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화
그때였다.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에 마병단에서 날아온 서신을 찬 전서조였다.
나누던 이야기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유더는 창가로 다가가 전서조를 손가락에 앉혀 서신을 꺼내는 키시아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서신을 순식간에 다 읽어 내린 키시아르가 흠 하는 소리를 작게 흘렸다.
“혹 안 좋은 소식이 온 겁니까?”
“아니. 마병단 측에는 딱히 안 좋다 말하기 어려운 소식이겠군. 와서 보겠나?”
유더는 두말없이 다가가 키시아르에게서 서신을 건네받았다. 쓰인 내용은 짧고 간결했다.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현재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다만 현자에 대한 소식과 저희가 남부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접한 호산라가 동행을 간절히 부탁하며 거래를 청해 왔기에 서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부에서 일어난 일과 현자의 소식을 들은 뒤 능력이 상당히 회복되었으며, 자신의 힘을 이용하면 마병단의 이동 속도를 최대 사흘 정도로 앞당길 수 있다고 주장 중입니다. 제 능력으로 읽었을 때 도망치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단지 나한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여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서신을 적은 이는 칸나였다. 그녀는 여태껏 나한의 측근이었던 호산라의 조사를 도맡아 왔고, 단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꾸준히 몇 번 보고의 편지를 보냈었다.
그 편지에 의하면 호산라의 건강은 스스로 어렵지 않게 일상생활을 보낼 만큼 나아졌었지만 능력이 다시 돌아올 길은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고 했다.
그랬던 이가 남부와 현자의 소식을 듣고 별안간 껑충 회복했다는 말에 놀라움이 앞섰다.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 컸단 소리겠지.’
유더는 서신을 접고 입을 열었다.
“호산라에게 이 소식들을 흘리라 명한 건 단장님이시겠지요.”
“그래. 나그란의 별과 관련된 큰 소식들이 들어가면 칸나의 판단에 따라 무엇이든 흘려도 좋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능력 회복과 거래 요청이라… 여기까진 나도 예상치 못했어.”
“거래 요청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보좌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나?”
호산라의 능력은 유용하며 현재로선 대체할 자가 없는 수준이다. 최대 한 달 가까이 걸릴 수도 있겠다고 예상했던 수도 지원 병력의 이동을 고작 사흘로 앞당길 수 있다면 솔직히 말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벌써 능력 제어구가 생겼고, 이제는 뢰네브도 있지. 나한이 남부로 향했다면 어차피 곧 마주치게 될 테니 호산라를 여기에 두어서 나쁠 건 없다.’
만약 이번에 진짜 나한 놈을 상대하거나 잡아들이게 된다면, 호산라는 그놈을 설득하거나 끌어들일 때 어느 정도 괜찮은 패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나한이 호산라를 버리고 저 혼자 도망쳤던 걸 생각하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호산라가 관리가 어려운 성격이었거나 딱히 지원 병력의 빠른 합류가 급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니까.’
유더는 그 생각들을 정리하여 간결히 대답했다.
“이동 속도를 정말 그만큼 끌어 올릴 수 있는 게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저희가 무엇을 하려 해도 현재로선 지원 병력의 빠른 합류가 최우선이니까요.”
“그래. 이용할 수 있을 때 이용하는 게 좋겠지.”
키시아르가 빙긋 웃고는 서신을 도로 가져갔다. 그가 허락의 뜻이 담긴 편지를 작성하고 있을 때, 또다시 톡톡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 칸 옆의 다른 창문 쪽이었다.
“……음?”
유더는 창을 열자마자 동시에 두 마리 전서조가 날아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디서 한꺼번에 두 마리를 날려 보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 전서조들은 각각 헤른 1공녀 마이라, 그리고 황궁에서 날아온 새들이었다.
“이거야 원, 약속이라도 했나 싶군. 황궁의 서신만 이쪽으로 날려 주고, 마이라 1공녀의 서신은 보좌가 확인하게.”
“알겠습니다.”
유더는 당혹감 속에서 바람의 힘을 살짝 일으켜 황궁에서 온 서신을 키시아르에게 보내고 마이라의 서신을 펼쳤다. 마이라의 서신 역시도 짧았지만 담긴 내용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표정이 묘한데. 1공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고 하나?”
“헤른 공작이 샬로인으로 온다고 합니다. 명목은 2공자의 장례를 위해서지만 1공녀께선 그게 전부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신다는군요.”
“그거참… 여러모로 시기가 재미있게 되었군.”
“예?”
한 손으로는 편지를 쓰고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서신을 펼쳐 읽는 괴물 같은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던 키시아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은 황제 폐하께서 보내 주신 소식인데, 디아카 공작이 별안간 남부의 상황이 어지러워 걱정된다는 주장과 함께 황궁기사단을 파견하자는 요청을 올렸다더군. 재미있는 건 거기에 황궁기사단 소속이자 동시에 황태자의 호위기사인 키올레 다 디아카가 책임자로 포함되어 있다는 거야.”
유더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누가 책임자라고 하셨습니까?”
“키올레 다 디아카.”
키시아르가 친절하게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디아카 공작이 미쳤나 보군요.”
“불행히도 아직 미치진 않은 것 같더군. 폐하께서는 그가 저번 일로 막내아들을 상당히 다시 보게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네. 내가 신검에 오러를 둘러 싸웠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래도 확실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디아카 공작에게 현자는 아직 믿을 수 없는 존재다. 키올레를 보내면 가장 믿을 수 있는 혈육에게서 직접 남부의 정황을 들을 수도 있고, 현자와 마병단을 감시하면서 동시에 황태자가 직접 자신의 호위기사를 내려보내 민생을 살핀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 여러모로 영리하게 머리를 굴린 행동이라 할 만했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띠고 선택한 게 키올레만 아니라면 말이다.
‘대체… 이럴 만큼 그때 키올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유더는 디아카 공작의 사람 보는 눈을 의심하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대답했다.
“어이없는 소식이지만… 저희에게 나쁜 결과는 아닐 것 같아 다행입니다.”
“디아카 공작이 보낸 키올레와 헤른 공작 본인의 방문. 여기에 더해질 게 또 뭐가 있을지 궁금해지는군.”
“설마 더 있겠습니까?”
놀랍지만 더 있었다.
새로운 서신 두 통을 처리하자마자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나타난 선즈와 에몬이 샬로인에 찾아올 세 번째 방문자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저희의 보고를 전달받으신 지노 장군님께서 남부군과 함께 샬로인의 치안 유지를 돕기 위하여 방문할 계획이시라고 전하셨습니다. 여기, 마병단장님께 전달을 명받은 서신입니다!”
“…….”
힘차게 두 손으로 내민 서신을 보며 유더는 침묵했다. 그의 미묘한 표정을 본 선즈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저어, 왜 그렇게 보십니까? 혹시 저희가 들어와서는 안 되는 때에 잘못 들어온 건……?”
“아니, 아니네. 지노 장군이 남부군과 함께 와 준다니 든든하군.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도움의 손길이 더 필요해질 예정이었거든. 이쪽에서 요청하기 전에 수고를 덜었어.”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선즈와 에몬은 곧 긴장을 풀었다. 그들이 나간 뒤 유더는 키시아르의 책상에 놓인 여러 개의 서신을 보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제국군 측에도 추가 지원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만, 지노 장군님께서 먼저 오시겠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노 장군이라면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도시의 안전지대가 깨졌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무겁게 받아들였을 거야. 그는 그런 사람이지.”
키시아르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유더는 이전에 산맥에서 만났을 때도 지노 장군과 몹시 친밀히 함께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노 장군님을 몹시 믿으시는군요.”
“믿는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 많은 걸 배운 상대이니 말이야. 아무래도 친밀감이 높은 상대라고 말하는 쪽이 맞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약간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지노 장군은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몰라. 그게 믿음과 친밀감의 차이라고 말하면 이해하겠나?”
지노 장군은 키시아르가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건 즉 키시아르가 지닌 다른 힘들도 제대로 몰랐으리라는 말과 같았다.
당연히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이였는데 아니었다니. 몹시 놀라웠으나, 동시에 그것들이 그만큼 키시아르에겐 중요한 비밀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키시아르가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장군에게조차 꽁꽁 숨겨 왔던 그 비밀들을 유더에게만은 서슴없이 열어 내보여 주었다는 것. 알고 있다 여겼던 무게가 새삼스레 더욱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그가 제게 내민 믿음과 신뢰는 때로 사랑보다도 무겁게 여겨진다.
그 무게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순간마다 유더를 땅에서 떨어지지 않고 다시 정신을 차려 일어서도록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눈앞의 당신 말고는.
“……예. 알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은 사내가 희미하게 웃고는 다시 서신의 답을 쓰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주먹을 살짝 쥐고 입을 열었다.
“단장님. 저는 오늘 잠시 밖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혼자?”
“걱정되신다면 다른 사람들을 데려갈 수는 있겠습니다만, 가능하면 혼자 해치우는 쪽이 편할 것 같습니다.”
수도에서 올 지원 병력이 3일 후 온다면, 그사이 그에게도 꼭 해 두어야 할 일이 있었다.