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85화 (785/805)

785화

“그러면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잘 가려무나.”

헬렘의 인사를 받으며 옆 연구실로 넘어오자마자 알릭은 곧장 가방에 달려들었다. 그는 겹겹이 포장하여 쌓아 둔 제어구를 꺼내 늘어놓으며 신나게 주절거렸다.

“헬렘 님도 참. 아무리 연구 분야갸 전혀 다르다지만 어떻게 이 역작을 보고 장난감이라고 하실 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분이 유더를 참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긴 해요. 저만 갔으면 간 김에 뭐라도 도우라고 일을 더 시키셨을 텐데, 같이 가니까 유더를 걱정하느라 다른 건 신경도 안 쓰셔서 정말 다행이었죠.”

‘날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한다기보다는…….’

헬렘은 젊은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한 할머니처럼 구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마법사 후배에게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그분이 평소엔 알릭에게 많이 엄격하셨나 보군요.”

“음? 아니에요! 자꾸 일을 시키셔서 그렇지 엄격하시진 않아요. 그분의 엄격함은… 저희 스승님한테 대하시는 걸 봤어야 해요. 정말 장난 아니게 무서웠거든요.”

그 타이스 율만을 상대로 헬렘이 무섭게 굴었다니. 어쩐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어? 안 믿는단 말투네요. 진짜예요.”

알릭이 포장지를 뜯으며 실실 웃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연구실을 한번 훑은 헬렘 님이 스승님께 아직도 제자를 이렇게 굴리고 사냐며 뼈가 있는 잔소리를 하시는데……. 저희 스승님이 어지간한 분들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유명한 분인데도 헬렘 님 앞에서는 감히 그러질 못하시더라고요.”

보아하니 아무래도 알릭은 그때의 사건을 계기로 헬렘에게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 듯했다.

“스승님께 슬쩍 듣기론 예전에 헬렘 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고 하셨는데……. 아. 이제 다 됐다.”

알릭이 마침내 모든 제어구를 전부 탁자 위에 올렸다. 열 개 정도나 될까 싶었는데 생각 외로 양이 무척 많았다.

“전부 몇 개입니까?”

“50개 정도 만들었어요. 만들다 보니 요령이 붙어서 빨라지더라고요.”

알릭은 꽤나 뿌듯해하며 자신의 역작들을 늘어놓고 설명해 주었다.

“절반 정도는 목걸이 형태고, 나머지는 팔찌 형태예요. 그간 제가 직접 몸으로 시험해 본 바로는 양손에 낄 수 있는 팔찌 형태가 제어 효과가 더 좋은 것 같았거든요.”

액세서리 형태의 제어구들은 겉보기엔 몹시 평범했다. 이게 수갑과 같은 역할을 할 물건이라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유더는 완성된 제어구를 힘주어 당겨 그것이 어지간한 완력으로는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튼튼하군요. 이 정도면 괜찮겠습니다.”

“그렇죠? 자기 능력을 잘 제어하지 못해서 필요한 분들에겐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하지만 마병단에 지금 필요한 건 죄를 저질러 감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채울 물건이 더 많잖아요? 그래서 제가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알릭은 제어구에 특별한 열쇠 장치를 추가하고 물건을 강화하는 능력자의 힘으로 더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은 어떻겠느냐며 조금 수줍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능력을 지닌 단원이 때마침 마병단에 몇 명 있었으니 좋은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만들려면 자물쇠와 열쇠 구멍까지 추가해야 하니 제작비는 더 들고 공정도 귀찮아지겠지만요……. 유더는 어떻게 생각해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군요.”

“이미 설계는 다 생각해 놨어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단장님께 말씀드려 해당 사항에 필요한 지원을 해 드리죠.”

키시아르가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윈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가 여기 있었어도 유더와 같은 결정을 했을 테니 말이다.

“이야! 과연 단장보좌님. 시원시원한 결정 감사합니다.”

아낌없는 연구 지원 약속에 싱글벙글 웃음을 지은 알릭이 후웁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럼 이제… 가장 중요한 시간이네요. 시제품 성능 시험 시간.”

알릭은 그간 수도에서 제어구의 성능을 좀 더 개량했다고 말하며 비장하게 두 개의 팔찌를 들어 올렸다.

“…한번 차 줄래요?”

그것이 유더에게 통하지 않으리란 건 둘 모두 알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강해졌는지 비교할 수는 있으니 유더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알릭이 새로 만든 제어 팔찌를 양손에 차자 온몸을 자연스럽게 타고 흐르던 힘이 일순 무겁게 굳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역시 뢰네브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군.’

유더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펴 본 뒤, 손을 뻗어 허공에 힘을 발했다. 침묵 속에서 힘을 막으려는 듯 벌벌 떨리던 팔찌가 잠시 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눈앞에 붉은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아아…….”

알릭이 안타까운 얼굴로 흩어진 팔찌 조각을 그러모았다.

“그래도 확실히 제어의 힘이 많이 강해진 것 같긴 하군요.”

“그러게요… 몇 초 정도 차이긴 했지만요.”

“그 몇 초 차이도 보통 각성자들에겐 몹시 클 겁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으면 굉장히 재수 없게 들렸을 것 같은데… 유더라서 할 말이 없단 말이죠.”

알릭이 농담기를 담아 이야기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이걸 시험하다 보니 제 능력도 그동안 더 발전하긴 했는데, 힘이 늘면 늘수록 유더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를 깨닫게 돼요. 제 힘이 옹달샘이라면 유더의 힘은 바다 정도인데 그걸 고작 널빤지 같은 팔찌 두 개로 막으려니 힘들 수밖에 없는 거겠죠.”

“…….”

“그래서 어렵지만… 어려워서 오히려 더 불타오른달까.”

알릭은 의기소침하지 않은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과연 타이스 율만의 제자다운 모습이라 할 만했다.

유더는 그런 그에게 격려를 줄 겸, 뢰네브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남부에서 합류한 각성자 중 각성자의 능력을 차단하는 영역을 펼치는 게 가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네? 못 들었… 아니, 어렴풋이 지하에 무슨 장치를 해 둬서 제어구 없이도 감옥이 잘 돌아간단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그게 장치가 아니라 사람이었어요?!”

“네. 사람입니다. 단장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고 나면 알릭의 제어구 개량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셨으니, 기다리고 있으면 칸나가 곧 데리러 올 겁니다.”

“아니 이런 세상에! 벌써부터 엄청나게 흥분되네요! 가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둬야겠는데요!”

알릭의 눈이 번쩍였다. 유더는 잔뜩 흥분하여 상기된 얼굴로 부산을 떨기 시작한 그를 지켜보며 혹 뢰네브가 너무 놀라지는 않을까 약간 염려스러워졌다.

‘뭐… 칸나가 안내할 테니 그 부분은 알아서 잘 제지해 주겠지.’

“알려 줘서 고마워요, 유더! 제어구는 여기 둘 테니 언제든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 좋아요! 새로운 제작은 그 뢰네브란 분을 만나고 나서 재개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유더를 한번 꽉 끌어안았다 놓은 알릭이 콧노래를 부르며 방 한편에 쌓인 짐 더미를 향해 달려갔다. 유더는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남부 지부의 복도는 수도에서 지원이 온 뒤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건 혼란으로 인한 소란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제국군에 합격자들까지 섞여 있어 낯을 가릴 만한데도 누구 하나 타인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은 키시아르의 지시를 따라 누구 하나 몸을 빼지 않고 다 함께 어울리려 노력하였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다.

혹시라도 합격자나 제국군을 상대로 허세를 부리거나 타인을 차별하려 드는 놈이 나오면 본보기로 대련을 한 방 갈겨 주려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마도 이 분위기는… 수도에서 현자를 눈앞에서 놓치는 실패를 경험한 에버와 그때 그 임무에 참여했던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때 임무에 참여했던 이들은 마병단 내에서도 평소 가장 실력이 좋고, 타고난 신분이 높았던 단원들이다. 그런 그들이 몸소 나서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더 열심히 구르는 중이니 혹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눈치가 있다면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유더는 열심히 뛰어 돌아다니는 단원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지켜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임시 의료부 팻말을 붙인 곳이었다.

“참 빨리도 온다, 엉?”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이논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는 자신 몫의 조그만 짐가방 하나를 침대 위에 던져 놓고 반쯤 드러누운 상태였다.

유더가 반대쪽 침상 옆에 가지런히 놓인 루산의 가방을 훑자 이논이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놈은 짐을 풀자마자 남부 지부를 도우러 와 준 다른 사제들을 만나러 갔어. 저녁에나 돌아오겠지.”

“…….”

“난 왜 안 갔냐고 물어보지 마라. 여기 온 것만으로도 성질이 뻗치니까.”

“엘포킨스와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을 줄 알았어.”

“그건 내일부터 해도 충분해. 하지만 대화는 오늘 하지 않으면 네놈이 바빠서 안 되겠지.”

투덜거리며 읏차 하는 소리를 낸 이논이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와서 앉아. 나한테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어디 들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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