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화
“그리고 그때 수도에서 받기로 했던 초대 타인 공작의 일지 속 숨겨진 페이지. 지금 받을 수 있을까.”
“아… 맞다. 그거, 그래. 가져오긴 했으니까 잠깐 기다려.”
이논이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쁠 와중에 이것까지 볼 시간이 있겠어?”
“남부에 오기 직전에 초대 타인 공작과 루마의 흔적이 남은 유적 같은 걸 발견했었어.”
“뭐?”
이논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사정없이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아니, 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해?! 편지로 안 하고?”
“보안 때문에.”
“아니, 그래도 그렇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던 이논이 겨우 진정하고는 구깃한 종이 뭉치 사이에서 찾던 것을 끄집어냈다.
“받아! 그리고 빨리 얘기해!”
유더는 일지 원본과 종이를 받아 챙긴 뒤 입을 열었다.
“남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 방문했을 때였는데, 오래된 지하 묘지 속에 숨겨진 몬스터 사체들을 발견했었어.”
유더는 그것이 초대 타인 공작이 숨겨 둔 연구용 실험체라는 사실과 더불어 거기서 발견된 타인 공작의 새로운 일지 조각 약간과 대마법사 루마의 상징인 레몬꽃이 새겨진 브로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단장님께서는 아마 그 무덤이 조성된 이후에 루마가 찾아와 애도의 뜻으로 브로치를 두고 간 게 아닐까 추측하시더군. 아주 옛날에 황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말이야.”
“…….”
“혹시 짚이는 점이나 뭔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줘.”
“짚이는 거고 뭐고…….”
이논이 숨을 깊이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레몬꽃 브로치라면 루마의 물건이 맞을 거야. 나와 함께 있었을 때는 멀리 나간 적이 없으니 길란드르 언덕을 떠난 이후일 것 같긴 한데……. 하아.”
“…….”
“아무튼… 그래. 내 생각을 말하자면, 루마는 단순한 개인적 감정만으로 어딘가를 찾아갈 사람은 아니야. 거기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니까 갔을 테고, 간 김에 브로치를 두고 갔을 가능성 쪽이 더 높아.”
“그러니까, 그 유적에서 루마도 뭔가를 찾아보려 했을 거라고?”
“그래. 그저 내 생각이지만.”
“일지에서는 루마와 초대 타인 공작의 의견 차이가 생기면서 교류가 끊긴 것처럼 나왔는데, 그렇다면 이후에 루마 쪽의 생각이 바뀌었단 건가.”
“그랬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바깥에서 뭘 더 알아보다 보니 과거의 제자가 했던 연구 결과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궁금했을 수도 있고.”
확실한 건 없다. 하지만 천 년도 전에 살았던 대마법사를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리 말한다면 가능성 정도는 남겨 두어도 되리라.
“그래서, 거기서 발견했다는 루마의 브로치는 어떻게 했어? 네가 갖고 있는 거야?”
생각에 잠긴 유더에게 이논이 물었다. 그의 눈빛은 방금까지와 달리 조금 복잡해 보였다.
“아니. 단장님이 가져갔어. 본부로 보내 칸나에게 조사하도록 시키려고 했었는데… 그 이후로는 확인하지 못했고. 여기 온 뒤로 일이 계속 터졌으니 못 보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행히 칸나가 지금 여기 있으니 브로치가 현재 어느 쪽에 있든 확인하기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논이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다른 할 말 있으면 다음에 다시 찾아와.”
“브로치를 찾으러 가 보려고?”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궁금하긴 하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성큼성큼 나아가는 그의 걸음은 상당히 조급하고 빨라 보였다.
“이논.”
“왜.”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이가 유더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 더 있다 가고 싶은 거면 마음대로 해. 안 물어봐도 되니까.”
그는 아무래도 유더가 의료부의 공간에서 조용히 좀 더 머물다 가고 싶은 모양이라 여긴 듯했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믿어 줘서 고마워.”
이논이 문고리를 잡은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그냥. 말하고 싶었어. 이제 가도 돼.”
“하, 그런 말을 듣고 발길이 참도 잘 떨어지겠다! 어?”
버럭 소리친 이가 성큼성큼 걸어 돌아오더니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유더의 뺨을 꽉 꼬집어 양옆으로 늘렸다.
“이 자식. 너 말이야. 헛생각하지 마. 엉?”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새어 나가는 발음을 무시하며 대꾸하자 이논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믿을 만한 것 같다고 판단하게 됐으니 믿었을 뿐인데 고맙단 소리 들을 이유가 뭐가 있어? 살면서 내가 한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말하긴 뭐하다만,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그런 건 관계없어. 그러니까 너도 이전의 나를 못 믿어서 미안하다든가 후회된다든가 그런 생각 하지 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신기하게도 이논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읽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했다.
“지금의 내가 널 믿은 건 네가 먼저 날 믿고 다가왔기 때문이야. 뭐가 먼저였는지 따지는 짓은 의미 없어. 내가 수도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선택한 것도 전부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일인 거지.”
“…….”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이 들 것 같으면 그냥 네 몸이나 더 챙기고 밥이나 많이 먹어. 알겠어?”
“…….”
“대답.”
“알겠어.”
“좋아.”
이논이 비로소 손을 놓아 주었다.
“고맙다는 말 자체가 싫다는 게 아냐. 이 형님 말뜻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그럼 간다.”
손을 탁탁 털고 돌아선 이논이 곧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유더는 아무도 없는 곳에 앉아 가만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조금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
별다른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유더는 호산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칸나를 찾았다. 그녀는 식당 옆의 응접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가 유더를 보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더! 왔구나.”
“저녁에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바쁘면 혼자 갈게.”
“아니야. 네가 올 것 같아서 잠깐 기다리면서 이야기한 것뿐인걸. 이제 가야지.”
칸나는 모여 있던 무리에게 이제 가 보겠다고 인사한 뒤 쾌활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친화력이었다.
“사람들과 벌써 많이 친해진 것 같네.”
“응. 다들 성격도 좋고 친절하더라고. 나그란의 별 출신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단장님의 계책이 대단하다 싶더라.”
겉보기엔 순수한 뜻 같지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칸나가 본래도 사교성 좋은 성격이긴 하지만 오자마자 저리 많은 사람들과 굳이 한꺼번에 어울리며 지낸 건 혹 이 지부 내에 이상한 사람이 없는지 능력을 발휘해 가볍게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다들 성격이 좋고 친절하다는 평을 내렸으니 결과적으로는 현재 남부 지부 내에서 아군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 된다.
‘칸나가 오니 이런 면에선 정말 편하군.’
“그분들과 이야기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 편지만으론 알기 어려웠던 소식이 많더라. 몰랐으면 섭섭할 뻔했지 뭐야.”
“…필요한 이야기는 다 전한 것 같았는데.”
몰랐으면 섭섭할 뻔한 이야기가 뭐가 있나 싶어 약간 의문스러웠으나 칸나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했다.
“아니지! 너랑 단장님이 불법 격투장을 때려 부술 때 엄청난 옷을 입고 있었다든가, 네가 혼자서 사람 수백 명을 날려 보냈다든가 뭐 그런 거 말야! 왜 그런 건 적지 않은 거야?”
“…….”
격투장에서 줬던 옷이 고대 의복을 흉내 낸 것이라 상당히 눈에 띄긴 했지만, 엄청난 옷이란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 모습을 보았던 단원이나 각성자들도 별말이 없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는데, 사실은 뒤에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약간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훈련할 때 누가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지 좀 캐내봐야겠군.’
“아 맞다. 아까 알릭하고 같이 지하 감옥으로 가서 뢰네브 씨도 만났어. 정말 대단한 능력을 지니셨더라. 그 옆에 있던 투명 각성자 쪽이 난 솔직히 더 놀랍긴 했지만.”
“왜?”
뜻밖의 말에 반문하자 칸나가 주변을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름이 큐레이지나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 능력을 쓰고 있는 상태에
선 나도 읽을 수가 없더라고. 정말 말 그대로 투명해진 것처럼!”
“접촉 중인데도 읽을 수 없었다는 뜻이야?”
“응. 당연히 접촉 상태로 해 봤지. 안 되더라고.”
능력을 마음먹고 발휘했는데도 아예 읽지 못한 경우는 처음이라 칸나는 상당히 놀라고 자존심이 상한 기색이었다.
“이제 능력 조절을 필요한 만큼 잘할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나니까 또 새로운 벽이 보이네. 어휴. 훈련의 길은 끝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