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769화 (769/805)

769화

“내게도 미리 말해 주기 어려운 일인가?”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남부를 전체적으로 한 바퀴 훑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남부 전체를?”

펜을 잡고 있던 키시아르의 손이 멈추었다. 유더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신중히 말을 골랐다.

“이전 게임에서는 샬로인을 시작으로 남부 전역이 돌아가며 골고루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동일한 상황이 일어나리라 확신하기는 어렵겠지만, 혹시 모르니 해당 지역들을 미리 살펴 두는 쪽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유더는 자신이 참여한 전투나 임무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기억하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이번 건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가 기억하는 남부의 대지진과 재앙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다. 기억 속의 지형지물과 현재의 남부 상황이 상당히 다를 테니 그것을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지원이 오기 전에 파악해 두고 싶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잠시’ 다녀오는 정도로 가능한 일인가?”

“자세히 둘러볼 것도 아니니 힘을 요령 있게 쓰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루 종일 여러 일을 하느라 해가 져 가고 있긴 하지만 유더에게는 문제 될 사항이 아니었다. 마력의 혜안이 열린 뒤로 밤이라 해도 시야가 어두워질 걱정이 없었던 데다 어디서 닥칠지 모를 적이나 몬스터도 딱히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유더 혼자서는 하룻밤 사이에도 해낼 수 있는 일임에도 남을 데려가면 그들까지 건사해야 하니 여러모로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만이 유일한 문제였다. 그제야 혼자 가는 편이 편할 것이라 말한 이유를 알았는지 키시아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이 허락의 뜻은 아니었다.

“그렇군. 하지만 당장은 안 되겠어.”

“본부에서 지원 병력이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끝내 둘 생각이었습니다만… 지금 제가 해야 할 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

“없지. 하지만 나는 아직 일이 조금 남았거든.”

“예?”

“내 일이 끝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는 뜻이네. 하고자 하는 일에 걸리적거리지 않을 쓸모있는 능력을 갖춘 데다 이렇게나 보기도 좋은데 굳이 두고 갈 필요가 있겠나?”

키시아르가 눈을 깜박이며 예쁘게 웃었다.

유더는 실로 간만에 그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는 이곳을 지키고 계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반나절 정도를 예상하고 떠난 일이 예기치 못한 일로 조금 더 늦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만약의 상황이 일어나도 남부 지부를 지탱할 사람이 있어야 하기에 유더는 애초부터 키시아르와 함께 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키시아르 또한 당연히 그렇게 판단하리라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은 유더와 달랐던 듯했다.

순식간에 키시아르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과장되게 파르르 떠는 속눈썹에서 일부러 꾸며 낸 티가 나는데, 그걸 알면서도 그 모습이 물에 젖은 수선화처럼 처연해 보였다.

유더가 제 눈을 살짝 의심하는 사이 고개를 숙여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사내가 짐짓 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럴 수가…… 두 번 다시 떨어질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밤의 기억은 여기에만 남겨진 것이로군요.”

“예?”

“나는 이제 그대의 숨결 없이는 떠오르는 해조차 의미가 없고 그저 이 땅에 심겨만 있을 뿐인데, 매정한 그대는 등 뒤를 보지 않고 변함없이 나아가는가.”

“예?”

“뿌리가 말라도 좋으니 부디 나를 그대의 허리춤에 매달아 가져가세요. 뽑힌 자리에는 언젠가 새로운 싹이 돋아나겠지만, 그대의 손길을 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두 번이나 반문한 끝에야 유더는 비로소 키시아르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를 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먼 옛날 살았던 마법사와 그를 사랑한 정령의 이야기로, 어지간한 시장이나 술집 한복판에서 광대나 음유시인들이 자주 공연하다 보니 어린아이들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유더 또한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정도였다.

다만, 키시아르가 읊은 게 주로 가녀린 여성으로 표현되는 정령 쪽 대사라는 게 문제였을 뿐이었다.

‘왕의 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최고의 보물들을 가져가야 하는 마법사가 황금 사과나무의 정령을 죽이고 가져갈 수 없어 포기하려 하자 정령이 스스로 목숨과 같은 황금사과를 내어 줄 때의 대사……였던가.’

그 황금 사과는 나무에서 열린 마지막 열매였다. 그 사과를 가져가면 황금 사과나무가 말라 죽어 사라질 것을 안 마법사는 정령의 제안을 거절하려 하지만, 정령은 지금 당장은 죽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가지를 잘라 사과를 그의 손에 떨어트린다.

사과를 떨군 나무는 예상대로 말라 죽는다. 하지만 죽은 나무는 거름이 되어 아름다운 숲을 일구고 이후 마법사가 왕의 땅으로 돌아와 황금 사과를 심자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자라나며 정령의 말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키시아르가 지금 저 대사를 빗대어 하고 싶은 말도 결국, 여기에 자신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굳이 그렇지만도 않다는 뜻이었다.

‘…그걸 이런 식으로 말하나?’

뻔뻔하고 처연하게 정령의 대사를 읊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데도 한편으로는 또 무어라 말하기 어려울 만큼 잘 어울려서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키시아르 라 오르답기도 했다.

유더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고맙네.”

방금까지만 해도 한 떨기 꽃처럼 사람의 심장을 쥐고 흔들 것만 같던 정령이 곧바로 당당하게 키시아르 라 오르로 되돌아왔다. 그는 이전의 두 배 정도 되는 속도로 남은 서신들의 답신을 적고 서류 몇 개를 처리하면서 입을 열어 말했다.

“산에서 살았었다기에 혹시 이 이야기를 접한 적이 없으면 어찌하나 생각했는데 다행이야.”

“그 정도는 압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법사가 대마법사 루마로 추정된다는 뒷이야기도 아나?”

당연히 몰랐다. 옛이야기 따위엔 관심이 없어 완전히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랬습니까?”

“그렇다더군. 얼마 전부터 주변에 대마법사 루마와 관련된 일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나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거든. 워낙 신출귀몰했던 전설 속 사람이라 신빙성 있는 걸 가려내기 힘들지만, 이건 꽤 정확도가 높은 편이야.”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목소리를 낮추어 근거와 이유를 알려 주었다.

“이전에 수확철 축제 시기에 내가 타국에서 온 사절들을 데리고 갔던 풍요의 언덕을 기억하나?”

“아……. 네. 루마와 관련이 있었던 곳이었지요.”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루마가 직접 심은 사과나무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곳엔 실제로 작은 사과나무가 한 그루 존재하는데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군.”

“가 본 것 같지만 자세히 보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하지만 이전 생의 경험에서 비롯된 답이었다. 그런 언덕을 굳이 보러 갈 일은 고작해야 타국의 사절들이 와서 접대해야 하는 때 정도밖에 없는데, 유더가 그런 일을 맡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에 의하면 카치안 황제를 밀접 경호하기 위해 따라붙었다가 멀찍이서 본 정도뿐이었다.

“그 사과나무는 꽃은 피되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살아 있는 아주 기이한 존재야. 마법사들의 조사 결과 꽃이 열매가 되는 대신 내부에 품은 마력을 땅에 퍼트리고 지기에 그럴 수 있다고 하더군.”

“설마 진짜 황금 사과나무라는 겁니까?”

“열매가 열린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지. 마법사들은 그 나무가 뿌리를 통해 마력을 많이 빨아들일 수 있는 특수한 성질을 지녔기에 대마법사 루마가 그것을 매개체로 삼아 수도의 7벽을 지탱하는 주춧돌 중 하나로 삼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네. 이건 사실 제국의 기밀 중 하나야.”

수도의 누구나 올라가 볼 수 있는 언덕의 사과나무 하나가 사실 제국의 기밀이었다니.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농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터다.

“일설로는 초대 황제께서 사과나무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그냥 심었을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전설이란 것도 아주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이야기지. 자, 다 끝났다.”

키시아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펜을 가볍게 놓았다. 유더는 갑작스레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내 말대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

“……제가 기다리지 않을까 봐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함께 있어 주는 편이 나도 좋으니까 말이야.”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이제 가 볼까.”

그들은 나단 주커만과 쿠르가, 선즈를 만나 간략히 사정을 설명한 뒤 지부 건물의 가장 위, 지붕 쪽으로 올라갔다. 유더는 하늘에 뜬 달을 보며 키시아르가 해 준 이야기를 생각했다.

고대에 용이나 요정, 정령이 존재했다는 건 알았지만 어린아이도 아는 그 이야기가 루마와 관련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논이 오면 물어볼 만한 이야기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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