에 대한 설명만으로 나한의 맹목적인 증오 중 일부는 벌써 납득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충격적인 이야기를 불쑥 꺼내 놓은 호산라가 이렇다 할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유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르는 걸 미워하기보다는 아는 걸 미워하는 게 더 쉽고 강렬한 법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아는 걸 미워하기가 더 쉽다……. 처음 들어 보았지만 맞는 말 같네요.”
들릴 듯 말 듯 그렇게 말한 뒤 호산라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나한 님은 모친께서 남국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거의 갇혀 지내셨고, 저는 그분의 수발을 들기 위해 고용된 아이였어요.”
“네 출신지는 그러면 어디지?”
“남국이에요. 고아였죠. 살기 위해서 사막을 건너는 무역상의 심부름꾼이 되었는데… 다시 데리고 돌아가기 귀찮았는지 절 팔아넘기고 갔더군요.”
호산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만 해도 전 제국 말을 거의 못 했어요. 나한 님의 가문에서는 연고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제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기에 딱 좋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어떻게 된 사정일지 대충 짐작은 되는군.’
귀족들이 가문 내의 치부를 가리고 싶을 때, 벙어리 하인을 일부러 구해다 쓰는 일은 아주 흔한 편이다. 이 경우는 남국인 첩과 그 혈통을 이은 자식을 가리기 위해 같은 민족이지만 벙어리나 다름없는 이를 일부러 구했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때만 해도 그분은 정말 착하고 좋은 분이셨어요. 어리지만 똑똑하셨고 늘 의연하게 생활하셨죠. 답답하셨을 텐데도 갇혀 지내는 삶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제게도 잘 대해 주셨어요. 제국말도 도련님께 배웠으니까요. 그런 도련님을 저는… 정말 존경했어요.”
호칭이 도련님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호산라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말로는 존경이라 언급했으나 저 남국인 청년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키시아르를 존경하는 나단 주커만 같은 이와 상당히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더 깊고 어둡기 그지없는 그 깊은 감정의 편린을 유더는 무언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도련님께는 꿈이 있었어요. 성인이 되면 어머님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이셨죠. 저도 그분을 끝까지 모시고 남국에 가길 바랐어요. 그렇지만…… 그 계획을 실행할 수는 없었어요.”
호산라가 무릎 위에 두었던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고통이 가득 차올랐다.
“도련님께는 어린 시절부터 생활을 돌보아 준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저희에게 늘 친절했기 때문에 저희도 그 사람을 믿었어요. 그렇지만 도련님이 가문을 나갈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망설임 없이 가문에 알렸죠.”
“어쩌다가 알게 된 거지?”
호산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건 제가… 다 제 탓이에요.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 사람에게만은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호산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성격이 여전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친하다 생각한 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거나 소식을 알리는 게 아주 멍청한 행동이라 볼 순 없다. 다만 이 경우는 상대가 그걸 지켜 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을 뿐이었다.
‘알자마자 바로 알렸다면 애초에 인간적인 교류를 나눴다고 생각한 것부터 이쪽의 착각이었고, 그쪽은 감시를 위해 붙여 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유더는 냉정하게 추측했다.
“탈출은 실패했고, 저희는 벌을 받게 되었죠. 저는… 그 사람에게 계획을 알린 게 저라는 걸 도련님이 알게 되셨으니 절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그분께선 저를 용서하셨어요. 단지 그 사람이 왜 저희를 배신했는지만을 궁금해하셨죠.”
호산라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그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 수 있었어요. 저희를 배신한 사람이 가문에서 새로운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저희가 갇혀 있던 곳에 들어오게 되었거든요.”
“…….”
“사실은 그 사람도 도련님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사생아였다고 했어요. 처음부터 저흴 감시하러 왔을 뿐, 언제든 꼬투리를 잡으면 밀고해서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고…….”
그러나 밀고 후에 돌아온 건 상이 아니라 독이었을 것이다. 치부를 그 정도로 치밀하게 가리려 드는 가문에서 그런 야망을 지닌 사생아의 정체를 알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리 없으니까.
호산라의 말 또한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것 같다고 했죠. 그 사람은 저희에게 절대 그 가문에 남지 말라고,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한다고 말했어요. 도련님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지만 다시 한번 탈출하는 데 힘을 빌려준다면 함께하겠다고 하셨죠. 그게 가능했던 건… 갇힌 이후 도련님이 능력을 각성하셨기 때문이었어요.”
‘진짜 나한 이야기가 맞나? 그 정도로 무른 놈이었다고?’
한번 뒤통수를 맞았는데 두 번이나 같은 상대를 믿다니. 그 정도면 호구도 보통 호구가 아니었다. 그런 짓을 하는 놈이 제 주변인 중에 있었더라면 뒤통수를 손수 후려갈겨 정신을 차리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더는 그렇게 무르게 구는 나한의 모습이 영 상상되지 않았다.
‘용서는커녕 미치게 만들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아무튼 호산라의 말에 의하면 나한은 갇혀 있던 중 환상 능력을 각성했다.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탈출할 계획을 짰다.
계획은 간단했다. 환상을 이용하여 불이 난 것처럼 꾸민 뒤, 감시하는 자들이 도망치면 그 틈을 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갇혀 있던 곳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또다시 저희가 속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이번에도 그들의 계획은 또다시 탄로 났다. 이유는 당연히도 함께 탈출하려 했던 밀고자가 또다시 그들의 계획을 불었기 때문이었다.
‘기가 막히군.’
“저희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고… 도련님은… 얼굴의 반을 불에 지져지는 벌을 받게 되었어요. 그 뒤에는 저희를 진짜로 불타는 집에 두고 모두 가 버렸죠.”
치부가 외부로 드러나느니, 차라리 사고로 위장해 손쉽게 없앤다. 사람을 물건처럼 보는 놈들의 사고방식이란 뻔한 법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는 건 거기서 결국 탈출했단 거겠지.”
“제가 능력을 각성했거든요.”
호산라가 낮게, 그리고 슬픈 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도망갈 길을 찾았었는데, 그 순간에야 힘이 생겨났어요. 조금만… 하루만 더 빨리 생겼더라도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각성자들 중에는 능력을 발현한 사실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후회하며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호산라 같은 이도 특이한 경우는 아니다.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각성자들을 유더는 이전 생에도 셀 수 없이 만나 보았었다.
경험상 호산라 같은 말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아끼지 않고 사용하는 편이다. 덕분에 힘의 발전은 빠르지만, 몸을 아끼지 않는 탓에 많은 수가 단명하곤 했다.
“…….”
“그런데도 도련님은… 그 사람을 구하고 싶어 하셨어요. 저희 둘만 가서는 안 된다고, 그 사람은 어디에 있냐고 물으셨죠. 하지만 불타는 곳을 뒤져 찾아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은 뒤였어요.”
두 번의 밀고를 했지만 두 번 모두 상 대신 독이 돌아온 셈이었다. 그쪽도 참으로 어지간히 멍청한 일을 했지만 그 대가가 몹시도 참혹했다.
“저는 도련님을 끌고 그곳을 도망쳤고… 아마 필사적으로 이동했던 것 같아요. 사막을 넘어 남국까지 가고 싶었지만 그때의 상태로는 거기까진 불가능했죠. 저희는 도망치던 도중 정신을 잃었고, 지나가던 여행자의 선의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지나가던 여행자. 유더의 감이 번득였다.
“그 여행자가 현자였나?”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