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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778화 (778/805)

778화

“다시 만나 기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단장님은 어디 계셔?”

웃고는 있지만 조금 피로해 보이는 수도 단원들 사이로 키가 훌쩍 큰 여자가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긴 갈색 머리를 위로 질끈 묶은 에버였다.

“음… 아마 오전 일정을 끝내고 임시 집무실에 계실 거야.”

에버는 남부 지부의 단원들에게 키시아르의 임시 집무실 위치가 어디인지 들었다. 간단히 감사를 표한 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수도에서 온 이들이 줄줄이 움직이는 모습은 상당한 장관이었다.

“저분들은 뭐야? 뭐? 수도에서 지원을 오셨다고?”

뒤늦게 수도에서 지원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남부의 합격자들과 제국군이 멀찍이서 그 모습을 구경하며 소리 죽여 떠들어 댔다.

그들의 눈에 비친 새로운 마병단원들은 하나같이 절도 있고 대단해 보였다. 다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멋있다… 그런데, 저 뒤에 따라오는 분들은 뭐지?”

이런 곳에 따라오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의 커다란 짐까지 모두 바퀴 수레에 싣고서 낑낑대며 나아가는 통통한 얼굴의 젊은 마법사.

그들의 뒤로는 세상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의 잿빛 머리 미청년이 화난 사람처럼 땅을 차며 걸었고, 젊은 사제가 뒤를 따라붙으며 웃는 얼굴로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제의 곁에는 금갈색 단발머리가 눈에 띄는 작은 여자와 반대로 껑충 큰 키와 대단한 미색을 지닌 붉은 머리 남자가 함께 걷고 있었는데,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가린 누군가를 보호하듯 교묘하게 둘러싼 상태였다.

마지막에 선 단발머리 여자와 붉은 머리 남자는 마병단복을 입고 있으니 단원이 분명한데도 왜 다른 동료들과 떨어져 맨 마지막 줄에서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러모로 정체가 궁금한 조합이라 여기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던 사람들은 마치 그것을 알아챈 것처럼 홱 고개를 돌린 잿빛 머리칼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쳐 움찔 놀랐다.

“뭘 봐?”

“허억…….”

사나운 목소리에 찔린 이들이 맹수를 만난 초식동물 떼마냥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만스럽게 콧등을 찡그리고 있던 남자가 문득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누군가를 향해 손짓을 했다.

“야, 거기 사슴뿔.”

“히이익, 저, 저요?”

지목당한 건 엘포킨스였다. 수도에서 새로운 마병단이 왔다는 소식에 얼른 구경하러 왔던 그는 남자의 지목에 기절할 듯 놀랐다.

“그래. 너, 상태가 왜 그래?”

“예? 제가 나쁘게 쳐다보려 한 게 아니라, 그냥, 시, 신기해서 잠깐 보려고 한 것뿐인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 뭔 헛소리냐.”

인상을 찌푸린 남자의 얼굴은 참으로 잘생겼지만 엘포킨스에게는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 그가 눈물을 흘릴 뻔했던 찰나, 곁에 있던 사제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논 님. 그렇게 말하면 누구나 무서워해요. 거기 계신 분의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셔야죠.”

“그렇게 말했잖아?”

“언제요?”

“방금.”

“그건 아니죠. 저분의 표정을 보세요. 전혀 못 알아들으셨을걸요. 저나 다른 분들이야 이논 님 화법에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처음 보는 분들은 그러기 어렵죠. 칸나 님과 가케인 님한테도 물어보세요. 누구 말이 맞는지…….”

“오냐, 그래. 꼬맹이가 이제 좀 컸다고 날 가르치려 드는구나.”

구원의 손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젊은 사제는 친절해 보였지만 말이 많았다. 그사이 엘포킨스의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존재감을 낮추며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러나 뿔에 날개까지 합쳐 너무나 눈에 띄는 외견을 지닌 엘포킨스는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냥 가 달라고 사정하고픈 마음을 꾹 삼키고 그저 꿈지럭대기만 했다.

그때였다.

“……이논?”

“유더 님!”

“유더!”

엘포킨스의 등 뒤에서 구원자가 나타났다. 이전에도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찬란한 구세주는 오늘도 깔끔한 단복 차림에 무얼 해도 땀 한 방울 흘린 자국이 보이지 않는 창백하게 하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엘포킨스와 그 주변을 보자마자 바로 상황을 파악한 듯 짧게 혀를 찼다.

“왔으면 짐부터 풀고 쉬어. 일부터 하지 말고.”

“그러려고 했는데 저놈이 눈에 띄잖아. 저놈 대체 뭔데 저렇게 상태가 엉망이야? 어디서 열 번쯤 죽을 뻔했던 놈을 건져 오기라도 했어?”

그 말을 들은 유더는 엘포킨스를 돌아보며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거의 비슷해. 이번에 불법 격투장에서 빠져나온 각성자 중 한 명이야. 2기 단원 모집에 지원해서 합격했고.”

엘포킨스는 그들이 나누는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격투장에서 빠져나온 이후 신력도 많이 받고 이제 아주 멀쩡해졌는데 왜 상태가 안 좋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저, 저는 하나도 안 아픈데요……. 그냥 가면 안 될…….”

“그럴 줄 알았다!”

그냥 가면 안 되냐고 물으려던 소심한 목소리는 이논의 외침 아래 곧바로 박살 났다. 이논은 엘포킨스를 깡마르고 비루먹은 망아지 보듯 보며 혀를 쯧 하고 찼다.

“들어오면서 보니 여기 저런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저놈이 그중에서도 제일이야! 글렀어 아주!”

“제, 제가요……?”

“치료는 가능할 것 같아?”

엘포킨스의 말을 무시하고 유더가 물었다.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못 할 정돈 아니지. 누굴 데려와도 너보단 나을 거다. 수도 밖으로는 부르지 말라니까 굳이 왜 부르나 했더니 어디서 이런 놈들만 줄줄이 데려와서……!”

“그것 때문에 부른 것만은 아닌데.”

“뭐! 또 뭐 하려고!”

무서운 미남은 엘포킨스의 구세주에게도 가차 없었다. 엘포킨스는 이논이 유더의 뺨을 꽉 잡아 늘리는 모습을 보며 기겁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더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지켜보는 엘포킨스에게는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허어억…….”

“자주 저럴 테니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때, 뒤에서 누군가 등을 토닥이며 말을 걸었다. 단발 머리칼을 지닌 여자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귀엽고 명랑해 보였지만 어쩐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느껴져 엘포킨스는 살짝 움츠러들었다.

“응? 겁먹지 마세요. 나쁜 사람들 아니니까. 저분은 마병단의 하나뿐인 공식 의료부 약사님인 이논 님이시고요, 저 사제님도 마찬가지로 한 분뿐인 의료부 소속 사제 루산 님, 저쪽 빨간 머리는 신과의 가케인 볼룬발트, 그리고 저는 정과 부단장 칸나 완드예요. 정체를 알고 나니 안 무섭죠?”

그 사이에 끼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가린 사람의 정체는 교묘하게 넘어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엘포킨스에게는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어… 아아……. 네…….”

“그건 그렇고 불법 격투장에서 탈출한 뒤 바로 지원해서 2기 단원에 합격했다니 대단하네요. 유더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좋은 실력을 지녔다는 거니까 앞으로 기대해도 되겠어요!”

뭐지? 아까 자신이 2기 단원에 합격했다는 얘기 외에 유더가 자신의 능력을 좋게 보아 주었더라는 그런 이야기까지 오갔었던가? 엘포킨스는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순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운이 좋았지요. 감사합니다…….”

“운만으로 그렇게 될 순 없어요. 좋은 결과를 맞이할 인연도, 실력도 모두 있었던 거죠.”

그 말을 한 건 칸나 곁에 말없이 서 있던 가케인이었다. 이논과는 또 다르게 외모가 눈에 띄는 사람이라 엘포킨스는 절로 주눅이 들었지만, 그의 선량한 미소를 보자 어쩐지 감동으로 마음이 일렁였다.

“그, 그런가요……?”

“그래요. 지금 이논 님이 저러시는 건 그냥 몸 상태를 걱정해서 치료하고 싶다는 뜻이니까 겁먹지 말고, 그냥 편하게 돌아가도 돼요. 당신은 다 나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분께선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귀신같이 알아보시거든요.”

그걸 마병단원들끼리는 이논 님의 마법의 눈이라 부른다며 칸나가 비밀을 말하듯이 씩 웃었다. 엘포킨스는 어리둥절한 상태로도 그녀를 따라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아무튼 필요하면 나중에 이논 님이 알아서 부르실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엘포킨스는 몸을 돌려 그들을 뒤로했다. 다행히 붙잡는 목소리는 없었다. 중간에 고개를 돌려 슬쩍 본 곳에서는 유더에게 다가가 편하게 포옹하고 어깨동무를 한 칸나와 가케인,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퉁명스레 팔짱을 낀 이논이 있었다.

사실 엘포킨스는 단장님께서 왜 굳이 수도에서 그들을 불러들였는지, 앞으로 무슨 일들을 예정하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자 뭔가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더의 얼굴이 남부의 다른 이들과 있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늘 비슷비슷한 무표정이라 태도를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신이 내린 전투의 사자처럼 강인하기 그지없는 그에게도 ‘지원’은 분명 필요했던 것일 테다. 그래서 저 사람들이 온 거겠지.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엘포킨스는 이전보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리고 더욱 재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수도에서 남부 샬로인으로 마병단이 내려온 첫날 오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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