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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81화 (781/805)

781화

자신들의 경험이 있으니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레블린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마이라 1공녀가 각성자가 아니란 것만 빼면 정말 좋은 마음가짐이라 할 만했다.

“마이라 1공녀는 우리의 협력자가 맞지만, 각성자는 아니야.”

게다가 그녀에겐 이제 남은 경쟁자조차 없어 큰일이 없는 한 차기 헤른 공작의 자리가 거의 확실하게 약속된 상황이었다. 각성자라고 해도 마병단에 들어올 수는 없었으리라.

“아, 그렇구나. 하긴… 우리 같은 경우가 그리 많을 리 없는데. 그래도 좋은 분이라니 궁금하네요. 다음에 볼 수 있으려나.”

레블린이 머쓱해했다. 마음이 앞선 티를 냈다고 생각해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유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있었던 덕분에 이번 2기 단원 모집에 이전의 몇 배나 되는 귀족 출신 지원자가 몰렸어. 헤른 가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적응 교육에는 같은 입장에 있었던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가능성이 커.”

“아…….”

레블린의 얼굴이 도로 훅 밝아졌다. 아무래도 그가 너무 기뻐하는 것 같아서, 유더는 일단 냉정한 소리도 하나 끼워 넣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신입인데 그런 일까지 맡으면 개인 훈련을 할 시간이 부족해질 텐데. 괜찮겠어?”

“마병단이 단체 훈련만으로 따라가기 어려운 곳이란 건 그간 지켜보아서 잘 알아요…… 아니, 알아! 하지만 단내 적응도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란 것도 아니 둘 다 열심히 할게.”

이건 걱정이 아니라 현실 자각에 도움을 주기 위한 말이라고 답하려 했지만, 유더는 즐거워 보이는 레블린의 얼굴을 보고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정말 어떻게 아페토 같은 가문에서 저런 아이가 나왔을지 의문스러울 만큼 성격이 좋은 소년이었다.

프루엘레와 레블린은 이후 자신들의 가문에서 있었던 일도 간략히 알려 주었다. 남부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니폴렌을 제외한 프루엘레의 나머지 동생들은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비록 타인 공작은 아직도 제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일을 저지른다지만, 프루엘레의 태도를 보면 그것조차도 그에겐 즐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처음엔 협박 편지 정도나 보내더니, 요즘은 사람을 시켜서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기도 하더라고. 그나마도 가문의 하인들은 매수를 못 해서 외부 잡배를 고용했다지 뭐야.”

“…괜찮은 건가? 피해 정도는?”

“괜찮아. 다친 사람도 없어. 그럴 줄 알고 우리도 준비를 다 해 두었거든.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철저하게 증거를 남겨서 매번 친절히 추가 고발을 해 주고 있어. 이럴수록 자기 손해라는 걸 어머니처럼 빨리 깨달을 때도 되었는데… 뭐, 알 때까지 알려 주는 것도 자식 된 즐거움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 프루엘레의 눈빛은 밝고도 차가웠다.

레블린 쪽의 상황은 프루엘레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로 에이셰스 형의 사람들만 그분을 돌보고 있어서 난 한 번도 그분을 뵌 적이 없어. 가끔 가문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아버지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치긴 하는데…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형도 그러길 더 바라는 것 같고.”

자신은 이미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니, 현 공작과 에이셰스가 있는 한 다시 발을 들일 일이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인 듯했다.

레블린은 모르고 있겠지만, 아페토 공작이 쓰러진 건 에이셰스가 공작위를 노려 손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쥔 가문을 에이셰스 본인도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할 운명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아 보였지. 제 숙부가 되도 않은 연구를 하다 죽는 꼴을 보고도 제 몸이 낫기 위해서라면 또다시 그 방법을 떠올리고도 남을 놈이니… 슬슬 레블린에게 경고해 두긴 해야겠어.’

유더는 생각을 정리한 뒤 레블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레블린.”

“네? 아니. 으음, 응?”

“나는 외부인일 뿐이지만, 그쪽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별개로 관심을 아주 끊지는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괜찮았을지라도 추후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무것도 모른다면 불리해지는 건 네가 될 테니까.”

에이셰스가 레블린이 가문에 관심도 두지 않고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레블린이 따라 줘야 할 필요는 없다. 당장은 조용할지라도 그는 레블린의 적이고, 적이 바라는 건 곧 이쪽에게 해가 되는 일이었다.

최대한 뭉뚱그려 경고를 전한 뒤, 유더는 한마디를 보탰다.

“…물론 그렇다 해도 너는 마병단의 일원이니 마병단의 모두가 널 돕겠지만.”

“사실 그건 나도 레블린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말이야.”

프루엘레가 시기적절하게 유더의 말에 부드럽게 제 의견을 보탰다.

“가문에서 나온 입장이라 두 번 다시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지만, 아무리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남들은 쉽게 믿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알지? 네겐 널 믿고 여기까지 온 니온도 있고, 우리도 있으니까 돌아보는 걸 너무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프루엘레에게는 그래도 가문에 남겨 두고 온 동생들이라는 절대적인 조력자가 존재하기에 그쪽의 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레블린에게는 가문에 남겨 두고 온 조력자가 없었다. 그건 큰 차이였다.

“아…….”

인형처럼 고운 소년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가는, 이내 굳세게 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아. 보기 싫다고 관심을 끄고 산다 해서 내 출신이 그곳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에이셰스 형이 아니라도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언제든 날 찾아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지. 응. 알겠어. 그렇게 할게. 모두 고마워.”

레블린이 경고를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유더는 에이셰스나 아페토 쪽에서 혹여나 수상한 행동을 하려 한다면 바로 마병단에 알리라고 말했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더!”

“칸나?”

“이제 그쪽 이야기는 다 끝난 거지? 그럼 내 부탁도 하나 들어줄 수 있어?”

주변에 있는 이들도 전부 믿을 만한 동료인데 여태까지 기다린 걸 보면 상당히 비밀스러운 용건인 듯했다.

“뭔데?”

“호산라한테 가 줬으면 해.”

의외의 이름에 유더가 눈을 깜박이자 칸나가 가까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사실 호산라가 능력이 회복된 이후부터 널 좀 보고 싶어 했거든. 여기 오고 나서 제일 먼저 요청한 게 널 만날 수 있냐는 거였어.”

“……나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는 했다.

“세뇌가 점차 풀리면서 뭔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긴 것 같아. 그런데 나보다는 아무래도 네 쪽이 더 믿음직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별일이군.’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도록 도움을 준 게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한과 대립했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인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로 성격 좋은 칸나나 단장 키시아르가 아니라 자신을 원했다는 건 뜻밖이었다. 유더는 잠시 자신이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가늠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하지만 지금 말고, 이따 밤에 찾아가겠다고 전해 줘. 지금은 다른 일이 많아서.”

호산라. 나한의 유일한 측근이자 같은 나그란의 별 출신들도 모르는 그의 과거를 아는 자.

과연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유더를 부르는 것일까.

유더는 짐작할 수 없는 의문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

수도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하는 마차 안.

디아카 가문의 문장이 떡하니 새겨진 호화로운 마차 안에서 키올레 다 디아카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대체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는 언제나 가문 내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는 늦둥이 막내아들의 위치를 고수하며 살았다. 중요한 일은 언제나 아버지와 손위 형, 누나들이 했으므로 키올레가 할 일이란 그냥 매일 검이나 수련하고 황궁기사단에 출퇴근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

왜 자신이 디아카 가문과 황궁기사단의 대표 겸 황태자의 뜻을 전하는 이라는 거대한 직함을 지고 이 마차 안에 타고 있는 걸까?

그것도 가고 싶지도 않은 남부를 향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지, 키올레 경?”

차가운 목소리가 키올레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키올레는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고급스러운 망토를 쓴 소년이 팔짱을 끼고 앉은 채 키올레를 차갑게 보고 있었다.

분명 아름답지만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사나운 얼굴을 보며 키올레는 절로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도 미칠 것 같은 지점이 많았지만 저 소년은 그중에서도 최고로 키올레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카치안 라 오르.

지금 여기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 나라의 유일하고 고귀한 황태자 전하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 그냥 잠깐 생각하던 게 입 밖으로 나온 겁니다.”

대체 카치안 황태자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건 간단했다.

그가 자신을 치료해 준 ‘현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궁을 탈출하여 키올레의 마차에 몰래 올라탔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정말 미치겠군!’

키올레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출발하던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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