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83화 (783/805)

783화

“……전하!”

“크윽, 콜록……. 감히…… 내게…….”

카치안 황태자가 기침을 내뱉으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키올레는 재빨리 그를 부축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다급히 물었다.

“전하께서 대체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내가 직접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도와야 할 이를 도와야겠으니까!”

“예?”

“디아카 공작은 내게 늘 기다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 말해 왔지. 그러나 정작 내가 부탁한 것은 들어주지도, 기억하지도 않아! 그동안은 계속해서 참았지만, 이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갈 생각은 없다. 이번에도 가만히 있다간 처음으로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준 아지헨 툼마저 사라지게 되겠지! 그리되도록 놓아둘 것 같아?”

“아지헨 툼이라면… 그 사기…… 아니, 치…료사 말씀입니까?”

사기꾼이라고 말하려던 걸 참아 낸 건 키올레 다 디아카 인생 최고의 인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순간이었다. 유더가 보았더라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으나 키올레는 어이가 없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전하, 저번에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놈… 아니, 그자는 수도 내에서 폭발 사고를 일으킨 일당과 한편이었던 데다 심지어! 각성자였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구할 만한 ㄴ… 사람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각성자를 싫어하는 건 키올레 경 본인이겠지. 나는 아니야.”

“네? 무슨…….”

“나를 인형처럼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는 자들보다는 내게 진실된 충성을 바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각성자가 훨씬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황태자는 이어 충격적인 말을 토해 냈다.

“물론 처음부터 나도 그를 믿었던 건 아니었지. 그러나 아지헨 툼은 광휘궁을 떠나기 전, 내게 이제 치료는 끝났다는 말과 함께 진심을 담아 모든 것을 고백했다.”

“무…얼, 말입니까?”

“내게 진실된 충정을 바치려는 자들이 여태 없었던 게 아니라, 나를 보호라는 이름하에 견제하려 드는 주변의 방해로 사라지고 만 것이라고. 이제는 자신 또한 그리될 것 같다고 말이지.”

그 말을 하던 순간의 황태자의 눈빛은 마침내 바라던 답을 찾아낸 사람처럼 번득이며 빛났다. 시종들에게 패악을 부리던 순간의 억울함과 분노는 그곳에 전혀 없었다.

“그 말대로 이후 그자를 내 곁에서 떼어 놓으려 하는 일들이 그대로 일어났다. 마치 예언처럼 말이야. 그 모든 사건을 지켜본 뒤 나는 그자를 믿기로 했지. 그자만큼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살피며 진실을 고한 이는 여태까지 없었으니까.”

“그게 아니라, 전하……!”

키올레가 본 그 사기꾼 놈들은 황태자보다 디아카 공작에게 먼저 다리를 놓으려 혈안이었다. 사람을 세뇌하는 능력을 숨기고 치료사라 우기며 황태자와 디아카 공작에게 접근한 놈이 진실된 충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그러나 키올레가 필사적으로 그것을 주장하려 해도 황태자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고, 오히려 날카로운 분노만 되돌아왔다.

“키올레 경. 그간 그대가 디아카 공작의 명에 따라 아지헨 툼과 그 주변인들을 감시하며 내쫓을 기회를 노려 왔음을 내가 정녕 모를 것 같았나?”

“……그건…!”

디아카 공작이 현자 일행이 헛짓을 하지 않도록 지켜보라고 말한 건 맞았다. 그러나 그놈들을 호시탐탐 감시한 건 마병단의 악마에게서 정보를 얻어 임시 협력 중이었기 때문임을 어떻게 제 입으로 고백할 수 있겠는가?

키올레가 찔끔하여 멈칫 입을 다물자 황태자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이 이번 일의 대표로 경을 선정한 것 또한 아지헨 툼을 가장 가까이서 본 인물이기 때문이겠지. 경은 남부로 가자마자 아지헨 툼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제거할 생각이었을 테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신 나간 사기……가 아니라 그자들이 뭐라고 제가 그러겠습니까? 전 남부에 내려가는 것만 하고 귀찮은 일에는 손가락 하나 안 움직일 생각이었습니다!”

“경이 공작을 위해 얼마나 효심 깊은 모습을 보였는지 그리 소문이 났는데, 애써 아닌 척을 하는군.”

“정말입니다!”

욕을 참으며 돌려 말하려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보니 남이 들었다가는 게으른 쓰레기 귀족의 표본이라 할 만한 발언이 마구 튀어나와 버렸다.

“애써 부정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경은 내 명을 듣게 될 테니까.”

“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여기에 탄 것 같은가?”

키올레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인내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다행히 그가 대답하기 전, 황태자가 먼저 입을 열어 주었다.

“경이 이번 일에 발탁된 순간 이것이 바로 아지헨 툼이 말했던 ‘벗어날 기회’라 생각했다. 디아카 가의 다른 이라면 모를까, 경은 좀 다르지. 그렇지 않나?”

“대체 무슨 말씀을…….”

“나는 경이 부모 형제에게 밝히지 못할 부끄러운 비밀을 안고 있음을 알고 있다.”

눈을 가느다랗게 휜 황태자의 얼굴을 본 순간 일순 벼락같은 충격이 키올레의 머리를 쾅 두들겼다.

‘설마?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마병단의 악마놈과 서약을 했다는 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야……! 그건 서약 조건 1번이라고!’

키올레는 그때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의가 아닌 타의로 모르는 사이 알려졌어도 서약을 어긴 셈이 되는 걸까? 키올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무표정하게 변한 순간, 황태자가 놀리듯 속삭였다.

“아끼는 막내아들이 더러운 남색가라는 걸 알게 된다면 나이 든 공작이 얼마나 충격이 크겠나. 그렇지 않아도 고루하게 꽉 막힌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이인데 그런 비통한 소식을 들었다간 당장 드러눕겠지. 혹은, 그토록 귀여워하던 아들의 존재 자체를 지우기로 마음먹거나.”

그 단어는 잔뜩 긴장해 희게 질려 있던 키올레의 한쪽 귀로 들어가 스르르 반대쪽으로 통과하여 날아갔다.

‘…내가…… 더러운, 뭐라고?’

남색가?

키올레는 한참 뒤에야 겨우 얼빠진 얼굴로 목소리를 내었다.

“……남…색?”

“스스로의 명예와 목숨을 소중히 위하고 싶다면 알아서 잘하도록. 내가 이곳에 온 사유와 그 후처리는 모두 경 쪽에서 처리해야 해. 혹 잘못된다면 전부 경의 책임이 되는 거야.”

황태자의 고운 얼굴 위로 승기를 잡은 이의 미소가 떠올랐다.

“경은 내 호위기사이니 이 정도쯤은 믿고 맡겨도 되겠지?”

거역하는 순간 진실을 밝힐 것이라 속삭이는 황태자의 협박을 듣고 나서야 키올레는 겨우 제가 처한 환장할 상황을 깨달았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 저는 남색가가 아니……!”

“그래? 그러면 수확철 축제 때와 지난번 파티 때 몰래 빠져나간 경과 뒹굴었다던 그 상대는 누구지?”

“…….”

“경이 그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어. 쓸데없이 부정하여 화를 키우지 말도록.”

‘그게 아니라… 진짜 아닌데……!’

키올레는 그 두 번의 날에 공통적으로 만났던 한 상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빌어먹을 유더 아일 때문에 지금 제가 남색가로 오인받고 있으며, 그걸 해명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황태자가 고작 사기꾼을 구하려고 황궁을 떠나 마차에 숨어들었으며, 심지어 그사이 정말로 그자에게 세뇌당한 듯 보이는 언행을 벌이고 있다니. 디아카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키올레는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호위하는 동안 뭘 했냐고 하시겠지. 차라리 남색가라고 알려지는 게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 젠장!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데!’

평소 쓰지 않던 머리를 굴리려니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키올레는 억울함 속에서 황태자를 제 마차로 안내한 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모셨다. 하인들에게는 황태자가 보낸 비밀 시종이라 어떻게든 변명했지만, 과연 제대로 통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남부 샬로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키올레는 마차에 힘없이 늘어진 채 그간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 낸 최선의 결론을 되뇌어 보았다.

‘…일단 전하가 그 사기꾼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건 맞는 것 같으니, 남부에 간 즉시 악마 놈을 만나야 한다. 그놈은 같은 각성자니 이걸 어떻게 해제할 수 있는지도 나보다는 잘 알겠지.’

가능하면 남부에 가서도 마병단이 있는 쪽으로는 머리도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은 키올레를 그렇게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키올레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다, 갑자기 거세게 덜컹이며 멈추는 마차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잘 가다 말고 갑자기 왜 멈춰!”

“죄송합니다, 도련님. 앞쪽에서 오던 마차가 갑자기 길을 막아선지라……!”

샬로인으로 향하려면 지금 달리는 길이 가장 가깝고 잘 다듬어져 있지만, 대신 좁아서 많은 마차가 한 번에 통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앞쪽에서 대량으로 나타난 검은 마차가 갑자기 앞길을 막아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는 마부의 설명에 키올레는 벌컥 화를 냈다.

“하! 감히 어느 간 부은 자가 디아카 가의 문장을 보고도 비키지 않는단 말이냐. 어느 가문인지 나와 있겠지!”

“마차 외부가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어 어느 가문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장례식 마차라도 되나? 키올레는 이를 북북 갈며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섰다. 세뇌당한 게 분명한 황태자와 한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거기에 크게 한몫을 했다.

나가 보니 과연 바깥에 거대한 검은 마차가 줄줄이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보통 가문의 행렬은 아닌 듯했다.

‘대체 뭐야?’

키올레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 그 행렬 중에서도 가장 큰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하인 한 사람이 뛰어내려 가까이 다가왔다. 그자의 옷에 수놓인 문장을 본 키올레는 눈을 크게 떴다.

‘저 문장은…… 헤른?!’

***

“어서 와요, 유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네. 알릭도 건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저야 뭐. 하핫.”

유더는 오랜만에 만나는 알릭의 얼굴을 보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약간 해쓱해진 얼굴로 싱글대며 남부 지부에 차려 둔 자신의 조그만 임시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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