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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82화 (782/805)

782화

그날은 날씨부터 그리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꾸물거려 영 불길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갑자기 쏟아부었다.

“키올레. 네가 이번에 남부에 갈 황궁기사단의 대표로 확정되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수락한 바이니 당장 준비하여 내일 떠나도록 하거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남부라니요?”

“이번에 남부에서 들려온 흉흉한 소식들을 듣지 못했느냐? 그와 관련된 일이다.”

키올레도 귀가 있으니 남부에서 어떤 소식들이 들려왔는지는 당연히 알았다. 몬스터가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나타나고, 헤른 공작가의 누가 죽고, 마병단이 활약하고, 펠레타 공작이 알고 보니 그냥 신검의 주인이 아니라 소드마스터였고 어쩌고저쩌고.

마병단의 활약이야 그 괴물 같은 유더 아일이 거기 있으니 당연하다 여겨 고개도 안 돌렸으며 펠레타 공작의 소문은… 놀랍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라 현실감이 없었다. 나머지는 누가 죽든 말든 그와는 크게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 일로 아버지 디아카 공작이 사람을 보내려 한다는 것도 알기는 했지만… 설마 그걸 자신에게 맡기려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키올레는 뻣뻣한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처럼 가족이 모두 모인 식사 도중이었기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 상태였다. 암묵적으로 차기 후계자의 역할을 수행 중인 장자 키론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엄숙한 얼굴로 앉아 있기만 했지만, 그 아래 형제들은 달랐다.

모두가 은은한 경악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고 키올레를 노려보았다. 특히 아버지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지 못하는 셋째의 질시는 눈빛만으로 사람을 불태우는 게 아닌가 싶은 수준이었다.

안하무인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키올레는 그 정도 시선 따위에 겁을 먹거나 움츠러들진 않았으나 이 상황 자체는 그에게도 내키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여태 디아카 공작이 키올레를 수도 밖으로 내보낼 때는 대부분 사고를 쳐서 벌을 주려 할 때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수도를 떠났던 때는 강제로 훈련을 빙자해 동부로 갔던 때인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다가도 그때의 사건만 떠올리면 벌떡 일어날 정도이니 말 다 했을 터였다.

‘난 수도를 떠나는 것 자체가 싫어! 길은 질척거리지, 잠도 편하게 못 자지, 하나같이 불편하기만 하잖아! 게다가 거기엔… 그놈도 있다고!’

그놈! 마병단의 그 악마! 유더 아일을 떠올리며 키올레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무의식중에 깊이 각인된 공포는 언제 어디서든 유효했다.

키올레는 고심 끝에 일단 최대한 좋게 거절의 뜻을 밝히려 했다.

“아버지.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이런 일은 저보다는 다른 형님, 누님들이 더 적격이지 않을까요?”

“집을 떠나기 싫다는 떼를 그런 식으로 쓰는구나. 물론 나도 네가 완벽하게 할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현 상황에서 우리 가문 유일의 황궁기사단 소속인 너만큼 적절한 인선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얕은 속내는 곧바로 디아카 공작에게 들통났다. 키올레가 찔끔하여 입을 다물자 그를 질시하던 형제들의 눈빛에 그럴 줄 알았다는 안도가 조금 차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키올레를 보는 디아카 공작의 눈빛이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저는 현재 황태자 전하의 호위가 아닙니까. 제가 없으면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불편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미 너를 보내는 데 동의하셨다.”

“예? 저, 정말입니까?”

주변 시종들조차 안 믿고 수시로 패악을 부리는 황태자가, 그나마 곁에 두는 자신을 보내는 데 정말 그리 빨리 동의했단 말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이번에 네가 선택된 건 곧 황태자 전하께서 제국민들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는 걸 바로 이해하고 계시더구나. 그 건방진 치료사들이 다른 건 몰라도 전하의 정신을 이전처럼 맑게 돌려 둔 것만은 분명해 보이니 다행한 일이지.”

“…….”

“이미 황제 폐하의 윤허도 내려온 상황이니 잡소리 말고 얌전히 준비해서 가거라.”

‘젠장……!’

키올레는 결국 아버지를 이기지 못하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디아카 공작은 그 모습을 보며 제법 흡족한 기색으로 눈을 가늘게 휘어 웃었다.

“거기 서라, 키올레.”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빠져나오던 중, 키올레는 셋째 형에게 붙잡혔다.

“아버지께서 저번 일로 좀 좋게 보아 주신다고 기고만장하지 말아라. 이건 단지 시험일 뿐이니까. 네 녀석이 좀 철든 척 군다고 그 덜떨어진 근성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예전 같았으면 뭐라고 한마디 대꾸했을 텐데, 타인에게 폭언을 할 수 없게 된 뒤로 키올레는 참을성이 강제로 늘어났다. 키올레가 찌푸리면서도 그를 무시하고 나아가려 하자, 셋째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가 어렸다.

“네놈이 아무리 귀여움받아 봤자 큰형님의 자리를 빼앗을 순 없단 말이다! 네 어머니의 천한 출신을 생각해 보라고!”

“…….”

그 말에 키올레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셋째 형을 바라보았다. 찌푸린 눈을 보면 화가 난 건 분명한데, 이번에도 맞서 대거리하지는 않았다. 불과 1년 전쯤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인내심이었다.

셋째가 저도 모르게 키올레의 성장을 느끼며 움찔하거나 말거나, 키올레는 필사적으로 서약 조건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데 뭐 어쩌라고. 그게 이번 일하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큰형님 자리 뺏고 싶다고 언제 그랬어?”

“뭐, 뭐?”

“증거 있으면 얘기하고, 없으면 그냥 가서 잠이나 자. 디아카 가의 일원이면서 아랫것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아버지에게 인사 한마디 못 돌려받는 형하고 달리 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피곤하니까 이만 갈게.”

증거 없는 헛소리는 관두고 꺼지라는 뜻을 이렇게 길게 돌려 말하고 있자니 속에서 피눈물이 났다. 그러나 남들의 눈에 비친 그의 뒷모습은 어느샌가 훌륭하게 성장하여 분노를 삼킬 줄 알게 된 청년처럼 듬직해 보였다.

셋째는 자신이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뒤늦게야 주먹을 쥐고 고함을 질렀다.

“너… 감히 네가…… 키올레! 거기 서! 이 건방진 자식. 내가 네 실체를 반드시 꼭……!”

그가 무어라 떠들든 말든 키올레는 우울하게 방으로 돌아와 남부로 갈 준비를 했다. 그의 하인들은 어느새 듬직해진 막내 도련님이 드디어 가문의 큰일을 맡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무어라 축하의 말을 건넸으나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출발은 내일이었기에 오늘까지는 출근을 해야 했다. 광휘궁으로 출근한 키올레는 자신이 없는 사이 황태자의 호위를 맡을 기사들의 얼굴을 보고, 인수인계 같지도 않은 업무 인계를 조금 해 주었다.

떠나기 전 인사를 올리기 위해 만난 황태자의 얼굴은 조금 파리하긴 했으나 평소보다 몹시 침착하고 멀쩡해 보였다. 그가 얼마 전 사기꾼 치료사 놈들을 구명하기 위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관대한 노력을 해 주었었다는 걸 아는 키올레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영 찝찝함을 거두기 힘들었다.

‘그 사기꾼들에게 아버지께서 세뇌되지 않은 건 분명해.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확신하기 어려웠다. 마음은 영 찝찝한데, 마주하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은 멀쩡해 보여 더욱 그랬다.

얼마 전 황태자는 디아카 공작이 준비하여 넘겨준 이들의 명단으로 태양궁 침범 사건의 범인을 잡았다는 보고서를 써 냈다가 반려당했다. 그 뒤,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진짜 범인들과 관련된 익명의 제보가 황태자의 손에 날아들었다.

키올레는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거기엔 황태자의 사기꾼 치료사들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던 것 같았다. 황태자가 불처럼 화를 내며 곧장 치료사들을 음해하려 하는 정보를 넘긴 거짓말쟁이를 잡겠노라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시종 몇 사람이 또 갈려 나갔다.

이전의 황태자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사기꾼들도 함께 먼저 의심했을 텐데, 그는 궁을 떠나 한참 돌아오지 않는 사기꾼들을 찾지도 않고 관대하게만 굴었다. 그 외에도 여러모로 이상한 태도가 많긴 했지만 이번에 그놈들을 디아카 공작의 손에서 구명해 남부로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 게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진짜…… 이미 당하신 건가?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또 아버지와 디아카는…….’

그때, 황태자가 입을 열면서 키올레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키올레 경. 내일 떠나게 되었다지. 출발이 이르군.”

“아. 예. 그만큼 남부의 상황이 급박하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은 알고 있네. 아쉽지만 우리 제국민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으니 당연히 나도 이 제국의 기둥으로서 한몫을 해야지. 경의 어깨 위에 내 이름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 출발은 정확히 언제쯤 할 생각이지? 역시 새벽인가?”

“네. 해가 뜨기 전 출발할 생각입니다.”

키올레는 황태자가 평소 그런 질문을 할 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한 채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고생이 많겠군. 남문을 지나갈 때 통행에 어려움이 없도록 내 미리 그쪽에 언질을 해 두었네. 책임자의 얼굴만 한번 보고 인사를 나누면 바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까지……. 감사합니다, 전하.”

“무얼. 경은 나를 대표하여 가는 것이기도 하니 이 정도쯤은 당연한 일.”

황태자가 미소를 지었다. 키올레는 찝찝함을 삼키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수도를 빠져나가기 직전 마지막 관문인 남문 경비대.

책임자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출발할 때까지도 키올레는 금방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수도를 완전히 떠나고 한참이 지나 첫 번째 숙소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짐만 따로 보관하는 짐마차의 문을 직접 열려다가 쥐새끼처럼 숨어든 침입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누구냐!”

검을 겨누고 가슴을 차 넘어뜨렸다. 암살자일지 모른다 생각하여 빠르게 제압하고 몸을 감싼 천을 벗긴 키올레는 그 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의 얼굴이 드러나자 기절할 듯 놀라 소리쳤다.

“……전하!”

“크윽, 콜록……. 감히……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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