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87화 (787/805)

787화

‘뭐지?’

그 목소리라니? 명은 또 무슨 소리인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 기억에 없는데…….’

유더는 혼란 속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흔들었다. 잡힐 듯 말 듯 한 감각을 부여잡으려 노력할 때마다 환상처럼 지끈대는 두통 사이로 미약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유더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어떻게든 그것의 끝을 붙잡으려 했으나,

“왜 그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깨를 붙잡은 이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기이한 감각은 어느새 물속으로 풍덩 가라앉아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니… 방금, 뭔가가…… 내 기억에 없었던 이상한 게 떠오를 것 같았는데, 사라진 것 같아.”

“뭐야, 그건 또?”

유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두통이 사라진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그 이상한 감각은 이논의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불쑥 치솟아 올라왔었다.

세상을 구해 달라 말한 사람도 없는데 왜 그리 노력했냐던 질문.

그래. 그런 사람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없는데…… 그 이후 무의식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던 기이한 단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한테도 말 못 할 거라도 떠오른 거야? 대체 뭐냐고.”

“…그런 건 아니야.”

침묵을 지키는 유더가 답답하고 걱정되었는지, 이논이 심각하게 물었다.

유더는 고개를 젓고 방금 자신이 느꼈던 이상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워낙 짧은 순간 겪은 데다 스스로도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워 잘 전했다 보기 어려운 말이 되었지만, 이논은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흐음…….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어?”

“완전히 똑같은 경험은 없었지만, 다시 돌아온 뒤로 아주 가끔 비슷한 일이 있기는 했어.”

“비슷한 일이라면 어떤 거?”

유더는 잠깐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이전엔 기억하지 못했던… 정확히는 내가 기억을 못 한다고 인지하지조차 못했던 것들이 가끔 불쑥 다시 떠오를 때가 있었어. 정확히는… 비어 있는 줄 몰랐던 구멍이 채워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구멍?”

유더의 안에는 스스로도 모르는 아주 많은 구멍이 존재했다. 그것들은 가끔 알 수 없는 경로로 불쑥 채워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잊은 줄도 몰랐던 기억이나 감정의 파편이 함께 떠오르곤 했다.

구멍이란 게 단순한 비유만은 아닌 것이, 사람의 본질적 내부를 볼 줄 안다는 믹 슈덴이 유더를 보고 ‘구멍이 아주 많다. 빈공간이 많아서 셀 수도 없을 정도다’란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최근엔 그런 감각을 느낀 일이 적어졌지만 방금 이논과 이야기하다 또다시 비슷한 일이 생긴 걸 보면 아주 없어진 것만도 아니었다.

유더의 말을 들은 이논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전 생에 있었던 일을 들었을 때보다 어떤 의미로는 이쪽이 더욱 그를 심각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는 유더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참이나 이리저리 살핀 끝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구멍이란 것 자체는 내가 파악할 수 없어.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돼. 네 혼이 엉망이었다가 나아지기 시작한 게 그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납득되는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이논은 그간 한 적 없던 설명을 추가로 해 주었다.

“혼이 엉망이라는 건 두 가지를 뜻해. 하나는 육신만으로 막아 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상처를 입거나 충격을 받아 내부의 본질까지 파괴되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육체와 혼의 결속이 약하다는 뜻이야.”

“…….”

“엘포킨스란 놈이나 여기 오면서 본 다른 놈들은 다 전자였는데, 너는 둘 다야. 그러니까 네놈이 더 안 좋은 상태란 거지. 이해하겠어? 그나마 최근엔 많이 나아졌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또 결속이 느슨한 상태더라. 뭔 짓을 했는진 모르겠다만.”

“…결속이 느슨해졌다고?”

“그래! 본래대로라면 이렇게 이성을 지키며 똑바로 걷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는 상태라고!”

여태 이논이 유더의 혼 상태가 나아졌다고 말할 때는 대부분 키시아르와 여러모로 깊은 접촉과 연결을 나누었던 때였다. 수도를 떠난 이후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관계가 더 깊어지면 깊어졌지 그 반대는 아니었을 텐데 오히려 상태가 안 좋아졌다니.

‘왜지?’

유더는 잔소리를 이어 나가는 이논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앞부분은 알겠어. 그런데 결속이 약하면 뭐가 안 좋은 건지 물어도 될까.”

그 말에 이논은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내 설명을 해 주었다.

“음… 인간이 아닌 내 눈에 비치는 모든 생명은 실존하는 육신과 그 내부의 본질을 이루는 기운의 결합. 즉 혼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 그 두 가지 사이의 결속이 약해지면 둘 중 하나가 언제 흩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지. 그러다 완전히 끊어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죽나?”

“그래.”

그의 레몬색 눈동자가 차갑고도 감정 없이 가라앉았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

“하지만 나는 내 상태가 딱히 나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네놈이 별종이란 거야!”

버럭 소리친 뒤 이논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 지켜본 바로 아무래도 넌 본래부터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타인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데다 고장까지 나 버린 게 틀림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고통이 너무 심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머리가 아예 그 부분을 없애 버리는 경우가 있거든. 혼의 손상이 그 정도로 심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이논은 친절하게도 자신이 만나 본 뒷골목 인생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았다는 설명을 해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극한 고통에 익숙해진 삶을 살다 보면 나중엔 그 고통을 쾌락으로 느끼거나, 혹은 감정이 거세된 것처럼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그런 경우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좀 떨떠름했지만 겪어 온 일들을 떠올리면 그리 놀랍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군. 혼의 손상이란 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라면 앞으로의 일에 갑자기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단 소리니…….’

유더가 묵묵히 제 몸을 내려다보고 있자 이논이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흐트러뜨렸다.

“눈에 보이는 부분이 아픈 게 아니니까 인지하기 힘들긴 하겠지. 나도 당장 네놈이 정신 차리고 조심히 요양이나 하며 살 거라곤 생각지 않아. 그래도 그걸 잊지만 않는다면 괜찮아. 아무튼 지금 네놈 곁엔 나도 있고, 그 단장 놈도 있으니까.”

목소리는 퉁명스럽고 손길은 거칠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온기만은 그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이논다운 행동이었다.

유더는 흐트러진 머리 사이로 입술을 비뚜름하게 내민 이논을 바라보다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알겠어. 고마워.”

“어휴, 이런 시커먼 놈 뭐가 귀엽다고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논은 몇 번 더 유더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에야 손을 떼었다.

“그런데 네 안에 있다는 그 구멍, 채워진 것들에 어떤 공통점은 없었어?”

“공통점?”

“뭐라도 좋으니까 생각해 봐. 의외로 그런 데서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글쎄…….”

유더는 생각에 잠겨 있다 불쑥 입을 열었다.

“……단장님인가?”

“어엉?”

“생각해 보니 대부분… 단장님과 연관되어 있었던 기억이나 감정이었던 것 같아서.”

말하는 순간 또다시 머리가 조금씩 욱신거리며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무언가가 얇은 베일을 벗고 한 꺼풀 드러난 듯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그러고 보면 꿈도 그랬지. 처음조차 키시아르를 죽였던 날의 기억이었는데.’

왜 지금까지는 이 부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새로 떠오른 기억과 감정의 내용에 집중하느라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넘어가 그리 깊게 여기지 않았다.

유더는 얼떨떨하게 계속해서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이논이 말했던 제 혼의 결속이 다시 약해졌을 만한 일의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여겼다.

‘내가 잊고 있던 모든 것이 키시아르와 연결되어 있다면, 수도를 떠난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 중 가장 나를 근본부터 뒤흔든 사건은 역시… 그것이겠지.’

“…흰 장갑.”

입술 사이로 스르르 흘러나간 단어를 들은 이논이 눈을 껌벅이며 반문했다.

“뭔 장갑?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바로 며칠 전에 이상한 악몽을 꿨었어. 이전 생의 단장님이, 정확히는 손 부분만 나타나서 나를 만지고 뭔지 모를 의사소통을 하려 드는 꿈.”

“손만 나타났다고? 으윽. 그게 뭔 개꿈이야?”

이논이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여기에 그 손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유더는 그 꿈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 뒤 창밖을 향해 눈을 돌렸다.

정확히 이전에 이상 균열이 나타났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도 처음엔 그냥 뒤숭숭한 꿈인 줄 알았어. 하지만 단장님과 이야기해 본 뒤 그 꿈을 꾼 날이 정확히는 이 남부 지부에 이상 균열이 나타났던 바로 그날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지.”

“그러니까… 그 이상 균열이란 거랑 그게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렇고, 어쩌면 그 꿈 때문에 내 혼이란 게 상태가 안 좋아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들어서.”

그때의 꿈은 다소 이상했다. 여태까지처럼 떠올리지 못하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되살린 게 아니라, 실존하는 뭔가가 꿈에 찾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몸이 아닌 손 일부가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면 그게 유령이란 말과 뭐가 다를까.

유더는 자신이 이상하다 느낀 부분들을 설명한 뒤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글쎄…….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이렇다 말하긴 어렵겠지만, 가능성은 있어 보이네.”

이논도 그 추측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이상 균열이란 걸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뭔가 더 확실해지긴 하겠다만…….”

“그건… 아니길 바라지만 아마 곧 가능할지도 몰라.”

“뭐?”

이논이 미간을 푹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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