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화
“공작님. 돌아오셨습니까.”
해가 높이 떠오른 낮의 마병단 남부 지부 복도.
밤새 외부에 다녀왔다는 사실 따위는 짐작하지 못할 만큼 말끔한 얼굴로 걷고 있던 키시아르는 다가와 인사하는 나단 주커만을 향하여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나단. 그사이 변동 사항은 없었고?”
“오늘 오전 부로 샬로인 내의 불법 격투장은 거의 단속을 완료했습니다. 그중 각성자를 강제로 억압해 두고 있었던 것이 발각된 업장 5곳은 샬로인 치안대에서 넘겨받아 검거했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마약도 모두 몰수한 상황입니다. 전부 질 낮은 등급의 칼라네사였고, 남국인 상인들이 유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잘 되었군. 남부 사람들의 반응은?”
“몹시 뜨겁습니다. 칼라네사가 불법 격투장 위주로 막 유통되기 시작하던 참이었기에 그것을 막아 냈다는 점에서 특히 좋은 반응이 오고 있습니다. 이번 몬스터 처리 건으로 얻은 긍정적 인식까지 더해진 덕분인지 마병단이 단속 활동을 벌일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이 대폭 늘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만으로 단번에 격투장 문화를 뿌리뽑기는 어렵겠지만 해당 부분은 남부 지부가 앞으로 얻을 성과 요소로 좋은 목표가 될 테니 괜찮겠지.”
그들은 자연스럽게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주변을 지나며 키시아르를 알아보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다른 사람들이 많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말의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검의 극의에 달한 사람끼리는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여도 그 조그만 기척만으로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키시아르는 그 방식을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바깥에서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하고는 했다.
키시아르는 조용히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나단 주커만의 보고를 이어서 들었다. 거의 모두 비슷하게 좋은 소식이었다.
우선 마병단의 인식이 대폭 좋아지면서 민심이 좋아지고 그들을 무시하던 남부 귀족들이 확실하게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특히 큰 효과를 발휘한 건 남부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헤른 가의 사람, 1공녀 마이라 엘 헤른이 마병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마병단 덕분에 2공자 아쉴라브를 죽인 범인과 협력자들을 잡을 수 있었다고 공표했다. 범인들이 감히 헤른 가 내부에서 주인을 배신했고, 하마터면 1공녀까지 음해당할 뻔했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다.
마이라가 누구인가. 수십 년 만에 태어난 귀하디 귀한 헤른의 적녀다.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부의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마병단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긴 사람들이 편견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샬로인의 영주 사콥 남작이 누키조 불법 격투장의 귀빈이었던 젊은 귀족들의 구명을 요청하다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선 사건 또한 거기에 불을 붙이기에는 충분했다. 일설에는 펠레타 공작의 신검이 신성한 오러를 내뿜으며 남작의 거짓말을 징계하려 하자 그가 혼비백산해 도망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덕분에 키시아르가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에 대놓고 의심을 토하는 자도 없어졌다.
여론이 단숨에 싹 바뀌자 그 젊은 귀족들이 속한 가문에서는 더 이상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막대한 보석금을 낸 뒤 굴욕적인 노역 봉사형 3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전 같았으면 그저 당당히 뻗대며 처벌 하나 받지 않고 빠져나왔을 이들이 벌을 받는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펠레타 공작과 그의 보좌가 남부에 온 첫날 마주했던 관리와 마법사, 상인들과의 업무 협력도 마찬가지였다.
마병단은 남부에 이미 자리잡고 있던 세력들을 무작정 적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그 협력 하나로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황제가 마병단을 앞세워 자신들을 전부 쳐내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이들도 덕분에 안심했다.
마병단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지 고작 며칠 만에 누구도 손댈 수 없었던 격투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나타났으나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고, 마병단원들은 하루 종일 샬로인을 돌며 어려운 이를 돕고 치안 단속에 힘을 썼다.
그러던 중, 오늘 새벽 샬로인에 물고기를 팔러 왔던 근처 어촌 사람들이 치안 단속을 하고 있던 옆 마을 어부의 아들, 쿠르가 싱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쿠르가를 감싸 안고 금의환향한 아들처럼 환영하며 진한 남부 억양으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떠들어 댔다. 쿠르가는 머쓱해 하면서도 그들 모두에게 흔쾌히 술을 사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나단 주커만에게서 그 이야기를 보고받은 키시아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조금 늦게 알려지기는 했지만 시기적절하게 잘 되었군.”
마병단 지부를 만들면서 지원자를 뽑을 때 그가 내건 우대조건 중 하나가 해당 지역 출신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변화가 적었던 오르 제국 사람들은 출신지를 따지는 의식이 몹시 강한 편이다. 특히 남부 사람들은 그 의식이 아주 강해서, 아무리 도움이 시급한 일이라도 타지 사람의 도움은 잘 받으려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이들에게는 마병단이 이방인이 아니라 사실 알고 보니 같은 지역 출신이었다는 정보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대놓고 알리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퍼지게 만드는 쪽이 제일 좋았다.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남부 지부의 마병단원 대다수가 남부 출신이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질 것이다.
‘…그러면 마병단을 이방인 취급하며 경계하고 의심하던 사람들의 근본적인 의식도 변화하게 되겠지.’
남부 출신의 평범한 젊은이들이 마병단원이 되었고, 황제에게 성을 하사받은 데다 경의 칭호를 받을 만큼 크게 성공하여 돌아왔다는 미담은 술집에서, 거리에서, 크고 작은 모든 골목에서 끊임없이 멋진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그건 즉 이전까지만 해도 마병단의 소식을 접하면서도 그 실체를 실감하지 못하고 어렵게만 느끼던 이들이 각성자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각성자가 되면 마병단원이 될 수 있다.
마병단원이 되면 신분 상승과 성공이 가능하다.
설령 각성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언제든 각성자가 될 수 있으며, 그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짧고 간단한 공식이 오랫동안 신분 상승의 기회 없이 정체되어 있어 현실에만 안주해 왔던 이들에게 과연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변화를 모르는 귀족들은 아직 그 사실을 잘 실감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겠지만 키시아르는 아니었다.
그는 마병단 본부가 위치해 있어 각성자를 접하기 쉬워진 수도에서 이미 얼마나 많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지부 건립을 통해 그것을 전국으로 퍼트릴 차례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키시아르는 문득 창밖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를 보았다. 유더 아일이 지부 바깥을 바쁘게 걷고 있었다. 오늘 아침 헤어진 이후 그를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게 고작 몇 시간 전임에도 키시아르는 그 검은 머리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군이 걸음을 멈추자 자연히 나단 주커만 또한 멈춰 섰다.
주군의 뜻을 잘 알아차리는 부관은 키시아르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음에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누구를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키시아르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일 때는 반드시 그 끝에 유더 아일이 있다. 어떻게 그리 잘 알고 발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리 먼 곳에서도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보좌의 모습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잠시 후 유더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나단. 마클라의 영주에게 연락을 넣어 한번 만나자고 전해라. 단, 목적은 어디까지나 마클라에 대한 펠레타 공작의 ‘투자’로 하고.”
“어제 살펴보신 지역이 그곳입니까.”
“그래. 그중 하나였지.”
키시아르는 그 외에도 유더와 함께 돌았던 지역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몇 가지 명을 내렸다. 해당 지역들의 동향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언제든 이동 경로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적인 지시였다. 유더가 어젯밤 언급했던 재해 대응의 첫 단계라 할 법한 일들이기도 했다.
현 상황만 생각하면 굳이 지금 할 이유가 없는 행동들뿐이라 다소 어리둥절할 만도 하련만, 나단 주커만은 주군의 뜻에 반하는 일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제 물러가도 좋다고 말할 줄 알았던 키시아르는 답을 들은 뒤에도 어쩐지 말이 없었다. 나단 주커만은 조용히 복도를 나아가는 사내의 뒤를 잠자코 계속 따랐다.
잠시 후, 완전히 모든 이의 기척이 사라지는 복도에 도달할 때쯤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나단.”
“네.”
“죽은 이는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지?”
그간 주군의 수많은 이상한 질문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나단 주커만도 이번만큼은 과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