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6화
“그건 내일부터 해도 충분해. 하지만 대화는 오늘 하지 않으면 네놈이 바빠서 안 되겠지.”
투덜거리며 읏차 하는 소리를 낸 이논이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와서 앉아. 나한테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어디 들어나 보자.”
그간 이논을 만나면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그러나 무엇을 하려 하든 모든 일엔 순서가 필요한 법이었다.
유더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이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논. 먼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이제 단장님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
그게 무슨 뜻인지 이논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심드렁하게 반쯤 감겨 있던 눈빛에 날카로운 빛이 감돌며 그가 유더의 안색을 살폈다.
“……허, 그래. 드디어 그쪽에 이야기했어? 어디까지?”
“내가 기억하는 건… 거의 전부.”
“그러니까 나한테 말한 것보다 훨씬 자세히 말했단 소리지?”
유더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이논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반응은? 믿던?”
정작 이논 본인은 유더의 말을 곧바로 믿기 힘들어했었으면서, 어쩐지 키시아르가 믿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기세였다. 유더는 희미하게 올라온 웃음을 숨기지 않고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부? 그 미친 얘길 진짜 다 믿었어? 증거 요구 같은 것도 안 하고? 거짓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단 말이지?”
“그런 건 없었어. 그냥… 믿었어. 전부.”
스스로 말하면서도 놀랍지만 그게 진실이었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전술 게임이란 수단을 통해 보여 주고 전하려 한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믿어 주었다. 이전 생에도 누구 한 명 쉽사리 믿어 준 적이 없던 유더의 이야기를 그만은 진지하게 들었다. 이후로도 키시아르는 유더가 아는 정보를 토대 삼아 그것이 진실이라는 확고한 믿음 위에 행동 방침을 수립하여 대응하는 중이었다.
유더가 진실을 말하는지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응시하던 이논의 눈이 그제야 맥이 탁 풀린 기색으로 변했다.
“나와 직접 대면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것부터 보통 놈이 아니라 생각하긴 했지만……. 허, 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사실 나도 그리 믿어 줄 거라 생각진 않았었어.”
“그러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이논은 키시아르에게 순수하게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못마땅함을 아직 내려놓지 못한 듯 보였다. 유더는 그를 향해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니 네게도 단장님께 말한 것들을 먼저 알려 주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 괜찮을까.”
이논은 유더가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밝힌 존재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어떻게 사라졌었는지는 알아도 그 외엔 자세히 듣지 못했다. 때문에 유더는 그에게 먼저 과거를 밝힌 뒤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키시아르만큼이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사람이 딱 하나 있다면 그일 테니 말이다.
“좋아. 내가 두 번째라는 게 좀 짜증 나긴 한다만, 그놈이 첫 번째로 듣고 믿어 줘서 네놈이 드디어 스스로 뭔가 자세히 얘기할 마음을 먹은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이제 말할게.”
“…….”
“우선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정확히는 마병단장이었다가 사형당했는데,”
“무, 뭐? 잠깐!”
별안간 손바닥을 펼쳐 대화를 막은 이논이 자리에서 황급히 벌떡 일어나 문을 잠갔다. 혹시라도 누가 들여다볼 수 없도록 커튼까지 친 그가 주변을 오락가락 맴돌며 숨을 거칠게 골랐다.
“아니 이 미친놈이 시작부터……. 너 너네 단장한테도 그따위로 말했어?”
“그때는…….”
“아니, 됐다. 무슨 영광을 보자고 내가!”
가슴을 퍽퍽 두들긴 이논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이를 부드득 갈며 이전보다 더욱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시작해.”
“…불편하면 그냥 질문에만 답할까.”
“됐고, 그냥 하려던 거 처음부터 하라고! 내가 못 들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냐?”
유더는 결국 이논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키시아르에게 이미 몇 번 말하면서 익숙해진 덕인지 이번에는 신기할 만큼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유더는 침착하게 이전 생의 유드레인 아일이 어떻게 성공을 거머쥐었다 몰락했는지, 제국이 어떻게 흘러갔으며 어떤 재앙들이 세상을 덮쳤는지에 대해 간결히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는 이번 생에서 새로이 알게 된 남국인들에 대한 정보도 다수 끼어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논을 만났다 헤어졌는지 말할 때 이논은 비교적 침착했다. 하지만 유드레인이 키시아르를 죽였다는 부분과 재앙을 막으려 홀로 동분서주한 끝에 사형수로 막을 내렸다는 부분에서 그는 거칠어지는 숨을 참지 못했다.
“…단장님께 알린 건 여기까지가 끝이야. 어느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현재와는 다른 부분이 많겠지.”
“…….”
“뭐 궁금한 것 있으면 말해. 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할게.”
“……궁금한 거?”
“못 믿겠다거나, 이상한 부분.”
그러자 이논이 고개를 푹 꺾었다.
“하아. 넌 정말…….”
그는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 동안 씨근대며 숨을 골랐다. 유더는 그가 화를 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이논의 얼굴에는 여태까지 중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유더를 슬프게 바라보며 조금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논?”
“…정말 너답긴 하다. 여기서 이야기 끝내 놓고 하는 말이 못 믿겠는 부분 있으면 질문하란 거라니.”
“…….”
“그러니까 네놈이 여기서도 이 고생을 하며 구르고 있는 거겠지만…….”
이논이 또다시 눈을 내리감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돌아와서, 복수하고 싶진 않던? 굳이 바로 마병단에 들어오지 않고 쉬었어도 되었을 텐데, 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와 비슷한 말을 키시아르도 했다. 유더 또한 당연히 스스로에게 같은 질답을 한 적이 있었다. 유더는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했었던 것 같아. 그런 생각도.”
“인간이면 당연히 그렇겠지. 애초에 넌 받으면 그 두 배로 돌려주는 거 잘하는 놈이잖아.”
“…그런데 그런 것보다, 실패했던 일을 다시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가슴이 더 뛰었어.”
그 말에 이논이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유더는 자신이 한 말을 새삼스레 다시 곱씹어 보았다. 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온 그 대답 속에 논리적인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나, 그래서 기이하게도 더더욱 진실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도 잘 몰랐던 뭔가가 가슴 안쪽에서 불쑥 흘러나온 듯한 기분 속에서 유더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유는 나도 몰라. 대단한 뭔가가 있었던 건 아니야. 아마 그게 내가 끝내지 못한 일 중 가장 크게 남은 미련이라서 그랬겠지. 지금도 그렇고.”
그래.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닥쳐올 재앙을 다시 한번 막아 낼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한 순간 저도 모르게 환희에 빠졌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었다. 복수심도, 허망함도 새로 얻은 기회 앞에서는 무가치했다.
이논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누가 네게 세상을 구해 달라고 했냐. 아무도 안 믿었다면서,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
글쎄. 왜였을까.
유더는 자신이 그리 고결한 인간은 아님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지닌 힘을 주군을 위해, 제국을 위해, 마병단을 위해 사용했고 거기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살았다. 그저 목적만이 그를 움직이고 살게 하는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제국 곳곳에 닥친 재앙 앞에 무너져 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했던 때.
재해를 예상하고 막아 낼 방법들을 조사하며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던 순간.
그러다가 문득 그 알 수 없는 재해 사이에서 본능적이라고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기묘한 감으로 멸망의 단초를 느꼈던 찰나.
그는 어딘가에서 해일처럼 밀려 들어오는 어떤 강렬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가 지닌 힘을 써야 할 단 하나의 목적만을 정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이리라는 확신과 같은 감각.
그건 마치 가슴속 깊숙한 곳에 새겨진 단 하나의 명과도 같았다.
언제 새겨졌는지도 모를 그 명이 유더를 자리에서 일어나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가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 목소리가…….
“……윽.”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유더는 문득 머리를 푹 찌르는 감각에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