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70화 (770/805)

770화

“자. 꼭대기까지 올라는 왔는데, 이제 어떻게 갈 셈이지?”

낮에 엘포킨스가 수리를 마친 지붕에 선 키시아르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유더는 아직까지 지우지 못한 약간의 망설임을 담아 입을 열었다.

“일단 샬로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신전 지붕 종탑까지 갈 겁니다. 이후 항구가 이어지는 곳을 따라 남문을 넘고, 하늘 높이 올라가 마클라, 투반, 슬루반, 알사라를 이어 도로 샬로인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 바퀴를 돌 생각입니다.”

그 네 개의 지역은 이전 생에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이상 균열을 목격했다던 사람이 한 명 이상 나왔던 곳이다. 재앙의 피해 또한 다른 지역보다 더 크게 입었고, 지형적으로도 서로 지나치게 가깝지 않으면서 주변의 다른 마을과 왕래하기 좋았다.

“과연. 그렇게 하면 가는 도중 거슬릴 일 없이 간략하게나마 최대한 빠르게 남부 전체를 살필 수 있겠군.”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출발하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단장님의 힘으로 허공에 뜨는 게 가능하다고는 해도, 속도가 빨라지면 제어가 어려우실지도 모릅니다.”

키시아르는 밀고 당기는 힘을 이용하여 몸을 하늘 높이 띄울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허공을 걷는 것도 가능했지만 걷는 것과 날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몸을 지상에서 밀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힘을 사용할 텐데 거기서 속도까지 높였다가 부담이 가해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그저 즐겁게 웃기만 했다.

“염려 말게. 나는 그냥 뒤에 묶어 둔 작은 주머니 정도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움직여도 좋아.”

“작은 주머니라기엔 많이 크신 것 같습니다만…….”

“그럼 큰 주머니로 하지.”

본인이 그렇다니 뭐라 말하겠는가.

‘정말 자신이 있나 보군.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지. 일단 신전 종탑에 갈 때까지 상황을 보고 조금이라도 힘들어 보인다면 속도를 늦추거나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러면…….”

유더는 눈을 내리깔며 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한쪽 눈 안쪽에서 금빛이 일렁이며 그들의 몸을 거칠게 할퀴고 지나가던 바람의 방향이 일제히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의 흐름을 비틀어 놓는 듯한 모습으로 몸 주변에 바람을 두른 유더가 어둠 속,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흐릿하게 눈에 띄는 신전 지붕을 응시했다.

잠시 후, 놓기 전의 활시위처럼 살짝 굽혔던 다리가 탄력 있게 바닥을 박찼다. 지붕 바깥을 향하여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는 모습은 마치 뛰어내려 죽으려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며 작게 뭉쳐진 바람이 그것을 막았다.

유더는 발밑의 바람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이어서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뛸 때마다 눈에 보이는 고도가 훅훅 높아져 순식간에 까마득한 곳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그리 춥지 않은 남부임에도 바람이 제법 거센 날이었다. 덕분에 거의 힘을 발휘하지 않고도 순식간에 바람을 밟고 위로 올라가기가 편했다.

뛰어오른 몸이 한계에 도달해 잠시 느려지다 멈추는 듯 느껴지는 짧은 순간.

그 틈을 타 뒤를 돌아보자 빠른 속도로 유더를 뒤따라오고 있는 키시아르의 금빛 머리칼이 얼핏 보였다.

유더는 그대로 다시 바람을 밟고 앞을 향해 훌쩍 뛰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라면 기절할 만한 광경 속을 조용히 가로지르며 허공을 암약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익숙하게 힘을 다루며 최적의 경로를 본능적으로 찾아 가로지른 끝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목적했던 곳에 도달했다. 남부 특유의 붉은 도료로 칠한 신전 지붕을 따라 몸을 날리자 이내 어둠에 잠긴 종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지기도 자리를 비워 그저 고요하기만 한 종 앞에 내려선 유더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종탑 안에 발을 들이던 키시아르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이 반짝 미소를 흘렸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빠르더군. 소리 하나 안 내고 어찌 그리 쉽게도 장애물을 피해 가는지.”

내려서서 긴 옷자락을 가볍게 훑어 낸 그는 힘들어 보이기는커녕, 마치 유더보다 먼저 여기에 와 있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자, 이걸로 이제 내가 쓸모 있는 주머니란 건 증명된 거겠지?”

“…….”

각성자의 힘을 다루는 훈련을 마병단원들처럼 매일 하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발전한 걸까. 유더는 새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이인지를 느꼈다.

기운을 섬세히 다루고 조절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마병단원 중 언제나 제일이었던 에버 벡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볼 때마다 한 단계가 아니라 열 단계씩은 뛰어넘고 있는 듯한 키시아르의 발전은 직접 본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염려를 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정말로 걱정하지 않고 속도를 내겠습니다.”

“그래. 얼마든지.”

유더는 숨을 고르며 종탑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드높고 차디찬 밤하늘 아래, 등불이 반짝이는 도시의 풍경은 이전 생의 폐허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해상 무역의 중심지답게 샬로인의 끝에는 온통 바다가 보였다. 밤이라 새카맣게 너울대는 수평선 너머로 크기가 각양각색인 배들이 나란히 정박되어 있었다.

그가 그 배들을 살피는 동안 키시아르가 조금 뒤쪽으로 다가와 같은 곳을 보는 방향으로 섰다. 유더가 보고 있는 것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살피려는 줄 알았는데, 그는 별안간 옷자락을 벌려 유더의 몸을 푹 감싸 안았다. 길고 두툼한 겉옷 자락이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을 완전히 덮으며 따뜻한 온기가 퍼지고, 키시아르 특유의 향이 훅 코끝을 간지럽혔다.

유더가 눈을 깜박이며 눈동자를 위로 올리자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항구 부분을 유심히 보는군. 이유가 있나?”

“…샬로인은 지대가 낮은 편입니다. 비가 크게 오거나 태풍이 몰아치면 파도가 지나치게 높아져 피해를 크게 입을 수 있는 곳이지요.”

“그렇지. 이곳이 지금까지 멀쩡히 번성할 수 있었던 건 남쪽이라 따뜻한데도 비가 잘 오지 않는 곳이었던 이유가 크니까.”

유더는 제 몸을 감싸 안은 팔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균열과 몬스터는 어떻게든 해치우면 되지만, 만약 거기에 이전 게임과 같은 자연재해가 겹친다면 저 항구는 더 이상 샬로인의 보물이 아니라 악몽이 될 겁니다.”

“대지진 말인가.”

“네. 지진은 땅 위가 아니라 바다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땅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훨씬 사납고 끔찍합니다.”

유더는 대지진이 할퀴고 지나간 남부의 모습을 기억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천 년간 쌓아 올린 인간의 문명은 그저 보잘것없는 모래성과 같이 손쉽게 무너졌다.

도시는 파괴되고 갈라진 땅 아래 시체가 쌓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건 샬로인처럼 지대가 낮아 지진의 여파로 거대한 파도가 덮쳐 버린 지역들이었다.

완전히 잠겨 버렸던 도시는 도시라 부르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쓸려 나갔기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을 정도였다.

겨우 찾아낸 생존자들은 파도가 넘쳐흘러 도시를 덮치던 순간을 증언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이유로 아무 방비도 하지 않았던 영주와 귀족들도 너무 많이 죽어 나가 벌을 받고 책임질 이를 찾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일을 수습한 뒤에도 몇몇 지역들은 서부의 대삼림 근처처럼 완전히 황폐화되어 다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그런 지역에는 약속이나 한 듯 몬스터가 들끓어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이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는 했다.

남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헤른 공작가의 위세도 덩달아 한층 꺾였고, 그렇지 않아도 시골뜨기라 비웃음을 받던 당시의 차기 헤른 공작은 더더욱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은 그때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전 생에 남부 대지진이 일어났던 무렵, 유드레인 아일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수천 명의 단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고작 수십에 불과한 조력자밖에 없는 지금은 얼핏 막막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부 대지진이 일어날 때 정작 그곳에 갈 수도, 대비할 수도 없었던 유드레인과 달리, 지금의 유더에게는 미리 이곳에서 지형과 상황을 판단할 시간과 등 뒤에서 온기를 나누어 주는 존재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유더는 어둡게 일렁이는 바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이전과 다르도록 만들어야지. 그러려고 왔으니까.’

“지진의 여파로 파도가 일어나 도시가 묻힐 수도 있다는 건 확실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군. 대비한다면 무엇을 먼저 대비하고 싶지?”

유더는 오랫동안 반복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입 밖으로 내 본 적은 없었던 방법을 조금 낯선 기분으로 언어로 풀어놓았다.

“우선 파도를 막아 낼 벽을 만들고 사람들의 대피 방안을 미리 널리 알려야겠지요. 넘어지거나 물에 휩쓸리면 그 무엇보다 위험해질 배들도 미리 다른 항구에 정박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흙과 물을 다룰 수 있는 각성자들의 협력, 그리고 행정적인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겠지요. 전자는 저희가, 그리고 후자는 마이라 1공녀와 관리들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흙과 물, 행정이라.”

키시아르가 그것만으로도 유더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만약 반복된다 해도 이번에는 그 답대로 될 거야.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도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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