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8화
“뭐?”
이논이 미간을 푹 찡그렸다.
“이번에 남부에 나타났던 이상 균열은 아무래도 한 번으로 끝이 아닐 것 같으니까.”
유더는 이번에 잡아들인 남국인 상인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사하고 키시아르와 함께 추측했던 사안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아톤이란 놈이 조사할 때 말하길,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이미 일은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굴었다고 했어. 아니길 바라지만 이전 생에 나타났던 남부 대지진이나 그 비슷한 재앙이 지금 찾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들어서 현재 대비 중이야.”
그 추측이 맞아떨어진다면 이논도 이상 균열을 직접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논이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일이 다 있었구만. 그래, 이제 날 왜 불렀는지 아주 확실히 알겠다.”
유더는 그가 이 상황에 대해 무어라 욕을 더 할 줄 알았지만 그는 오히려 조용해졌다.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테이블을 노려보는 모습을 보니 뭔지는 몰라도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현 상황에 대해 들을 만한 건 다 들었으니 정리가 필요하긴 하겠지.’
이논과 함께 있을 때는 대개 그의 고함 속에서 시끄러운 대화가 오갔던지라 이런 침묵은 오랜만이었다. 생각에 잠긴 이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유더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평소엔 감정을 아주 격렬하게 드러내는 편이다 보니 인지하기 쉽지 않지만 사실 이논의 외향은 공들여 만든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보통 뛰어난 외견을 지닌 사람들이 어디서든 눈에 띄는 것과 달리, 그의 외모는 사람들에게 깊이 인식되지 않는 편이었다.
‘마병단원들만 해도 그렇지.’
이논이 잘생겼다고 곧잘 말하긴 하지만 그 이상 자세히 설명하려 드는 이도, 외모에 홀려 지나치게 다가가거나 그에 대해 정도 이상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다. 마치 평소에는 그의 외모에 대해 까먹고 있다가 이름이 나오면 그제야 ‘그 잘생긴 약사’ 정도로 새삼 떠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슷하게 훌륭한 외모로 곧잘 화제의 중심이 되다 못해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온갖 관심을 받는 가케인, 그리고 어딜 가든 얼굴에 시선이 집중되어 사람을 곧잘 홀리는 키시아르 같은 이를 떠올려 봐도 그건 상당히 기이한 일이다. 그런데도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면에서 더 그러했다.
어쩌면 저런 외모를 지니고도 사람들에게 잘 인식되지 않은 채 7구역에서 내내 마음대로 살아왔단 것부터가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그때, 이논이 드디어 생각을 마무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유더가 이상했는지 엉?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봐.”
“그냥 봤는데. 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건 아니긴 하다만…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어리둥절하고 미심쩍은 얼굴을 한 이논이 정말로 얼굴에 무언가 묻은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뺨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음, 아무튼 말이야… 네 말대로라면 지금 여기 남부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제국 전체와 수도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단 거잖아?”
그런 셈이란 뜻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이논이 찌푸린 얼굴로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나는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수도를 우선시해야 해. 그게 루마와 계약해 수도의 7벽을 지켜야 하는 가디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이논은 ‘그런데 말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런 식으로 사명을 우선하는 게 최선만은 아닐 수 있다는 걸 방금 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 이전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관점이지.”
이논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먼 곳을 보듯 깊어졌다.
“네 이야기를 들으면 ‘이전의 나’는 분명 사명을 우선시하며 살던 대로 살았던 게 분명해. 수도를 절대 떠나지 않고, 인간들의 큰 흐름에 신경을 끈 채 지냈겠지.”
그가 본래 어떻게 살았는지는 유더도 잘 알았다. 그는 본디 7벽의 가장 허름한 골목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약사로 지내며 외부의 일에는 개인적인 관심을 잘 두지 않았다. 제국 이곳저곳에서 재해가 뻥뻥 터지고 정치적인 문제로 난리가 나던 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신기할 정도로 아는 게 많고 상처 입은 이들에게 후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초탈한 듯한 그 모습을 과거의 유더는 영 수상하다고 여겼다.
바로 그때의 모습이 이논의 입장에서는 사명을 우선하여 지내는 삶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랬던 나도 결국에는 수도를 떠났고, 그러면서 네게 굳이 직접 죽은 이후… 그러니까 재흡수 후 재생성을 암시하는 메시지까지 남겼어. 널 다시 돕고 싶다고까지 말했다고 했지. 그건 아마 널 만나면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뜻일 거야. 즉 네가 옳다는 걸 ‘나’도 인정했었단 거겠지.”
일순 유더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재흡수 후 재생성이라는 건…….”
“이전에 말했잖아? 떠난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라고. 그게 재흡수. 그리고 다시 만나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한 게 재생성.”
들어도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유더가 눈을 깜박이자 이논이 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담담하게 설명을 보탰다.
“7벽의 보호가 위험한 수준으로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되거나, 이 육신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험에 빠졌을 때 나는 재흡수란 수단으로 육신을 버리고 7벽의 일부로 돌아갈 수 있어.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죽는 거지.”
“…….”
“하지만 인간의 죽음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 재흡수된 이후에도 7벽이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고 판단된다면 여부에 따라 육신을 다시 수복해 돌아오는 것도 가능해. 그게 바로 재생성이야. 물론 돌아오기만 할 뿐, 기억을 비롯한 다른 부분은 전부 갓 태어난 수준이 되겠지만.”
상상조차 안 가는 비현실적인 설명이다. 그렇지만 유더는 이전 생 이논이 남긴 마지막 편지에 쓰인 문구를 떠올리며 그 말이 저 재흡수와 재생성이란 개념에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논이 내 말을 믿기에 수도에서 나가는 선택을 했을 거라고…….’
그때의 유더는 무엇이든 의심했고, 누구도 제 말을 믿지 않았다고 느꼈다. 이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이논의 마지막 편지를 본 이후로는 그가 정말 진실했음을 느끼고 뒤늦게 아쉬워했다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유더는 마지막 편지를 통해 누구도 쉽게 믿기 힘들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솔직히 밝혀 준 이논을, 수도를 떠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날의 만남을 언급해 준 그의 마음을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신을 믿어 줄 수 있었을까.
스스로를 형님이라 자칭하며, 자주 다쳐서 돌아오던 유더를 보고 화를 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유더는 그때의 이논에게 진작 자신의 생각과 목적을 솔직하게 밝히고 의견을 나누며 도움을 주고받았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다. 지금처럼 편히 지내고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목격한 재해와 멸망의 단초에 대한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뭔가 바뀔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그걸 죽고 나서야 안 게 조금 우스웠다.
‘새삼… 정말 멍청했었군.’
유더는 눈을 내리깔며 깊이 숨을 내쉰 뒤, 그때와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은 덕에 맞이할 수 있었던 현재의 이논을 응시했다.
“나는… 사실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 내가 과거로 돌아와 널 다시 만날 날이 오리란 걸 그때의 네가 예지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럴 리가 있겠어? 난 그런 능력은 없다.”
“그 재흡수란 것, 이전에도 한 적이 있었어?”
“몇 번 있었지. 육신을 다루던 게 미흡했던 시기에.”
이논은 그때의 실패들로 말미암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법을 정립하게 되었다며 툴툴거렸다.
“수도를 떠난 네가 어디로 갔을지는 짐작이 돼?”
“뭐, 그건 뻔하지. 길란드르 언덕밖에 더 있겠어?”
길란드르 언덕이라면 대마법사 루마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장소이자 이논이 이전에도 가 보아야겠다고 언급했던 곳이었다.
“이논. 아직 거기에 가 보진 않았지?”
“그래. 누구 때문에 너-무 바빠서 아직 못 갔지.”
“남부에서 돌아가면 그곳에 나도 같이 갈 수 있게 해 줘.”
“……너랑?”
놀란 듯 물은 이논이 턱을 문지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가도 상관없긴 하겠다만……. 알겠어.”
“그리고 그때 수도에서 받기로 했던 초대 타인 공작의 일지 속 숨겨진 페이지. 지금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