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1화
“……제가, 제가 마병단을 더 돕는다면… 그러면 마병단은 나한 님을 살려 주실 수 있나요?”
‘과연. 이게 본론이군.’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마병단을 돕고 그 대가로 진실을 확인받았으니 다음으로 나올 만한 말이 저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유더는 그런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고요히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군. 나한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나?”
호산라는 어깨를 떨면서도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현자, 님은 자비로우시지만… 아니, 자비로우…셨다고 생각하지만 그 주변은 달라요. 나한 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현자님과 직접적으로 반목한 뒤 다치기까지 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거기에 마병단까지 더해진다면…….”
거기까지 말한 뒤 호산라는 차마 뒷말을 꺼낼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에 가득 찬 호흡이 불안정하고 거칠게 터져 나왔다.
“의외군. 나그란의 별 내에서 현자를 따르는 이들과 나한을 따르는 이들 사이에 반목이 심하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현자를 따르고 나한을 싫어했던 가일 두일 형제 같은 이들도 호산라와는 사이가 좋았다. 호산라를 아는 이들은 대체로 그를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평하는 듯했기에 호산라가 그 반목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건 제법 의외였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누구보다 나한 님의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 저인데요…….”
호산라가 겨우 얼굴을 가린 손가락을 내렸다. 그 사이에서 드러난 남국인 청년의 눈빛은 몹시 두렵고 슬퍼 보였다.
“나그란의 별에는 나한 님의 뜻에 공감하고 함께한 사람들도 많지만, 아닌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이전까지는 제가 그분들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죠. 거기에 현자 님의 변심이 더해진다면…… 누가 그분들을 중재할 수 있을까요.”
중재라는 단어는 제법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호산라가 여태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착하게 살았던 게 아니라, 나한의 곁에서 주변 분위기를 어떻게든 유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살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말려들었을 때 가장 위험해질 수 있는 상대가 저런 유형이다. 개인은 제법 선량하며 유약하고 착한 편이지만, 그 모습이 진실되었다고 해서 마냥 방심하고 무해하게 여기면 안 된다. 호산라는 그 선량함을 십분 발휘해 나한에게 유리해질 방법을 찾아 주려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이였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겉모습이라고 방심하면 안 된단 소리지…….’
대단한 무력을 통해 주는 도움만 도움이 아니다. 때로는 저런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실수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니까.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유더는 여전히 자세 하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한다는 건 결국 네 생각에도 나한이 현자와 붙으면 현재 나한 쪽이 질 게 확실해 보인단 소리군.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
“그렇다면 마병단이 왜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할 게 뻔해 보이는 난리통에 굳이 끼어들어 그놈을 살려야 할까? 그놈이 여태껏 죽인 죄 없는 제국민이 몇 명이며, 무너진 건물이 몇 채인지는 알고 있나? 그로 인해 피해받은 이들은 또 어떻고?”
“그건……!”
사실은 그놈들이 곱게 자멸하지 않을 게 뻔한 데다 남부에 곧 일어날지 모를 위험한 재해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손을 써서 잡아들이는 게 마병단 입장에선 이득이다. 특히 나한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놈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런 주변 상황까지는 모를 호산라의 안색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그놈은 각성자는 무조건 보호받고 비각성자는 이유 없이 죽여도 된다고 주장하지. 하지만 각성자는 타고나는 게 아니야. 어제의 비각성자가 내일 갑자기 이유 없이 각성자가 될 수 있는 게 지금의 세상이라고.”
아직 각성자의 수가 너무 적고 발현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세상이기에 무언가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게 진실이다. 각성자가 되는 이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반대로 멀쩡했던 각성자도 폭주나 부상으로 인해 언제든 능력을 잃고 비각성자나 다름없는 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놈은 대체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죽이겠다는 거지?”
“…….”
호산라가 아랫입술을 피가 배어 나오도록 꽉 악물었다.
“게다가 형제자매라던 각성자들조차 보호하긴커녕 결국 그놈만 도망치고 다들 잡히도록 내버려 두었잖아. 당장 너조차도 그렇게 버려진 상황이고. 그런데도 네 힘을 볼모로 그놈을 살려 달라고? 네 목숨보다도 나한이 중요하단 건가? 어이가 없군.”
호산라는 유더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동안 어깨를 떨다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요. 나한 님이 저지른 죄는… 무겁겠죠. 그렇지만… 그분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그분은 고통받는 각성자들을 많이 구했어요. 몸을 아끼지 않고 모든 걸 바쳐 나그란의 별을 보호했어요. 모두 안전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길 바라서……. 현자님과의 약속은 그저 그것뿐이었는데.”
두서없는 흐느낌 속에서 들려온 현자와의 약속이라는 부분이 문득 유더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전에 본 칸나의 추측과 보고에 의하면 현자의 세뇌 능력은 말을 통해 단순한 명령을 자연스럽게 심어 넣는 쪽에 가까워. 기회는 한 사람에 한 번일 거라고 했었지.’
나그란의 별에 속한 대부분의 각성자에게 주입된 명령은 ‘현자를 믿어도 좋다’일 것으로 추측된다. 호산라 또한 여태까지의 반응을 보면 그쪽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나한은 이전부터 꾸준히 은근슬쩍 현자와의 반목을 계속해 왔던 인물이다. 이전에는 그 상황조차 사실 현자의 의도하에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었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건 확실히 아니었던 것 같았다.
세뇌 능력을 가진 현자는 굳이 나한이라는 모난 돌을 이용해 집단 내의 신뢰와 자신 위주의 소속감을 계속 구축할 필요가 없다. 능력을 쓰면 자신을 완벽하게 믿게 만들 수 있는데 뭐 하러 그런 귀찮은 방법을 쓰겠는가?
현자의 능력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전까지는 놈이 일부러 자신 대신 돌 맞을 자를 세워 지저분한 일을 떠넘겼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그놈의 힘이 뭔지 알게 된 지금은 달랐다.
나한이 다른 이들처럼 완전히 세뇌된 상태에서 고의적으로 반목시켜 왔던 거라면,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이룰 기회가 왔을 때쯤엔 그걸 그만두도록 했어야 맞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땠던가. 나한은 전보다 더 격렬하고 확실하게 현자의 뜻에 반발을 내비쳤다. 그건 즉 나한이 세뇌당한 다른 각성자들처럼 현자를 완벽하게 믿지 않는다는 뜻이며, 동시에 다른 이들과는 뭔가 다른 세뇌가 있었을 가능성을 뜻했다.
그 답을 알기 위한 열쇠가 과연 저 ‘약속’이란 말 안에 있을까?
“현자와의 약속이라. 그게 뭐지?”
“그냥, 약속이에요. 나한 님이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던……. 모든 게 시작되기도 전의 사막에서…….”
호산라가 눈물을 닦지도 못한 상태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유더는 그중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눈 말이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현재 현자의 세뇌는 나그란의 별에 갓 들어온 상대들을 가볍게 구슬린 뒤 시도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한이 현자와 만난 건 정보에 따르면 나그란의 별이 제대로 만들어지기도 전의 극초기.’
역시 그 약속이란 게 열쇠일 것 같다. 유더는 확신을 얻었다.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호산라가 눈물 젖은 눈을 들었다. 유더의 심각한 표정을 본 그는 알 수 없다는 듯 혼란해하면서도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 이야기가 뭔가 중요한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잔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이야기해. 판단은 이쪽이 할 테니까.”
“…….”
잠깐 희망을 가질 뻔했던 호산라의 고개가 다시 바닥을 향해 떨구어졌다. 그는 머뭇거리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저는 나한 님과의 약속을 깨야 해요. 두 번 다시는 과거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요.”
“그래서, 안 하겠다고?”
“…아뇨. 할 거예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다른 모든 분들에게 밝히진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별것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저, 저와 나한 님에겐…….”
유더는 짧게 숨을 내쉰 뒤 한 손을 들었다. 맹세를 할 때 사용하는 간단한 손동작이었다.
“알았다. 단장님 빼고는 비밀로 하겠다고 맹세한다. 이러면 된 거냐?”
“…네. 믿겠습니다.”
호산라가 깊은 한숨을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나한 님은, 이곳 귀족의 혈통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