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77화 (777/805)

777화

아무도 찾지 않는 사막 사이에 숨겨진 나그란의 별 남부 거점 마을.

그곳은 외부의 아픔을 피해 도망친 각성자들에게 한때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을씨년스럽게 변하여 제대로 된 사람 소리 하나 듣기 힘든 곳이 되어 있었다.

마을을 외부에서 숨겨 주던 힘조차 거의 사라져 버린 그곳에, 넝마 같은 거적으로 몸을 가린 누군가가 들어섰다. 얼굴까지 가렸음에도 그 남자가 팔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에 발까지 절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불길하게도 질질 끌리는 소리를 따라 진득하게 밴 피와 고름의 냄새가 났다.

기력 없이 이 빠진 낡은 검 하나에 기대어 앉아 있던 각성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막 누구냐고 물으려던 순간, 그가 먼저 낡은 천을 뒤집어 얼굴을 드러내었다.

일그러진 화상 흉터로 뒤덮인 한쪽 얼굴과 그와 반대로 깎은 조각처럼 잘생긴 반대쪽 얼굴. 그것을 보자마자 각성자는 크게 외쳤다.

“……나한!”

현자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남자가 드디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한의 얼굴은 떠나기 전보다도 더욱 초췌했고 눈은 알 수 없이 가라앉은 채 어둠으로 넘실거렸다.

나한에게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도 저도 모르게 기가 질려 창백해진 각성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상태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함께 갔던 형제자매들은?”

“…….”

“설마…… 현자님도 못 만난 건 아니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각성자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던 나한은 드디어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만났어.”

“만났다고? 그러면 대체 왜 네가 그 꼴로…….”

그 말을 들은 나한의 한쪽 입술 끝이 문득 비틀렸다.

“현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다. 그러니 나도 더 이상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현자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니?”

나한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마을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가 들어서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어 떠들썩했었지만, 지금은 인기척이 거의 없어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간혹 보이는 이들도 나한의 곁에 금방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서 경계의 눈빛만을 보낼 뿐이었다.

나한은 그 모습을 보고 저를 뒤따라오고 있는 각성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아무도 없지? 세라는? 아무리 내가 보기 싫어도 생각 없이 마을을 비울 사람은 아닌데.”

“아, 그게……. 하아. 네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데리고 떠나고 나서 여기도 얼마나 분위기가 안 좋았는지 몰라…….”

각성자는 이 말을 할 사람을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처럼 억울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간 나한 파와 현자 파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 그로 인해 도망치기 시작한 평범한 각성자들, 그 사이를 틈타 남부 거점에 슬그머니 스며들기 시작한 남국인 상인들. 그리고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기는커녕 현자에게 연락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단 이유로 그들과 손을 잡은 세라.

그 세라가 얼마 전 현자에게서 어떤 부탁을 전달받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샬로인으로 향한 이후, 아무 연락도 없이 미귀환 중이라는 말을 들은 나한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얼마나 흉흉한지 몰라. 심지어 아픈 녀석들이 나와도 제대로 치료도 못 하고 있어. 메토, 기억해? 네가 전에 동부에서 데려왔던 몬스터 다루는 꼬맹이 녀석.”

“…….”

“그 녀석이 현자님이 떠난 이후 줄곧 상태가 좋지 않았거든. 그때 디에먼 놈이 능력을 빼앗아 가게 빌려준 탓인가… 후우. 디에먼 놈이 돌아와야 뭘 묻든 말든 할 것 같은데 안 오니까 알 수가 있어야지. 저러다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나름대로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려 꺼낸 말이었지만 나한은 그 이야기에 오히려 더욱 싸늘해졌다. 주변의 공기가 몇 도는 내려가는 듯한 침묵 속에서 각성자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던 순간, 나한이 별안간 이를 부드득 갈며 이마를 짚었다. 비틀거리는 몸뚱어리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나한?!”

“손대지, 마…….”

나한은 자신을 부축하려 하는 각성자를 피해 물러난 뒤 한참 동안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을 토했다. 꽁꽁 묶인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끔찍한 소리였다.

여기저기 비틀대며 부딪치고, 땅을 구르며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던 끝에 그는 마침내 스스로 다시 제대로 땅을 딛고 서는 데 성공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금세 아까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각성자는 그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팔도 안 좋아 보이는데, 괘… 괜찮은 거 맞는 거지? 혹시 병이라도 걸린 거라면… 히익.”

나한을 염려하던 각성자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라 헛숨을 삼켰다. 실핏줄이 온통 터져 붉게 물든 눈이 스산했다. 같은 편임에도 한순간 너무나 무섭게 여겨져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예전엔 아무리 눈이 돌아가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겁에 질린 각성자를 보면서도 나한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퀭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낮게 쉰 목소리를 흘렸다.

“전에도, 종종 이렇게 머리가 아플 때가 있었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아프기 시작한 건… 이번에 현자를 만난 이후부터야.”

“그, 그래?”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이 고통이 끝날 때마다… 머리가 깨끗해지며 계속해서 뭔가를 깨닫게 되니까.”

각성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지만 나한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각성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마을에 남은 형제자매들 중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두 모아 줘.”

“모아 올 수야 있지만 세라도 없는데… 뭘 어쩌려고?”

“우리가 본디 하려던 일을 해야겠지.”

그 말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나한의 사상에 늘 동조해 왔던 각성자는 나한이 저 상태가 되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예전의 나한은 이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었다. 그때 그는 나름대로 농담을 할 줄 아는 여유가 있었고, 지니고 있던 본연의 차가움도 무리를 이끄는 이로서 지닌 매력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때는 그의 곁에 늘 소심하고 착한 호산라가 있기도 했다.

호산라는 정말 유용한 능력을 지닌 데다 나한 외에도 모두에게 친절했다. 그때 실종된 동료들이 많아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서부에서 마병단에게 잡혀 죽은 건 모두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각성자는 새삼 호산라가 없는 나한에게 다가가기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현자님을 만났다 그냥 왔다면서. 그래도 괜찮겠어? 다른 동료들은 언제 오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만으로는 머릿수가 많이 적을 텐데.”

“나와 함께 갔던 형제자매들은 다시 오기 힘들 거야. 현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거든.”

현자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는 나한의 눈빛이 일순 극도로 차가워졌다.

“예기치 못한 일?”

“대신 중부 거점에 있는 형제들에게 오면서 연락을 넣어 두었으니 곧 오겠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각성자를 향해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똑똑히 전해. 마병단의 협력자 명단에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이 떴다고.”

“……뭐?”

“내가 한 짓은 아니야. 그렇다면 누가 했을까?”

“…….”

각성자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이성적으로 낼 수 있는 결론과 오랫동안 뇌에 파고들어 있던 세뇌가 충돌한 탓이었다. 그 말이 귀를 통과하며 자아내는 감각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머리를 후비며 일순 두통이 강렬하게 일었다.

“아……, 어……? 어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한, 나는 도무지……. 나그란의 별이, 뭐?”

“나는 권력과 손을 잡은 이들과 함께 갈 생각이 없어. 우리는 우리끼리 각성자의 세상을 찾으러 떠나게 될 거다.”

나한은 고통스러워하는 각성자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그 전에 우리를 배신한 이가 찾으러 온다면 그것도 좋겠지.”

***

키시아르가 마병단 본부에 ‘호산라의 능력을 사용하여 남부로 오는 것을 승인한다’는 서신을 보내고 나서 정확하게 4일째의 아침.

마병단 남부 지부 앞에 낯선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단장님! 저희가 왔습니다!”

수도에서 온 동료들의 모습에 남부 거점을 지키던 단원 모두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언제 온 거야? 우린 온다는 소식도 못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여기까지 이렇게 빨리 왔어?”

“다시 만나 기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단장님은 어디 계셔?”

웃고는 있지만 조금 피로해 보이는 수도 단원들 사이로 키가 훌쩍 큰 여자가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긴 갈색 머리를 위로 질끈 묶은 에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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