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만약 반복된다 해도 이번에는 그 답대로 될 거야.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도울 테니.”
근거 없는 자신감처럼 느껴질 만큼 마냥 긍정적이고 따뜻한 말이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말이 정말이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더는 키시아르 라 오르라면 분명 자신이 말한 사항을 지킬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가볍고 허무맹랑하게만 들리는 말일지라도, 그 속에 담긴 마음까지 가볍지는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 말에 깊은 안심을 느꼈다.
만약 유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등 뒤에 모든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이가 존재한다. 그가 누구도 믿지 못할 유더의 말과 기억을 아무런 조건 없이 믿어 주는 사람이라서, 자신을 대신하여 목표를 이루어 줄 능력과 의지가 충분한 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든든히 저를 믿고 받쳐 주려 하는 사내에게 아직도 쉽사리 말하지 못할 것들을 품고 있는 제가 그만큼 조금 한심해졌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품에서 빠져나가 다음으로 향할 방향을 가늠한 뒤 힘을 사용했다. 그가 바람을 밟고 뛰어오르자 곧바로 등 뒤를 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유더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집 수십 채 정도의 거리를 순식간에 훌쩍훌쩍 뛰어넘었다. 머리 위에서 누가 날아다니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샬로인의 야간 치안대도 뛰어넘고, 도시와 외부의 경계를 가르는 벽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등불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들판을 달빛과 별빛에 의지하여 달리는 동안 계속해서 그의 뒤를 따르는 사내의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다. 집중하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작은 기척이었지만 유더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마을이 나타났다. 샬로인보다 규모가 작고 인가가 모인 시골에 가까워 보이긴 했지만 살고 있는 사람의 수 자체는 많은 편이었다.
유더는 지대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무 위에서 잠시 이동을 멈춘 뒤 키시아르가 자신을 따라 멈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금빛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지긴 했어도 이번에도 역시 그리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 보이지 않으니 약간 오기마저 생길 정도였다.
“여기가 마클라인가?”
“네.”
“항구가 인접한 곳은 아니군. 여기서 알아야 할 만한 부분은 뭐지?”
“이곳은 샬로인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터를 잡고 사는 곳입니다. 좁은 지역에 낡고 위험한 건물이 몰린 데다 보기보다 사람도 많습니다.”
“재해 이전에 몬스터만 나타나도 상황이 몹시 어려워지는 곳이란 뜻이군.”
“네. 이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치안을 유지하는 인원이 소수의 제국군밖에 없다는 것이므로, 그에 대한 대비가 우선입니다. 영주를 맡고 있는 이가 돈을 좀 밝히기는 해도 말은 잘 통하는 편이었으니 사람을 보내면 금방 해결될 겁니다.”
“그건 이전 게임에서 파악한 부분인가?”
“예. 당연하지만 지금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그때는 마병단 남부 지부가 이쪽에 있었습니다.”
“그랬군.”
왜 그때의 지부가 샬로인으로 가지 못했는지에 대해서까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키시아르라면 충분히 이유를 짐작할 테니 말이다.
“주변의 반대가 상당했을 텐데 돈을 좀 받는 대신 마병단 지부도 아무 말 없이 세우게 해 줄 정도의 인물이라면 확실히 까다롭지는 않겠어.”
보라.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걸 파악하지 않는가.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영주의 저택을 가리켰다.
“네. 영주가 머무는 곳은 저기입니다. 제국군이 머무는 곳은 그 옆이고, 그 두 곳 이외에는 솔직히 말해 제대로 된 시설이 하나도 없다고 보면 됩니다.”
“알겠네.”
유더는 다음으로 살필 곳을 향해 몸을 띄웠다. 다음 지역을 향해 가는 동안 멀리 어렴풋이 보이던 바다는 점차 사라지고, 풀과 나무 또한 드문드문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막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남부의 사막 지형을 이런 식으로 직접 파악하게 될 줄은 몰랐군. 신기한걸.”
뒤를 따르던 움직임을 조금 더 빠르게 바꾸어 유더의 바로 곁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사내가 속삭였다.
“이전에는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없지. 어릴 적 머물렀던 별궁은 바다 근처에 있었고, 말썽꾸러기 꼬마에게 위험한 사막을 구경시켜 줄 만큼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몇 번 부탁하다가 스스로 탈출해 보려 했는데, 그걸 예측한 어머니께서 이미 사람을 깔아 두셔서 실패했지. 몹시 안타까운 기억이야.”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말썽꾸러기 꼬마라 일컬으면서도 키시아르는 미소를 흘렸다.
‘이전에 황자였던 시절 머물렀던 궁에 방문했을 때 만난 시종들의 반응도 그렇고, 황자가 가고 싶다고 부탁했는데도 사막에 안 데려갈 정도였다면 정말 대단하긴 했나 보군.’
지금도 예측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황당한 언행을 자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대충 짐작은 갔다.
한편으로는 키시아르가 탈출을 감행하려 했는데 그걸 미리 내다보고 막았다는 전대 황후의 통찰력도 대단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한 번 실패했다고 그대로 하고자 하는 일을 접을 사람은 아닐 텐데. 어린 시절이라 조금 달랐나.’
“실패하고 나서 다시 시도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음… 다시 탈출하면 그때는 내가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여리고 착한 어린아이가 크게 혼날 상황이란 걸 알게 되어서 말이야. 그냥 포기했지. 내가 잠깐 재미있자고 남을 다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남부 별궁에 머물던 어린 황자를 도와준 어린아이라.
지칭하는 단어는 낯설어도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야기 아닌가? 유더의 머릿속에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혹시, 그 어린아이가… 저도 아는 사람입니까?”
“물론이네. 커서 나의 훌륭한 부관이 된 사람이지.”
“…….”
역시 그 어린아이가 나단 주커만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크고 무뚝뚝한 기사와 여리고 착한 어린아이라는 단어 사이의 괴리감이 상당했으나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전에 마법사 헬렘이 나단 주커만을 작은 어린아이처럼 귀여워하던 모습을 먼저 본 적이 있어 다행이었다.
유더가 침묵을 지키자 키시아르는 작게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남부는 아직도 고대의 신비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들 하지. 유적이 많아서 나온 말이기도 하지만 지형지물 또한 그래. 이곳은 바다가 인접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거대한 사막을 볼 수 있지. 물이 적게 나오는 곳도 아닌데 동시에 건조하고 비가 잘 오지 않아. 공존하기 어려울 정반대의 상황이 함께하고 있는 건 확실히 신비로운 일 아니겠나?”
“그러고 보면… 그렇군요.”
너무 당연해서 그다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남부는 바다와 사막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남부 사람들은 그것이 천 년 전 대멸망이 닥쳤던 때의 흔적이라 생각한다더군.”
“그건 몰랐습니다.”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사항이니까. 하지만 남부 출신들에게 물으면 조금 다를 거야. 여러 전설이 제법 많이 존재하는 모양이니까.”
유더는 힘을 사용하여 달리면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지평선을 보았다. 사막이 있는 방향이기 때문인지, 그곳에는 지평선을 가릴 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도, 나무도, 건물도 거기에는 없었다.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이 공존하는 곳이라…….’
그것을 떠올릴수록 왠지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근질거리는 기분 속에서 막 세 번째 지역에 들어선 유더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억해 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왜 그러지?”
“방금 그 말씀 덕분에 아톤과 남국인 상인들이 일을 저지를 곳으로 먼저 남부를 택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왜 남부를 택했는지 알 것 같다고?”
깨달은 사실 때문에 별안간 숨이 벅찼다. 유더는 남의 눈에 띄지 않을 곳에 멈추어 선 채 키시아르를 마주했다.
“아톤은 제게 이곳이 한없이 불균형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품은 땅이라고 했었습니다. 자신들이 한 일은 그저 언젠가 일어났을 불균형의 여파를 조금 더 얹어 주었을 뿐이라고, 모든 조건이 완비된 게 그날이었다고 말했죠. 기억하십니까?”
“그렇다고 했었지.”
“사막과 바다가 공존하는 이곳만큼 균형적이지 못한 땅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미 불균형하기 그지없는 땅이 이상균열과 몬스터, 더 나아가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곳이라면 그 녀석들이 한 일은 정말로 그저…….”
유더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언제나 그보다 잘 알고 있는 사내의 눈빛도 크게 변했다.
“사람의 힘으로 처음부터 없던 재앙과 이상 균열을 불러낸 게 아니라, 마력이든, 목숨이든 뭔가를 이용하여 이미 존재하는 ‘불균형’을 뒤흔든 것이란 거군.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그 사이엔 제법 큰 차이가 존재하니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네.”
아까까지만 해도 유더는 아톤과 남국인들이 마법진에 제물을 바치듯이 어떤 조건을 충족하여 이상 균열과 몬스터를 불러냈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왜 그들이 굳이 남부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이곳에는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이미 충분하였고, 남국인들이 그저 거기에 불씨만 던졌을 뿐이라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0에서 10을 만드는 것보다는 5에서 10을 만드는 게 쉽지. 5가 존재하는 곳을 미리 알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야.”
“그렇습니다. 아톤과 그놈의 배후가 ‘언젠가 일어났을 불균형의 여파’가 그런 식으로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면, 그건 즉…….”
“이전 게임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던 모든 곳들도 그들이 이미 알고 있으며 언제든 이번 일과 같은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겠군. 그들의 말마따나 불균형을 뒤흔들 수만 있다면 말이야.”
유더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이전 게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상황에 따라 이번처럼 훨씬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유더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들은 빠르게 나머지 지역을 돌고 나서 샬로인으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 어두웠던 밤이 한층 옅어지며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샬로인의 문을 재차 뛰어넘어 마병단 남부 지부의 지붕에 착지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뜬 뒤였다.
“정확하게 반나절 정도 걸렸군.”
키시아르가 속삭였다.
“피곤하진 않나?”
“괜찮습니다. 단장님께서는…….”
“나도 물론 괜찮고말고.”
이제 들어가서 쉬자거나, 식사를 하자고 제안할 거라 생각했는데 키시아르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한참 동안 유더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까 나눈 대화 덕에 나도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키시아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옛 사람들은 악몽이란 태양신에게 쫓겨난 검은 달이 숨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안개와 같은 손길이라 생각했다지.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말이야.”
“…….”
“문득 네가 좋지 않은 꿈을 꾸었던 그날이 ‘불균형의 여파’로 이상 균열이 열리고 몬스터가 나타났던 날이기도 하다는 게 생각나더군.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